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도네시아 현대사

[자경 스크랩] 김문환 선배의 ‘9.30사태’의 전말(顚末)

beautician 2022. 8. 30. 11:16
 

 

‘9.30사태’의 전말(顚末)

(2014년 김문환 선배가 자카르타 경제신문에 기고한 내용)

제1부 발아(發芽)
                                                                             
인도네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이며, 논쟁거리인 9.30사건이 끼어있는 9월만 돌아오면,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잠긴다. 최소 4십만 명에서 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그들의 후손들까지도 공산당으로 낙인이 찍혀 사회적인 금치산자 취급을 받으며 지난 50여 년의 세월을 인고하여 왔기 때문이다.
 
수하르또 정권 때까지만 해도 이날은 일상생활이 자제되고 언론매체는 이날을 애도하는 스산한 프로그램과 기사로 매워야 했다. 정부에서 제작한 ‘9.30사태’에 관한 홍보영화가 수십 년 동안 녹음기처럼 재탕되어 일반국민들에게 세뇌교육 시키듯, 획일적인 행사가 매년 반복되었다. 그렇다면 정확히 48년 전 9월, 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1913년 네덜란드의 저명한 사회주의 정치가인 헹크 스네이플리트(Henk Sneevliet)가 피식민지국인 인도네시아에 입국하여 다음해 동부자바 수라바야에서 인도네시아 사회민주협회(Indische Sociaal Democratische Vereeniging/ISDV)를 창설하였으니, 이 작은 좌익단체는 소련 이외의 지역에서 결성된 최초의 공산주의 집단이었다.
 
이 단체가 결성될 당시 회원 수는 100명이었으며, 이중 토착민은 3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네덜란드인이었다. 1917년 발발한 러시아의 10월 혁명(볼셰비키)에 영향을 받은 단체내의 과격파들이 네덜란드 해군수병 및 육군병사들을 선동하여 1919년 말 수라바야에서 ‘반제국주의’ 피켓을 들고 소요사태를 일으켰다.
 
이 폭동을 진압한 네덜란드 총독부는 1918년 스네이플리트를 포함한 네델란드인 간부들을 본국으로 추방하였고, 일부 요원들은 ‘이슬람연합(Serikat Islam)’이라는 단체로 침투하여, 스마랑 출신의 철도종사원인 스마운(Semaun)과 상류층 출신의 다르소노(Darsono)를 포섭하였다. 1920년 5월 23일 스마랑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이 단체는 동인도공산주의자연합(Perserikatan Komunis di Hindia/PKH)으로 개칭됨과 동시에 스마운을 총재, 다르소노를 부총재로 선출하였으며, 1924년 열린 제5차 국제공산당대회(Comintern) 직후, 인도네시아공산당(Partai Komunis Indonesia/PKI)으로 다시 개명되었다.
 
한편 1913년부터 1919년까지 네덜란드에 유학하여 사범학교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후, 북부 수마뜨라 메단(Medan) 지역 담배농장에서 스위스, 독일인 자제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재직하던 딴 말라까(Tan Malaka)가 1921년 ISDV에 가입하며 활발한 기고 활동을 벌이게 된다.
 
서부 수마뜨라 부낏띵기(Bukittinggi) 출신인 그는 이미 네덜란드 유학기에 스네이플리트를 만난 인연이 있었다. 1920년대에 딴 말라까와 더불어 ISDV에서 핵심요원으로 활동하던 동부 자바 끄디리(Kediri) 출신의 무쏘(Musso)는 소련의 지령을 받기 위해 동료인 알리민(Alimin)과 함께 1926년 모스크바에 들어가 스탈린을 만나게 된다. 그 해 말 바따비아로 돌아와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무쏘와 알리민은 네덜란드 당국에 체포되어 복역한 후 1936년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이후 잠잠하였던 좌익활동은 일본이 제2차 대전에서 패한 직후의 통치공백기를 틈타 다시 불씨를 지피기 시작한다. 좌, 우 대립의 혼돈상황 속에서 재통치에 대한 야욕을 보이며 진주한 네덜란드군에 대항하는 ‘독립전쟁’에서는 양측은 한시적으로 한 배를 타며 협조체재를 구축하게 된다.
 
이때 두각을 보인 좌익단체로는 사회주의청년단(Pemuda Sosialis Indonesia/PESINDO), 인도네시아 사회당(Partai Sosialis Indonesia/PSI)과 족자카르타에서 창설된 ‘빠뚝 토론그룹(Kelompok Diskusi Patuk)’이 있었는데 이 토론그룹에는 아이딧(Aidit), 샴(Sjam) 등 민간인 외에 수하르또(Soeharto), 수빠르조(Soepardjo), 압둘 라띱(Abdul Latief), 운뚱 삼수리(Untung Samsuri) 등 현역 군인들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20년 후인 1965년 발발한 ‘9.30사태’ 당시 혁명동지로, 또는 적군으로 서로 얽히게 되어, 극단적인 운명의 교차점에 도달하게 된다.   
www.pagi.co.id/bbs/board.php?bo_table=column&wr_id=3578&sca=김문환의+주간포커스&page=1
 
 
제2부  공산당(PKI)의 팽창
                                                                                        
1923년 수마뜨라 방까섬(Pulau Bangka)에서 출생한 아이딧은 ISDV에 가입한 후 마르크시즘에 심취되면서, 한편으로는 당대의 민족주의자들인 수까르노, 핫따, 아담 말릭 등으로부터 사사 받게 된다.
 
후일 초대 부통령에 취임하는 핫따의 수제자가 되었으나, 사상노선에 대한 견해차이를 보이면서 결국 결별을 맞게 된다. 그는 1948년 ‘마디운 공산당봉기’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그 다음해인 1949년 딴중 쁘리옥항을 통해 재입국을 시도하려다 체포되어 수감되어 버린다.
 
