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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9.30사태’의 전말(顚末) (2014년 김문환 선배가 자카르타 경제신문에 기고한 내용) 제1부 발아(發芽) 인도네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이며, 논쟁거리인 9.30사건이 끼어있는 9월만 돌아오면,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잠긴다. 최소 4십만 명에서 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그들의 후손들까지도 공산당으로 낙인이 찍혀 사회적인 금치산자 취급을 받으며 지난 50여 년의 세월을 인고하여 왔기 때문이다. 수하르또 정권 때까지만 해도 이날은 일상생활이 자제되고 언론매체는 이날을 애도하는 스산한 프로그램과 기사로 매워야 했다. 정부에서 제작한 ‘9.30사태’에 관한 홍보영화가 수십 년 동안 녹음기처럼 재탕되어 일반국민들에게 세뇌교육 시키듯, 획일적인 행사가 매년 반복되었다. 그렇다면 정확히 4..
라왕세우 (Lawang Sewu) 방문 고풍스러운 식민지 시대의 건물 라왕세우 천 개의 문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귀신이 많이 나오는 곳 철도 박물관으로서의 라왕세우 6월 22일(수) 방문한 라왕세우는 오후 3시경, 너무 낮이어서 여기 출몰한다는 귀신들을 만나볼 수 없었습니다. 2022. 6. 24
사진 속 인물들 이 오래된 사진은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대장군(오성장군) 세 명 중 한 명인 압둘 하리스 나수티온(AH Nasution) 장군의 가족사진입니다. 일반에 공개된 이 사진이 너무 작게 나온 게 아쉽습니다. 이 사진은 대략 1965년쯤의 것인데 당시 나수티온 장군은 육군사령관직은 아흐맛 야니 장군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전군사령관 즉 육해공군을 모두 통솔하는 군 최고 위치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다가 1965년 9월 30일 자정이 지나고 10월 1일 새벽이 되었을 때 대통령궁 경호실 군인들이 나수티온 장군 자택에 난입해 들어옵니다. 훗날 9,30사태, 인도네시아인들은 P30S PKI라고 줄여 부르는 쿠데타가 벌어진 겁니다. 서로 식별하기도 어려운 어둠 속에서 나수티온 장군은 정원을 가로질러 달린 끝에 ..
초창기 경력 글쓰기와 창작 말릭은 7개월 간의 메카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빠당빤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간 정박지인 메단에서 배를 내렸다. 그곳에서 말릭은 저널리즘 세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는 화교신문인 뻘리타 안달라스(Pelita Andalas)에 하지 순례를 다녀온 경험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처음으로 수마트라 타왈립과 그의 아버지가 선봉에 선 미낭까바우 이슬람 개혁운동에 대해서도 글을 썼다. 이 첫 원고들을 쓰면서 함카는 그의 속에 있던 저널리스트 소양에 눈을 떴다. 이란 잡지의 무하마드 이스마일 루비스(Muhammad Ismail Lubis) 사장도 말릭에게 원고를 청탁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신문과 로컬 잡지에 글을 쓰는 것 외에도 말릭은 압둘 아지즈(Abdul Azis)가 ..
함카의 메카 시절 고향 반응과 순례 출발 말릭은 고향에 돌아올 때 환영받았지만 종교학자라기보다는 단지 연설가로 받아들여졌다. 아랍어 문구나 단어를 읽을 때 말릭은 어순(tata)과 문법(nahwu), 단어의 변화(sharaf)를 잘 이해하지 못해 아랍어가 유창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타왈립 학교에서 교육을 다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랍어를 인도네시아어로 번역한 결과물은 늘 다른 사람들이 한 것보더 훨씬 나았지만 함카 스스로도 자산의 아랍어 발음이 자주 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말릭은 풀이 죽었다. 아버지 역시 연설만 잘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좀더 공부를 하라고 조언했다. 무함마디야가 빠당빤장에 학교를 열었을 때 그는 자바에서 돌아온 다른 친구들과..
함카의 청년기 타지생활 말릭은 자주 혼자 먼 길을 떠나 미낭까바우의 여러 곳을 여행하곤 했다. 그가 워낙 자주 부모를 떠나 멀리 돌아다니자 아버지는 그에게 “먼 데 총각(Si Bujang Jauh)”이란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말릭은 15세가 되자 자바섬에 가고 싶었다. 그는 아버지에게도 알리지 않고 집을 나섰다. 마닌자우의 할머니에게만 하직인사를 올렸을 뿐이다. 그는 마닌자우에서 할머니가 쥐어 준 여비를 들고 긴 여정에 올랐다. 육로를 통해 벙꿀루를 거쳐 그곳에 사는 어머니 가문 친척들에게 여비를 보태 달라고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도중에 말릭은 병에 걸리고 말았다. 벙꿀루에 도착하면서 말라리아에 걸리고 만 것이다. 그 와중에 천연두까지 걸리고 말았는데 말릭은 그런 상태에서 기어이 나빨 뿌티(Napal ..
함카의 어린 시절 유년기 함카의 어릴 적 이름은 압둘 말릭(Abdul Malik)이었다. 그는 1908년 2월 17일, 이슬람력으로는 1326년 무하람(Muharram)월 13일, 지금은 서부 수마트라 아감(Agam)군, 숭아이 바땅 지역(Nagari Sungai Batang)에 해당하는 따나 시라(Tanah Sirah)에서 태어났다. 그는 네 명의 형제들 중 장남이었고 아버지는 하지 라술(Haji Rasul)이라 불리던 압둘 까림 암룰라(Abdul Karim Amrullah), 어머니의 이름은 사피야(Safiyah)였다. 함카의 동생들 이름은 압둘 꾸두스(Abdul Kuddus), 아스마(Asma), 압둘 무티(Abdul Mu'thi)이었다. 하지 라술이 첫 부인인 라이하나(Raihana)가 메카에서 ..
지난 해인 2020년 9월 번역 탈고한 의 출간일정이 더 늦어져 오늘 5월에나 세상에 나올 것 같은데 번역후기와 작가소개를 부탁받아 자료를 정리하던 중 원작자인 함카(Hamka)에 대한 자료들을 번역하면서 앞으로 몇 차례에 나누어 이 인물을 소개하려 합니다. 언론인지자 작가이자 성직자, 정치인이었던 그는 수카르노에게 탄압을 받았지만 그의 장례식을 집전한 대인배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책을 번역할 때 이슬람 성직자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깨졌습니다. 그의 소설 속 묘사와 그 안에 흐르는 정서가 너무 수려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위키페디아에 나온 그의 일생을 요약한 소개를 우선 번역해 싣습니다. 함카 (Hamka) 작가 함카(Hamka)로 잘 알려진 압둘 말릭 까림 암룰라(Prof. DR. H. Abdul M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