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도네시안 드림

인도네시안 드림 (11)

beautician 2022. 2. 17. 11:46

 

ep11.  주인 무는 개

 

 

그 즈음 류상무가 또 상해에서 날아 왔습니다. 그때 불발되어 버린 납 원석 열 컨테이너의 선적이 요원했기 때문이었죠. 에도가 바야에서 돌아온 후 대타로 대신 바야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던 최사장은 그 대신 마카사르(Makassar)와 반자르마신(Banjarmasin)을 날아다니며 망간 광산을 찾고 있었는데 내게 더 이상 동반출장부탁을 해오지 않았으므로 항상 통역이 필요한 그가 다른 누군가를 구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그는 이제  류상무에게 현재의 바야 상황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류상무는 사트리오 거리의 맨하탄 호텔에 묶고 있었는데 뒤늦게 호텔에 간 나는 5층에 있는 한국식당 ‘미르’에서 최사장, 류상무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며 바야 상황 설명을 도왔어요. 최사장은 류상무의 투자에 대해 납 대신 망간으로 보상하겠다는 취지의 설명을 했습니다. 망간을 하려면 투자액을 늘려야 한다고 덧붙이면서요. 류상무는 당연히 담보를 요구했고 최사장은 아직 조금 남아 있는 발릭빠빤 실리카 광산의 지분을 주기로 했습니다. 이미 황사장 것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렸고 규사 수출규제는 차치하고 완공된 후 이미 1년 이상 버려져 있어 가동 가능여부조차 불투명한 광산과 제티의 지분이 과연 담보로서의 가치가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바야에서는 망간이 거의 나지 않았으므로 장소 역시 마카사르나 반자르마신으로 옮겨 가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난 최사장이 바야에 임대해 놓은 주택과 선별장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아직 듣지 못한 상태였고요. 식사를 마치자 최사장은 1층 로비에 다른 손님들이 한 팀 와 있다며 자리를 떴고 류상무는 할 말이 있다며 최사장과 함께 일어나던 나를 눌러 앉혔습니다.

 

“물어 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지금 최사장님께 월급을 받고 계신가요?” 류상무는 뜬금없는 질문을 물어 왔습니다. 

“월급 받는 관계는 아니고요. 일부 경비보조는 받았습니다만…?” 

“사무실은 지금 최사장님이 임대한 사무실을 함께 쓰는 거구요?” 

“그렇습니다….?”

 

류상무는 첫 인상이 매우 좋은 사람이었어요. 실제로 은행 일을 오래 한 사람들은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게다가 그의 학력과 경력 역시 인상적이었고 은행 출신의 엘리트가 광산업 현장에까지 내려와 실무를 해보려 하는 점에서 꽤 도전정신도 있어 보이고 그의 말을 들어보면 정의감은 물론 사고방식도 건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랬기에 그 다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으며 내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개가 주인을 물면 안되는 거네요.” 그가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였습니다.

“그렇잖아요? 최사장님이 그 사고친 직원을 그렇게 싫어하는데 배사장님 입장에서는 최사장님한테 돈 받아 쓰고 사무실도 얻어 쓰면 최사장님 직원이나 다름없는데 최사장님 불편하게 해 드리면 안되는 거네요. 그렇죠?”

 

에도 문제가 끝나지 않았던 겁니다.

더욱이 류상무는 성격상 큰 소리로 욕설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가 조용조용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심한 욕설을 퍼붓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사실 류상무의 회사 배경을 들으며 어쩌면 우리 미용사업도 그의 도움을 받아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내 사업을 하면서 가진 원칙 중엔 우린 물건을 팔지 자존심을 팔진 않는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류상무는 그 원칙을 정면으로 공격한 것이고 내가 그 말을 듣고서 가만이 있을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류상무님이 저한테 월급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죠, 왜요?” 

“그럼 나한테 내 직원을 해고해라 말아라 할 입장도 아니시군요.”

