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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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70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4)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4) 제5장 불타오르는 자바 “우리들의 전략적 목적은 이 땅에서 네덜란드인들과 중국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왕국을 우리 손으로 되찾아 온전히 지배하는 것입니다.” 고아슬라롱에 마련된 본진 사령부 막사에서 망꾸부미 왕자와 끼아이 모조를 비롯해 왕족, 귀족들로 구성된 지휘관들에게 디포네고로 왕자는 이 저항전쟁의 목적을 분명히 했습니다. 침략자 네덜란드뿐 아니라 오랜 기간 동인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중국인(화교)까지 몰아내야 할 이민족으로 규정한 것은 그들이 정부의 세금징수업무를 위임받아 위세를 부렸고 총독부나 네덜란드 개인사업자들의 하수인으로서 자바 백성들 위에서 대체로 군림하며 호가호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1812년 아버지 하멩꾸부워노 3세의 두 번쨰 ..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3)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3) 족자의 귀족들과 일반 민중들이 끝없이 밀려들어 디포네고로의 휘하에 들었으므로 깔리사카에서는 더이상 그들을 수용할 수 없어 뜨갈레죠를 나온지 불과 며칠 만에 왕자는 더 넓은 곳을 찾아 옮겨가야 했습니다. 가족과 병사들을 거느리고 꿀론쁘로고군 (Kabupaten Kulonprogo) 덱소 마을(Desa Dekso)에 도달한 디포네고로는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꺾어 반뚤시(Kota Bantul)로부터 서쪽으로 5킬로미터, 족자에서 남서쪽으로 약 9킬로미터쯤 떨어진 고아슬라롱 (Goa Selarong)이란 곳에 이르렀습니다. 고아(Goa)란 동굴이란 의미이므로 고아슬라롱은 '슬라롱 동굴'이라고 번역되지만 그 동굴이 있는 지역을 통칭하는 지명으로 쓰였습니다. 그의..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2)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2) 그러던 중1825년 7월 중순, 네덜란드는 족자에서 문띨란(Muntilan)을 거쳐 마글랑까지 이어지는 도로계획의 원래 경로를 조금 틀어 굳이 뜨갈레죠(Tegalejo)를 통과하도록 수정하면서 자바전쟁의 직접적 단초를 제공합니다. 그렇게 수정된 도로공사가 하멩꾸부워노 외가의 조상 묘소들을 지나게 된 것입니다. 비록 매일 등청하진 않았지만 당시 술탄 하멩꾸부워노 5세의 숙부이자 가장 중요한 후견인 중 한 명인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사전 언질은 물론 양해와 허락을 받아야 마땅했으나 그런 절차를 깡그리 무시한 것은 다누레죠 4세 재상의 은밀한 입김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었죠. 다누레죠 재상이 공사강행을 위해 그 땅에 경계표시 말뚝을 박으려 하자 그제서야 조상들의 묘역이 파헤쳐..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1)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1) 제4장 자바전쟁의 시작 세상의 모든 왕가들이 그렇듯 어린 술탄 뒤에서 실권을 쥐려는 외척들과 정치가들은 섭정 자리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기 마련입니다. 제왕의 이름을 빌어 마음껏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죠. 술탄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네덜란드 관리들의 전횡도 도를 넘기 시작했습니다. 궁전을 함부로 드나들던 그들이 궁전 안 여인들을 범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궁 안에서 일하는 여인들이란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한 당시의 관념으로는 모두 술탄의 여인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지 몰라도 최소한 왕실에 속한 여인들, 엄밀히 말해 왕실의 재산이었으므로, 이민족이 궁에 들어와 궁안의 여인들과 함부로 잠자리를 한다는 것은 커다란 불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끄라톤을 온전히..

