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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0) 본문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0)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 후 족자 외곽에서 여러 뚜먼궁들이 네덜란드군에 백기를 들었고 망꾸부미 왕자의 부인도 네덜란드군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 난 이제 더 이상 뭘 위해 싸워야 할지 모르겠구나.”
뻥아시의 야전막사에서 디포네고로 왕자와 마주앉은 망꾸부미 왕자는 술탄과 신하가 아닌 삼촌과 조카로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버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이모기리의 묘역에도 방문하지 못하는 불효를 저질렀는데 이젠 가족들마저 족자 끄라톤에 잡혀갔으니 난 이제 반쯤 죽은 시체나 다름없구나.”
“숙부님, 그럴수록 힘을 내셔야죠.”
“내 가족들을 세랑 왕자가 잘 돌봐 주고 있다고 하는구나.”
망꾸부미 왕자는 서한 한 통을 디포네고로 왕자 앞에 내놓았습니다. 거기엔 족자 끄라톤의 봉인이 쳐져 있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군과 끄라톤은 모든 가용한 경로를 통해 디포네고로군 지휘관들에게 서한을 보내 회유하고 있었으니 그걸 굳이 적과의 내통이라고 호들갑 떨며 문제삼을 일은 아니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 자신도 부대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상인들을 통해 드콕 장군의 친필 서한을 받은 적도 있었으니까요. 세랑 왕자가 네덜란드에 항복한 후 끄라톤의 자리를 하나 얻어 등청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그간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세랑 왕자께서 숙부님 가족들을 신경써 주신다면 더더욱 마음 놓으셔도 되지 않으십니까?”
“디포네고로 왕자, 날 보게, 내가 이제 얼마나 더 살 것 같은가?”
백발이 성성한 망꾸부미 왕자는 지난 1825년 뜨갈레죠에서 처음 합류할 때에 비해 훨씬 늙고 초췌해져 있었습니다.
“난 아버님이 왜 그 수모를 견디면서 네덜란드인들의 손을 빌어 삐낭섬에서 족자까지 돌아오셨는지 그 마음을 잘 알 것 같네.”
“네 숙부님, 저도 할아버님 마음 잘 압니다.”
“그분은 족자에서 세상을 떠나고 싶으셨던 거야.”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이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여기서 대화가 끝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망꾸부미 왕자는 침묵을 깨고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나도 아버님과 같은 마음이야.”
“……”
“내일 아침, 모두들 보는 앞에서 내 목을 배게. 신념을 잃은 배신자로서 말이야. 그 대신 내 시신을 끄라톤으로 보내 내 가족들이 장사 지내도록 해주게.”
“숙부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망꾸부미 왕자의 숙소 앞에는 그의 말과 소규모 부대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숙소에서 나오는 망꾸부미 왕자에게 그 부대의 지휘관이 허리를 굽혔습니다.
“저희가 왕자님을 끄라톤까지 모시겠습니다.”
디포네고로는 망꾸부미 왕자를 조용히 족자 끄라톤으로 보내주기로 한 것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끝내 그 자리에 모습을 비치지 않았습니다. 망꾸부미 왕자는 한참 동안 디포네고로의 막사를 응시한 후 말에 올랐습니다. 전쟁 내내 그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디포네고로 왕자의 곁을 지켰던 망꾸부미 왕자는 그렇게 네덜란드에 투항했습니다.
끄로야(Kroya)에서는 소년장군 센똣이 홀로 분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수백 명의 네덜란드군을 생포하고 400정의 소총과 화포들을 노획하는 승전보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829년의 전황은 전반적으로 디포네고로군에게 점점 더 불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머리피 산기슭에서 끼아이 모조가 네덜란드군에게 사로잡힌 사건은 디포네고로군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는 1826년 하반기부터 디포네고로는 물론, 주요 지휘관들, 왕족, 귀족들과 의견충돌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디포네고로의 군사 및 종교 지도자이자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입니다.
디포네고로와 끼아이 모조의 불화는 1826년 10월 가웍 전투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디포네고로를 비롯한 지휘관 대부분이 망꾸느가라안 봉국을 침공에 전면전 방식을 주장했는데 끼아이 모조 만이 그동안 네덜란드군을 상대해 왔던 게릴라전 방식만을 고집스럽게 요구해 기어이 관철시켰던 것입니다.
한편 디포네고로 왕자는 가웍에 집결한 네덜란드 연합군에 가담해 있던 수라카르타 군대와의 충돌을 원치 않았습니다. 수난 빠꾸부워노 6세가 어쩔 수 없는 입장임을 잘 알고 있었고 수난의 특별한 부탁도 비밀리에 받았기 때문이었죠. 그러니 수라카르타 군대와는 사전에 교감을 통해 싸우는 척만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때 빠꾸부워노 6세의 신임을 받았던 끼아이 모조가 오히려 수라카르타 군대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결국 가웍 전투는 모두가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고 피를 뿌리는 눈먼 전장이 되었고 디포네고로 왕자는 원칙론에 지나치게 입각해 자기주장만을 강요하는 끼아이 모조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아직 30대 중반에 불과했던 끼아이 모조는 이슬람에 대한 깊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거듭된 승전으로 치기어린 자신감이 오만함으로 변질되면서 초심을 잃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 충돌은 1827년 8월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에루쪼끄로(Sultan Erucokro)의 역할에 대해 협의하던 중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쁘라렘방 자야바야 예언서에 등장하는 공의의 여신 라투아딜(Ratu Adil)은 남성의 경우 ’에루쪼끄로’란 특별한 명칭으로 불린다고 되어 있었죠. 기왕에 자바 백성들이 디포네고로 왕자를 라투아딜의 현신으로 여겼으므로 쁠레레드의 대관식에서 받은 술탄의 칭호에도 헤루짜끄라(Herucaktra – 에루쪼끄로와 같은 의미)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에루쪼끄로에겐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왕, 이슬람의 포교자, 공의의 설파자, 그리고 가득찬 신뢰입니다. 술탄께서는 이중 하나만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난 제왕의 권위를 선택하겠네.”
