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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도네시안 드림

인도네시안 드림 (14)

beautician 2022. 2. 20. 12:02

 

 ep. 14.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

우리가 사무실을 임대해 입주한 것은 길바닥으로 나온지 5개월만의 일이었습니다. 

길바닥에서 일하는 동안 팩스나 우편물을 제대로 받을 방법이 없고 사무실이 어디 있냐는 거래선들의 질문에 좀 머뭇거려야 했지만 그런 부분은 자카르타 남부 깔리바타(Kalibata) 지역에 주택을 임대해 일부를 사무실로 쓰고 있던 릴리가 잘 커버해 주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카르타라는 도시 전체를 사무실 삼아 오늘은 끌라빠가딩 아르타가딩 몰에서 아침 미팅을 하고 다음날은 BSD의 빠당(Padang) 음식점에서 저녁 결산을 하는 등 다이내믹하게 움직이면서 일은 재미를 더했으므로 지루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습니다.

 

비록 우린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타고 자카르타를 누비고 있었지만 사무실이 없어 제품창고를 마련하지 못한 관계로 내 차에 제품들을 잔뜩 싣고서 내가 맡은 루트를 지나면서 중간중간에 길가나 카페에서 직원들을 만나 그들이 들고 다니는 제품 배낭에 부족한 물건들을 채워주고 부족한 비용도 보충해 주곤 했습니다. 내 역할은 마치 24시간 비행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전투기들에게 공중에서 연료를 채워주는 공중급유기 같은 것이었어요. 사무실에 입주한 후에도 그런 일의 구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무실이 안정되고 직원들이 늘어나면서 내가 직접 미용실에 들어가는 일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사무실에 입주할 당시 최사장은 아직 자카르타에 있었습니다.

그는 쯤빠까마스(Cempaka Mas) 안사장의 가발가게 2층에 책상을 하나 놓고 사무실을 같이 쓰기 시작하지만 끌라빠가딩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의 출근하지 않았고 그 대신 리나(Lina)라는 여직원을 출근시켰습니다. 리나 역시 바로 얼마 전 최사장이 안사장으로부터 소개받은 가발공장 업무과 출신 직원으로 회사서류 정리와 각종 허가갱신 등이 담당업무였던 모양이었어요. 최사장의 정관에서 우리 직원들 이름 빼는 것을 그 친구가 담당했지만 결국 그때 끝나지 못해 최사장이 롬복으로 옮겨간 후까지도 골치를 썩어야 했습니다.

 

당시 리나의 설명으로는 최사장이 가족들의 비자갱신이나 회사서류 허가연장 등의 일을 끊임없이 지시했지만 해당 업무를 진행할 비용을 주지 않아 전혀 진행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정관의 이사진 명단을 바꾸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직원들의 이름을 빼는 대신 리나와 그녀의 남편 이름을 대신 넣기로 했으나 최사장은 그렇게 하면 리나의 회사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리나에게 해당 허가변경 비용을 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는 회사를 폐업하면 해야 할 세무정산을 떠넘기려고 리나의 이름을 빌리면서도 사례는 못할 망정 가당치 않게 비용을 전가하려 했던 것이죠. 그러다가 3개월 이상 월급을 받지 못한 리나가 참지 못하고 사표를 던지고 말았습니다.

 

최사장이 롬복에 간 후 아직 남은 정관변경 문제 떄문에 나도 전화를 했지만 이따금 최사장도 전화를 해오곤 했습니다. 그 중 몇 번은 내 현지 구좌를 통해 롬복에서 송금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전 말링핑에서 납 원석 구매사고를 내고 한국으로 도주했던 최사장 동생이 뜬금없이 또 다른 투자자를 물고 자카르타에 돌아와 있었지만 아직 체류 비자와 노동부 근로허가를 받지 못한 상태여서 현지통장 개설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형이나 동생이나 어디서 돈을 끌어 오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여러 번 통화를 하면서 최사장이 예전에 류상무의 사촌동생 류과장을 반자르마신에 버리고 수라바야로 옮겨 갔듯, 이번에 양프로를 수라바야에 버리고 롬복으로 옮겨갔다는 사실도 최사장 입을 통해 직접 들었습니다.

 

“양프로는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전에 얘기했죠? 배사장이 신경 쓸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망간 구매를 잘못해서 회사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어요. 그리고 나서 현장 버려두고 자카르타로 줄행랑을 쳐버렸거든. 뭐, 물론 전에 양프로가 돈을 좀 빌려 준 적이 있지만 그 동안 충분히 그 이상은 가져간 셈이니 그것도 다 정산된 셈이요. 세상에, 어디 그렇게 못되먹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는지…”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양프로와는 끝까지 함께 가겠다고 장담하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전화상에서 최사장은 그렇게 혀를 끌끌 차고 있었습니다.

