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도네시안 드림

인도네시안 드림 (15)

beautician 2022. 2. 21. 12:27

 

 

ep.15 선하게 살 수 없는

 

 

그러던 어느 날 한 인도네시아 관련 인터넷 카페에서 어떤 사람의 글을 보고 난 깜짝 놀랐습니다. 

 

참 어려운 시기입니다.

아직은 저 역시 마찬가지이구요.

그 동안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참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노력과 결과는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도 때가 되면 결실을 이루는 것이라 굳게 믿고….

그 동안 믿음을 갖고 같이 일하게 된 분들과의 일이 잘 되어 나가고 있는 듯하여 힘이 납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위한 특별한 목적의 카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근데 친목 카페가 아니라 사업목적의 카페인지라…, 회원수가 넘 없어서 썰렁합니다.

 

카페명 : 망간 전문 선광공장

 

요즘 주로 근무하는 곳이 롬복이니깐 추첨해서 롬복 여행권 드리기는 아직 어렵고 ㅋㅋ

롬복으로 위문공연 온다면 그 맛있다는 Arak Bali 또는 Arak Lombok 무제한 제공입니다.

물론 숙소도…  (후략)

 

롬복의 망간 전문 선광공장그것도 한국인이 하는 그렇게 스펙에 딱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또 있긴 힘들죠. 그것은 분명 최사장이 하고 있다는 망간 선광시설이었고 새마을 운동이라는 ID를 쓰는 이 사람이 그 밑에 추가로 단 글을 보고 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습니다.

 

망간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웃고 들어와서 울고 나가는 부분이더군요.

특히 이 나라 망간 광산업자와 중개업자는 말 그대로 100% 믿으면 안되는….

결국 직접 1에서 100까지 관리 안하면 바로 사고 납니다.

저와 같이 일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 낸 소중한 경험의 소유자들입니다.

 

인도네시아어가 능통한 조력자가 늘 필요했던 최사장은 내가 떠나고 안사장도 떠나고 급기야 양프로마저도 떠난 그때 마침 기계정비를 위해 불려 왔다가 필이 꽂힌 조사장이라는 조력자를 만난 것입니다. 최사장의 유려한 말빨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드물었는데 조사장 역시 최사장의 망간 사업에 필이 제대로 꽂힌 상태였어요.

 

마침 이 카페의 오프라인 정모가 바로 며칠 후로 다가와 있어 처음으로 정모에 가 보았습니다. 조사장은 그가 하려는 일에 어떤 위험이 잇는지 경고를 받을 권리가 있었고 내 말을 믿고 안믿고는 그가 판단할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날 정모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나름 정해진 운명인지 모릅니다. 그날 정모에서 조사장은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 카페의 핵심멤버까지는 아니었는지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날 굳이 정모에 간 것은 우연을 핑계로 조사장과 얘기를 해 보려는 것이었으므로 비록 전화번호를 받았다 하더라도 한창 최사장을 100% 믿고 있는 조사장에게 내가 전화까지 해서 최사장을 모함(?)한다는 의심을 살 얘기를 꼭 했을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느 날 공항에서 양프로와 마주쳤습니다.  짧은 방학을 자카르타에서 지내고 호주 멜번의 대학으로 돌아가는 아들을 배웅하던 길이었죠. 나는 아내와 함께였고 그는 다른 친구와 함께 한국에서 오는 손님을 마중하러 온 길이었습니다. 내 모습을 본 그는 잠시 움찔하는 듯 했지만 이내 그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갑게 인사를 해 왔습니다. 실로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였습니다.

 

최사장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아세요?”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 후 그간 어떻게 지냈냐는 얘기가 오가야 할 순간 그가 맨 처음 꺼낸 말이 최사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글쎄…, 몇 달 전 롬복에 있다며 전화했던 게 마지막이었는데…, , 열심히 돌 고르면서 일 잘하고 있겠죠?”

그 사람 지금 일 못해요. 내가 유치장에 처넣었거든요.”