그러나 1945년 족자카르타에서 친분을 맺은 적이 있던 딴중 쁘리옥항 부두노조 간부 샴(Sjam)의 도움으로 아이딧은 곧 석방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이딧은 샴을 공산당에 가입시켰으며, 그를 협력자로 삼아 1955년 총선에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1950년에 3천명의 당원으로 재건을 시도한 공산당은 1951년 아이딧, 루끄만, 뇨또 등이 당권을 장악하면서 1954년에 16만 5천명으로 급성장하였고, 1955년 총선에서 16%의 득표율을 달성하여 제4당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아이딧은 수까르노의 교도민주주의(Demokrasi Terpimpin) 노선에 적극 순응하며, 서부 이리안(Irian Barat) 탈환을 당론으로 정하는 등, 수까르노의 정책에 적극 편승하였다.
 
1957년엔 전국노동조합을 이끌고 있던 샴을 자신의 보좌관으로 임명하여, 그 조직으로 하여금 네덜란드인 소유기업과 외국인기업들을 강제수용하는 전위대 역할을 자임하자, 수까르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아이딧을 공산당 당수직위에 오르도록 적극 후원하게 된다. 이후 아이딧 당수 체제하의 인도네시아공산당은 1965년도에 이르러 3백만 명이라는 당원을 확보하며 인도네시아 최대 정당으로 올라섰으며, 소련, 중국에 이은 세계 세 번째 규모의 공산당으로 성장하였다.
 
수까르노 정부를 떠받쳐오던 군부, 민족주의 진영, 이슬람계, 공산당간의 사각균형이 깨지며 공산당 우위로 변모되자, 수까르노는 1964년에 이르러 전통적인 ‘친소정책’에서 ‘친중정책’으로 급선회하며, ‘자카르타-프놈펜-베이징-평양’이라는 새로운 동맹축을 구축하게 된다.
 
이 동맹관계를 다지기 위해 수까르노 대통령과 수반드리오(Subandrio) 외무장관은 1965년 3월 2일 극비리에 프놈펜을 방문하게 되며, 이보다 앞선 1964년 11월과 12월에 첸의(陳毅) 중국 외무장관은 두 차례에 거쳐 자카르타를 드나들게 된다.
 
두 번째 방문 시점인 12월 3일엔 양국 외무장관 사이에 상호협력 의정서가 교환되었다. 이때 수까르노 대통령은 첸의 장관에게 “중국이 핵기술을 인도네시아에 이전하여 줄 것과 인도네시아 영토 내에서 핵실험을 해줄 것”을 요청하자, 이를 거절한 중국대표단을 향하여 책상을 치며 흥분하는 돌발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일단 양국간에 의정서가 교환되자마자 일련의 후속조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으니, 1965년 1월 7일 적대관계이던 말레이시아가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으로 선임된 것에 반발하여 인도네시아는 유엔을 탈퇴하는 ‘깜짝쇼’를 연출하였고, 1월 15일엔 공산당과 그 꼭두각시인 민족전선(Front Nasional)이 공동성명을 내고 말레이시아와의 대결정책을 승리로 이끌 혁명전사들을 양성한다는 명분으로, 정부로 하여금 천오백만 명의 농민, 노동자들을 무장시킬 것을 촉구하였다.
 
1월 15일 국영 안따라(Antara) 통신은 중국이 인도네시아에 1억불 차관을 제공하기로 하였다는 뉴스를 쏘아 올리는가 하면, 수반드리오 외무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대규모 정부사절단이 1월 말에 베이징을 방문하여 군사협력 방안까지도 논의하게 된다.
 
1965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양국간의 교류는 본격화되어 수반드리오 장관은 인도네시아 공산당 제3인자인 뇨또(Njoto)와 함께 1965년 6월 초 광동성에서 주은래를 다시 만났고, 한 달 후엔 아이딧, 알리(Ali Sastroamidjojo) 수상 등 정부요인들을 대동한 수까르노가 직접 상하이를 방문하여 주은래 수상과 정상회담을 갖게 된다.
 
이 자리에서 중국은 제5군 창설에 필요한 소총 10만 정을 무상 공급하기로 약속하였으며, 이에 대한 후속조치를 위해 수반드리오 장관, 무르짓(Murjid) 장군, 물요노(Mulyono) 제독으로 구성된 군사사절단을 베이징에 파견하였다.
 
9월부터는 국회사절단, 경제사절단, 공군사절단, 국방대학원, 문화사절단, 기자협회 등 온갖 사절단이 베이징을 안방 드나들 듯 왕래하게 된다. 그러나 주은래가 수까르노에게 약속한대로 10만 정의 무기를 공급하는 시점이 임박하자, 중국 수뇌부는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핵기술 이전에 대해 거부의사를 밝혔다고 첸의 외무장관 면전에서 범한 외교결례를 보고받은 바 있는 모택동과 주은래는 천방지축의 수까르노가 중국을 악용할 가능성에 대해 경계하고 있었다.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 수뇌부는 돌출적인 성격의 수까르노의 역할에 우려를 나타내며, 인도네시아에서의 혁명과업은 수까르노를 배제하고 아이딧 당수의 주도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www.pagi.co.id/bbs/board.php?bo_table=column&wr_id=3579&sca=김문환의+주간포커스
 
 
 
제3부 교시(敎示)
 
결국 약속했던 10만 정의 무기공급은 보류되고, 모 주석은 8월 5일 베이징을 다시 찾은 아이딧에게 단지 우익장성들을 제거하는데 필요한 3만 정의 무기만을 제공하겠다는 수정안을 내놓게 된다. 이에 따라 수까르노는 선적방법에 대한 실무절차를 협의하고자, 심복인 오마르 다니(Omar Dani) 공군참모총장을 극비리에 베이징으로 파견하였으며, 육군장성들 제거에 사용할 일부 무기들은 허큘리스 수송기에 직접 싣고 돌아오게 된다. 할림 공항은 공군의 관할지역인지라, 육군이나 세관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사각지대였다. 오마르 다니 장군은 육군과는 달리, 수까르노의 정책에 순종하면서 아이딧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었다. 결국 오마르 다니 장군의 영역인 할림 지역은 보름 후 쿠데타 진영의 지휘본부로 사용되게 된다.
 
