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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부야 함카 (Buya Hamka) (3)

beautician 2021. 4. 15. 18:11

 

함카의 청년기

 

 

타지생활

 

말릭은 자주 혼자 길을 떠나 미낭까바우의 여러 곳을 여행하곤 했다. 그가 워낙 자주 부모를 떠나 멀리 돌아다니자 아버지는 그에게 먼 데 총각(Si Bujang Jauh)”이란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말릭은 15세가 되자 자바섬에 가고 싶었다. 그는 아버지에게도 알리지 않고 집을 나섰다. 마닌자우의 할머니에게만 하직인사를 올렸을 뿐이다. 그는 마닌자우에서 할머니가 쥐어 여비를 들고 여정에 올랐다. 육로를 통해 벙꿀루를 거쳐 그곳에 사는 어머니 가문 친척들에게 여비를 보태 달라고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도중에 말릭은 병에 걸리고 말았다. 벙꿀루에 도착하면서 말라리아에 걸리고 만 것이다. 와중에 천연두까지 걸리고 말았는데 말릭은 그런 상태에서 기어이 나빨 뿌티(Napal Putih)까지 가서 마침내 친척들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 그곳에서 달간 가료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자 친척들은 말릭을 마닌자우로 돌려보냈다.

 

그가 앓았던 천연두는 결국 그의 몸 전체에 흔적을 남겼으므로 말릭은 자신감을 잃었고 친구들은 그런 그를 조롱했다.

 

 

나가리   숭아이   바땅   서쪽에   위치한   마닌자우   호수

 

19247월 말릭은 다시 자바섬으로 길을 나섰다. 이번엔 기어이 바다를 건너 자바에 도착하는 그는 같은 미낭 출신인 마라 인탄(Marah Intan)의 집에 얹혀 살았고 족자에서는 아버지의 동생인 자파르 암룰라(Jafar Amrullah)와도 만났다. 삼촌은 그를 끼 바구스 하디꾸수모(Ki Bagus Hadikusumo)에게 데려가 알꾸란의 해설을 배우게 했다. 끼 바구스가 양파껍질을 벗기듯 알꾸란 각 문구들의 의미를 깊이 가르쳐주었으므로 함카는 그에게서 공부하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끼 바구스를 통해 사레깟 이슬람(Sarekat Islam – 이슬람연합)을 알게 되어 곧 회원으로 가입했다. 사레깟 이슬람 내부적으로 운영하던 학과들을 통해 그는 사회적, 정치적 움직들이 갖고 있는 이념들을 받아들였다. 많은 선생님들 중 HOS 쪼끄로아미노토(HOS Tjokroaminoto)와 수리요쁘라노토(Suryopranoto) 같은 출중한 선생님들도 있었다. 쪼끄로아미노토는 공부에 대한 열정이 특출한 말릭을 눈여겨 보았다. 말릭은 많은 질문을 던지며 학과수업을 열심히 따라갔고 배운 것은 따로 정서해 정리해 두었다.

 

그 즈음 자바에서 일고 있던 이슬람 운동이 말릭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족자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이슬람을 뭔가 생명력 넘치는 것, 뭔가 투쟁해 나가는 것, 자아 속에서 발현하는 역동적인 박동으로 받아들였다.

 

미낭까바우 무슬림들이 이슬람 의식을 행하는 것에 대한 토론을 하며 관심을 갖게 되자 그는 자바에서 일어나고 있던 관련 운동의 조직과 인사들을 연결해 무슬림들을 후진성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투쟁의 중심에 서겠다고 마음먹었다.

 

족자에서 6개월을 보낸 말릭은 뻐깔롱안으로 오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처남 아흐맛 라시드 수딴 만수르를 만나 그에게 사사했다. 수딴 만수르와의 만남은 이슬람 전파(dakwah)를 위한 투쟁의 길로 나가겠다는 그의 결심을 더욱 공고히 했다. (닥와(dakwah)는 이슬람의 규범에 따라 사람들이 신을 믿고 순종하도록 초대하는 활동을 말하므로 기본적으로 다른 종교의 전도와 통한다 역주) 말릭은 처남과 함께 하는 동안 무함마디야의 다양한 회합에 참석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 역량을 키웠다.

