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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9) 본문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9)
그러나 스텔셀 요새작전이 곧바로 네덜란드의 승리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 사이에도 네덜란드는 꺼두 지역의 여러 전투에서 고전했고 특히 반유마스에서는 디엘 중령, 드보스트 중령(letkol de Bost) 등 베테랑 지휘관들을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족자 남쪽방면에서는 1827년 6월 21일 족자 지방총독 반 로윅(Van Lowick)이 노또쁘로조 왕자(Pangeran Notoprojo)와 세랑 왕자를 밀어붙여 마침내 항복을 얻어내는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전쟁 초반 눈부신 활약을 했던 세랑 왕자를 잃은 것은 디포네고로군에겐 큰 손실이었습니다.
지리한 접전 끝에 1827년 10월 10일 이후 휴전이 발효되어 일단 전투가 멈추었지만 종전협상은 매번 결렬되었습니다.
“자바땅에서 네덜란드 민간인들의 상업활동을 인정해 주겠소. 하지만 그 대신 군대는 완전히 철수해야 할 것이오!”
“반란군의 무장해제가 선행하지 않는 한 총독부는 반란군의 그 어떤 요구도 수용할 수 없소.”
이렇게 갑론을박이 계속되었지만 아슬아슬한 휴전이 어떻게든 간신히 유지되던 시기에 디포네고로 왕자는 군세를 추스르며 본진을 뻥아시 인근 삼비라타(Sambirata)로 옮기고 그곳에 이슬람 자바 왕국의 끄라톤 궁을 세웠습니다.
그 즈음 네덜란드군은 벤뗑 스텔셀 전술에 따라 급히 세운 요새들을 체계적으로 강화한 네덜란드군은 이제 디포네고로군을 충분히 옥죌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그것은 일방적인 휴전 폐기로 이어졌습니다. 삼비라타 끄라톤 궁전 완공식을 기해 휴전을 깨고 기습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가장 큰 작전목표는 디포네고로 왕자를 사로잡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서면 매번 일방적으로 휴전을 깨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네덜란드군의 행태는 비단 디포네고로 전쟁에서뿐 아니라 훗날 1945년 이후 5년간 벌어지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도 몇 번씩이나 똑같이 반복됩니다.
삼비라타는 불바다가 되었지만 디포네고로 왕자가 무사히 뻥아시로 피신하면서 전쟁은 또다시 활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양상은 디포네고로군이 일방적으로 승승장구하던 전쟁 초반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1828년이 밝으면서 노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928년 1월 3일 77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족자 끄라톤에서 마감한 것입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디포네고로군도 애도를 표했고 망꾸부미 왕자 역시 적진 한 가운데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부음에 마음아파 했습니다.
“디포네고로, 그 녀석은 내가 끄라톤에 돌아왔다 해도 금방 약해져서 전쟁을 그르칠 놈이 아니다.”
늙고 병든 몸으로 고향땅에 돌아왔던 하멩꾸부워노 2세는 결과적으로 네덜란드의 회유공작에 동원되고 말았지만 애당초 디포네고로의 동기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813년 유배당했던 삐낭섬에서 돌아온 후에도 사랑하던 장손자 디포네고로와 그 진영에 속한 후손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채 그렇게 유명을 달리 하고 이모기리의 묘역에 묻혔습니다.
그로부터 2주 후인 1월 17일 하멩꾸부워노 5세가 다시 술탄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처음 왕위에 올랐던 1823년엔 천진난만한 세 살박이 영아였지만 이제 두 번째 다시 왕위에 오른 그는 야박한 세상인정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소극적이고 조심성 많은 여덟 살 소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왕국의 최고봉에 섰지만 세상은 그에게 무섭기만 했습니다. 증조할아버지인 하멩꾸부워노 2세는 자신을 폐위시켰고 삼촌인 디포네고로 왕자는 끄라톤을 호시탐탐 노리는 무서운 적이었으니까요. 게다가 다누레조 2세 재상으로 대변되는 끄라톤 궁전의 신료들, 귀족들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 했고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네덜란드군은 든든하기보다는 위협적으로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자기 편이 아무도 없는 궁전에서 어린 술탄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습니다.