이번엔 류상무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최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내가 자기 직원이라고요? 최사장님도 내 직원을 써라 마라 할 입장이 아니십니다. 아무리 코딱지 만한 조직이라도 내 회사 일이고 내 직원 일이에요. 내가 길바닥에서 일하는 게 두려워 최사장 사무실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증거를 보여 드리죠.”

 

어쩌면 경솔한 짓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개가 주인을 물면 안된다는 얘기까지 듣고 가만히 있을 정도로 최사장에게 목을 매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최사장이 내게 목을 매고 있었던 것이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서 한 마디 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착각하고 계실까봐 말씀드리는 건데…, 류상무님 회사로부터 투자를 기대하는 건 내가 아니고 최사장님이에요. 돈 투자해 주겠다는 빌미로 아무한테나 막말 해도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방향이 틀렸습니다. 최사장님 회사에나 간섭하시고 내 회사는 놔두세요. 난 류상무님 돈에 아무 관심도 없으니까요!”

 

나는 그 길로 로비의 최사장도 만나지 않고 곧장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동안 운전대를 잡고도 류상무가 했던 얘기들이 귓전을 맴돌았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온 후, 그리고 파산을 경험한 후 온갖 모욕적인 경험을 많이도 해 보았지만 류상무 같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에 더욱 분통이 터졌습니다. 개차반인 인간에게 욕을 먹는다면 그 인간이 원래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치면 됩니다. 그러나 점잖고 지혜로워 보였던 류상무의 입에서 '넌 개니까 주인을 물면 안돼" 이런 소리를 들었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도록 최사장이 떠버렸을 에도에 대한, 나에 대한 얘기들이 마치 초능력이라도 생긴 것처럼 머리 속에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며 생각을 괴롭혔습니다.

 

류상무가 했던 그런 소리를 듣기 싫다면 해야 할 일은 분명했어요. 에도를 해고하거나 우리가 사무실을 비우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누구에게 등떠밀려 내 직원을 해고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실을 나가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결론이었고 나가야 한다면 오늘 당장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곧 사무실도 없는 유령회사가 된다는 의미였어요. 그런 회사에 남아 있을 직원들은 없었습니다.

 

나는 메이와 에도를 내 책상 앞에 불러 앉혔습니다. 메이 이전에 채용했던 직원들은 먼저 퇴사하여 당시엔 그렇게 달랑 두 명만 남아 있었어요. 난 그 날 있었던 일과 내가 결정한 사항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린 길바닥에 나가 앉아야 해.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희들 월급 줄 능력마저 없어진다는 건 아니야. 사무실이 있든 없든, 직원이 많던 적던,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여전히 계속할 수 있어. 사무실도 다시 찾아 봐야 되겠지. 단지 당분간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만나 미팅하고 결산해야 할 곳은 이 사무실이 아니고 저기 길바닥 어딘가가 될 거야. 어차피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사무실로 불러 들여 만나는 게 아니고 그 사람들을 찾아 가는 일이지. 그러니 시간에 쫓겨 아무 사무실이나 대충 얻을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난 그럴 각오가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너희들에게도 길바닥으로 함께 나가자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러니 너희들도 결정을 해야 해. 날 따라 길바닥에 함께 나갈지, 아니면 너희들 살길을 찾아갈 건지…”

 

메이와 에도는 사뭇 심각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메이가 아랫 입술을 삐죽 내밀며 얘기했습니다.

“사무실 답답했는데 잘 됐어요. 내가 매일 좋은 자리 찾아서 알려 줄 테니 장소 바꿔가면서 미팅해요. 어때요?”

이번엔 에도 차례입니다. 

“미스터르, 전에 먹어도 같이 먹고 굶어도 같이 굶자고 했잖아요? 그러면 길바닥에 가도 같이 가고 사무실에 들어가도 같이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미스터르가 결정하시면 뭐든 따르겠습니다.”

 

하~! 요 녀석들. 

난 이 두 친구들을 번갈아 가며 꼭 안아 주었습니다.