수까르노 대통령은 알제리 비동맹국회의 참석 차, 아이딧을 포함하여 8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1965년 6월 26일, 알제리의 문턱인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한다. 일주일 전인 6월 20일 알제리에 쿠데타가 일어나 아흐맛 벤 벨라(Achmad Ben Bella) 대통령이 하야하는 등 사태가 유동적이었기 때문에 주변국에서 관망하고 있었다. 결국 비동맹국회의는 11월로 연기되었고,  수까르노의 병세도 재발되어 황급히 귀국하게 된다. 7월 말에 들어 병세가 다시 악화되기 시작하자, 수까르노는 모스크바와 동구권 국가들에 대한 순방을 마치고 베이징에 머물고 있는 아이딧의 귀국을 재촉한다. 아이딧은 8월 3일, 3일 후에 귀국이 가능하다는 회신을 보내왔으나, 바로 그 다음날, 수까르노는 지병인 신장병이 재발하여 네 차례나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들었다. 주치의인 UI대학의 마르조노 박사가 침실에 들었을 때엔 중국에서 온 여덟 명의 의료진이 치료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7월 22일부터 대통령의 곁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대통령이 위급상태임에도 아이딧이 귀국을 미루는 것은, 모 주석과의 면담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월 5일 모 주석은 자금성 부근, 중국공산당 본부가 위치한 종난하이(中南海)에서 아이딧을 맞았다. 이 자리에서 아이딧은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현황을 설명하며 중국의 군사적 도움을 받아 제5군 설립에 관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제5군이라 함은 농민, 노동자로 구성될 민병대를 지칭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육군이 제5군 창설에 극력 반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제동을 걸어 혁명과업 완수에 큰 지장을 받는다는 고충을 털어 놓자, 이를 경청하던 모 주석은 아이딧에게 ‘극단의 조치’를 강조하는 교시를 내리게 된다.
 
모 주석과 밀담을 마치고 8월 7일 귀국한 아이딧은 중국에서부터 대동한 2명의 중국인 의사와 함께 곧장 대통령궁으로 들어가 귀국보고를 올렸다. 실제로 이 중국인들은 의사로 가장한 중국정부의 밀사였으며, 수까르노의 건강상태를 직접 확인하기 위한 밀명을 받고 있었다.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아이딧은 다음 날 보고르 대통령궁 침실에서 재차 수까르노와 독대하여 모 주석의 제안을 타진하였다. 이날 아이딧이 독대를 마치고 나간 직후, 대통령은 경호실 제1대대장인 운뚱(Untung) 중령과 경호실장인 사부르(Sabur) 준장을 침실로 불렀다. “운뚱, 자네는 지금 대통령에게 충성하지 않고 대통령의 정책에 사사건건 시비만 거는 육군장성들 누구라도 체포할 용의가 있는가?” 라고 묻자, 운뚱 중령은 항상 그래왔던 대로 서슴지 않고 하복하였다. “예,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실행에 옮기겠습니다.” 아이딧이 종난하이에서 모 주석과 밀회를 가진지 10일이 지난 8월 15일,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 행사에 참석 차 내방한 첸의 장관은 수반드리오 외무장관과 아이딧 당수를 차례로 만나, 중국은 수까르노가 은퇴한 후 칩거할 수 있는 휴양지로 ‘백조호(白鳥糊)’를 지정하였다는 내용을 은밀하게 흘렸다.    
 
9월 15일 아침 8시경, 수까르노는 사부르 경호실장을 입회시켜 수나르요(Sunarjo) 헌병 준장을 불러 비슷한 내용을 언급하게 된다. 9월 26일에는 헌병사령관 수디르고 준장이 재차 수까르노를 만나 항간에 떠돌고 있는 ‘장군위원회(Dewan Jenderal)’라는 비밀조직이 실제 존재한다고 보고하였다. 오마르 다니 공군참모총장과 수빠르조 장군도 수까르노를 찾아 장군위원회가 국군의 날인 10월 5일을 쿠데타 거사일로 잡았다는 내용까지 보고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공군은 대통령의 지시대로 육군 측의 어떠한 도발도 분쇄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충성을 재확인하였다.  9월 27일 대통령 부관인 수간디(Sugandhi) 준장은 아이딧과 정치국원인 수디스만으로부터 육군 수뇌부를 제거하는 작전에 동참할 것을 제의 받았다. 3일 뒤인 9월 30일 아침 수간디는 대통령에게 아이딧과 수디스만의 말대로 대통령이 이를 재가하였는지를 묻자, 대통령은 언성을 높이며 제발 ‘공산당 공포증’을 갖지 말도록 단호하게 꾸짖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가는 길이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고 판단한 수간디는 대통령궁을 나와 곧장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향하여 야니 총장에게 아이딧, 수디스만, 수까르노 간에 오간 내용을 보고하며, 쿠데타 D-day가 임박하였음을 귀뜸하였다.   -계속-
 
http://www.pagi.co.id/bbs/board.php?bo_table=column&wr_id=226&sca=%EA%B9%80%EB%AC%B8%ED%99%98%EC%9D%98+%EC%A3%BC%EA%B0%84%ED%8F%AC%EC%BB%A4%EC%8A%A4&page=2
 
제4부 D-day H-hour         
 
납치자 명단이 확정되고 병력동원계획까지 수립되자, 마지막으로 거사일을 확정하는 일만 남았다. 운뚱 중령이 강력히 요청하는 반둥 소재 실리왕이 사단으로부터의 탱크 동원계획이 차질을 빗자, 거사일을 하루 더 늦춰 10월 1일 04시로 최종 확정하며, 이날의 작전을 ‘9.30운동(Gerakan 30 September)’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막내아들 또미의 병간호 차 육군병원에 머물고 있는 전략사령관 수하르또 소장의 의중을 타진하기 위해 장군을 만나러 간 라띱 대령이 자정이 다 되어 돌아오자, 혁명수뇌부는 수하르또가 거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반대도 하지 않을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본격적인 행동단계로 돌입한다.
 