 

말릭은 국제 칼리파 회의가 연기되어 이집트로 출발하려던 일정이 취소된 아버지를 뻐깔롱안에서 만났다. 무함마디야의 활동에 감명받은 하지 라술은 자파르 암룰라, 마라 인탄 등과 함께 미낭까바우에 돌아온 후 숭아이 바땅에 무함마디야 지부 창설을 앞장섰다. 그 결과 그곳에 이미 오래 전 설립되어 있던 센디 아만(Sendi Aman)이란 단체가 무함마디야로 이름을 바꾸고 족자 무함마디야의 지부를 자청했다. 그리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예전에 그곳에서 공부했던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무함마디야가 미낭까바우 전역으로 전파되어 갔다.

 

무함마디야의 전도사(무발릭 mubalig)과 교사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지 라술은 타왈립 학생들을 움직여 숭아이 바땅에 타블릭 무함마디야(Tabligh Muhammadiyah)를 개설했다. (타블릭(Tabligh)은 신의 뜻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활동을 뜻하므로 타블릭 무함마디야는 무함마디야가 세운 그런 목적의 타블릭 학교라 하겠다 역주)

 

 

아직도 있는 Tabligh Muhammadiyah의 대위원회 로고  

 

말릭은 그곳에서 단타성으로 구성되는 연설훈련을 담당했다. 그는 글솜씨가 좋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연설문을 만들어 주었는데 훌륭한 연설문들은 카티불 우마(Khatibul Ummah) 잡지에 실어 발행했다. 이 찹지는 처음부터 500부씩 출판되었다.  말릭은 인쇄 전 접수된 연설문들을 보완하고 편집하는 일을 했다. 자이누딘의 교사와 바긴도 시나로 인쇄소 사장도 그 잡지의 제작과 유통을 도왔다. 몇몇 사람들이 말릭에게서 연설문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연설문을 다듬고 편집하면서 말릭은 글 쓰는 능력을 발견하고 이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비용문제로 인해 카티불 우마 잡지는 3호까지 발행된 후 더 이상 출간되지 않았다.

 

무함마디야를 미낭까바우에 전파하려는 노력은 현지 사회에 이미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기존 타왈립 학교 등과 적지 않은 마찰을 빚었다.

 

무함마디야 사상의 이해는 물질주의에 뿌리를 둔 이념에 비해 네덜란드에 대한 타활립 학생들의 태도에 보다 극단적인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반공주의자들은 네덜란드의 강점상황에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대신 그들의 활동을 교육개혁투쟁에 한했다. 비록 타왈립 학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을 타지 않았지만 타왈립 교사들과 학생들이 정치문제에 몰입하기 시작하자 하지 라술은 크게 실망해 타왈립의 강의요청을 거절했다.

 

1925년 족자의 무함마디야의 큰 선생은 수딴 만수르를 미낭까바우에 파견했다. 말릭은 이후 전도하며 무함마디야 지부를 구축하는 수딴 만수르의 곁을 늘 지켰다. 그는 수딴 만수르와 함께 빠가르 알람(Pagar Alam), 라끼딴(Lakitan), 꾸라이 따지(Kurai Taji)에까지 무함마디아 지부를 세웠다. 무함마디아 빠당빤장 지부장이었던 쉑 모하마드 자밀 자호(Syekh Mohammad Jamil Jaho)의 후임으로 쉑 잘라루딘 라조 엔다 IV세 앙깟(Syekh Jalaluddin Rajo Endah IV Angkat)이 취임할 때 말릭도 부지부장이 되었다.

 

 

무함마디야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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