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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위선으로 시작하는 성도의 교제

beautician 2021. 11. 25. 12:03

옆 사람과 인사 안 할 자유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는 늘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였습니다. 군사정권이 사회전반을 짓누르던 시절 교외나 성당이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또는 자유가 넘쳐흐르던 해방구처럼 느껴졌던 적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꼭 그리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기말시험이나 성질 더러운 학생주임이 없는 곳, 남학교에서는 볼 수 없던 아리따운 여학생들이 같은 공간에서 숨쉬는, 조금은 부드럽고 색다른 곳이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루브 넘치는 미국 개신교 예배의 선례를 따라 조금씩 소개되던 대중음악 닮은 가스펠송이 급기야 수십 권의 복음성가집으로 묶여 파급되기 시작하고 우후죽순처럼 결성된 수많은 워십팀들이 긴 팔, 다리와 허리를 휘젓고 아이돌풍 댄스와 음악이 선보이기 시작했을 때 엄숙한 집사 장로들에겐 눈꼴 사나웠을 지 몰라도 어쩌면 진정한 자유가 교회에도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교회 앞마당과 부속 공간들이 나눔의 바자회와 각종 여가교육, 취미 동호회 등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교회는 더욱 개방되었는데 물론 그 순간에 성스러워야 할 하나님의 성전을 장사치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며 상점과 가판대를 때려 부수며 그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염을 토하던 예수님이 잠시 떠오르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게 모든 교회들이 겪는 일반적인 추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여름방학 동안 각종 부서별 활동을 마치고 각 부서장들이 주일예배의 한 순서에서 결과보고를 할 때 회사일로 해외출장을 나간 부장 대신 여름 성경학교 결과보고를 하려던 어린이부 차장이 보고하러 나오자 '보고는 부장이 하는 것이요!'라며 전교인 수백 명 앞에서 차장을 면박주던 성난 한인교회 담임목사의 일갈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려 자신을 버리는 파격을 보였지만 어떤 목사님은 아주 작은 형식의 파괴조차 용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벌써 오래 전의 일입니다.

 

많이 개방되었다 해도 종교의 경직성은 타고난 본질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종교가 인간을 모든 속박으로부터 구원해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선언에 불과합니다. 대개의 경우 종교란 참담하고 패배적인 현실 속에서 정신승리를 허용해 줄 온갖 논리와 믿음을 선사하는 대신, 그 대가로 사람들 사상과 행동을 속박하려는 것이 본질이니 말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구원에 이르기도 하니 참 이상한 일이죠.

 

그런 본질이 내재된 교회의 속박과 옥죄임은 조금 다른 부분에서 이상한 모습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예배가 시작될 때 또는 그 도중에 목사님이 하는 이런 요구에서요.

 

"옆사람과 인사하면서 이렇게 말합시다. 주 안에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인사하세요. 지난 한 주동안 주님 은혜로 살았습니다."

 

요즘은 수만 명 모이는 대형교회의 목사든, 달동네나 섬 구석의 개척교회 목사든 목사라면 누구나 시전하고 있는 이 예배진행기법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엄숙하고 진지하기만 하던 예배 분위기를 일신하는 충격적이고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당시 주보에도 명시되어 있듯 일방적으로 듣는 사람들인 ‘청중’ 또는 ‘회중’이 헌금 내는 것 외에 예배 중 뭔가를 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니까요.사람들은 오래 살았던 아파트 같은 층 이웃들조차 얼굴도 이름도 익히지 못했는데 이제 교회 옆자리의 타인들을 돌아보며 눈을 마주칠 기회를 공식적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젠 그 순서가 더 이상 참신하지도, 획기적이지도 않습니다. 

 

 

난 언젠가부터 남이 시키는 데로 살지 않겠다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내 세대가 학교를 다닐 당시 교육당국이 학생들에게 강요했던 온갖 규정과 조례들이 미래를 개척해 나갈 창의적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저 높은 곳의 사람들이 시키는 데로 움직이는 순종적인 톱니바퀴 인간들을 양산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을 다 보내도록, 권위에 순종하라는 가르침과 시스템을 비판 없이 수용했던 걸 그간의 경험을 한없이 곱씹은 끝에 마침내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 와중에 목사님이 옆 사람에게 그냥 인사하라는 것도 아니고 이런 표정, 저런 표현으로 말하고 인사하라고 하니 그 요구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발이 생기죠. 사람을 처음 대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와 사귀지 않거나 접촉하지 않는 것을 포함해 여러가지가 있는데 왜 목사님은 구체적인 방법적 지침까지 제시하며 옆사람에게 인사하라는 것일까요?  

 

나 송파구 오금동 사는 아무개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렇게 인사합니다. 일상에서 이름도 모르는 옆사람이나 이웃에게 사랑한다느니, 주님 은혜로 살자는 식에 진심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몇몇 환자들을 제외하곤 없습니다, 그런 짓을 교회에서 하라고 목사님이 요구하는 게 이상했습니다. 차라리 각각 명함을 교환하며 정식으로 수인사를 하라고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교회가 누군가의 첫 만남을 위선으로 시작하도록 강요하는 걸까요?

 

앞서 밝힌 바 있지만 주일마다 와이셔츠 가슴 주머니에 굳이 말보로 담배곽을 넣고 교회당에 들어서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중2병 같은 행동이지만 최소한 위선을 떨지 않으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내가 그사이 담배를 끊지 않았다면 담배곽을 가슴주머니에 넣은 채 성가대에서 노래 부르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옆사람과 인사하는 것은 굳이 비난할 필요 없는 긍정적인 일이지만 최소한 그 인사의 말을 매번 목사님이 정해주는 대로 따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야만 합니다. 그건 진심으로 시작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거짓과 위선으로 시작하도록 만들 뿐이니까요

 

집사님, 예배 끝나고 한잔하시죠.

 

차라리 이런 솔직한 진심을 나누는 것이 진짜 신의 뜻인지도 모릅니다.

정말 종교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면 이런 말을 하면서 남들 눈치 볼 일도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배 속 이른바 ‘교제의 시간’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종교는 몰라도 최소한 교화라는 장소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곳이 아니라 개인을 속박하고 그 의지에 반해 좌지우지하려는 곳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입니다.

 

집사님, 이따 한잔해요^^

 

2021. 11. 21.

(예전 원고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