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신을 거스르는 거룩엄숙함

beautician 2021. 11. 21. 11:09

성만찬의 오해

 

 

예수님이 붙잡히시기 전날 이른바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고 포도주에 축사하며 자신의 살과 피를 기념하라 말한 것은 오늘날 모든 교회들이 공장에서 찍어내듯 나름의 격식과 상징들을 갖추고 사람들을 줄 세워 쥐똥 만한 빵조각과 한모금도 안되는 포도주스를 나눠주라는 뜻이었을까요?

성찬식의 진정한 의미는 "만찬"에 있어야 할 터인데 성도들로부터는 정성어린, 그리고 아무쪼록 동그라미 많이 붙은 헌금을 기대하는 교회에서 정작 성도들과 나누어야 할 성찬식을 상징적 ‘약식 행사’로 축소하면서 너무 인색을 떤 건 아닐까요? 성도가 교제하고 함께 식사하면서 식탁의 빵과 포도주의 의미를 되새기라는 가르침을 교회가 너무 도식화시킨 것 같은데 그게 과연 신의 뜻이었으까요? 아니면 비용과 효율에만 치중한 교회의 지체 높은 어떤 분들의 결정이었을까요?

 

최소한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로 자신의 육신을 기념하라 한 것이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침례’받은 ‘정식’ ‘성인’ 교인들만 나와 줄 서서 떡조각과 포도주스를 배급 받으란 뜻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런 성찬식 참여 자격조건을 보면 헛웃음이 나올 뿐입니다. 지구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종교라고 생각했던 기독교가 사실은 사람들에게 등급을 매기고 계급과 순서를 정해 너는 되고 너는 안되다고 선을 긋는 편협한 신앙이라는 사실이 성찬식에서조차 드러나는 것이죠.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정식 어린 아이는 만찬의 장소인 성찬식에 발도 들일 수 없게 하는데, 정말 포도주를 나눠주며 그런다면 청소년에게 음주를 허용하지 않는 한국의 교육적 기준에서 이해되는 부분도 없지 않으나 실제로는 포도주가 아니라 포주주스를 나눠주면서 그런 칸막이를 세운 것은 너무나 웃긴 일입니다.

 

오히려 개척교회들이 매주 낮 예배 후 몇 안되는 성도들이 모두 모여 간촐하나마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이 성찬식의 원래 의미에 보다 가까운 것이란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큰 교회들이 그런 식사를 조직하면서 쿠폰을 나눠주고 소정의 비용을 받는 것을 보면 마치 예배에 참석해 헌금을 낸 사람에게만 응분의 보상을 한다는 ‘기브 앤 테이크’ 정신이나 헌금도 내고 밥값도 내라는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정신이 넘쳐 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비행기 타고 몇 시간 가야 도착하는 외국 오지까지 가서 구호활동, 의료선교활동을 하는 교회들이 예배 후 점심시간에 식당을 근처 빈민들에게 개방하는 것을 상상조차 해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바닥에 깔린 일정 정도의 위선을 반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을 만찬에 초대했던 예수의 가르침은 시간이 흐르고 기독교가 득세하며 몸에 맞지 않는 권위를 두르자 그 의미가 서서히 변색하고 점점 무거워져 오늘날 교리상징으로만 가득한 성만찬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예수가 잡히시기 직전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나누며 빵과 포도주를 취할 때 자신의 피와 살을 기념하라 했던 사건이 성찬식의 모체인데 그날의 그 모임은 이전에 비해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저녁식사 자리였을 뿐입니다. 저녁식사를 예배 순서 도중에 넣어 도식화된 세레모니로 바꾸어 버린 것은 정말 예수의 뜻과 부합하는 것일까요?

 

아내가 성경공부 모임에 가고 싶다는 말을 듣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린 것은 종교와 신에 대해 아내가 남들과 똑같이 찍어낸 듯한 이해를 갖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공부라는 것은 중세의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시대를 거치면서 치명적 질문들에 대해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교리를 배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독교 교회란 그 어느 종교보다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해 주류와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심지어 마녀사냥하고 학살했던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그러니 성경공부란 그런 과정을 통해 벼려지고 다듬어진 교리를 주입시키는 과정이고 그 교리는 다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신선한, 그러나 그들에겐 위험해 보이는 생각과 제안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갖습니다. 그래서 그런 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스스로 성서를 읽고 묵상하여 그들이 모르는 신의 다른 측면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장려하고 칭찬해야 할 일인데도 말입니다. 교리는 사람들을 칭칭 동여매 꼼짝 못하게 ‘속박’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교리는 개개인이 신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라 하는 이들을 동일한 색깔로 덧칠하여 생각을 제한하려는 통치기제가 되고 만 것입니다.

 

실제로 아내는 기어이 그 성경공부 모임에 나가 마음에 떠오르는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답변이 옹색했던 속회장은 아내를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밀어붙였습니다. 이해할 수 없으면 그냥 믿으라는 것이죠. 그런 무식한 말에 실망한 아내는 결국 더 이상 그 모임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와 거리를 두게 되고 기독교 신앙 자체에 의구심을 품도록 만드는 일반적인 과정이죠.

 

 

예수의 뜻은 평소와 다름없는 식사를 하면서도 늘 자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식사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음식을 허락한 신의 관용에 감사하면서 밥 한 톨에서도 예수의 세포를 기념하고 된장찌게 국물 한 스푼에서도 예수가 흘린 땀과 피를 기억하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런 모든 의미를 퇴색시키고 예수의 뜻을 성스러운 듯 보이는 한낱 ‘행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신의 뜻을 왜곡하고 의미를 변색시키는 행위는 대개의 경우 그렇게 거룩하게 이루어집니다. 

 

 

2021. 11. 18.

(2017-2018 사이에 쓴 '성만찬의 오해', '성찬식의 참 뜻'의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