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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외계인은 누가 창조했을까?

beautician 2021. 11. 26. 12:49

 성서무오설 (聖書無汚設)

 

 

제네시스

 

창세기는 천지창조의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이 부분은 기독교인들의 우주관을 형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사실 우주적 입장에서 보면 지구의 신이 우주 전체를 창조했다는 작은 변방 천체의 지엽적 신화, 그것도 그 동네의 수많은 신화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단군신화나 북유럽신화이집트와 그리스의 신화 등 지구에서도 각 지역 민족들마다 천지창조 신화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환단고기가 그랬던 것처럼 각 민족들은 그 신화를 바탕으로 자긍심을 고취시키며 서로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주장합니다.  그렇듯 창세기의 천지창조 기사를 통해 기독교인들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져왔고그 믿음은 인간이 만든 우주선이 달과 화성토성을 방문하고 심지여 태양계 너머로 여행을 하게 된 오늘날까지도 좀처럼 무너지지 않을 듯합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이 우주와 세상의 만물을 창조하는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화성의 모래사막을 만든 일들안드로메다 성운의 별들 하나하나와 저 넓은 우주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생명체들지성체들을 지은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창세기를 쓴 사람의 상상력 또는 지식이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니까요. 그래서 창세기는 세상이 인간들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아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자긍심을 크게 북돋는 기제가 되지만 동시에 수천 년간 인간들을 호도하는 폐해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도 창세기에서 발현됩니다. 그 결과 인간들은 같은 종끼리 서로 업신여기고 싸우고 정복하고 학살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세상 모든 생명체들을 복속시키거나 멸종시키는 데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소와 코끼리를 숭상하는 힌두교가 미개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지구상 모든 생명체들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힌두교나 불교가 더욱 훌륭한 사상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체 우주에 지성체는 지구인뿐이며 저 거대한 우주 속에 널린 수많은 천체에 그 어떤 지성체도 살고 있지 않다는 믿음 역시 창세기에서 시작합니다성경대로라면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만들어 에덴동산에 두었고 그들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들은 짐승들과 식물들뿐입니다. 그러니 어느 순간 외계인이 UFO를 타고 나타나 인간들을 공격하거나 하다못해 평화의 깃발을 들고 비행접시에서 내려와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기라도 하면 기독교의 신앙의 기반은 단번에 깨져버릴 판입니다이제는 미국의 도시괴담처럼 되어 버린 에어리어 51의 외계인 사건이 설령 사실이었다 해도 그걸 절대 인정할 수 없는 건 그런 맥락 때문입니다.

 

국가의 헌법이나 국가간 합의는 수정이라도 할 수 있지만 성서는 그게 좀 곤란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저 구름 속에서 나타나 머리를 벅벅 긁으며 사람들 앞에서 “쏘리내가 사실은 다른 별에도 좀 만들어 놓은 게 있었어변명이라도 하면 모를까하지만 하나님은 늘 침묵하고 있었으므로 신기한 일을 보거나 경험한 사람들은 아주 높은 확률로 종교재판을 받아 고문당하거나 화형당하는 일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헬로 휴먼~

 

우주탐사선이 화성과 토성을 탐사하면서 생명이 태동할 수 있는 가능성(예를 들면 물 같은 것들)을 발견하면 매체들은 화들짝 놀라 대서특필합니다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북경이나 뉴욕에도 당연히 사람들이 살고 있다 믿는 것처럼 지구인 역시 저 드넓은 우주 구석구석에 우리와 모습이나 존재형태와 방식은 다를지언정 우리 못지 않은 지성체(어쩌면 훨씬 우수한)가 살고 있으리라 추정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기독교는 지가 뭐라고 그걸 용납하지 못합니다우주 건너편 다른 천체의 지적 존재를 확인하지 못한 것은 단지 우리 문명이 그런 수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란 걸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서가 성령의 감화를 받아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토씨 하나 절대 틀리지 않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화성인들이 지구를 정복하러 와 전쟁을 벌여도 그게 다 북한의 도발이라 생각할 겁니다골방에 들어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저 악마들을 물리쳐 줄 것이라 믿거나 십자가를 들고 나가 외계인들의 군대를 향해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소리칠지도 모릅니다물론 그 정도의 신앙이라면 정말 존경해야 할 거란 생각도 듭니다.

 

성서의 제네시스(Genesis - 자동차 말고 창세기)에서 시작되는 참람한 이론을 하나 소개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 5-7)

이 첫 구절에선 채소가 아직 자라나기 전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니라…(중략)....이는 셋째 날이니라 (창세기 1 11-13)

그리고 이 두 번째 구절에서는 셋째 날 채소를 비롯한 초목들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그렇다면 사람이 창조된 것은 천지창조의 셋째 날이거나 그 이전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이건 성서에 쓰여진 바를 바탕으로 한 아주 단순한 논리이며 여기 아무리 성령감화의 할아버지가 온다 한들 달리 해석되지 않습니다천지창조의 셋째 날채소가 자라나기 전에 인간이 창조된 겁니다.