 

사무실 짐을 빼는 일은 순식간에 끝났습니다. 작은 사무실에서 생각보다 많은 짐이 나왔지만 나도 나름대로 짐 싸는 데 이력이 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내 아내도 짐 받는 데 이력이 난 사람이죠. 그 짐을 싸 들고 직원들과 함께 집에 오자 아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짐 쌓을 장소를 턱 마련해 주었고 그래서 사무실 짐을 집 한 구석에 쌓아 놓는 일도 금방 끝났습니다.

 

파산한 후 ROTC 선배와 고교 후배가 무스티카 라투 3층 사무실을 나누어 쓰도록 했을 때도 불과 2개월만에 짐을 싸고 집에 들어 갔었죠. 그 후 뿔로마스 태견전수관에서도 짐을 쌌고 박치기 대마왕의 빠룽공장에서도, 골프샵에서도 1년도 안되어 짐을 싸 나왔습니다. 그 후 김프로와 함께 열었던 맘빵 사무실에서도 4개월만에, 디자인 회사에서는 13개월만에 짐을 싸서 집에 돌아 왔었고요. 그걸 매번 보아 왔던 아내는 이번엔 별로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밤 최사장의 빨라디안 아파트에 가서 사무실 열쇠를 넘겨 주었죠. 최사장은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아 글쎄, 류상무 그 사람이 말을 함부로 해서…., 배사장님, 이러지 마시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 오세요. 그런 일로 이제 배사장님이 우리 일을 안 봐 주시면 여러 모로 곤란한 일들이…” 

“걱정 마세요. 난 그런 소리 듣지 않으려고 사무실을 뺀 거지 최사장님 일에서 손 떼겠다고 나온 거 아니에요. 그러니 여전히 바야 일에 우리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말씀하세요.”

 

손을 떼고 싶은 게 사실은 본심이었지만 그렇게 좋은 말로 끝내는 게 최선일 것 같았습니다. 최사장은 이미 망간 쪽으로 기울고 있었으므로 바야 쪽 일은 대폭 줄어들 것이었고 더욱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또 다른 한국인 조력자가 생긴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반자르마신이나 마카사르의 일도 내게 부탁을 했어야 하는데 난 그쪽 돌아가는 얘기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최사장 입장에서도 사실은 내가 떨어져 나가 주기를 바랬던 것인지 모릅니다. 그는 더 이상 나를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불과 한달도 되지 않아 그는 반자르마신에 사무실을 냈다고 전화해 왔습니다. 바야 쪽은 완전히 포기하고요. 류상무나 또다른 투자자들이 돈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바야에 얻어 놓은 주택이며 2년 임대한 5,000sq.m 대지며 구매해 놓았던 납 원석들을 모두 버려둔 채 망간에 집중하게 되었던 것이겠지요. 새로운 일을 벌이고 투자자로부터 돈을 끌어들이는 최사장의 능력은 경이로울 정도였지만 한편 상당한 돈이 투자된 사업과 지역을 그렇게 간단히 포기하는 것을 보며 최사장이 남의 돈에 대한 책임감이 지나치게 없다는 것과 어쩌면 이번 바야에서의 사업확장 시도도 단지 단기적으로 새로운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려는 계산된 행보였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야 납 선별장을 적지않은 돈을 들여 확장해 놓은 후 류상무를 비롯한 몇몇 신규 투자자에게 보여주면서 새로 투자를 받았고 그렇게 엮은 투자자들을 데리고 그는 바야를 간단히 버리고 다른 사업,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간 것이라고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동안 최사장의 요청에 따라 나와 내 직원들이 바야에 투자한 시간과 땀방울이 아깝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로서는 그동안 아무런 의미없는 일을 한 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우린 그의 사무실에서 나왔고 그로부터 몇 달 동안 아침미팅은 아르타가딩몰 3층 푸드코트에서, 저녁 결산은 우리 집 거실에서 하게 되었는데 나를 격려하려 그랬는지 늘 사기충천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메이와 에도로 인해 길바닥에서도 미용사업은 더욱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렇게 최사장과의 일로 인한 교류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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