한편 네덜란드군은 1828년에 보다 전략적 요충지라 판단한 마글랑으로 그 본진을 옮겼습니다. 이곳은 농민군의 저항을 보다 손쉽게 격퇴할 수 있는 전략적 지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보다 현대화된 무기로 전력을 보강했고, 동시에 디포네고로군의 지휘관들에게 끄라톤 궁전 고관대작의 자리를 약속하며 적극적인 회유작전에 나섰습니다.
1828년 4월 18일에는 망꾸부미 왕자의 아들인 나타디닝랏 왕자(Pangeran Natadiningrat)가 네덜란드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망꾸부미 왕자에게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1828년 말엔 뻐낭구한(Penangguhan)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져 네덜란드군과 디포네고로군 사이에 심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네덜란드 측에선 반잉겐(Van Ingen)대위와 쁘랑웨다나 왕자(Pangeran Prangwedana)가 전사했고 디포네고로군 측에서는 최정에 만티레죠 부대(Pasukan Mantirejo) 사령관이 전사하고서야 서로 군대를 물렸습니다. 1828년 내내 디포네고로군은 왕자들이 속속 전사, 또는 체포되거나 투항하면서도 네덜란드군과 대체로 호각을 유지하며 큰 펀치를 주고받았습니다.
1829년 초 이번엔 네덜란드 측에 변동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신임 총독으로 요하네스 반 덴 보쉬(Johannes van Den Bosch)가 부임해 그동안 디포네고로군을 야금야금 약화시켜온 드콕 장군을 해임하고 벤야민 비숍 소장(Mayor Jendral Benyamin Bisschof)을 네덜란드 동인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저런 미개인들을 상대로 몇 년씩이나 전쟁을 끌다니 우습지도 않은 일입니다. 한 달만 주시면 디포네고로군의 주력을 완전히 와해시키겠습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며 1829년 5월 13일 총사령관에 취임한 비숍 소장은, 그러나 뭔가 능력을 보여주기도 전인 6뤌 7일, 부임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찌안주르(Cianjur) 전투에서 디포네고로군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던 게릴라 전술에 걸려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의 전사가 몇 주만 늦었다면 전임 사령관 드콕 장군은 이미 본국행 범선을 타고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짐을 다 싸고 귀국준비를 하던 드콕 장군은 갑작스러운 신임사령관의 전사로 다시 전선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로서는 이 지긋지긋한 자바 전쟁을 영원히 잊어버릴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입니다. 어쩌면 그는 디포네고로 왕자와 운명적 악연으로 엮여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에서 디포네고로군은 바글렌과 반유마스에서 네덜란드군을 압박했고 족자 남쪽 방면에서는 베이 왕자의 농민군이 네덜란드의 요새와 초소들을 공격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술라웨시, 말루꾸, 발리에 주둔하고 있던 나머지 군대들도 모두 자바로 불러들였고 유럽 본토에서도 병력을 충원해 와야 했습니다. 자바전쟁으로 인해 네덜란드는 동인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던 다른 반란진압을 모두 멈추고 휴전을 맺은 후 현지에 배치했던 병력과 화력을 모두 자바로 옮겨와 디포네고로군 공략에 집중시킨 것입니다.
“디포네고로를 잡지 못한다면 최소한 망꾸부미 왕자와 끼아이 모조라도 잡아오란 말이오! 수뇌부를 쳐부수지 않고는 저들을 와해시킬 수 없소!”
양측이 휴전을 위한 회합을 계속하는 동안에도 드콕 장군은 모든 정보망을 동원해 디포네고로군 수뇌부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와 망꾸부미 왕자, 끼아이 모조 등은 모두 쉴 새없이 움직이며 위치를 바꾸고 있었지만 네덜란드군은 그들 가족의 소재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마침 디포네고로의 부인들을 포함해 수뇌부의 여인들은 꿀루르(Kulur)라는 곳에서 디포네고로군의 엄중한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나이 많은 망꾸부미 왕자가 언젠가부터 전선보다는 후방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꿀루르에 디포네고로군 수뇌부 가족들과 망꾸부미 왕자가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하지만 디포네고로군 대부대들 여럿이 가까이에 포진하고 있어 접근이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드콕 장군으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지금 당장 들이닥치지 않으면 저들은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갈 터였으니까요.