“잘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슬람 포교자의 권위는 제가 감당하기로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건 곤란한 일일세.”
별 것 아닐 수 있었던 이 대화는 결과적으로 라투아딜의 권위를 끼아이 모조가 디포네고로 왕자와 나누어 공유하자는 것이었으므로 권력을 나누자는 말과 다름 아니었습니다.
“난 자바땅의 칼리파라네. 가능하다면 그 네 가지 권위를 모두 갖고 싶지만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다 해서 누군가와 그 나머지 권위를 나눌 생각은 없네.”
“하지만 그건 한 사람이 모두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무슬림, 이건 정치적으로 생각해야 해. 알라의 뜻에 따라 이 전쟁을 수행하는 이 조직엔 망꾸부미 왕자님을 비롯한 어르신들이 수두룩한 상황이지. 내가 자바땅의 술탄이 된 것은 그분들이 나보다 못해서가 아닌데 에루쪼끄로의 권위를 그분들도 아닌 다른 사람과 나누는 모습은 우리들 사이에 분란을 가져올 걸세.”
“저는 종교적 부분을 감당한 능력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기도 하고요!”
이 논쟁은 필요 이상으로 격해졌고 디포네고로는 끼아이 모조의 고집이 점점 더 버거워졌습니다. 결국 의견충돌이 심해지자 자존심이 상한 끼아이 모조는 빠장(Pajang)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했고 디포네고로 왕자는 더 이상 그를 만류하지 않고 귀향을 승락합니다. 그렇게 서로 떨어져 머리를 식히고 나면 언젠가 초심으로 돌아가 함께 일할 시간이 다시 올 것이라 믿으면서 말입니다.
물론 끼아이 모조가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악의를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이 전쟁을 이기고 싶었어요. 단지 디포네고로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원하는 것 이상의 주도적인 역할을 스스로 원했던 거죠. 그래서 그는 디포네고로에게 사전 연락도, 사전 허가도 없이 네덜란드군의 위로네고로 중령과 비밀리에 교섭을 시작했습니다. 끼아이 모조는 언젠가부터 자바전쟁 승패의 키를 오직 자신만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위로네고로 왕자는 디포네고로군의 족자 끄라톤 공격을 막아냈던 네덜란드군 측 지휘관으로 당시의 공을 인정받아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끼아이 모조는 디포네고로군의 영적지도자이자 이슬람 큰선생으로 사람들이 떠받들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지만 끼아이 모조는 이때 자신만이 옳다는 종교적 자만심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이 빠장에 오갈 수 있는 특권과 끄라톤 최고의 종교지도자 지위, 그리고 자신이 오갈 때 네덜란드군 기병대의 호위까지 자연스럽게 요구했습니다. 적조차 자신에게 특권을 허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던 것입니다.
위로네고로는 끼아이 모조가 정말 전쟁을 종식시킬 의지가 있다면 그 모든 요구들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네덜란드로서는 디포네고로군의 신비주의적 이슬람 열정의 핵을 이루어온 끼아이 모조 같은 이를 전향시키기 위해 아낌없이 예외를 만들어 줄 용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디포네고로 왕자는 당연히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슬림!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이슬람 지도자가 죽음이 두려워 네덜란드와 거래를 하려 한 건가? 우리들의 신념을 믿고 명령에 따라 전장에서 목숨을 바친 우리 병사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난 당신에게 그런 협상을 하라고 지시한 기억이 없어!”
그러나 끼아이 모조의 진심은 전쟁을 끝내려는 것이었지 디포네고로를 배신해 네덜란드측에 전향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디포네고로의 서한을 받고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란 말이야!”
그렇게 충돌하며 끝난 마지막 회합 이후 끼아이 모조는 디포네고로에게 여러 차례 서한을 보내 자신을 만나달라고 요청했으나 끝내 회신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도처에서 벌어지던 전투 중 수하들과 백성들이 목숨을 잃고 있는 와중에 몰래 종전협정을 진행한 끼아이 모조를 디포네고로 왕자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만 건가?’
끼아이 모조는 그제서야 자신의 행동이 반역으로 비칠 수도 있었음을 마침내 깨닫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네덜란드에 투항할 것이란 디포네고로군 대다수의 예상과 달리 끼아이 모조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정말 빠장의 고향으로 낙향해 갔습니다. 그는 최소한 배신할 인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네덜란드군이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르바론 드벡셀라(Letnan Kolonel Le Baron de Vexela) 중령이 이끄는 네덜란드군이 베독 강(Sungai Bedog) 서안에서 그 뒤를 따라잡았습니다.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으나 이미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끼아이 모조의 부대는 평소의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는 살아남은 부대원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살라띠가(Salatiga)의 네덜란드군 진영으로 압송되었습니다. 끼아이 모조는 이후 스마랑과 바타비아의 지하감옥을 전전하다가 결국 동인도 북단인 북부 술라웨시 마나도의 똔다노(Tondano)에 유배되어 거기서 한맺힌 여생을 마치게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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