 

최사장은 자카르타를 떠난 후 수라바야에 소규모 망간 선광시설을 차려 놓고 롬복에서 망간을 가져와 처리했다고 합니다. 양프로는 그 수라바야 선광시설에 가 있었고요. 최사장은 자신이 세계 그 누구도 아직까지 시도해 보지 못한 최첨단의 선광설비를 발명했고 그 설비는 중국에서 40만불이 넘는 가격을 받았던 선광설비에 비해 제작비가 10분의 1도 안되는 혁명적인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나는 최사장이 그렇게 대단한 발명가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카피하지 못하도록 약속된 구매자들 외에는 시설 안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설비라는 것이 실상은 레미콘 차 위에 시멘트 섞는 원통 같은 것에 구멍을 숭숭 뚫어 놓고 그 안에 크러셔에서 분쇄한 원석자갈들을 넣고 물을 부어 세척하는 정도의 용도였고 실제 순도별 선별은 그 기계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일용직 직원들을 채용해 바야의 납 원석 선별장에서 했던 것처럼 일일이 육안으로 선별하는 것임을 나중에 들어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설조차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하고 망간을 구해오지 못해 제대로 가동시키지 못하고 있던 최사장은 어느 날 기계를 모두 뜯어 롬복으로 옮겨 가기로 결정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양프로는 손을 털고 자카르타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최사장의 사업상황이 어떤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롬복으로 옮겨가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결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릴리를 통해 듣고 있는 망간 상황에 비추어 보면 롬복이 포함된 NTB 주(Nusa Tenggara Barat)이나 꾸빵(Kupang), 숨바와(Sumbawa) 등이 포함된 NTT 주(Nusa Tenggara Timur) 지역의 망간은 지질학적으로 불순물이 많고 큰 광맥 발견을 기대하기 어려워 대기업들이 들어가지 않은 지역이었고 따라서 그곳에서 선광처리시설을 운용한다면 대부분 불법채굴업자 물량에 의존해야 하는데 정부의 불법채굴에 대한 규제가 당시 점점 강화되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수라바야 인근지역에도 뜨렝갈렉(Trenggalek), 뚤룽아궁(Tulung Agung) 등에 꽤 좋은 망간이 나오고 많은 국내외 업체들이 입질을 하는 가운데 실제로 몇몇 기업들의 정식 채굴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 째로 큰 대형 부두가 몇 시간 거리 안에 있다는 인프라적 측면에서 수라바야는 선광처리시설을 놓기에 최적지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굳이 롬복으로 옮겨 가려는 최사장의 의도를 알 수 없었습니다. 

 

사업성 면에서 현저히 떨어지는 곳으로 갑자기 사업장을 옮기는 배경에는 대개 모종의 사고가 숨겨져 있기 마련입니다. 최사장의 롬복 이전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점점 한국사람들이 적은 곳으로 이동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한국, 중국에서 보내져 온 눈먼 투자금이 야적시설과 사업장에 뭉텅뭉텅 버려졌고 그로 인해 돈과 시간을 축내고 만 패잔병들이 속속 낙오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신이 옳았다고 증명하려 했던 양프로도 결국 그 피해자 대열에 끼고 말았습니다.

 

뜨렝갈렉 불법 민간 망간광산

최사장은 자기가 피해를 입었다고 하지만 양프로도 최사장도 잘 아는 나로서는 최사장이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난 최사장과도 양프로와도 연락이 끊고 지냈습니다. 내 일이 바쁘다는 핑계도 있었지만 나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지금은 뭐라고 대답할 수 없네요’ 라며 ‘그래, 너 사기꾼 맞아’ 라는 내용에 근접한 대답을 한 후 무엇을 증명하려는 것인지 그에게 있어 가장 절박했을 순간에 연습장의 밥줄까지 내팽개치고 내 등 뒤에서 최사장과 야합해 수라바야로 떠나 버렸던 양프로에게 야속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양프로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최사장의 동정을 궁금하게 하는 그간의 이유였는데 양프로가 최사장과 결별하고 자카르타에 돌아온 이상 그간의 우여곡절은 고사하고 우리 직원들의 이름을 정관에서 빼는 것조차 이미 1년도 넘게 질질 끌던 최사장과 더 이상 말을 섞어야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양프로가 연습장에 돌아왔다는 얘기를 사람들에게 들었고 내가 연습장에 갈 때마다 연습장 직원들은 양프로가 저쪽에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르쳐 주기까지 했지만 날 보면 어딘가로 급히 숨어 버리는지 10여번을 가면서도 한번도 그와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나를 피하는 것이 분명했으므로 나 역시 굳이 그가 숨어있는 곳까지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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