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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예루살렘의 나귀새끼 본문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종려주일, 예루살렘의 나귀새끼

beautician 2021. 11. 23. 11:40

예수의 갑질

종려주일 예수살렘에 입성하는 예수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누가복음 19장 29~34절)

 

 

부활절을 한 주 앞둔 일요일은 Palm Sunday. ‘야자수 일요일’이라고 번역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쉬운 종려주일(棕櫚主日)입니다. 갈릴리에서 시작한 예수의 사역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직전, 그 정점을 향해 달리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죠.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순간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종려주일 다음날부터 성전을 정화하고 바리새인들과 대치하며 제자들의 발을 씻고 함께 떡을 뗀 성만찬의 목요일, 겟세마네에서 붙잡혀 다음 날 십자기에 못박힌 고난일 즉 성금요일을 지나 부활절로 이어지는 고난주간이 시작되죠.

 

 

예수의 탄생과 죽음을 골자로 하는 현대 기독교의 정수가 십자가 사건에 있는 만큼 그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종려주일부터 부활절까지의 기간은 성탄절보다도 더욱 의미 있는 시기임에 틀림없습니다. 더욱이 산타클로스와 이스터버니가 상징성을 선점해버린 성탄절과 부활절보다 고난주간은 비교적 기독교 색체의 훼손이 적은 기간입니다.

 

그런데 매년 반복되는 비슷한 고난주간 설교를 듣다 보면 의아하게 느껴지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특히 저 위 누가복음의 사건 같은 것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수는 평소엔 전혀 하지 않던 '세레모니'를 준비합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앞서 제자들을 시켜 건너편 마을에 들어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 합니다. 그리고 나귀주인이 왜 나귀를 푸냐 물어보면 ‘주가 쓰신다’고 대답하라 하면서요.

 

나귀 주인이 갑자기 나귀를 가져가려는 생면부지 예수 제자들을 보고 제지하며 왜 그러는지 묻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시킨 대로 대답하고 나귀를 끌고 왔고요. 나귀 주인이 그 대답을 듣고 과연 흔쾌히 나귀를 내놓은 것일까요? 당시 이스라엘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랍비가 나귀를 쓰겠다니 정말 기꺼운 마음이었을까요? 아니면 내키지 않으면서도 분위기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내준 걸까요?  성서는 이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목사님들은 ‘순종해야 귀하게 쓰인다’는 식으로 이 장면을 해석합니다. 내가 보기엔 위력에 의한 강요, 즉 '갑질'처럼 보이는데 말입니다.

 

목사님들은 예수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이 겸손함의 표시였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나귀도 타지 않고 두 말로 걸어 들어가며 더 큰 겸손을 보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이 순간 예수는 오만의 정점에 있었던 게 아닐까요? 물론 그것은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 또는 충만한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물을 술로 만들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 부활시키고 이적을 행하며 수많은 인파를 거느리고 예루살렘 인근까지 도달한 예수가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닙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무리해서라도 남의 나귀를 가져오라 시키겠다는 생각을 했던 건 아닐까요? 스가랴가 예언한 그 이가 바로 자신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9:9)

 

인류의 구원을 이루려 온 신의 아들에게 수백 년 전 한 예언자의 예언을 이루는 것이 그토록 중요했다면 제자들을 보내 나귀 주인에게 최소한 충분한 양해를 구하거나 응분의 임대료를 지불하는 모습을 보여 이 시대의 도덕율과 공정거래에 모범을 보이는 방식을 취할 수는 없었을까요?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에서 피를 토할 듯한 오랜 시간 기도했던 예수는 비록 성경에 적혀 있진 않지만 나귀를 가져오기 위해 갑질을 하고 성전에서 제물을 파는 장사치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행한 갑질을 마침내 회개하며 모든 오만을 내려놓았기에 마침내 신에게 자신의 운명을 다시 온전히 맞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해석은 정통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매우 위험한 사상입니다. 당장 이단의 딱지가 붙을 일이죠. 예수가 지극히 인간적이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가 한순간 오만한 마음을 품을 정도로 인간적이었다고 말하면 당장 그렇게 말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겠다고 대못과 망치를 들고 달려들 목사님들은 저 백사장 모래알들보다도 많습니다. 목사님들은 결국 예수가 별로 인간적이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입니다.

 

아무리 갑질처럼 보이는 사건조차도 신앙의 이름으로 겸손함으로 둔갑시키고, 광야에서 한 민족을 40년간 뺑뺑이 돌리며 결국 이집트에서 나온 유태민족 거의 전부를 가나안에 들이지 않은 채 죽여버리고 그들이 길가다가 만난 블레셋, 아말렉들 시나이 반도의 대부분 민족들을 여자와 아이들과 가축까지 쳐죽였지만 그럼에도 인류를 사랑한 신으로 포장하는 것을 가장 잘 본받은 공산국가들이 그들의 지도자들을 우상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갑질을 감히 갑질이라 말하기 두려운 마음이 들면서 허균과 홍길동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헤아리게 됩니다.

 

 

 

2021. 11. 19

(2019. 4. 14 원본의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