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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사도신경과 국민교육헌장

beautician 2021. 11. 20. 11:50

사도신경, 그 비겁함의 근원

                         

사도신경 (Apostles’ Creed)

 

주일예배 때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도 한동안 사도신경을 외면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신경이란 성경에 명백히 ‘이렇게 기도하라’하면서 예수님이 가르쳐준 주기도문과 달리 후세의 신학자들이나 교회관계자들이 정리한 ‘로마 카톨릭 교리의 요약’으로 신은 물론 바울이나 예수의 12사도들과는 사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입니다. 이름을 도용당한 사도들이 신경질 낼 만한 것이라 사도신경일까요?

 

과거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절, 기독교인으로서 최소한 이것들만은 지켜야 한다고 여겼던 신앙의 금과옥조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중세 세계관의 중심적 사상이 되면서 오히려 신도들의 신앙을 규격화하고 교회가 사회를 통제하는 통치기제가 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사용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일본제국주의 시대 황국신민들과 식민지 백성들, 그리고 박정희 시대 한국인들에게 누구나 다 달달 외어 세뇌시키려 했던 교육칙어(敎育勅語)나 국민교육헌장과 본질적으로 유사합니다.

 

말하자면 사도신경은 성서에 100%기반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석과 교단의 교리에 기반한 ‘표준 신앙고백’인 셈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카톨릭과 개신교, 또는 개신교의 각 교단들이 꼭 똑같은 사도신경을 외우고 있을 이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각자의 교리에 맞게 수정하거나, 가장 좋은 것은 폐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신이 사도신경으로 기독교인들을 이 넓은 세상의 한 쪽 귀퉁이에 꽁꽁 묶어 두려 할 리 없으니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왜 사람들의 신앙을 표준화하고 획일화해야만 했던 걸까요? 그래서 급기야 '사도신경 '을 강요하며 사람들 신앙의 폭과 깊이를 제한하려 했던 걸까요? 그것은 마치 소경이 코끼리를 만지며 제각기 코끼리에 대한 다른 소견을 갖게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만지고 있던 코끼리 꼬리를 모든 기독교인들이 함께 만지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실체라고 생각하길 바랐던 것입니다.

 

장님 코끼리 더듬기

 

사도신경이 구축되던 시대엔 보다 다양한 신앙고백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고 그걸 모두 받아들여 집대성했다면 신의 진면목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겠지만 종교권력을 가진 개인과 집단들은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을 틀렸다고 지적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단으로 몰아 말살시키려 했던 사실이 역사에 속속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믿는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려면 다른 모든 사람들이 틀려야만 했고, 그걸 권력화하려면 반대편에 대한 처절한 마녀사냥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런 편협함으로 기독교 안에서도 서로 이단으로 모는 작태가 지금도 벌어지고 있으니 이슬람같은 다른 종교에 사나운 송곳니를 드러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사도신경은 주류 기독교와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과 신앙을 가진 개인과 집단에게 '이단' 이란 이름을 붙여 배척하고 몰아내는 리트머스 시험지이자 통치기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집에 찌든 꼴통들이라 해도 신이 전지전능 무소불위하며 천지편만한 하나님이라 말하면서도 개인의 신앙을 제한하고 규격화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제한하고 규격화하는 행위라는 걸 모를 리 없습니다.  교황청과 목사님들, 교단의 높은 분들이 그 정도의 논리와 상식도 갖추지 못한 멍청이들일 리 없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예배 시작과 동시에 사도신경을 읊으며 하나님은 이런 분이고 우린 이러이러한 것을 믿어야 한다고 주입시키는 모습에서 일말의 악의마저 엿보입니다.

 

그리고 비겁함도요.
오늘날 수많은 목사들의 비리와 악행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건 사도신경에 포함된 뿌리부터 비겁한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도들의 헌금과 공짜 노동력을 통해 위풍당당한 성벽의 교회당을 높이 세우고 자신과 가족들의 주머니를 불리고 자녀들을 해외유학 보내고 여성 성도들을 유린, 폭행하면서 공공연히 십계명을 어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감언이설로 자신만은 예외적으로 신성화하고 합리화시키는 오늘날 일부 기독교 목사들의 작태를 보면 그 후안무치의 근원이 궁금해집니다. 신도들의 주머니를 박박 긁어내면서 돈을 내면 신이 복을 줄 거라며 하나님을 천박한 흥정의 대상으로 만들고 성도들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성당과 교단의 부를 자기 아들에게 세습시키는 유명한 목사님들의 패기 넘치는 파렴치함은 과연 어디서 유래했을까요?  그들을 끝내 편드는 장로, 안수집사들의 상식은 왜 우리들의 것과 전혀 다른 걸까요?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도신경의 이 부분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부추김을 받아 예수를 핍박하고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손을 빌어 차도살인(借刀殺人)한 사실이 성경에 그토록 명명백백히 기록되어 있고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도 이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모습이 성서 곳곳에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기독교는 질끈 눈을 감고서 예수의 죽음에 대해 제3자나 다름없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전적인 책임을 묻습니다. 그걸로 부족해 사도신경에 이 문구를 박아 넣었습니다. 참으로 파렴치하고 비겁한 짓이죠.

 

내가 잘못했지만 모든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내용의 사도신경을 전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이 매주 외고 있으니 후안무치한 대형교회들과 졸렬한 목사들이 양산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교회가 예배시간에 십계명 대신 사도신경을 외는 것은 어쩌면 최소한 양심의 발현입니다. 죄를 짓지 말라는 십계명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미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는 교회들로서는 사도신경을 외는 것이 그나마 죄의식 덜 느끼는, 세상 맘 편한 일이기 때문이죠. 신이 내린 계명을 새삼 입에 올리는 대신 자신들이 인간의 손으로 만든 통치기제에 '사도신경'을 주입시키는 것. 교회나 성당에 입교할 때 신에 대한 사랑과 신앙만으로는 부족해 반드시 '교리수업'을 받아 시험에 통과하도록 전제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이유입니다.


기독교가 신을 떠나 교리를 우상으로 섬기기 시작한 시점부터 타락은 이미 운명지어져 있었습니다. 정작 신은 그렇게 교회에서 왕따당하기 시작한 것이고요.

 

교회 입장에서는 내 꿈 속에, 또는 내 기도 속에 찾아와 속삭인 신의 말씀은 절대 이단이어야 하며,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자신이 속한 교단의 교리에 입각해 진위를 검증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신경의 존재는 교회가 신 위에 서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걸 그렇게 꼭 매주 외워야 하는 걸까요?

 

모든 목사들이 이렇게 주장합니다.

 

 

2021. 11. 17

(2018. 8. 12과 2018. 12. 9. 원본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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