“가용한 병력을 모두 끌어모아 총공격을 가하시오!”
네덜란드군은 족자의 병력은 물론 망꾸느가라안 봉국의 군대들과 인근 요새 수비대까지 모두 불러내 꿀루르를 포위해 들어갔습니다. 디포네고로의 부인과 자식들을 사로잡는다면 네덜란드는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될 터였습니다. 노련한 망꾸부미 왕자가 기민하게 병력을 운영하며 수비전을 펼쳤지만 압도적인 숫자와 화력을 견뎌내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네덜란드군이 맹공격을 펼치며 은신처에 시시각각 접근하고 있을 때 디포네고로군 사령관 센똣 쁘라위라디르죠(Sentot Prawiradirjo)의 지원부대가 홀연히 나타나 그 배후를 격파하여 간신히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센똣 알리바사가 직접 움직일 만큼 수뇌부 가족들은 네덜란드군 못지 않게 디포네고로군에게도 중요했던 것입니다.
한편 그해 7월 족자 남쪽 방면 게게르 마을(Desa Geger)에서는 베이 왕자의 부대가 네덜란드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언제나처럼 맨 앞에서 싸웠던 베이 왕자는 예기치 않은 적의 집중공격에 중상을 입고 쓰러집니다. 그의 지휘권을 넘겨 받은 그 지역 영주 라덴 조요네고로(Raden Joyonegoro)는 베이 왕자를 긴급히 후송시킨 후 기를 쓰며 그 뒤를 막아서서 네덜란드 대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시간을 끌어준 덕에 베이 왕자는 디포네고로 본진에서 치료를 받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베이 왕자는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다시 전선에 나가게 됩니다.
“숙부님, 전선에 나가는 건 조금 더 몸을 추스린 후라도 괜찮지 않습니까? 너무 많은 삼촌들과 형제들을 잃었습니다. 숙부님까지 잃을까 두렵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직접 나서 그렇게 말하자 말에 올라타려던 베이 왕자는 조카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술탄 전하, 그러니 제가 나서야죠. 그 많은 형제들과 조카들의 빈 자리를 나와 내 아들들이 채워야죠. 몸을 좀 더 추스리란 말을, 그전에 술탄 전하도 뿌리치고 전선으로 나서지 않았습니까?”
가웍 전투에서 총상을 입었던 디포네고로 왕자를 대신해 임시로 디포네고로군 전체를 지휘했던 것도 베이 왕자였습니다. 당시 간신히 몸을 일으킨 디포네고로가 전선에 나서는 것을 극구 말렸던 것도 베이 왕자였고요. 하지만 디포네고로도 그때 그 만류를 듣지 않았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신의 가호가 나와 함께 있음을 술탄 전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지옥 같은 모든 전투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가장 험한 곳에 출정해 잘 싸우고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장담하며 떠난 곳은 보고원토 강과 쁘로고 강 사이의 지역이었습니다. 스텔셀 요새 작전에서 네덜란드군이 섬멸지역으로 설정했던 바로 그곳이죠. 거기서도 베이 왕자는 디포네고로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네덜란드군의 요새들 사이 통신로를 유린하며 종횡무진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영웅의 주변엔 늘 배신자가 있기 마련이죠. 꼬깝(Kokap) 지역에서 네덜란드군 대군에게 포위된 베이 왕자는 또 다른 기발한 작전으로 적진을 돌파하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휘하의 끼 렉소 디위료(Ki Rekso Diwiryo)라는 참모의 배신으로 그의 퇴각로가 네덜란드군에게 사전에 노출되어 기습을 당합니다. 길목에 매복하고 있던 네덜란드군에게 집중사격을 받은 베이 왕자는 두 아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베이 왕자란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의 30번째 아들로 깐젱 빵에란 조요꾸수모 (kanjeng Pangeran Joyokusumo)란 정식 이름을 가졌고 디포네고로 전쟁을 통틀어 가장 빛나는 별들 중 하나였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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