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도네시안 드림 15

인도네시안 드림 (5)

ep5. 도어락 그러나 정작 문제는 최사장 자신에게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중산층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인도네시아에 날아와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제적 지위가 현지에서 갑자기 격상되는 것에 스스로 놀랍니다. 대개 인도네시아에서 외국인이라면 무조건 부자 취급을 해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시 한국화폐는 현지의 싼 물가와 저렴한 인건비 환경에서 위력을 발휘했지요. 그래서 자칫 잘못 생각하는 순간 운전사, 가정부도 필요 이상으로 각각 두 명씩 들이고 수스터(Suster)라 부르는 보모도 둘, 거기에 집에서 쓰는 비서까지 따로 채용하기도 하고 그 생활에 중독되면 집사와 정원사까지 두고 영화 속 대저택의 영주 같은 생활을 완성해 가지요. 최사장이 그런 상태였어요. 그는 절대 자신의 것..

인도네시안 드림 (4)

ep4. 뒤통수의 심리학 거기에 최사장 동생이 뛰어 들면서 문제가 불거집니다. 최사장에 따르면 알코올중독 치료까지 받았지만 아직 그 버릇을 완전히 고치지 못했다는 동생이 납 원석사업의 현장업무를 맡아 김부장과 마나도 출신 여직원들을 데리고 서부자바의 말링핑, 바야, 자싱아, 수카부미 등지로 1~2주씩 출장을 나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현지 불법채굴업자들로부터 원석을 구매해 북부자카르타 찔린찡 지역에 있는 한 컨테이너 하치장에 모아 수출하는 데 성공하죠. 그러나 순도 40% 이상이라고 장담했던 200톤의 원석은 그 순도대로라면 납 80톤이 나와야 했지만 실제로는 불과 2~3톤도 제련해 낼 수 없는 형편없는 쓰레기였음이 한국에 도착한 후 밝혀집니다. 그냥 짱돌들이었던 거에요. 그 사건으로 구..

인도네시안 드림 (3)

ep3. 불법체류 내가 입주한 최사장의 끌라빠가딩 사무실은 루꼬(Ruko)라고 부르는 주상복합 4층짜리 소형 유닛 두 개를 튼 4층짜리 건물의 2층이었습니다. 그 당시 북부자카르타의 중심지인 끌라빠가딩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어요. 자카르타 고급 몰 순위에도 들지도 못하던 작고 허름한 끌라빠가딩 몰은 증축을 거듭하면서 이제 자못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게 되었고 지역 전체에 건축붐이 일면서 수많은 아파트들과 루꼬, 상업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좀 더 나중의 일이지만 기존의 창고형 할인매장인 마크로(MAKRO)도 2010년 롯데마트가 인수하여 새롭게 리모델링한 모습으로 문을 열었고 끌라빠가딩은 이제 자카르타 전역에서도 내로라 하는 노른자위 상권으로 떠오른 지 오래입니다. 내가 입주한 루꼬 단지는 이..

인도네시안 드림 (2)

ep2. 연봉 50억 “아, 나 여기 말링핑에 와 있는데요. 지난 주까지 킬로그램당 1,200 루피아 하던 납 원석을 3,000 루피아 달라고 하는데 얘기 좀 해 주세요. 도대체 가격이 비싸진 이유가 뭐고, 얼마까지 주면 팔겠냐고요.” 전화를 걸어온 최사장은 빠른 말투로 이렇게 말하고는 대뜸 현지인을 바꿔 주곤 하는 겁니다. 그 시간도 대중없어 아침식사 전에도 전화가 걸려오고 한참 미팅 중일 때에도, 지인들 골프모임에서 드라이버를 막 휘두르려는 찰나에도 핸드폰이 울곤 했습니다. 최사장은 저녁식사 자리를 종종 만들었는데 예고도 없이 자기 사업 파트너라는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나와 내가 자기 일을 봐주는 것처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또한 악의나 고의가 없었다 하더라도 나로서..

인도네시안 드림 (1)

1. 파산 이후 다양한 스펙트럼의 업종과 사업현장들을 돌고 돌다가 디자인 회사 봐주던 일을 막 그만 두게 되었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의 사업이나 봐주는 바보짓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정말로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달리 먹고 살 방법이 없다면 어떤 일이든, 그 대가가 얼마이든,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파산 후 반둥공장 꼬린 가멘타마에 헐값으로 팔려 갈 뻔 했던 것도, 박치기 대마왕이 지배하던 빠룽의 봉제공장에서 자존심의 시련을 겪어야 했던 것도, 골프샵에서 사장 첩의 집사 노릇까지 감수해야 했던 것도 그 만큼 절박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그런 막다른 골목에서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은 그 뒤끝이 한결같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디자인 회사의 운영을 맡게 될 즈음의 상황은 분명 달라지기 시작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