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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목사의 의지가 꼭 신의 뜻은 아니다

beautician 2021. 11. 24. 11:51

신의 뜻 vs 인간의 의지

 

 

절기가 다가오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한국에서 날아와 자카르타에서 설교하던 어떤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꽤 오랫동안 한국에서 큰 교회의 담임을 맡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설교 중 자카르타의 성도들에게 자기 교회가 화재로 전소되었던 사건을 소개했습니다. 교회가 다 허물어진 건 아니지만 내부가 전소하고 지붕이 내려앉는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 신도들과 함께 교회재건을 위한 기도에 매달렸고 결국 2년 넘는 헌금과 공사 끝에 거대한 교회당이 완전히 개축되어 예전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그동안 생활비마저 쪼개 건축헌금을 하며 교회재건을 지원했고 교회당 개축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교회 마당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던 성도들은 목사님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감동적인 간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목에서 난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재건축이 불가피할 정도로 심한 피해를 낸 그 교회당 화재사건도 신의 뜻이었다면 그 뜻은 교인들이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단합하여 금전적 어려움을 포함한 모든 고난을 극복하며 성전을 재건하라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짓 작작 하라며 교회당 문을 닫으라는 계시였을까요? 목사님은 왜, 어떤 근거로, 교회재건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성도들을 독려해 적지 않은 건축헌금을 쥐어짜 교회당을 다시 지은 것일까요?

 

오래동안 해오던 일을 갑자기 중단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건 대개 어떤 의미일까요?  영구히 그 일을 그만하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하던 일을 다시 할 수 있도록 복구하라는 뜻일까요? 그 화재가 무려 신의 허락한 사건인데 거기 담긴 신의 의도가 수많은 사람들의 추가적인 헌신과 희생을 통해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화재 전 상태로 복구하는 것이라면 너무나 부자연스럽습니다. 이 문장을 말이 되는 명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화재사건이 신앙의 단련을 위한 시련일 뿐임을 증명할 많은 전제와 설명들이 앞뒤를 수식해 줘야 하죠.

 

한편 그 사건을 그동안 하던 것을 신이 지워버렸으니 이제 너희는 그걸 멈추고 다른 것을 다른 방향으로 시도해 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건 별다른 설명과 전제가 달지 않아도 크게 무리가 없는 해석이 됩니다. 불탄 성전을 재건해 거기서 예전에 하던 일들을 똑같이 다시 하겠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 목사님의 뜻이기 싶습니다. 좋게 말하면 '의지', 비난을 조금 섞자면 '독선'. 하지만 그 목사님은 어쨌든 성전재건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성도들을 독려해 최소 수십 억, 어쩌면 수백 억이 족히 들었을 성전재건공사를 2년만에 마무리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따르고 지켜야겠지만 그게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누군가 확인해주는 건가요? 성도들 중엔 그곳 터가 기력을 다한 것이라 여기고 다른 교회로 옮긴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당에서 예배드릴 당시 마음 속에 싹텄던 자부심과 교만을 회개하며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여기고 천막교회 생활을 족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을 텐데 목사님의 '불굴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된 것은 어떤 과정을 거친 것일까요? 신의 뜻도 다수결로 정했을까요?

 

신의 뜻을 설파하는 사람들 중엔 얼마간 진짜도 분명 섞여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신의 뜻을 설파하기보다 자신의 뜻을 말하고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경우가 태반이라 봅니다. 그 의지란 것이 전소한 성당을 재건하거나 빈민을 구제할 돈으로 자녀를 해외유학 보내는 등 나름 대체로 건전한 것도 있는가 하면 때로는 여신도를 농락하거나 목사 개인의 정치적, 경제적 야심을 충족시키는 방편으로 사용하려는 졸렬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가치관의 변천에 따라 성서의 해석도 달라진 것처럼 신의 뜻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습니다.  아프리카의 자유인들을 사냥해 노예의 비참한 삶을 살도록 만든 서구 열방의 내로라하는 기독교 국가들, 심지어 청교도 국가였던 미국에서도 당대의 목사들은 노예들을 노동으로 죽도록 혹사시키는 것이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며 노예제도를 적극 비호했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는 유명한 목사님들 대부분이 자기 국민들을 학살하던 예전 국가권력을 비판하기는커녕 남몰래 거기에 자신의 복수심까지 담아 빨갱이 처단은 거부할 수 없는 신의 뜻이라며 군사독재정권을 찬양했었죠.

 

수십, 수백억 원이 드는 전소된 대형교회의 재건을 갈망하는 목사의 의지를 신의 뜻으로 포장하며 성도들에게 재건축을 강요하는 것은 신앙이기보다는 사기에 가깝습니다. 그 교회를 새로 짓지 않아도 한국엔 세금도 내지 않는 대형교회들이 이미 너무 많은 상황에서, 왜, 이 땅에서 그 교회들을 하나라도 줄이려고 신이 그 화재를 허락했다고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걸까요? 우린 우리 불굴의 의지를 관철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신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 목사님처럼요?

 

2021. 11. 20.

(2018. 12. 16 원본의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