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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야 함카 (Buya Hamka) (2) 본문

인도네시아 현대사

부야 함카 (Buya Hamka) (2)

beautician 2021. 4. 12. 12:18

함카의 어린 시절

 

유년기

 

함카의 생가는 2001년부터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그는 미낭까바우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이곳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함카의 어릴 적 이름은 압둘 말릭(Abdul Malik)이었다.

그는 1908217, 이슬람력으로는 1326년 무하람(Muharram)13, 지금은 서부 수마트라 아감(Agam), 숭아이 바땅 지역(Nagari Sungai Batang)에 해당하는 따나 시라(Tanah Sirah)에서 태어났다.

 

그는 명의 형제들 장남이었고 아버지는 하지 라술(Haji Rasul)이라 불리던 압둘 까림 암룰라(Abdul Karim Amrullah), 어머니의 이름은 사피야(Safiyah)였다. 함카의 동생들 이름은 압둘 꾸두스(Abdul Kuddus), 아스마(Asma), 압둘 무티(Abdul Mu'thi)이었다.

 

하지 라술이 첫 부인인 라이하나(Raihana)가 메카에서 세상을 떠나자 라이하나의 동생 사피야와 재혼했다. 라이하나에게서 말릭(함카의 어릴 적 이름)의 이복누이 파티마(Fatimah)는 나중에 쉑 아흐맛 라시드 수딴 만수르(Syekh Ahmad Rasyid Sutan Mansur) 결혼하게 된다. (‘하지’란 메카 순례를 다녀온 무스림의 이름 앞에 붙는 경칭이니 함카의 아버지가 메카 순례를 갔을 때 동행한 어머니 라이하나가 현지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역주) 하지 라술은 이후 사피야와도 이혼한 후 라피아(Rafi'ah)라는 여인과 결혼해 압둘 바리(Abdul Bari)라는 아들을 낳는다. 네 형제와 이복누나, 이복동생으로 말릭의 족보는 사뭇 다채롭다.  

 

아흐맛 끼탑 알-미낭까바위(Ahmad Khatib Al-Minangkabawi)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낭까바우에 돌아온 하지 라술은 그의 아버지 무하마드 암룰라(Muhammad Amrullah)가 타레캇 낙샤반디야(Tarekat Naqsyabandiyah)의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통적 관습과 타레캇 관행을 배격하는 이슬람 일신운동을 주도했다. (타레캇 Tarekat은 직역하자면 길, 방법을 의미하며 알꾸란에 따르면 ‘바다 한 가운데의 마른 길’을 의미해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민족을 건너게 한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는 ‘세계의 학교’를 뜻한다. 타레캇 낙샤반디야 Tarekat Naqsyabandiyah는 샤리아를 엄격히 준수하고 진지한 신앙, 그리고 현실정치에 참여하려는 경향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 역주)

 

암룰라의 , 말릭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시티 따르사와(Sitti Tarsawa)는 사람들에게 춤과 노래, 그리고 전통 호신술인 쁜짝실랏을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의 함카는 미낭까바우에서 할머니와 함께 지내며 미낭까바우를 둘러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빤뚠(Pantun) 사절구들을 할머니로부터 듣고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설교를 하기 위해 자주 길을 나섰다. 말릭은 네 살 때 부모와 함께 빠당빤장으로 이사해 거기서 이복누나인 파티마의 도움을 받아 알꾸란 읽기와 숄랏 기도문 낭송을 배웠다.

 

말릭은 일곱살이 되자 마을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1916년 자이누딘 라바이 엘 유누시(Zainuddin Labay El Yunusy)가 디니야(Diniyah) 종교학교를 열고 사원(surau)를 중심으로한 전통적 교육시스템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자이누딘 라바이 엘 유누시는 1890년 빠당빤장에서 태어난 개혁주의 성직자로 함카의 아버지인 압둘 까림 암룰라와 함께 빠당빤장에서 현대식 이슬람 교원학교인 스마트라 타왈립(Sumatra Thawalib)을 설립한 인물이다. 그는 1924년 34세의 나이로 빠당에서 사망했다 – 역주)

 

말릭은 마을 학교에 매일 등교해 공부하면서 디니야 학교에서도 오후 클라스를 다녔다. 그는 언어 공부를 좋아해 아랍어를 빨리 익힐 수 있었다.