H-hour를 두 시간 남겨 둔 10월 1일 새벽 2시, 비단헝겊으로 만들어진 혁명군 인식표를 부착하며 할림지역을 출발한 1,500명의 병력 가운데 수라디 대위 지휘하의 제454대대 소속 3개 중대는 모나스 광장 서쪽의 국영 라디오방송국(RRI), 제530대대 소속 3개 중대는 남쪽에 위치한 전신전화국을 점령하였다. 한편 같은 시간대에 운뚱 중령의 직속 부하인 둘 아립(Dul Arief) 중위가 지휘하는 7개조의 납치특공대는 막사를 떠나 각각 지정 받은 납치 대상자들의 자택에 도착하여 4시 이전에 포위작전을 모두 완료한다. 첫 희생자는 기획관리담당 육군참모차장 하르요노(M.T. Haryono) 소장이었다.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괴한들에게 거칠게 반항하던 장군은 현장에서 사살되어 트럭에 실려졌다. 같은 시각에 국방부장관 나수띠온(A.H.Nasution) 대장에 대한 납치작전이 시작되었다. 나수띠온 장군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담을 넘어 옆집인 이라크 대사관 정원을 통해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였으나, 그와 모습이 비슷한 전속부관 뗀데안(Pierre Tendean) 중위가 오인되어 납치되었다. 4시 30분엔 육군참모총장 야니(Achmad Yani) 중장도 무례한 행동을 보인 이들을 엄하게 꾸짖다 피살되어 끌려 가자, 가정부는 야니의 부관인 수바르디(Subardi) 소령 집으로 허겁지겁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수바르디는 인근에 있는 정보참모부장 빠르만(Siswondo Parman) 소장 관사로 달려갔으나, 그도 이미 납치된 사실을 알게 되자, 이번에는 수도경비사령관인 우마르(Umar Wirahadikusuma) 소장 관사를 찾아갔다. 우마르 장군은 자카르타 주요도로를 봉쇄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판단을 내리고 실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특전사(RPKAD)의 도움을 이끌어 내기 위해 수바르디 소령을 사령관인 사르워 에디 위보워(Sarwo Edhie Wibowo) 대령의 관사로 급파하였다. 이때가 새벽 5시 반이었다. 야니 참모총장이 납치된 직후인 4시 50분경에 군수참모부장인 빤자이딴(Pandjaitan) 준장도 반항하다 현장에서 피살되었고, 5시경엔 행정담당 육참차장인 수쁘랍또(Soeprapto) 소장, 법무감인 수또요(Sutojo) 준장이 납치되었다. 8명의 납치 대상자 중 나수띠온 장군의 측근이자 미국통인 수껜드로(Soekendro) 준장은 마침 베이징에 출장 중이라, 마지막 순간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5시 50분 특공대장인 둘 아립 중위가 청년민병대장인 수요노(Sujono) 공군 소령을 경유하여 ‘3명 사망, 3명 생포, 1명 도주’라는 전과와 함께 납치작전을 종료하였음을 아이딧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나수띠온 장군에 대한 납치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보고를 접한 아이딧과 혁명군 지휘부는 패닉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최고위직 우익장성인 나수띠온이 생존하여 반격을 가할 가능성을 염려하면서, 일단 다음 단계의 작전계획을 실천에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대통령은 전날 밤 12시가 다 되어 대통령궁을 떠나 ‘호텔 인도네시아’에서 행사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 데위 부인을 태우고 숙소인 위스마 야소(Wisma Yaso)로 귀가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대통령은 아침 7시에 수빠르조 준장과 대통령궁에서 만나도록 되어 있는 각본대로 대통령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앞에서 에스코트하던 보좌관 망일(Mangil) 경찰 대령이 나수띠온 장군 자택 부근을 지날 때,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동료 경찰로부터 나수띠온 장군이 탈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대통령은 크게 당황하며 차의 방향을 돌려 시내를 잠시 배회하게 된다. 망일 대령은 그로골(Grogol) 지역 하르야띠 부인의 숙소에 대기하고 있던 경호실 차장 사엘란 대령과 상의한 후, 대통령을 그로골로 모시기로 합의를 본다. 대통령이 그로골 자택에 도착하자마자, 제2부수상 레이메나 박사로부터 나수띠온 장군이 지금 부상을 입은 채 자신의 집 별채에 은신해 있다는 긴급보고가 들어왔다. 수까르노는 경호실 소속 알리 에브람 중령에게 나수띠온 장군을 색출하여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라띱 대령도 같은 목적으로 나수띠온 장군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이렇게 아침 내내 행방이 묘연했던 대통령이 오전 9시 경 할림 혁명군 본부지역에 불쑥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아이딧과 혁명군 수뇌부는 일단 안도하면서, 대통령이 자신들을 불러 이전에 약속한대로 조각을 단행하고, 중국의 휴양지로 은퇴하겠다는 성명서를 읽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계속-
 
http://www.pagi.co.id/bbs/board.php?bo_table=column&wr_id=227&sca=%EA%B9%80%EB%AC%B8%ED%99%98%EC%9D%98+%EC%A3%BC%EA%B0%84%ED%8F%AC%EC%BB%A4%EC%8A%A4
 
 
제5부  일일천하(一日天下)
 
10월 1일 아침 7시 20분, 국영라디오방송(RRI)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긴급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다.
“1965년 9월 30일부로 수도 자카르타에서 진보적인 육군그룹이 중심이 된 혁명군에 의해 반역적인 ‘장군 위원회(Dewan Jendral)’를 겨냥한 군사작전이 전개되었으며 이 작전의 지휘자는 대통령 경호대대장인 운뚱 중령이다.”  <중략>
 
심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국민들은 일손을 놓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여,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4시간 후인 오전 11시 정각, 운뚱 중령을 위원장, 수빠르조 준장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혁명위원회 최고회의’가 구성되었음을 알리는 ‘포고문 제1호’가 발표되었다. 거사가 시작되면 대통령을 할림 지역 안가로 모시는 임무를 맡고 있던 수빠르조 준장은 아침 내내 행방이 묘연하던 대통령이 공군 작전상황실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그곳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대통령을 모셔오기는커녕, 오히려 대통령에게 훈계만 듣고 지휘 본부로 돌아와, “대통령 본인은 여전히 국가 통수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거사를 당장 중지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고 전한다. 운뚱 중령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수빠르조와 대통령을 싸잡아 비난하며 격하게 반발하였으나, 할림 지역 군사통솔권을 쥐고 있는 오마르 다니 장군의 제동으로 어쩔 수가 없었다.
 
