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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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70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4)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4)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 후 며칠 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기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아버지 하멩구부워노 3세가 술탄이 된 후부터 그는 가족들을 제대로 챙길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리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대부분의 아내들은 결혼 초기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 처 라덴 아유 수빠드미처럼 끄라톤 왕궁에 남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마글랑 네덜란드 본진에 와있다는 라덴 아유 렛나닝시(Raden Ayu Retnaningsih)는 지빵 끄빠당안(Jipang Kepadhangan)의 영주 라덴 뚜먼궁 수모쁘라위로(Raden Tumenggung Sumoprawiro)의 딸로 전쟁 전 디포네고로 왕자가 하멩꾸부워노 4세..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3)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3) 당시 양측엔 휴전이 발효되고 있었습니다. 디포네고로는 레모 까말에서의 회합을 마친 후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의 군대와 합류해 사카 마을(desa Saka) 북쪽 끄짜왕(Kecawang) 인근에 주둔했습니다. “나보고 자기 진영에 들어와 달라고?” 바타비아의 드콕 장군은 펄쩍 뛰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적진에 들어가 회담을 가질 생각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디포네고로를 본진에 끌어들여 사로잡으려 했던 만큼 자신도 적진에 들어가면 같은 신세가 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죠. “휴전협상은 우리 본진에서 열어야 하오. 그러기 위해 어떤 방법이든 동원하시오!” 드콕 장군의 이와 같은 명령을 받은 클레이런스 대령은 머리를 싸매고 방안을 강구해야만 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처..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2)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2) 제7 장 마지막 라마단 – 운명의 마글랑 회담 사실 휴전협상이 최초 시도된 것은 1827년 중반부터였습니다. 당시 드콕 장군은 영국인 상인 윌리엄 스타버스(William Starvers)와 아랍계 출신인 알리 칼리프(Ali Chalif)를 통해 디포네고로 왕자와 비공식적인 소통경로를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꼼페니의 드콕 장군께서는 왕자님, 아니 술탄 전하께서 족자 술탄국의 왕좌에 올랐다면 이 전쟁은 애당초 벌어지지도 않았을 거라고 탄식하십니다. 지금이라도 당연히 술탄 전하만의 왕국과 끄라톤을 가지셔야 한다고 생각하시죠. 그러니 이 전쟁을 멈춰 주시면 자바의 어느 땅이든 떼어 드린다 하십니다. 그 보다 더 큰 사례도 하실 것입니다. 드콕 장군께서는 네덜란드 동인도군뿐..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1)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1) 끼아이 모조가 사로잡힌 지 얼마되지 않아 디포네고로군의 총사령관 센똣 알리바샤(Sentot Alibasya)가 1829년 10월 17일 네덜란드에게 항복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제 막 스물 두 살의 아직 어린 나이였던 센똣은 전장에서 사자와 같이 용맹을 떨쳤지만 군대를 유지할 비용이 쪼들리자 네덜란드의 회유에 쉽게 넘어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센똣을 회유하기 위해 네덜란드는 센똣의 형인 마디운 군수 쁘라위로디닝랏(Prawirodiningrat)을 이용했습니다. 그러자 센똣은 항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10,000굴덴이란 거금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쟁 초창기부터 거느렸던 삐닐리(Pinilih) 부족으로 이루어진 1,000명 규모의 직속부대를 계속 지휘하고 소..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0)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0)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 후 족자 외곽에서 여러 뚜먼궁들이 네덜란드군에 백기를 들었고 망꾸부미 왕자의 부인도 네덜란드군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 난 이제 더 이상 뭘 위해 싸워야 할지 모르겠구나.” 뻥아시의 야전막사에서 디포네고로 왕자와 마주앉은 망꾸부미 왕자는 술탄과 신하가 아닌 삼촌과 조카로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버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이모기리의 묘역에도 방문하지 못하는 불효를 저질렀는데 이젠 가족들마저 족자 끄라톤에 잡혀갔으니 난 이제 반쯤 죽은 시체나 다름없구나.” “숙부님, 그럴수록 힘을 내셔야죠.” “내 가족들을 세랑 왕자가 잘 돌봐 주고 있다고 하는구나.” 