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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4)

beautician 2023. 9. 24. 11:43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4)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 후 며칠 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기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아버지 하멩구부워노 3세가 술탄이 된 후부터 그는 가족들을 제대로 챙길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리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대부분의 아내들은 결혼 초기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 처 라덴 아유 수빠드미처럼 끄라톤 왕궁에 남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마글랑 네덜란드 본진에 와있다는 라덴 아유 렛나닝시(Raden Ayu Retnaningsih)는 지빵 끄빠당안(Jipang Kepadhangan)의 영주 라덴 뚜먼궁 수모쁘라위로(Raden Tumenggung Sumoprawiro)의 딸로 전쟁 전 디포네고로 왕자가 하멩꾸부워노 4세의 후견인으로 아직도 끄라톤에 출입하던 시절인 1822년 혼인식을 올렸죠.

디포네고로 왕자의 여섯 번째 처인 그녀는 젊고 눈부시게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전쟁 초창기 고아슬라롱에서부터 전쟁터를 전전하며 남편의 곁을 줄곧 지켜왔던 사람입니다. 어린 자녀들을 네덜란드군에게 인질로 뺏기지 않기 위해 늘 전장에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던 시절, 그녀는 다른 부인들이 낳은 디포네고로의 다른 자녀들까지 헌신적으로 돌봐 주었습니다. 그래서 반년 전 그녀와 자녀들이 네덜란드군에게 나포되었을 때 디포네고로는 눈앞이 캄캄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절대 헤어지는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마글랑이 있는 동북쪽 밤하늘을 바라보며 애통함이 끓어 넘쳤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가 라덴 아유 렛나닝시와 자녀들, 그리고 센똣 쁘라위라디르죠까지 동원하고 드콕 장군까지 본진을 방문하는 등 전력을 다해 그를 마글랑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은 그곳에 헤어나오기 힘든 치명적인 덫이 설치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전하, 센똣 알리바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절대 마글랑으로 따라 나서시면 안됩니다.>

그 사이 센똣의 일행 중 어떤 인물로부터 이렇게 자바어로 적힌 쪽지가 전달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센똣이 지휘하는 삐닐리 부대 안에서도 심정적으로는 여전히 디포네고로를 지지하는 이들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서 마글랑으로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디포네고로 왕자는 더욱 분명히 알게 됩니다.

다음날 그는 지휘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난 오늘 마글랑으로 들어갈 것이오. 나와 함께 출발할 호위대는 100명으로 한정하고 나머지는 아놈 왕자의 지휘 아래 주둔지를 정리하고 부대를 산개시켜 전투에 대비하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험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디포네고로 왕자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하게 했을까요?

“전하, 이건 함정이기 쉽습니다. 센똣 알리바사는 배신자입니다. 그의 약속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 전투를 대비하라는 것이오. 내가 마글랑에서 회담의 성과를 얻지 못한다면 이곳 머노레도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할 것이오. 난 알리바사도 네덜란드도 믿지 않소. 난 오직 신을 믿을 뿐이오. 그분이 우릴 여기까지 이끄셨다면 이제 부딪혀 볼 도리밖에 없지 않소?”
“아버님, 제가 아버님을 호위하겠습니다.”

디포네고로의 아들 아놈 왕자가 호위대장을 자청했습니다. 회의장엔 적막이 감돌았습니다.

“내가 마글랑에 들어가든 그렇지 않든, 또는 내가 죽든, 살든, 네덜란드가 물러나지 않는 한 난 이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오. 어차피 이 회담에 들어가 마지막 결정을 내릴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소. 하지만 이 전쟁을 이끌 사람들은 나 말고도 이 막사에 한 가득이나 있지 않소? 내가 숨쉬는 한 나는 이 세상엔 고작 한 명 존재할 뿐이지만 내가 죽어 백성들 마음 속에 살아난다면 난 하늘의 무수한 별들같은 대군이 될 것이오.”

디포네고로 왕자는 이 시점에서 이미 생과 사를 초월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더라도 라마단 동안 금식의 규례를 잘 세우기 바라오.”

그는 1830년 3월 18일 해가 중천에 뜰 즈음 말을 타고 머노레를 출발했습니다. 100명의 호위대가 앞 뒤를 둘러쌓고 네덜란드 군복을 입은 센똣의 호위대가 앞장섰습니다. 그들은 머노레 외곽에서 센똣의 삐닐리 부대 본대와 합류하여 행군을 계속해 그날 저녁 늦게서야 마글랑에 들어섰습니다.