오전 7시 20분과 11시 두 차례에 걸쳐 방송된 혁명위원회 포고령에 자신의 이름이 완전히 배제된 사실을 알게 된 대통령은 11시 30분 자신의 안가로 지정되어 있는 할림 지역 수산또(Susanto) 장군의 사택에서 측근들과 함께 오찬을 하고 있었다. 이때 혁명위원회 ‘포고문 제2호’가 전파를 타고 있었다. ‘내각 해산’이 선포되고, 45명의 혁명위원회 위원명단이 발표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도 수까르노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아울러 현역 군인의 계급 중 ‘대령급’ 이상은 모두 ‘중령’으로 강등되고, ‘중령’ 이하의 계급은 모두 일계급씩 특진한다는 기상천외한 발표문을 내보내고 있었다. 혁명위원회 쪽에서는 이렇게 포고령을 줄지어 내보내고, 대통령은 아이딧과 줄다리기를 하면서 시간을 허송하는 사이, 강 건너 수하르또 장군 진영은 진압작전을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벌고 있었다.  
 
한편 지난 밤 육군병원에서 혁명군 측 라띱 대령의 방문을 받고 자택으로 급히 돌아왔던 수하르또 소장은 전투복 차림으로 새벽 6시경 스스로 운전대를 잡고 전략사령부로 출근한다. 급히 달려온 우마르 장군과 전략사령부 참모들 앞에서 수하르또는 혁명군이 표방한 ‘9.30운동’을 운뚱 중령이 주동한 ‘군사쿠데타’로 규정하고, 인질이 된 대통령을 조속히 구출하여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납치작전에서 총상을 입고 모처에 피신 중인 나수띠온 국방부장관은 8시 30분 수하르또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군 지휘서열에 따라 수하르또 소장을 공석중인 ‘육군참모총장 대행’에 임명하기로 합의하였다. 수하르또는 마침 전략사령부로 달려온 야니 총장의 보좌관 헤르만 수디로(Herman Sudiro) 대령을 전략사령부가 보유하고 있는 두 대의 장갑차 중 한 대에 탑승시켜, 사르워 에디 위보워(Sarwo Edhi Wibowo) 특전사령관에게 급파한다. 사르워 에디 대령은 고향 선배로서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멘토였던 야니 총장과 육군 수뇌부가 납치되었다는 자초지종을 듣고 충격에 휩싸인 채, 반사적으로 수하르또 진영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결심한다. 헤르만 대령이 자리를 뜨자마자, 이번에는 혁명군 측에서 보낸 사부르 대통령 경호실장이 한발 늦게 사르워 에디 대령의 집무실로 들어 선다. 특전사가 혁명군 편에 서 달라는 사부르 장군의 요청을 사르워 에디 대령은 단호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부터 사르워 에디 대령 휘하의 특전사는 혁명군이 장악하고 있던 주요 거점과 할림 지역의 혁명군 소탕작전에 선봉으로 나서자, 판세는 수하르또 군의 우위로 기울기 시작했다. 수하르또 진영은 우선 방송국과 전신전화국을 탈환하는 임무를 특전사에게 부여하였다. 오후 6시 특전사 제3대대 제1중대장인 화이잘 딴중(Faisal Tanjung) 중위와 소대장인 신똥 빤자이딴(Sintong Pandjaitan) 소위는 대통령궁 지척에 있는 국영라디오방송과 전신전화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큰 저항 없이 불과 30분만에 두 건물을 제압하자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혁명군 일부는 투항하였으나, 나머지는 트럭에 분승하여 할림 지역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혁명군이 진퇴양난에 처하자 아이딧은 자신의 아지트에서 비상회의를 열었다. 회의가 끝난 시각인 밤 9시부터 아이딧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공군 통신망을 이용해 베이징을 포함한 어딘가로 비밀스런 접선을 시도한다. 그러는 사이 ‘일일 천하’로 막을 내리는 10월 1일 운명의 밤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었다.     
 –계속-
http://www.pagi.co.id/bbs/board.php?bo_table=column&wr_id=228&sca=%EA%B9%80%EB%AC%B8%ED%99%98%EC%9D%98+%EC%A3%BC%EA%B0%84%ED%8F%AC%EC%BB%A4%EC%8A%A4
 
제6부 최후통첩
 
할림지역을 제외한 모든 요충지에서 군사력을 장악한 수하르또 진영은 혁명군에게 10월 1일 저녁 7시까지 투항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혁명군 진영에 머물고 있는 대통령의 신변을 염려하여 공격시간을 미루고 있었다. 시한을 두 시간 넘긴 저녁 8시 50분, 수하르또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9.30 운동’은 정부전복 쿠데타이며, 다수의 육군수뇌부 장성들이 납치되었기에, 본인이 육군의 지휘권을 잠정적으로 장악하고 있음을 발표하였다. 이 시각 오마르 다니 공군참모총장은 대통령과 그 일행을 피신시키기 위해 두 대의 수송기와 수하르또 진영을 공격할 무스탕 전투기의 발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수하르또는 전략사령부 지휘부를 스나얀(Senayan) 체육관 쪽으로 급히 이전하게 된다. 한편 혁명군 내부에서도 대통령의 피신처를 어디로 정할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오마르 다니 장군과 수빠르조 준장은 대통령이 중부자와 족자카르타, 또는 동부자와 마디운으로 피신하기를 강력히 건의하였으나, 저녁 8시경 레이메나 제2부수상과 수찝또 경찰청장이 대통령의 침실에 들어가 반대방향인 보고르로 피신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순간, 데위 부인이 들어와 대통령과 포옹을 한 뒤 대통령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단둘이 밀담을 나누는 것이었다. 데위 부인도 보고르궁으로 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귀뜸하고 있었다. 데위 부인의 의도를 눈치 챈 오마르 다니 장군은 아이딧과 교감한대로, 대통령을 마디운으로 유도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 목적지가 어디가 되었든, 할림지역을 떠나야 하는 시각이 임박해 오고 있었다. 오마르 다니 장군의 강요를 받은 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대통령이 집밖으로 나서는 순간, 레이메나 제2부수상이 미리 대기시켜 놓은 승용차에 대통령을 밀어 넣었다. 이 차는 대통령 부관인 밤방에 의해 보고르로 가도록 계획되어 있는 차량이었다. 수하르또 진영은 밤방에게 절대로 대통령을 오마르 다니 장군이 제공하는 항공기를 타지 말도록 사전에 회유해 놓은 상태였다. 만약 대통령이 오마르 다니 장군이 제공한 항공기를 타면 필히 족자카르타로 날아갈 것이며, 그곳에서 아이딧이 세울 공산당 망명정부의 인질이 될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족자카르타 행을 끈질기게 시도하다 주도권을 빼앗긴 오마르 다니 장군이 대통령 일행의 차량에 동승하고자 시도하였으나, 더 이상 빈 자리가 없다는 구실로 이마저 거절당하고 말았다. 두 대의 차량에 분승한 대통령 일행은 밤 10시 반에 할림을 출발하여 자정시간이 되어 보고르 대통령궁에 도착하였다.
 