 

하지만 우린 인간이 천지창조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에 지어졌다고 배워왔습니다그 근거 역시 성서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비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이는 여섯째 날이라(창세기 1 28-31)

물론 이 대목에서 히브리어를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님이 나올 확률은 100%입니다. 원문을 보면 그 채소가 그 채소가 아니라고 하면서요. 하지만 목사님들 말씀대로 성서 한 글자 한 획도 성령의 감화없이 쓰여진 것이 없고 심지어 그 번역조차 성령이 역사한 거라 침을 튀기며 강조하고서 좀 곤란한 게 나오면 원문을 보자는 목사님들은 스스로 지나치게 웃김으로써 개콘 폐지에 기여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창세기를 쓴 사람은 모세라고 알려져 있습니다하지만 사실은 그걸 누가 장담할 수 있겠어요단지 그런 걸 결정할 수 있는 당시 높은 분들이 그랬기를 바랬던 것이죠마치 자신의 전생이 옛날 수메르의 이름없는 한 상인이거나 남북전쟁 시대의 목화농장 노예, 심지어 사막을 떼 지어 날아다니는 메뚜기떼의 한 마리 메뚜기가 아니라 알렉산더 대제나 클레오파트라였다고 얘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그래서 어느 이름없는 유대인이 창세기를 썼다면 그 내용에 권위를 부여할 수 없으니 창세기 저자는 모세여야만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창세기의 세 부분을 보면 각각 다른 사람이 상당한 시간적 차이를 두고 쓴 것 같습니다실제로 창세기의 천지창조 부분을 찬찬히 반복해서 읽어보면 원래 매우 긴 창조신화 몇 개를 대폭 축약해 짜집기 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그래도 목사님들은 이 부분도 절대 후세에 조작되었을 리 없는,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굳이 논리나 추론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위의 마지막 구절에서 인간의 창조가 여섯째 날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말하자면 하나님이 6일간의 천지창조를 마치고 제7일에 쉬었는데 그 7일이라는 기간이 일주일이 되었고 토요일인 그 제7일은 안식일로 구분되었습니다물론 난 여기서 또 묻고 싶습니다천지창조의 시간표가 7일간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일주일을 7일로 정한 것일까요아니면 일주일이 7일로 정해져 있던 어떤 시점에그 기원을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맞추기 위해 천지창조가 7일이었다는 신화를 인간들이 ‘창조했을까요?

 

그리고 원래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우린 왜 일요일을 주일이라 부르며 교회에 가는 걸까요? 일요일 예배를 드리는 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이 부활한 사흘째 되는 날을 기념하는 행위입니다그 셋째 날이 일요일이었던 겁니다결국 기독교도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십계명의 규정 하나를 정면으로 위반해 버렸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주장하면서요

 

그렇게성서는 창세기 1장부터 결정적인 모순을 안고 시작합니다.

 

성서는 그 책들을 쓴 신앙의 선조들굳은 믿음을 가졌던 초기 기독교인들유태의 아버지들이 가졌던 신념과 하나님에 대한 절절한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으며 그 결과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말해주는 그들의 ‘간증입니다. 하지만 그 위대한 ‘간증을 옛 교황청과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켜 버렸습니다어떤 유명한 선조가 가졌던 신념으로는 세상을 다스릴 수 없지만 그게 만유의 주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그들은 그런 식으로 세상을 속이며 다스려 왔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했습니다. 자기 앞에 우상을 세우지 말라고도 하셨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 추켜 세우며 모든 기독교인들의 손에 쥐어 준 그 성서 자체가 오늘날 우상이 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어떻게 성서가 우상이 될 수 있었던 걸까요?

 

그건 성서가 티끌만한 흠도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서무오설(聖書無吳設)’을 교회가 주장하기 때문입니다그로 인해 가장 개인적이어야 할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은 결점투성이 고대 문서인 성서와 교회의 통치기제인 교리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규정되고 제한되고 말았습니다. 성서와 교리가 철벽을 치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단절시킨 겁니다. 그럼에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럼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성서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까요?

 

어쩌면 신은 성서무오설이란 교리가 만들어 놓은 터무니없는 격류의 강, 저 건너편에서 건너오지 못하고 속속 강물에 떠내려가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한숨짓고 있을지 모릅니다.

 

2021. 11. 22

(2017. 11. 26 원본의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