양프로의 입가엔 비장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서로 동행도 있고 양프로는 손님을 맞아야 하는 상황에 아들을 다시 보낸 내 아내는 우울한 심정이 되어 있었으므로 공항에서 긴 얘기를 할 수 없었지만 며칠 후 끌라빠가딩에서 따로 만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좀 더 자세한 근황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난 그 자리에 그렇게 양프로와 함께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기뻤어요. 골프 연습장에서 그의 바뀐 핸드폰 새 번호를 알게 되었지만 그간 그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고 연습장에서도 모습을 숨기고 있었죠. 그러나 그게 증오나 배신감 같은 것이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이렇게 만나면 어떤 얼굴로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얘기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겠죠. 자신의 실패한 모습을 또 보여주기도 싫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긋났던 두 개의 선이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마침 레슨 받는 사람들 중에 비밀경찰 고위간부가 있었어요. 내 얘기 듣더니 형사범으로 고소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직접 경찰서에 가서 고소 접수 시켰어요. 그리고 나서 증거 수집하고 체포 준비하는 것까지 한 달 반 걸렸어요. 그 동안 계속 경고도 했고 몇 번 사람들 내려 보냈지만 최사장은 약속만 하고는 여전히 차일피일 미뤘고요. 오히려 내가 내려 보낸 사람들한테 술 사주고 구워 삼더니 거꾸로 나한테 큰 소리 치더군요.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왔죠. 나도 이제 갈 때까지 간 건데  경찰 세 명 내려 보내서 롬복에서 잡아 가지고 자카르타로 끌고 왔어요. 지금 유치장 들어간 지도 두 달 되어 가요.”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한국인들 사이의 분쟁에 경찰까지 동원하는 사례는 이제 아주 흔한 일이 되어 버렸고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우선 상대방을 유치장에 떨궈 놓는 경우도 자주 듣곤 합니다. 실제로 경영권 분쟁에 휩싸인 한 공장의 법인장은 자신의 변호사가 고소인의 변호사에게 매수당해 출국금지 시켜 놓은 사실을 알리지 않아 출장 출발하던 날 공항에서 체포되어 3개월 가량 유치장에서 고생하며 투쟁해 끝내 경영권을 사수했던 일도 있었죠. 유치장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카르타에서는 국적을 막론하고 이권이 걸린 싸움이 벌어지면 경찰이나 폭력배를 동원해 상대방을 겁주고 위협하는 일은 이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 그림의 한 귀퉁이에 김프로와 최사장도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 씁쓸했어요.

 

도대체 최사장한테 얼마를 피해 본 건데? 전에 내가 돌려 줬던 1만불 말고도…., , 보증이라도 서 줬어요?” 

내가 알고 있던 원래의 양프로는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1만불, 고작 1천만원 전후의 돈 때문에 사람을 인도네시아의 열악한 유치장에까지 처넣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어요. 

처음엔 이런 저런 작은 비용들을 대줬어요. 최사장은 그때 이미 돈이 한 푼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골프장에서 레슨비 받아서 출장갈 비행기 티켓도 사주고 수라바야 직원들 월급도 내 줬어요. 전에 롬복으로 설비 옮긴 것도 사실은 내가 비용을 내 줬던 거에요. 그러다가 자꾸 말려 들어간 거에요.”

“양프로가 무슨 돈이 있어서?”

제주도 땅을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 줬어요. 나도 알아요. 그거 날린 거라는 거…, 최사장이 저렇게 버티면 받아낼 길이 없다는 것도요…”

 

벼룩이 간 빼먹는다는 말이 있어요. 최사장은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처지에 있던 양프로의 마지막 보루였던 선친으로부터의 유산마저 그 중 하나를 완전히 말아 먹은 것입니다.

 

그 돈이 다 인도네시아로 들어왔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않죠. 은행에서 대출 받자마자 최사장은 한국에서 빚잔치부터 했어요. 내 돈으로 한국에 밀려 있던 빚들을 갚았고…, 아마도 다 갚은 것도 아닐 거에요. 그 사람 빚은 상상도 할 수 없으니까…, 제주도 땅으로 대출받아서 여기 들어온 돈은 몇 푼 되지도 않았어요. 그 꼴 보니 계속 수라바야에 남아 있을 마음이 싹 사라졌어요.”

 

양프로는 힘없는 미소를 띄운 채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체념과 증오, 후회가 어지럽게 섞인 그의 복잡한 심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최사장의 방식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돈을 빌려 주거나 투자하는 사람들은 돌아가는 사업상황을 보고 들은 후 그에 맞춰 적정액을 내놓지만 그 돈을 받는 최사장은 그 돈으로 언급하지도 않았던 급한 빚들, 생활비, 아이들 학비 등을 먼저 정산하고 나서 남는 돈을 사업에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돈은 항상 모자랐고 사업은 더욱 더 삐걱거리고…, 그래서 그 다음 눈 먼 투자자가 또 돈을 넣기 전까지는 사업도 채무정산도 하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 그의 사업 스타일이었습니다. 이익을 내 주면 되는 것이니 자기가 돈을 어디 쓰는지 투자자는 참견할 권리가 없다고 하던 최사장의 주장도 새삼 떠올랐어요. 한국에서의 빚잔치에 이의를 제기하던 양프로에게도 그는 똑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겠죠.

 

최사장도 처음엔 그렇게까지 심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돈을 갚을 것 같아요?”

자긴 돈 없데요. 오히려 지가 화를 내고 있어요.”

동생하곤 얘기해 봤어요?”

몇 번 만났어요. 돈도 없지만…, 제 형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려야 되니까 한동안 유치장에 그렇게 놔두자고 하데요. 동생까지도 그런 말 할 정도로 최사장은 그런 인간이에요.”

“양프로….”