 

말릭은 마을 학교에서 3년을 공부한 후인 1918년 학교를 중퇴했다. 종교 학습을 강조한 아버지 하지 라술이 그를 타왈립에 입학시켰기 때문이다. 그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고전 서적들을 외우게 하고 아랍어 문법 나우(nahwu)의 규칙, 신경과학 등을 가르쳤다.

 

말릭은 아침마다 디니야 학교에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타왈립에서 수업을 들은 후 밤에는 사원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암기를 강조하는 타왈립 학교의 교수방식에 그는 마침내 질려버리고 말았다.

 

타왈립 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말릭보다 나이가 많은 청소년들이었고 외워야 할 것들은 그만큼 좀 더 무거운 내용들이었던 것이다. 그는 학교 과목들 중 아랍어로 된 시에 대해 논하는 아루드(Arudh)만을 좋아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하루종일 공부로 가득 찬 일정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함카는 개구장이로 유명했다. 그는 자기 말을 안듣는 친구들을 곧잘 괴롭혔다 (일종의 일진?) 영화가 보고 싶었던 말릭은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고 사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무성영화를 엿보기도 했다.

 

 

 

부모의 이혼

 

말릭이 12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아버지는 독실한 무슬림이었지만 어머니 쪽 친척들은 이슬람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 관례와 전통을 따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를 용납하지 못했다.

 

부모가 이혼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말릭은 학교를 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빠당빤장의 시골동네들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그는 시장에서 구걸하는 맹인을 보았다. 말릭은 그를 도와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데려가 구걸할 수 있게 해주고 나중에 돌아가는 길도 데려다 주었다. 그러나 다음날 말릭이 시장에서 한 일을 전해 들은 양어머니는 화를 냈다. “네가 한 일은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일이었어.” 이 사건은 말릭이 양어머니와 좋은 관계를 갖지 못하게 만드는 시작이 된다.

 

말릭은 타왈립의 교사가 방문해 말릭의 상황을 부모에게 알리기 전까지 15일간 줄곧 학교에 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말릭이 학교에 가지 않은 것을 안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며 말릭의 뺨을 갈겼다. 아버지를 두려워한 말릭은 평소처럼 학교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말릭은 아침에 디니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후 곧이어 타왈립에 등교한 후 마그립 즈음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곧 기도회에 갈 준비를 했다. 그는 자이누딘 라바이 엘 유누시를 교사로 만난 후 자이누딘이 연 도서관에서 자주 책을 빌려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그가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들 중에는 발라이 뿌스타카(Balai Pustaka)에서 출판한 문학작품들과 중국 이야기, 아랍문학 번역서 등이 있었다. 말릭은 책을 읽고 나면 그것을 자신의 버전으로 만들어 글로 썼다. 그는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을 인용한 연애편지를 써서 같은 또래의 여자친구에게 보낸 적도 있었다. 즉 그는 책에서 읽은 내용을 체화하고 그것을 응용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책을 빌릴 돈이 떨어지자 말릭은 바긴도 시나로(Bagindo Sinaro) 소유의 인쇄소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거기서 만든 책들은 보호용 판지로 덧대어져 있었다. 그는 판지를 자르는 일을 돕고 제본용 접착제 반죽을 만들고 커피 심부름도 하면서 그 대가로 거기서 만든 책들을 빌려 읽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디니야 학교에서 돌아와 타왈립 학교로 출발하기 전까지 남는 세 시간을 아껴 책을 읽었다. 작업장에서 일처리가 깔끔했던 그는 아직 보호용 판지를 덧대지 않은 책을 집에 가져가 읽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나 말릭의 아버지는 아들이 주로 소설책들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가 앞으로 신앙인이 될 것인지 이야기꾼이 될 것인지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가 우려를 표할 때마다 말릭은 소설책을 내려놓고 종교책을 꺼내 들고 읽는 척을 했다.

