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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부야 함카(Buya Hamka) (1)

beautician 2021. 4. 10. 12:45

 

 

지난 해인 2020년  9월 번역 탈고한 <판데르베익호의 침몰>의 출간일정이 더 늦어져 오늘 5월에나 세상에 나올 것 같은데 번역후기와 작가소개를 부탁받아 자료를 정리하던 중 원작자인 함카(Hamka)에 대한 자료들을 번역하면서 앞으로 몇 차례에 나누어 이 인물을 소개하려 합니다.

 

언론인지자 작가이자 성직자, 정치인이었던 그는 수카르노에게 탄압을 받았지만 그의 장례식을 집전한 대인배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책을 번역할 때 이슬람 성직자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깨졌습니다. 그의 소설 속 묘사와 그 안에 흐르는 정서가 너무 수려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위키페디아에 나온 그의 일생을 요약한 소개를 우선 번역해 싣습니다.

 

 

함카 (Hamka)

 

 

압둘 말릭 까림 암룰라 (Abdul Malik Karim Amrullah)  

 

작가 함카(Hamka)로 잘 알려진 압둘 말릭 까림 암룰라(Prof. DR. H. Abdul Malik Karim Amrullah)는 다뚝 인도모(Datuk Indomo)라는 호칭도 지녔다. 다뚝이란 보통 한 가문의 수장에게 붙는 경칭이다.

 

이슬람 학자인 울라마였고 문인이기도 했던 그는 1908217일 서부 수마트라 아감(Agam)의 딴중 라야(Tanjung Raya) 지역 숭아이바땅(Sungai Batang)에서 태어나 1981724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기자이며 작가이자 교사이기도 했고 정치에 입문해 마슈미(Masyumi) 당이 해체될 때까지 당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인도네시아 울라마 대의원회(Majelis Ulama Indonesia - MUI)의 첫 수장이었으며 죽을 때까지 전국 단위 이슬람 조직인 무함마디아(Muhammadiyah)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알-아자르 대학교(Universitas al-Azhar)와 말레이시아 국립대학교(Universitas Nasional Malaysia)에서 명예박사를 받았고 자카르타의 무스토포 대학교(Universitas Moestopo)에서는 그를 큰 선생으로 모셨다. 무함마디아는 그를 기념해 함카 대학교(Universitas Hamka)를 세웠으며 그는 사후에도 인도네시아 국가영웅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가장 오래된 이슬람 조직인 타왈립(Thawalib)에서 교육을 받은 후 1924년 자바로 길을 떠나 그곳에서 그렇게 1년을 지낸 후 다시 빠당빤장으로 돌아와 이후 줄곧 그곳에 무함마디아의 뿌리를 굳건히 내리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그에게 내세울 학위가 없다는 것과 아랍어를 잘 구사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당해 무함마디야가 운영하는 학교 선생으로 취직하는 것을 거절당한 그는 메카에 가고자 하는 열망을 더욱 불태웠다. 결국 메카로 유학을 떠난 함카는 그곳에서 아랍어를 배우면서 이슬람의 역사를 깊이 공부했고 동시에 독학으로 문학에 대한 소양을 키웠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기자생활을 시작했고 동시에 델리의 종교학교 선생으로 일했다. 그리운 아버지를 만난 함카는 아버지의 꿈을 이어받는 동시에 스스로 울라마이자 문인이 될 결심을 굳혔다.

 

그는 결혼을 하고서 1936년 메단에 돌아와 뻐도멘 마샤라깟(Pedoman Masyarakat사회의 나침반)이란 잡지를 출간하며 언론인의 위상을 분명히 했고 <카바의 보호 아래(Di Bawah Lindungan Ka'bah)><판데르베익호의 침몰(Tenggelamnya Kapal Van Der Wijck)> 등의 작품을 통해 함카는 작가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함카는 국가와 도시 수호전선(Barisan Pengawal Nagari dan Kota-BPNK)과 함께 게릴라전에 투신하여 인도네시아로 복귀하려는 네덜란드에 맞서 싸우며 서부 자카르타의 산악과 정글 속에서 지냈다. 전쟁이 끝나고 인도네시아가 주권을 회복한 후인 1950년 함카는 몇 안되는 가족들과 함께 자카르타로 가서 종교부에 일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뛰어든다.

 

1955년 총선을 통해 함카는 마슈미를 대변하는 헌정위원으로 선출되어 국가를 재건하고 기초를 쌓는 작업에 참여했다. 수카르노가 내세운 공산주의와 교도민주주 이념에 대해 마슈미 당의 정치적 성향이 함카와 수카르노 대통령 간의 관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썩 매끄럽지 못한 관계였다.

 

195975일 결국 대통령령에 의해 마슈미당이 해체된 후 함카는 빤지 마샤라깟(Panji Masyarakat-민중의 깃발)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지만 그 수명은 길지 않았다. 부통령 자리에서 사임한 하타가 쓴 우리들의 민주주의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가 수카르노에 의해 폐간된 것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정권의 핍박을 받았다.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함카와 그의 작품은 레크라(Lekra: Lembaga Kebudayaan Rakyat 민중문화위원회)의 전방위적 공격을 받았다. 그는 급기야 국가전복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1964년에 수카부미의 자택에 연금되었다. 그는 연금기간 동안 병석에 누워서도 <-아자르의 해석(Tafsir Al-Azhar)>의 집필을 완료했다. 그후 수카르노가 실각하자 함카도 1966년 연금에서 풀려났다.

 

수하르토의 신질서 시대에 그는 아궁 알-아자르 사원과 RRI(인도네시아 국영라디오), TVRI(인도네시아 국영 TV)에서 설교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1995년 정부가 인도네시아 물라마 대의원회를 구성하려 모색할 때 회의(musyawarah)에 참석한 이들이 그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함카는 1981519일 그 직을 내려놓았는데 그 이유는 무슬림을 위한 합동 성탄절 행사에서 MUI가 내놓은 하람 파트와(Fatwa)를 철회하도록 종교장관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981724일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자카르타 따나꾸시르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