아이딧은 나수띠온, 수하르또 연합인, 소위 ‘NATO군’이 장악하고 있는 수도 자카르타와 서부자와 지역을 피해 오마르 다니 장군이 제공한 다코타 소형 비행기에 탑승하여 10월 2일 새벽 1시 30분, 두 명의 비서를 대동하고 족자카르타로 날아간다. 아이딧이 족자카르타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마르 다니 장군도 허큘리스 수송기로 이륙하여 자와 상공을 선회하면서, 만약 수하르또군이 할림지역을 공격하면 내전이 발생할 것임을 경고하라는 지시를 지상에 있는 공군본부 상황실에 하달하면서, 무려 6시간을 선회한 후에야 마디운 공항에 착륙하였다. 대통령 일행이 보고르에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수하르또 장군은 10월 2일 새벽 3시 특전사령관인 사르워 에디 위보워 대령과 실리왕이 사단 참모장 다르소노 준장에게 할림 소탕작전을 위한 공격명령을 내렸다. 아침 7시에 혁명군 주력부대인 재 454대대가 항복하자, 수하르또는 이날 오후 2시 부로 쿠데타 진압작전이 종료되었음을 선언하였다. 야니 육군참모총장 등 6명의 장성들이 실종된 데 대해 누구보다도 큰 충격을 받은 사르워 에디 위보워 대령은 금번 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다음 날 아침 공군본부 작전국장 헤르람방 소장과 함께 헬리콥터에 동승하여 보고르로 날아가 대통령을 직접 면담한다. 우선 대통령에게 할림지역에 아직 남아있는 제454대대 잔류병들을 중부자와로 원대 복귀시키는 명령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납치된 장성들의 소재에 대해 캐묻자, 대통령은 “혁명완수 과정에서 희생은 당연히 따르게 된다.”며 퉁명스럽게 반응하였다. 사르워 에디 위보워 대령이 격분한 채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간 뒤, 대통령은 수하르또 장군에게 작금의 상황을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지시한다. 오후 4시경 육로로 보고르에 도착한 수하르또는 먼저 쿠데타 가담자에 대해 강력한 조치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특히 오마르 다니 공군참모총장에게는 직접적인 책임을 물을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분명한 답변을 회피하며,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네.”라는 거친 답변을 내뱉고 있었다. 향후 국가의 운명을 180도 바꾸게 되는, ‘수까르노-수하르또 양자대결’ 드라마의 서막은 이미 올려진 셈이다.         –계속-

http://www.pagi.co.id/bbs/board.php?bo_table=column&wr_id=229&sca=%EA%B9%80%EB%AC%B8%ED%99%98%EC%9D%98+%EC%A3%BC%EA%B0%84%ED%8F%AC%EC%BB%A4%EC%8A%A4 

 

제7부  패자들의 말로(末路)

 

사진설명: 군사법정에 들어서는 &lsquo;혁명위원회 최고회의 의장&rsquo; 운뚱 중령. 그는 1961년 서부 이리안 무력병합 당시 베니 무르다니 소령과 더불어 전쟁영웅이 되어 대통령 경호실장 직책에까지 올랐으나, 쿠데타에 연루되어 처형당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9.30 쿠데타’가 ‘일일천하’로 막을 내린 후, 최고위직 배후인물이었던 인도네시아공산당 당수, 아이딧은 11월 22일 새벽 1시 반, 중부 자와 보요랄리(Boyolali) 읍 삼붕 그데(Sambung Gede) 마을에서 전략사령부 소속 제328대대에 체포되어, 근처에 있는 한 우물가로 끌려가 30분간의 마지막 발언기회를 부여 받았다. 아이딧이 열정적인 사자후를 토해내며 끝까지 공산당을 찬양하자, 흥분한 군인들이 그대로 사살해버렸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를 감금한 처소를 아예 폭파시켜 통째로 날려보냈다는 설도 있다. 어찌됐던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은 틀림없으며, 현재까지도 그의 시신이 어디에 수습되어 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공산당 제2인자 루끄만, 제3인자 뇨또, 그리고 정치국원이었던 수디스만은 1965년 10월 초 체포되어 재판 없이 처형되었고, 선무공작 실행부서인 특별국(Biro Khusus)의 제1인자 샴, 제2인자 뽀노, 제3인자 왈류요는 1965년 12월 서부 자와에서 체포되어, 1968년 사형선고를 받은 뒤 처형된 것으로 발표되었으나, ‘2중 첩자’   의혹이 짙은 제1인자 샴은 ‘내부자 고발’을 해주는 대가로 석방된 후, 신분을 변경하였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대통령 경호대대장의 신분으로 혁명위원회 최고회의 의장직을 맡았던 운뚱 중령은 1966년 3월 서부 자와 찌마히(Cimahi)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운뚱 대대 휘하의 제3중대장으로 10월1일 새벽 7명의 장성 체포 특공대를 지휘한 둘 아립 중위는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중부 자와 스마랑을 향하여 도보로 탈출하다 체포되어, 자카르타 살렘바(Salemba) 형무소에 수감된다. 수도경비사령부 제1여단장 신분으로, 쿠데타군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던 압둘 라띱 대령은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82년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1998년 12월 하비비 정부에 의해 사면되었다. 수도경비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재직 중, 대 말레이시아 전선인 서부 깔리만딴 지구 전투사령부관을 지내다, 거사 이틀 전에 이탈하여 혁명군에 합류한 수빠르조 준장은 사형선고 후 처형되었다. 수까르노와 아이딧 신봉자로서 쿠데타군에게 기지를 제공하고 육군과 정면 대립하였던 오마르 다니 공군참모총장은 1966년 사형선고를 받고 30년간 복역한 후, 1995년 8월 16일 독립기념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경호실장으로서 대통령과 한 배를 탈 수밖에 없었던 사부르(Sabur) 준장도 실형을 선고 받고 4년간 복역 하던 중, 옥사하였다. 한편 정부요인 중 대통령 다음의 권력서열이었던 수반드리오(Subandrio) 제1부수상 겸 외무장관은 사형선고 후 무기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독립기념일 특사로 1995년 8월 16일 석방되었다.                                         
9.30사태 직후 사건관련자들을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사건 배후에 중국 공산당이 있었다는 증거가 속속 들어나자, 수하르또 정부는 1967년 중국과 국교를 단절하였으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하는 중국과의 교류가 불가피하게 되자, 정부는 군부의 반대를 가까스로 무마하여, 1990년 8월 중국과 국교를 재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공산당 주도로 자행된 쿠데타가 하룻 만에 막을 내리고, 쿠데타군 진압으로 실권을 잡은 수하르또 진영은 1967년 3월 수까르노 마저 완전히 권좌에서 몰아내고 ‘신 질서시대(Orde Baru)’라는 구호를 내건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킨다.

