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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부야 함카 (Buya Hamka) (5)

beautician 2021. 4. 20. 13:09

초창기 경력

< 집을 떠나 델리로 (Merantau Ke Deli)>

 

 

글쓰기와 창작

 

말릭은 7개월 간의 메카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빠당빤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간 정박지인 메단에서 배를 내렸다. 그곳에서 말릭은 저널리즘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그는 화교신문인 뻘리타 안달라스(Pelita Andalas)에 하지 순례를 다녀온 경험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처음으로 수마트라 타왈립과 그의 아버지가 선봉에 선 미낭까바우 이슬람 개혁운동에 대해서도 글을 썼다. 원고들을 쓰면서 함카는 그의 속에 있던 저널리스트 소양에 눈을 떴다.

 

<서루안 이슬람(Seruan Islam)>이란 잡지의 무하마드 이스마일 루비스(Muhammad Ismail Lubis) 사장도 말릭에게 원고를 청탁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신문과 로컬 잡지에 글을 쓰는 것 외에도 말릭은 압둘 아지즈(Abdul Azis)가 발행하는 <수아라 무함마디야(Suara Muhammadiyah)>와 파크루딘(Fakhroedin)<빈땅 이슬람(Bintang Islam)>에도 글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글에 대한 원고료는 아직 낮은 수준이어서 부족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가르치는 생활도 병행해야 했다. 그는 꺼분 바자링기(Kebun Bajalinggi) 소상인들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에도 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짐꾼들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있었고 이는 그가 훗날 <집을 떠나 델리로(Merantau Ke Deli)>를 쓸 모티브가 된다.

 

그가 메단에서 지내는 동안 아버지와 친척들은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몇 번이나 보냈다. 거기에 매형인 수딴 만수르까지 합세해 귀향을 종용하자 그는 이내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1927년 말 록스마웨(Lhokseumawe)에 갔다고 돌아오던 수딴 만수르가 메단을 들른 것이다.

 

말릭은 아버지가 있는 숭아이 바땅의 집으로 갔다. 원래 빠당빤장에 있던 그의 집이 일년 전 지진으로 무너져버렸던 것이다. 고향에 도착한 말릭은 아버지를 만나 감격에 겨웠다. 아버지는 말릭이 스스로 돈을 구해 하지순례를 하고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높고 신성한 뜻을 품었다는 것을 왜 말하지 않았느냐? 아버지가 그때 어려워서 돈이 없었던 게로구나.”아버지의 환대를 받으며 말릭은 아버지가 지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았다.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생각한 말릭은 이번에 아버지의 말에 순종에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192945일 시티 라함(Sitti Raham)을 아내로 맞았다. 말릭은 숭아이 바땅에 살면서 <사바리야(Si Sabariyah)>라는 제목의 첫 소설을 미낭까바우 방언으로 써서 출간했는데 이 소설은 그가 메단에 있던 시절 쓰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는 19288월 부낏띵기에서 이슬람성도대회가 있어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때 처음으로 아버지와 자밀 잠벡(Jamil Jambek), 압둘라 아흐맛(Abdullah Ahmad) 등에게 <시바리야> 소설을 보여주며 낭독회를 가졌다. 압둘라 아흐맛은 앞으로 말릭이 계속 소설을 쓰면서 그 안에 이슬람의 가치를 포함시켜 달라고 주문했다.

 

<시바리야>는 시중에 출간된 후 3쇄를 찍었다. 이에 고무된 말릭은 글을 통해 이슬람 전파의 의무를 다하자는 열정에 휩싸였다표현기법과 글쓰기에 스스로의 자질을 발견한 그는 자신감이 점점 커졌다.

 

<사바리야>의 인세로 말릭은 결혼비용을 충당했다. 결혼 후 말릭은 두 개의 정원이라는 아랍 소설을 읽은 후 상상력 만으로 <라일라 마지눈(Laila Majnun)의 서사를 집필했다. 1932년 당시 최고 출판사였던 발라이 뿌스타카(Balai Pustaka)는 철자와 등장인물 이름을 변경하는 조건으로 <라일라 마지눈>을 출판했다. 발라이 뿌스타카가 자신의 작품을 받아주었다는 사실에 고무된 그는 더욱 집필작업에 매진했다.

 

< 사바리야 (Si Sabariyah)>

 

 

무함마디야

 

결혼 3개월만에 말릭은 아내와 함께 빠당빤장으로 이사했다.

