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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6) 제8장 그가 남긴 것 북부 술라웨시의 마나도(Manado)는, 말하자면 동인도의 북쪽 끝이었지만 아주 오지는 아니었습니다. 마나도는 한국 참치잡이 원양어선이 자주 기항하면서 한국에도 제법 알려진 항구인데 대항해시대 당시에도 포르투갈 상선들을 위시해 그후 유럽 선박들의 출입이 잦은 지역이었죠. 디포네고로 왕자와 그들 일행을 마나도로 보낸 것은 그곳 미나하사(Minahasa) 지역을 네덜란드가 공고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 디포네고로 왕자를 구출하러 올지도 모를 민중군을 두려워했으므로 마나도쯤이라면 설사 그런 구출시도가 있다 해도 충분히 격퇴할 만한 환경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네덜란드에게 여전히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고 동인도 민중..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5) 물론 디포네고로의 체포에 대해 네덜란드 측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네덜란드의 미술가 니콜라스 피에너만(Nicolaas Pieneman)은 똑같은 장면을 자진해 항복하러 온 디포네고로가 네덜란드에 굴종하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물론 디포네고로가 항복했다는 말은 네덜란드군이 날조해 퍼뜨렸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네덜란드군이 스텔셀 요새작전으로 디포네고로군을 옥죄어 올 때 그는 휘하 부대에게 보다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적에게 쉽사리 항복하지 않도록 했을 뿐 아니라 자신 스스로 배신당해 체포당하게 되었을 때 항복하기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굳건히 견지했다는 기록이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날 방도가 없다면 나는 처형당하는 편을 선택하겠다. 내게 항복..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4)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 후 며칠 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기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아버지 하멩구부워노 3세가 술탄이 된 후부터 그는 가족들을 제대로 챙길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리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대부분의 아내들은 결혼 초기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 처 라덴 아유 수빠드미처럼 끄라톤 왕궁에 남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마글랑 네덜란드 본진에 와있다는 라덴 아유 렛나닝시(Raden Ayu Retnaningsih)는 지빵 끄빠당안(Jipang Kepadhangan)의 영주 라덴 뚜먼궁 수모쁘라위로(Raden Tumenggung Sumoprawiro)의 딸로 전쟁 전 디포네고로 왕자가 하멩꾸부워노 4세..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3) 당시 양측엔 휴전이 발효되고 있었습니다. 디포네고로는 레모 까말에서의 회합을 마친 후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의 군대와 합류해 사카 마을(desa Saka) 북쪽 끄짜왕(Kecawang) 인근에 주둔했습니다. “나보고 자기 진영에 들어와 달라고?” 바타비아의 드콕 장군은 펄쩍 뛰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적진에 들어가 회담을 가질 생각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디포네고로를 본진에 끌어들여 사로잡으려 했던 만큼 자신도 적진에 들어가면 같은 신세가 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죠. “휴전협상은 우리 본진에서 열어야 하오. 그러기 위해 어떤 방법이든 동원하시오!” 드콕 장군의 이와 같은 명령을 받은 클레이런스 대령은 머리를 싸매고 방안을 강구해야만 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처..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2) 제7 장 마지막 라마단 – 운명의 마글랑 회담 사실 휴전협상이 최초 시도된 것은 1827년 중반부터였습니다. 당시 드콕 장군은 영국인 상인 윌리엄 스타버스(William Starvers)와 아랍계 출신인 알리 칼리프(Ali Chalif)를 통해 디포네고로 왕자와 비공식적인 소통경로를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꼼페니의 드콕 장군께서는 왕자님, 아니 술탄 전하께서 족자 술탄국의 왕좌에 올랐다면 이 전쟁은 애당초 벌어지지도 않았을 거라고 탄식하십니다. 지금이라도 당연히 술탄 전하만의 왕국과 끄라톤을 가지셔야 한다고 생각하시죠. 그러니 이 전쟁을 멈춰 주시면 자바의 어느 땅이든 떼어 드린다 하십니다. 그 보다 더 큰 사례도 하실 것입니다. 드콕 장군께서는 네덜란드 동인도군뿐..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1) 끼아이 모조가 사로잡힌 지 얼마되지 않아 디포네고로군의 총사령관 센똣 알리바샤(Sentot Alibasya)가 1829년 10월 17일 네덜란드에게 항복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제 막 스물 두 살의 아직 어린 나이였던 센똣은 전장에서 사자와 같이 용맹을 떨쳤지만 군대를 유지할 비용이 쪼들리자 네덜란드의 회유에 쉽게 넘어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센똣을 회유하기 위해 네덜란드는 센똣의 형인 마디운 군수 쁘라위로디닝랏(Prawirodiningrat)을 이용했습니다. 그러자 센똣은 항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10,000굴덴이란 거금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쟁 초창기부터 거느렸던 삐닐리(Pinilih) 부족으로 이루어진 1,000명 규모의 직속부대를 계속 지휘하고 소..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0)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 후 족자 외곽에서 여러 뚜먼궁들이 네덜란드군에 백기를 들었고 망꾸부미 왕자의 부인도 네덜란드군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 난 이제 더 이상 뭘 위해 싸워야 할지 모르겠구나.” 뻥아시의 야전막사에서 디포네고로 왕자와 마주앉은 망꾸부미 왕자는 술탄과 신하가 아닌 삼촌과 조카로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버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이모기리의 묘역에도 방문하지 못하는 불효를 저질렀는데 이젠 가족들마저 족자 끄라톤에 잡혀갔으니 난 이제 반쯤 죽은 시체나 다름없구나.” “숙부님, 그럴수록 힘을 내셔야죠.” “내 가족들을 세랑 왕자가 잘 돌봐 주고 있다고 하는구나.” 망꾸부미 왕자는 서한 한 통을 디포네고로 왕자 앞에 내놓았습니..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9) 그러나 스텔셀 요새작전이 곧바로 네덜란드의 승리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 사이에도 네덜란드는 꺼두 지역의 여러 전투에서 고전했고 특히 반유마스에서는 디엘 중령, 드보스트 중령(letkol de Bost) 등 베테랑 지휘관들을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족자 남쪽방면에서는 1827년 6월 21일 족자 지방총독 반 로윅(Van Lowick)이 노또쁘로조 왕자(Pangeran Notoprojo)와 세랑 왕자를 밀어붙여 마침내 항복을 얻어내는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전쟁 초반 눈부신 활약을 했던 세랑 왕자를 잃은 것은 디포네고로군에겐 큰 손실이었습니다. 지리한 접전 끝에 1827년 10월 10일 이후 휴전이 발효되어 일단 전투가 멈추었지만 종전협상은 매번 결렬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