 –계속-

http://www.pagi.co.id/bbs/board.php?bo_table=column&wr_id=230&sca=%EA%B9%80%EB%AC%B8%ED%99%98%EC%9D%98+%EC%A3%BC%EA%B0%84%ED%8F%AC%EC%BB%A4%EC%8A%A4
 

제8부  승자들의 행진-마지막 회

 
10월 1일 새벽 사복 경찰정보원인 수낏만(Sukitman)은 심상치 않은 이날의 정황을 파악하려고 서성거리다 우익 장성들을 납치한 혁명군에 의해 할림 지역으로 연행되고 말았다. 오후에 이곳을 가까스로 탈출하여 바이파스 지역(현 Jalan Gatot Subroto)을 지날 때, 이번에는 그의 거동을 의심한 대통령 경호실 순찰대에 체포되어, 전략사령부로 끌려간다. 그의 진술에 의해, 특전사 요원들은 그를 대동하여 10월 3일 자정을 넘겨 뽄독 그데, 루방 부아야(Lubang Buaya) 지역에 있는 지름 75센티 깊이 12미터의 폐기된 우물 속에서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형체의 시체들을 찾아 내게 된다. 10월 4일 아침 수하르또 장군, 나수띠온 장군 등 고위 장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특전사 제1대대장 산또사 소령의 지휘아래 신똥 빤자이딴 소대원들과 해병대 잠수부들에 의해 시체 인양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날 밤 8시 수하르또 장군은 전국 라디오 방송망을 통해 공산당과 군부가 개입된 쿠데타의 진상과 그들의 잔혹성을 전국민에게 알리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인 10월 5일 ‘국군의 날’ 행사는 취소되고, 대신 이들 7명의 희생자에 대한 장례식이 깔리바따 국립묘지에서 거행되었다. 수까르노 대통령은 자신을 대리하여 수반드리오 제1부수상을 장례식에 파견하였으나, 육군 측의 거부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10월 10일 자로 국가안보질서회복사령부(Kopkamtib)가 출범하여 수하르또 소장이 사령관에 취임하였고, 10월 16일에는 일계급 특진하여 육군참모총장직에 오르게 된다. 이후 특전사, 전략사령부, 실리왕이 사단 등이 주축이 되어 사건 관련자 체포는 물론 공산당을 발본색원하는 정풍운동이 1966년까지 자바, 발리 섬 전체와 수마뜨라 일부 지역을 광풍처럼 휩쓸게 된다. 특히 공산당과 상극관계로 치달았던 이슬람계는 선봉에 나서게 된다. 이 정풍운동의 주 타겟은 골수 공산당원뿐만 아니라 공산당 동조자로 판단되는 민간인으로, 그 범위는 실로 광범위하였다. 이 당시 희생된 주민 수는 적게는 5십만 명에서 3백만 명이라는 숫자까지 거론되는, 엄청난 민족적 비극을 초래하여 그 후손들은 현재까지도 그 악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사태발생 당일 새벽부터 수하르또 진영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우마르 소장은 대장으로 예편한 후, 1983년 부통령 직위에까지 올랐으나, 당시 수도권에 남아있던 최정예 부대인 특전사령관으로서 수하르또 진영이 쿠데타군을 소탕하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사르워 에디 위보워 대령은 국군사관학교 교장, 주한대사를 거치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83년 대선 당시엔 그의 청렴성에 대한 국민들의 인기에 힘입어 국군사령관인 유숩 대장, 회계감사원장인 우마르 대장과 함께 강력한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우마르 대장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여야 했다. 사르워 에디 특전사령관과 더불어 당시 실리왕이 사단 참모장으로서 쿠데타군 소탕작전에 혁혁한 공적을 세운 다르소노 준장은 직후 실리왕이 사단장으로 승진하여 초기에는 순탄하였으나, 이후 수하르또 측근들의 견제를 받아 중장으로 예편하여 아세안(ASEAN) 사무총장이라는 직책에 머무르며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1980년에는 자카르타 주지사를 11년간이나 역임한 알리 사디낀과 함께 ‘50인 청원그룹(Petisi 50)’을 결성하여 가장 대표적인 반정부 인사가 되어 4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전략사령부 참모이면서 전략사령관인 수하르또 장군과 특전사령관인 사르워 에디 대령의 연락책을 맡았던 와호노 대령은 중장으로 예편하여 동부 자와 주지사를 거쳐 국회의장까지 역임하면서 입신하게 된다. 수하르또의 중부 자와 지역사령관 시절부터 줄곧 정보참모로서 그림자 역할을 하였던 알리 무르또뽀(Ali Moertopo) 대령은 수하르또의 최측근으로 자리매김하며 2인자의 반열에 올랐으나, 1974년 1월 15일 발발한 반일폭동을 전환점으로 내리막길에 접어들게 된다. 네 번에 걸린 심장마비 끝에, 1984년 60세를 일기로 사망하면서 알리 무르또뽀의 군 인맥은 고스란히 베니 무르다니 장군에게 승계되게 된다.
 