네덜란드군은 요새 앞 멀찌기부터 임시 뻔도뽀(Pendopo)를 설치해 놓고 예를 갖추어 디포네고로 일행의 방문을 환영했습니다. 거기엔 클레이런스 대령과 몇몇 끄라톤 왕자들도 나와 있었지만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들에게 딱히 시선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장 마글랑의 네덜란드 군영 내 쁘상그라한 (Pesanggrahan) 초대소에서 아내와 자녀들을 만났습니다.

“전하, 어찌 저희 같은 것들을 돌아보시려 이런 험지에 들어오십니까?”

렛나닝시는 남편의 모습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으며 울음을 터뜨렸고 디포네고로 왕자는 아무 말없이 그녀와 아이들을 보듬어 줄 뿐이었습니다. 그는 별도의 공식 행사나 회합도 없이 금식월의 마지막 며칠 간을 쁘상그라한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도록 네덜란드 측의 양해를 얻었습니다. 그가 샤왈월의 첫날 이둘피트리까지 지내는 동안 그와 동행한 다른 왕자들과 호위병들이 쁘상그라한의 안팎을 철통같이 지켰습니다.

 

마글랑의 꺼두 주지사 청사. 1830년&nbsp;3월&nbsp;20일 디포네고로 왕자가 사로잡힌 곳 https://kerisnews.com/2017/11/27/perpecahan-antara-diponegoro-dan-kyai-mojo/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샤왈월 둘째날인 1830년 3월 28일 아침 7시 디포네고로 왕자가 마글랑 중심부에 있는 꺼두(Kediu) 주지사 청사에 나타났습니다. 머노레에서부터 극구 동행해 온 세 아들 즉 아놈 왕자와 라덴 마스 죠나드(Raden Mas Jonad), 라덴 마스 라압(Raden Mas Raab)을 위시하여 마르타느가라 장군(Basah Martanegara)과 끼아이 바다루딘(Kyai Badarudin) 등이 디포네고로 왕자의 등 뒤로 도열했습니다. 한편 네덜란드 측에서는 드콕 장군을 비롯해 발크 주지사(Resident Valk), 루스트 중령(Letkol Roest), 비서관 드스튜어즈 소령(Major Ajudan De Stuers) 등과 함께 나타났고 룹스 대위(Kapten Roeps)가 회담의 진행을 맡았습니다.

우연이었을까요? 센똣과 클레이런스 대령은 이날 자리에 없었습니다.

한편 또 다른 방에서는 반 레이우벤 중령(Letkol De Kock van Leeuwen)이 이끄는 일단의 네덜란드군 장교들이 디포네고로군 장교들을 상대했습니다. 오직 두페론 중령만이 드콕 장군의 비밀 지령에 따라 주지사 청사 바깥에 언제 떨어질지 모를 기습공격 명령에 대비해 은밀히 병력을 집결시켜 두고 있었죠.

이윽고 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드콕 장군은 회담의 시작과 동시에 지난 5년간 지속된 전쟁에 대해 디포네고로 왕자를 일방적으로 성토했으므로 듣다 못한 디포네고로 왕자가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상대방에 대한 적의만 가지고 있다면 차라리 전쟁을 계속할 것이지 왜 이런 평화회담을 하려는지 모르겠소. 장군의 말을 들으면 들을 수록 여길 오지 말고 차라리 바글렌으로 돌아가 전투를 준비하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드콕 장군도 회의장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긴 그의 진영 한복판. 그는 목소리를 더욱 높였습니다.

“자바땅에 이슬람 지도자가 지배하는 단일 독립국가를 세운다는 건 도저히 허락할 수 없는 일이오. 단일 독립국가라니! 족자 술탄국이나 수라카르타 수난국도 동의하지 않을 게 틀림없소.”
“드콕 장군, 그건 당신이 허락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오. 그것은 신과 백성들이 원하는 것이니 당신이 원하든 원치않든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일이오!”

당초 우려했던 대로 회담은 금방 벽에 부딪히고 있었습니다. 뭔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좀 더 오랜 대화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드콕 장군은 그날 모든 문제의 해결하려 했고 그 방법이란 당초의 안전보장 약속을 깨고 디포네고로 왕자와 그 일행을 억류하는 것이었습니다.