[소설]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0)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0) “전하, 끄라톤 생활이 무료하시면 모처럼 선선한 날씨온데 바깥바람을 좀 쐬시지요.” 어쩐 일인지 다누레죠 재상이 그날 아침 일찍 도성 외곽 소풍을 제안했습니다. 술탄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마침 끄라톤 궁전 안의 모든 것에 숨이 막힐 듯하던 차였으니까요. 물론 마차 두 대와 시종, 하녀들 수백 명씩을 거느리고 길을 나서는 것이 얼마나 번거롭고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인지엔 생각이 미치지 않았습니다. 왕실과 귀족들에게 그런 것은 그저 당연히 누리는 권리였으니까요. 그래서 수백 미터씩 늘어진 왕실의 행차가 장관을 이루었고 인근 백성들은 그 행차 앞에 하던 일을 멈추고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해야 했습니다. 그 행차의 앞 뒤를 소규모 끄라톤 경비대가 호위했고 멀찍이 뒤편에선..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9)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9) 나폴레옹 전쟁으로 멸망하다시피 했다가 간신히 되살아나 동인도로 돌아온 네덜란드는 과거의 기득권을 주장하며 족자 술탄국을 신속히 다시 손에 넣기 위해 이 시기에 전방위적으로 끄라톤 왕족들과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자바땅을 잠시 영국에게 맡겨 놓았던 자기 보따리처럼 여기는 네덜란드의 행태가 디포네고로 왕자 눈에 곱게 보였을 리 없습니다. 그때 그들이 가장 공을 들여 회유하려 한 사람은 다누레죠 4세 재상이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그걸 모를 리 없었지만 영국 강점기 내내 섭정 빠꾸알람 1세를 끈질기게 견제해온 다누레죠 4세라면 분명 네덜란드의 유혹도 물리칠 것이라 내심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집요했고 거대한 이권이 걸리자 다누레죠 4세가 욕망 앞에 흔들리는 것은..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8)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8) 디포네고로 왕자의 어린 이복동생 입누쟈롯 왕자는 10살의 나이로 하멩꾸부워노 4세가 되어 술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디포네고로 왕자가 국사를 도울 섭정이 될 것임을 누구도 의심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결코 자기 편이 되지 않을 것임을 일찌감치 간파한 래플스 총독은 영국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합니다. 영국과 깊은 교분을 나누고 있던 빠꾸알람 1세를 섭정으로 지정한 것입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스뻐히 전투에서 영국이 끄라톤을 함락시킨 후 영국에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자치구인 빠꾸알라만 봉국을 할양받고 그곳의 영주가 된 빠꾸알람 1세는 말레이 반도 삐낭섬으로 유배된 하멩꾸부워노 2세의 동생입니다. 그가 어린 하멩꾸부워노 4세를 대신해 족자 술..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7)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7) 제3장 왕위를 포기하다 하멩꾸부워노 3세는 술탄이 된 후 아직도 뒤숭숭한 왕궁의 상황을 수습하기는커녕 매번 식사를 물리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등 육체적 정신적 건강문제를 노출시키며 국사에 대해 아무런 의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기저에는 그가 어떤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있든 영국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결코 성취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지난 몇 년 사이 왕국에서 일어난 사건들로 인한 충격과 이제 술탄으로서 왕국을 위하기보다는 이민족들에게 휘둘려야만 한다는 현실은 큰 중압감으로 다가왔고 정신적 부담을 견디지 못한 그의 육체는 날로 쇄잔해 꼬챙이처럼 말라갔습니다. “이럴 때 왕자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술탄 전하의 힘이 되어 주십시오.” 이..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6)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6) 한편 영국군은 찌레본(Cirebon)에서 네덜란드군에게 잡혀 있던 노토꾸수모 왕자를 풀어주었는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그는 하멩꾸부워노 2세의 동생입니다. 그는 영국이 동인도 총독대행으로 보낸 토마스 스탬포드 빙글리 래플스(Thomas Stamford Bingley Raffles)를 만나 그가 가진 자바문화의 깊은 이해에 감탄하여 친분을 다졌고 그와 하멩꾸부워노 2세 사이의 소통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멩꾸부워노 2세는 네덜란드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국에 대해서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영국 총독대행에게 붙어 다니는 동생도 영 마뜩치 않았습니다. 처음엔 하멩꾸부워노 2세를 족자 술탄국의 지배자로, 라덴 마스 수로요를 아디빠티 아놈(태자)으로 순순히 ..

[소설]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5)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5) 아니나 다를까, 네덜란드는 왕궁이 하는 모든 일을 참견하며 온갖 이권을 요구해 왔습니다. 왕실과 귀족들이 네덜란드에게 강력히 반발하던 중 응으벨(Ngebel)과 스끄독(Sekedok)에서 티크나무 숲을 뺴앗으려는 네덜란드 총독부를 상대로 현지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네덜란드는 그 책임을 라덴 롱고 쁘라위로디르죠 3세(Raden Ronggo Prawirodirjo III)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폭동지역 관할인 마디운의 군수이면서 술탄의 사위이자 고문이었고 무스타하르 왕자의 장인이기도 했습니다. 주로 끄라톤궁에서 지냈던 인물이었는데 댄덜스 총독은 그에게 폭동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있다며 보고르(Bogor)로 소환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장인인 술탄을 압박하려는 수단이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