 

 

Masjid_Jamik_Parabek

 

가정에서 생긴 문제로 말릭은 멀리 혼자서 먼 길을 방황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디니야와 타왈립의 수업을 내팽겨치고 마닌자우(Maninjau)의 어머니를 방문하러 가기도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중 누구와 함께 살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말릭을 매우 혼란스럽게 했다. “아버지 집에 가자니 양어머니가 계시고 어머니 집에 가자니 양아버지가 계시고....” 말릭은 피곤한 마음을 달래려고 마닌자우의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실랏 무술과 강강술래 비슷한 란다이(Randai) 춤도 배웠다. 그러나 가장 즐거운 것은 미낭까바우 전통 악기들을 연주하며 미낭까바우의 옛 이야기들을 문학적으로 노래한 카바(kaba)를 듣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더 멀리까지 가곤 했는데 부낏띵기와 빠야꿈부(Payakumbuh)같은 곳까지 가서 닭싸움꾼이나 경마기수들과도 어울렸다.

 

거의 일년간 그렇게 방황하자 그가 14세가 되었을 때 그의 장래를 걱정한 아버지가 그를 부낏띵기에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빠라벡(Parabek)의 울라마인 쉑 이브라힘 무사(Syekh Ibrahim Musa)에게 데려가 멍아지(Mengaji-알꾸란 읽기) 공부를 시키려 했다. (울라마의 이름이 기독교 성서를 기반해 바꿔 말하자면 ‘랍비 아브라함 모세’ 정도가 되니 꽤 무거운 이름을 가진 비중 있는 이슬람선생이었을 것 같다-역주)

 

빠라벡에서 함카는 처음으로 혼자 지내는 생활을 시작했다. 아직 청소년이던 말릭은 빠라벡에서 산트리(santri)로서 매일 필요한 일들을 해냈다. (산트리란 쁘산트렌(pesantren) 이슬람 기숙학교에서 기숙하며 종교교육을 받는 학생들을 말한다 – 역주)

 

말릭은 이제 자존감을 회복했지만 개구장이 성격은 여전했다. 빠라벡에 열병이 돌자 그는 이를 호랑이 형상을 한 귀신의 존재와 연관시키며 기숙사 근처 주민들을 겁주려 했다. (미낭까바우에는 사람이 변한 호랑이 요괴 이니약(Iniyak), 호랑이 요괴가 사람 흉내를 내는 찐다꾸(Cindaku) 같은 호랑이와 관련된 귀신과 괴담들이 많다. 이는 당시 미낭까바우 지역에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많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역주) 그런데 사람들이 그 말을 믿지 않고 그런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하자 그가 스스로 귀신 모양을 하고 밤에 돌아다녔다. 터번을 쓴 채 얼굴에 분필로 그림을 그린 다음 기숙사를 나와 돌아다닌 것이다. 그를 본 사람들은 크게 겁을 먹고 날이 밝으면 그 귀신을 잡으러 가겠다고 웅성거렸는데 말릭은 다음날 기숙사 친구들에게 자신이 전날 밤 장난친 이야기를 하고 그런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 토요일은 기숙사를 나와 빠라벡 일대의 촌들을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말릭은 그 기회를 십분 이용했다. 말릭은 전통과 관례에 따른 연설에 관심을 갖고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모이는 족장들의 취임식에 자주 참석하곤 했다.  그는 전통 관례에 따른 연설을 들으면서 단어들과 인용된 빤뚠 사절구를 기록하거나 암기했다. 이러한 취미를 위해 그는 몇몇 족장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찐다꾸의 모습은 대체로 호랑이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