“술탄, 당신의 생각이 정히 그렇다면 당신을 여기서 내보내 드릴 수 없소.”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오?”
“이대로 당신을 내보내면 자바땅엔 또다시 전쟁이 들불처럼 일어날 것이오.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오!”
“당신들의 압제가 계속되는 한 이 땅에 전쟁이 그치지 않는 건 당연한 일 아니오? 그리고 당신은 군복을 입고 장군계급장을 달고 있으면서도 전쟁이 두렵단 말이오? 그건 비열한 배신자들이나 하는 소리요!”

디포네고로 왕자가 회담장을 박차고 일어서자 네덜란드군 병사들이 문을 막아섰고 왕자의 일행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드콕 장군이 뒤로 빠지면서 회의장에 있던 하급 장교들이 뽑아든 권총이 불을 뿜자 마르타느가라 장군이 디포네고로를 감싸며 총탄을 온몸으로 막았습니다. 회의장과 그 앞, 청사의 넓은 홀에서 근거리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엄청난 총성이 들려왔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를 호위해 왔던 부대가 몰래 전개한 두페론 중령의 부대에게 포위공격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네덜란드군의 기습작전에 마글랑에 들어온 디포네고로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버렸고 두페론 중령의 부대 중 중대규모 병력이 청사 안으로 뛰어들어 오면서 디포네고로 왕자와 그 일행들도 수에 밀려 모두 제압당하고 말았습니다.

“계속 저항한다면 당신 수하들의 목숨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디포네고로 왕자는 자신이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할 덫에 빠진 것을 알았습니다.

“안전을 보장하겠다던 클레이런스 대령과 센똣 알리바사는 어디 있소? 그들을 데려와 보시오!”

머리와 어깨의 부상으로 피를 철철 흘리던 아놈 왕자가 그렇게 소리치자 그의 머리에 총을 겨군 네덜란드군 장교는 웃음을 흘리며 빈정거렸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소? 우린 모르는 일이고 그들은 지금 마글랑에 없소이다.”

전형적인 발뺌이었죠. 디포네고로 왕자는 네덜란드측이 한 약속을 조금이나마 신뢰하려 했던 자기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교들 뒤로 몸을 피했던 드콕 장군이 다시 앞으로 나와 무장해제 당한 디포네고로 일행 앞에 섰습니다. 그의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지만 지난 5년간 염원했던 바, 디포네고로를 마침내 생포했다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에 걸려 있었습니다.

“의도치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소. 술탄, 지금이라도 항복의 뜻을 밝히고 전국의 수하들에게 무장해제를 명령힌다면 그대의 형량도 참작될 것이고 그대의 수하들도 더 이상 목숨을 잃는 일이 없게 될 것이오.”

바로 그 순간에도 마글랑 외곽에서 산개하고 있던 디포네고로군의 주력은 드콕 장군이 동인도 전역에서 끌어모든 부대들의 협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드콕 장군이 오래동안 준비해 온 작전의 일환이었습니다. 디포네고로군은 요새들과 통신로에서 튀어나온 적들의 맹공을 받아 밀리기 시작했고 남은 지휘관들은 마글랑에 들어간 디포네고로 왕자 일행의 운명이 어떤 파국을 맞이한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내 이름은 깐젱 술탄 압둘하미드(Kanjeng Sultan Ngabdulkhamid)! 나는 자바땅 이슬람의 수호자로서 신에게 불충한 자들을 처분할 의무를 다할 것이다!”

손발을 제압당한 상태에서도 디포네고로 왕자는 드콕 장군에게 이렇게 외첬다고 전해집니다.
19세기 유럽에서 명성을 떨쳤던 동인도의 귀족 출신 화가 라덴 살레(Radeh Saleh)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디포네고로의 체포장면을 전해 듣고 애통해 하며 이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의 그림 속에서 디포네고로 왕자는 많은 추종자들이 울부짖는 가운데 강제로 끌려가는 순교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손발을 제압당한 상태에서도 디포네고로 왕자는 드콕 장군에게 두 눈을 부릅뜨고 이렇게 외졌다.

동시대를 살며 유럽에서 명성을 떨쳤던 동인도의 귀족 출신 화가 라덴 살레(Radeh Saleh) 많은 시간이 흐른 디포네고로의 체포장면을 전해 듣고 애통해 하며 이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의 그림 속에서 디포네고로 왕자는 많은 추종자들이 울부짖는 가운데 강제로 끌려가는 순교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라덴살레가 &nbsp; 그린 &nbsp; 디포네고로 &nbsp; 왕자의 &nbsp; 체포
이중 디포네고로 왕자 부분을 확대하여 수정한 누군가의 작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