 그는 무함마디야에서는 빠당빤장 지부장 겸 마드라시 짜나위야(madrasah tsanawiyah) 수준의 무함마디야 부설 탈브릭(Tabligh) 학교의 교장을 겸했다. (마드라시 짜나위야는 종교부 주관의 중학교 과정에 해당하며 일반 학교에 비해 종교수업의 비중이 높다 -역주) 구국말린당(Guguk Malintang) 소재 무함마디아 건물에서 화요일 밤마다 수업이 있었는데 많은 학생들이 참석했다. 타블릭 학교의 수업은 무함마디야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커리큘럼으로 리더쉽, 전도전략, 무함마디야 가치관의 전파 등을 배웠다.

 

말릭은 그곳에서 수딴 만수르, 수딴 망꾸토와 함께 가르쳤다. 교수방법은 예전과 다른 새로운 방법이었다.

 

당시 그의 학생 중 하나였던 말릭 아흐맛(Malik Ahmad)는 훗날 무함마디야의 수장으로 성장한다.

 

18회 무함마디야 대회가 1929년 초 솔로에서 열렸을 때 말릭도 대회에 참석했고 그 이후 열린 무함마디야 대회를 단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다. 솔로를 방문했을 때 그는 무함마디야 지도자 파크루딘을 만났다. 함카는 훗날 파크루딘이 종교에 대한 그의 생각에 큰 영향을 준 사람 중 하나라고 회고했다. “그의 용기와 결단력은 나 역시 용감하고 단호하게 행동하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반둥을 방문했을 때에는 A 하산(A. Hassan)과 모하마드 낫시르(Mohammad Natsir)를 만났다. 1929년 그는 <시대의 갈망(Kemauan Zaman)>이란 잡지를 창간했지만 5호까지 발행하고 폐간했다.

 

무함마디야 대회가 부낏띵기에서 열리던 1930, 말릭은 미낭까바우 전통과 관례 속의 이슬람 종교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전국대회 성격의 회합이었지만 관습과 종교를 연관지어 연설한 사람은 함카가 유일했다.

 

이듬해 족자에서 열린 제20회 무함마디야 대회에서 말릭은 수마트라에서 무함마디야의 발전상에 대해 연설했다. 그는 참석한 이들 중 상당수의 주목을 끄는 능력을 보였고 그의 연설을 들은 이들 중 많은 수가 감격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1931년 벙깔리스(Bengkalis)에 무함마디야 지부를 설립한 그는 무함마디야 중앙의 지도자들에게 신임을 받아 마카사르에서 제21회 무함마디야 대회를 준비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남부 술라웨시 마카사르에 위치한 무함마디야 설교센터 건물. 미낭까바우의 건축양식을 따랐다  

 

마카사르에 있으면서 그는 <이슬람 떤떠라(Islam Tentera)> 잡지를 네 번 출간했고 <-마디(Al-Mahdi )>잡지는 아홉 번 출간했다.

 

현지 무함마디야 지도자는 그가 마카사르에서 지내는 기간을 잘 활용했다. 말릭은 빠당빤장에 있는 것과 같은 타블릭 학교를 거기에서도 세운 것이다. 타블릭 학교는 전통적인 교육시스템을 바꾸어 서구 교육시스템의 모델을 본따면서도 종교적 가치를 그대로 유지한 현대적이고도 체계적인 새로운 교육 패턴을 제시했다. 함카는 1934년 그곳을 떠났지만 마카사르 타블릭 학교는 계속 존속했고 이후 무함마디야의 지원 아래 무알리민 무함마디야(Muallimin Muhammadiyah) 학교로 바뀌었다.

 

그는 마카사르 지역사회와 교류하면서 훗날 쓰게 될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집필을 위한 영감을 얻게 된다.

 

빠당빤장에 돌아온 그는 자신이 부재중 퇴락을 겪은 타블릭 학교를 대신한 쿨리야툴 무발리긴(Kulliyatul Mubalighin) 학교를 위탁받았다. 3년제 학교인 쿨리야툴 무발리긴은 이슬람으 가르침을 전달하는 무발릭(mubalig)과 교사들을 양성하는 곳으로 짜나위야(tsanawiyyah)와 같은 레벨의 중학교 과정이었다. 쿨리야툴 무발리긴에서 말릭은 학생들에게 웅변과 작문을 가르쳤다.

 

1934년 그는 서부 수마트라와 잠비,, 리아우를 아우르는 중부 수마트라 무함마디야 대의원회 회원으로 승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