 

예전에 동생이 원석 사고를 내고 한국으로 갔을 때 최사장은 동생이 알코올 중독자이고 미쳐서 자기 몰래 일을 파탄낸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모든 잘못을 동생에게 미뤘습니다. 그는 그렇게 투자자들과 함께 자기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면서 그 사고에 대해 손을 씻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롬복으로 가자마자 동생은 또 다른 투자자를 물고 자카르타에 들어왔고 최사장은 아무 일 없었던 듯 동생이 가져온 돈을 함께 쓰고 동생에게 롬복 선광설비 홍보를 부탁했지요. 이번엔 동생이 도울 차례였던 것입니다.

 

팔은 절대로 안으로 굽는 것이고 자기 형이, 가족이 인도네시아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쌤통이라 생각하며 팔짱만 끼고 있을 사람은 없습니다. 십중팔구 그들은 양프로에게 그렇게 얘기하기로 입을 맞추고 동생도 형의 처벌을 원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실제로는 양프로와 합의를 보려면 줘야 할 돈보다 훨씬 더 적은 돈으로 경찰과 합의를 보고 풀려 나려 노력하고 있을 터였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고소인이 방심한 틈을 타 경찰에게 돈뭉치를 건넨 한국인 피소자는 머지않아 유치장을 나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카르타를 자유롭게 활보할 것입니다.

 

그러나 양프로는 최사장 동생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최사장이 동생조차 사기꾼이라 인정하고 등을 돌린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했다고 고소해마지 않으며 자기 위로를 하고 있었습니다. 양프로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입니다.

 

“앞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더라도 이제 당장 먹고 사는 게 중요해요. 양프로 심정 모르는 거 아니지만 그런 일에 너무 얽매여 있으면 다른 일 하기 힘들어지거든. 한국도 아닌 인도네시아에서 다른 한국사람 법정에 세우고 벌받게 하고 빚 받아 내고 하는 거 분명 쉬운 일 아닐 거에요. 물론 돈을 받아 낼 수 있다면 받아 내야 하겠지만 빨리 결론 내려 정리해 버리고 그런 감정 훌훌 털어 버리는 게 중요해요. 살 길을 찾아서 계속 앞으로 나가야죠. 최사장 사건에 올인하고 있으면 양프로가 최사장 잡아 넣었지만 양프로 역시 최사장한테 발목을 잡혀 있는 셈이야. 그래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어.”

 

양프로가 내 말을 이해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나와 릴리가 하고 있던 목재사업이 망한 후 릴리의 큰 오빠가 우리가 보낸 감독관을 감금하고서 벌목장과 제재소 소유권을 넘기지 않으면 감독관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던 사실을 내 머리 속에서 털어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직도 그 사실을 이렇게 기술하는 걸 보면 결국 털어내지 못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발목을 잡고 있던 그 사건을 뿌리치지 못했다면 릴리는 그간의 부채를 모두 털고 술라웨시의 니켈광산주가 되어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나 역시 여전히 나락의 밑바닥을 헤매면서 언제까지나 릴리 큰 오빠에 대한 원망과 증오만을 매일의 양식으로 삼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몇 번의 만남을 반복하면서도 양프로와의 대화 속에서 최사장은 또 다시 수라바야에서 대금을 치르지 않고 롬복에서는 자금상환을 생까기 시작했으며 양프로는 자비를 들여 경찰관들을 롬복으로 보내고 유치장에 들어간 최사장이 배째라며 자빠지는 일련의 시퀀스가 매번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고 있었으므로 이미 인도네시아라는 사각의 링에서 매 라운드 다른 상대를 만나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드려 맞고 몇 번씩이나 링 바닥에 나가 떨어지고서도 힘겹게 다시 일어나 자세를 고쳐 잡았던 양프로가 이번 최사장과의 사건으로 결국 결정타를 맞고서 레프리의 카운트가 다 끝나가도록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이 양프로는 많은 친구들을 새로 사귀었고 더 이상 내가 예전처럼 모든 것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왠지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나와 양프로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서 어쩌면 다시는 예전과 같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벌어지던 시기가 2007년, 2008년이었고 이 사건은 이게 끝이 아닙니다.

얼마 후 유치장에서 나온 최사장은 한동안 자카르타 곳곳에 출몰하다가 언젠가부터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양프로를 비롯해 노숙자 확사장이나 상해의 류상무, 소희 엄마 등의 이야기는 더 이상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릴리와 메이는 여전히 내 주변에 있지만 에도는 어느 날 회사에 큰 사고를 치고 도주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한국 교민들은 한때 5만 명 선까지 올랐다가 코로나 팬데믹 시기엔 2만 명 밑으로도 떨어졌습니다. 그들 각각은 처음 인도네시아에 올때 어떤 '인도네시안 드림'을 품고 왔을까요?  지금은 내 것처럼 어느새 누더기가 되어 있을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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