특전사 소속으로 10월 1일 오후 쿠데타군이 점령하고 있던 라디오 방송국 건물을 탈환하는 일선 중대장이었던 화이잘 딴중 중위는 수하르또 정권 말기 국군총사령관, 정치안보조정장관으로 크게 입신하였으나, 화이잘 딴중의 직속 부하였던 신똥 빤자이딴 소위는 분쟁지역인 동띠모르 관할 지역사령관으로 재직 중이던 1991년 11월 발생한 산타 크루즈(Santa Cruz) 공동묘지 학살 사건에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끌어안고 예편하게 되어, 미래의 참모총장 감을 잃어버리게 되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끝-    

http://www.pagi.co.id/bbs/board.php?bo_table=column&wr_id=231&sca=%EA%B9%80%EB%AC%B8%ED%99%98%EC%9D%98+%EC%A3%BC%EA%B0%84%ED%8F%AC%EC%BB%A4%EC%8A%A4 

 

 

52. 치유되지 않은 후유증

본 칼럼난은‘9.30사태’발발 48주년에 즈음하여 8회에 걸쳐 그 전말을 다루어 보았다.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흐름을 가장 큰 굴곡진 역사로 바꿔 놓은 상기 사건의 핵심은, 1960년대 세계적으로 유행처럼 번지던 ‘공산화’의 연결선상에 있었고, 인도네시아에서의 공산화 시도의 실패는 곧 친공세력과 반공그룹이라는 2분법으로 명확하게 구분하여 놓았다. 최후의 승자가 된 반공그룹은 그 반대편에 서있던 친공세력에 대한 숙청과 보복행위에 들어간다. 패자의 대칭점에 서있던 우익군부와 이슬람그룹은 동병상련의 연대감으로 결속되어, 즉각 ‘공산당 정풍운동’이라는 광풍을 몰아 자바, 마두라, 발리, 그리고 수마뜨라 일부 지역을 휩쓸게 되었다. 1966년까지 진행된 이 정풍운동에 ‘최소 40만에서 2백만 명의 희생자’란 숫자가 나올 정도로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였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최소 50만에서 3백만 명’이라는 숫자로 확대되어 언급될 정도로 동족상잔의 민족적 재앙임에는 틀림없었다.
 
10월 29일자 ‘자카르타 포스트’지에 1965년 9.30사태 당시 숙청당한 희생자 후손과 반공단체 간의 갈등이 표출되는 기사가 대서특필 되었다. 지난 27일 희생자 유족들이 족자카르타 관내 시도아궁(Sidoagung) 마을 소재 산띠 다르마 휴양지에서 열기로 되어있는 집회가 반공전선(FAKI) 족자카르타 지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자, 그 다음날 이에 대한 진정서를 접수하고자 방문한 족자카르타 법률구조공단(LBH) 건물주변에서 또다시 반공전선 요원들과 충돌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날 반공전선 측은 ‘인도네시아 전몰자 및 군경 후손 청년협회’ 요원들과 합세하여, “9.30사태 당시의 공산당원 가족들도 공산당원이나 다를 바 없다.”라고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반공전선은 이들 후손들이 공산당 재건을 시도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법률구조공단 측이 희생자 후손들의 청원서를 접수하지 말도록 요구하였다. 만약 구조공단 측이 법률지원을 요구하는 이들의 청원을 수용하는 경우, 구조공단을 공격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이에 대해 구조공단 측은 “법률구조공단의 책무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에 대해 차별 없이 법률지원을 아끼지 않는 기관임”을 천명하였다.
 
한편 국가인권위원회(Komnas HAM)는 이번 사태를 놓고 정부가 그간 1965년 희생자들의 기본인권보장 문제를 소홀히 다루어왔던 결과로 나타난 사례라고 일침을 놓았다. 실제로 9.30사태 당시의
인권문제는 수하르또 집권기간 중에는 언급자체가 터부시되어 왔으며, 그 어느 누구도 공론화 하기를 꺼렸던 민감한 사안이었다. 구스 두르 대통령 이후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서야 이 문제가 서서히 이슈화되기 시작하였으나, 50년 전의 사건이 이 시점에서 재점화되어 자주 거론되는 현상은, 무언가 정치적인 목적이 개입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뉴앙스를 풍기게 한다. 일례로 내년도 유력대선 주자 중 한 명인 쁘라보워가 20대~30대 젊은 엘리트들을 핵심참모로 기용하여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긍정적인 면모를 보이는 뒷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가 쁘라보워의 발목을 잡는다고 정치평론가들은 진단하고 있다. 그 그림자란 1997년~1998년 초에 자행된 운동권에 대한 납치, 5월 폭동 관련설 등 1998년 당시 취해진 일련의 인권유린 행위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인권문제가 이와 같이 쁘라보워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기 위해 등장하는 화두라면, 5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들추어 내는 인권문제는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 화살인가?  
 
총선을 불과 5개월 여 앞두고 이와 같은 정치적인 이슈가 우후죽순처럼 돌출하는 현상을 보면, 그 배경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소고기수입 스캔들을 무기 삼아 수도권에서 강세를 보이던 진보정당 하나를 파탄에 빠뜨리는 가 하면, 현직 헌법재판소 소장을 뇌물수수 현행범으로 옭아 맨 후, 지방족벌가문 문제로 확대재생산하여 유력정당에 타격을 주는 현재형 작전이나, 50년 전 사건의 불씨를 지펴 대형화재로 극화시키겠다는 과거청산형 전술은 시제만 다를 뿐 ‘장군멍군’식의 유사한 전술로 비쳐지고 있다. 정풍운동 당시 특전사 사령관이었던 사르워 에디 장군이 현 집권당 최고지도층과 특수관계라는 사실은, 경쟁자 입장에서 보면 비밀병기로서 쓸만한 가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끝-

http://www.pagi.co.id/bbs/board.php?bo_table=column&wr_id=232&sca=%EA%B9%80%EB%AC%B8%ED%99%98%EC%9D%98+%EC%A3%BC%EA%B0%84%ED%8F%AC%EC%BB%A4%EC%8A%A4 

 

 

 

 

안타깝게도 자경이나 한인뉴스 기사 아카이브에 이 연재의 1부와 2부가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 아쉽다.

2018년에 출간한 내 책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에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당시엔 이 칼럼의 존재를 몰라 참고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