망꾸부미 왕자는 서한 한 통을 디포네고로 왕자 앞에 내놓았습니..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9)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9) 그러나 스텔셀 요새작전이 곧바로 네덜란드의 승리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 사이에도 네덜란드는 꺼두 지역의 여러 전투에서 고전했고 특히 반유마스에서는 디엘 중령, 드보스트 중령(letkol de Bost) 등 베테랑 지휘관들을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족자 남쪽방면에서는 1827년 6월 21일 족자 지방총독 반 로윅(Van Lowick)이 노또쁘로조 왕자(Pangeran Notoprojo)와 세랑 왕자를 밀어붙여 마침내 항복을 얻어내는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전쟁 초반 눈부신 활약을 했던 세랑 왕자를 잃은 것은 디포네고로군에겐 큰 손실이었습니다. 지리한 접전 끝에 1827년 10월 10일 이후 휴전이 발효되어 일단 전투가 멈추었지만 종전협상은 매번 결렬되..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8)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8) 제6장 네덜란드의 반격 – 스텔셀 요새 작전 슬라미라(Selamira)를 출발해 쁘라기(Pragi) 동편에 도착해서 슨자티(Senjati)를 지나 적들이 쳐 올라온다. 저 수많은 이교도와 변절자들이 세 패로 나뉘어져 달려드는데 하나도 무섭지 않구나 이것은 디포네고로 왕자 자신이 마카사르의 포트 로테르담 요새에서 썼다고 알려진 ‘디포네고로 이야기(Babad Diponegoro)’에 등장하는 여러 시들 중 하나입니다. 불굴의 호연지기가 빛납니다. 그가 네덜란드와 그 동맹들을 대항해 벌인 이 전쟁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성전인 지하드(Jihad)였고 그 지하드의 대상은 이교도들과 변절자들이었죠. 이교도란 이슬람 성도들을 공격하고 지배하려는 비무슬림, 즉 네덜란드인들과 중..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7)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7) 디포네고로 왕자는 이후1826년 내내 네덜란드와 망꾸느가라안 봉국의 군대들을 맞아 승승장구했습니다. 바글렌에서도 농민군이 네덜란드군을 몰아냈고 끄지완(Kejiwan)에서도 베이 왕자(Pangeran Bei-조요꾸수모 왕자)가 승전보를 전해왔습니다. 족자 북동부 방면의 들랑구(Delanggu) 지역에서는 양쪽의 대군이 맞붙는 매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전황이 디포네고로군에게 크게 유리해지면서 네덜란드군을 짓쳐나가 결과적으로 ‘들랑구 대첩’이라 불려 마땅할 큰 승리를 거둡니다. 여기서 디포네고로군은 수십 정의 소총과 12문의 화포를 노획했습니다. 그후 한동안 네덜란드군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자 디포네고로군 전략고문이 되어 있던 끼아이 모조의 제안에 따라 디포네고로 왕자는..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6)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6) 이쯤 되자1825년 8월 7일 드콕 장군은 양자 협상을 요구하는 서한을 서둘러 디포네고로군에 보냈습니다. 네덜란드로서는 당장 전쟁을 멈추게 하진 못하더라도 시간이라도 벌어야 할 상황이었죠. 그런데 그 서한엔 대담하게도 이런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자발적으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들은 신분의 귀천과 지은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사면해 줄 것이다’ 이 편지를 함께 열람한 고아슬라롱의 디포네고로 왕자, 망꾸부미 왕자, 끼아이 모조 등은 실소를 터뜨리며 조요꾸수모 왕자(Pangeran Joyokusumo)와 수르옝로고 왕자(Pangeran Suryenglogo)에게 강경한 답신을 쓰도록 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이 무장해제하고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그 길을 막지 않겠지..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5)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5) 한편 뜨갈레죠 사건을 보고받은 바타비아의 네덜란드 총독 반더 채펄런(Van der Cepellen)은 디포네고로 왕자를 상대할 야전사령관으로 헨드리끄 머르쿠스 드콕 장군을 선임합니다. 그는 당시 40대 중반 활달한 성격의 군인으로 원래 해군에 입대해 1807년부터 동인도 근무를 시작했지만 1821년에는 수마트라의 빨렘방(Palembang)에서 육전으로 현지 반란진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전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동인도 전역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반란들이 한 두 개가 아니오. 족자에서 벌어진 저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고 돌아와 주시오. 장군이 할 일이 많소.” 채펄런 총독이 이렇게 말할 때까지만 해도 드콕 장군은 미개한 자바 내지에서 한 두 달 안에 반란을 진압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