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우리 동네 천사들 (7) 본문
ep7. 시기심
나는 상황이 그렇다면 이제 우리 쪽에서 먼저 스텔라의 손을 놓아줘야 할 시점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미 스텔라는 자기 스스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전엔 모든 사소한 문제들까지도 메이에게 가져와 상의하던 그녀가 이제 스스로 결정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정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 말이죠.
스텔라가 아웃렛들에서 부조리와 불이익을 당했다는 얘기, 메단에서 센티옹까지 몇 개월간 구걸한 끝에 도착했다는 얘기, 심지어 작은 오빠가 감옥에서 죽었다는 얘기도 어찌 보면 스텔라 스스로 만들어낸 가상의 사건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15세의 소녀가 관심을 끌기 위해 어른들을 대상으로 시네트론 TV 드라마의 학대받는 소녀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이는 최소한 작은 오빠의 이야기는 허구이기 쉽다고 의심했고 나도 어느 정도 그 의심을 수긍했습니다. 스텔라도 메이의 남동생이 감옥에서 죽은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데 이번 작은 오빠가 죽었다는 정황과 스토리 전개가 거의 판박이였기 때문이죠. 카피캣 (copycat). 만약 정말 그랬다면 그건 스테피 양부모의 관심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스텔라 자매는 이미 루디 하디수와르노라는 신뢰해마지 않을 수 없는 거인의 품의 안겨 있었고 상당한 재력을 가진 바딱 부부가 스테피를 입양한 상태였으습니다. 고졸 출신 외판영업직원인 메이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죠.
“뭐…, 스텔라나 스테피를 위해 다 잘 된 일이라 생각하자. 초심을 기억해야지.”
그렇습니다. 스텔라를 도우려 마음먹던 당시 우린 나중에 스텔라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려 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두 자매가 지옥 같은 환경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만 생각했었죠. 그게 결국 우리 힘으로 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 목표는 성공적으로 달성되었습니다. 우리 초심을 이룬 겁니다. 그럼 된 겁니다.
물론 당시 스텔라의 초심이 어떤 것이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스텔라가 나나 메이에게 평생 고마워 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우린 곤경 속의 스텔라 자매를 짓밟기만 하던 스텔라의 친인척들과 아무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메이는 그 후 며칠 동안 시무룩한 표정이었어요.
얼마 후 스테피는 양부모와 함께 다시 싱가포르로 날아갔습니다. 이번엔 사시 교정수술을 하기 위해서였어요. 일주일쯤 후에 자카르타로 돌아온 스테피의 눈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고 수술로 인해 떨어진 시력 때문에 착용한 앙증맞은 안경은 어린 스테피의 미모에 화룡점정이었습니다. 스테피는 미녀로 커 갈 것이 분명했습니다. 공포영화 ‘The Conjuring’에 등장하는 아역배우들은 하나같이 예쁘기만 하지만 그 중에서도 몽유병으로 걸어 다니며 장롱에 머리를 찧어대던 신디를 스테피는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스텔라도 미용실에 휴가계를 내고 그 싱가포르 여행에 따라갔었습니다. 물론 모든 비용은 스테피의 양부모가 부담했고요. 그 소식을 들은 메이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어요.
“요즘 센티옹엔 코빼기도 안비친다더니 저쪽으로 완전히 붙어 버렸어요…”
그 즈음 스텔라는 마침내 센티옹을 떠나 뿔로가둥(Pulo Gadung)공단 뒷문 뻐무다 거리(jl. Pemuda)로 숙소를 옮긴 상태였습니다. 스테피 양부모의 검사 아들이 사는 곳과 가까운 곳이었어요. 스텔라는 교회도 그들이 나가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메이는 스텔라가 완전히 변해 버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어쩌면 메이의 마음에도 스텔라 자매에 대한 일말의 시기심이 싹 튼 것일까요? 곧바로 상류사회에 편입해 버린 것 같은 그 두 소녀들에게 말입니다.
나 역시 어느 정도 마음이 불편했던 게 사실입니다. 크게 변한 신분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이 메이 만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어요. 실제로 상류사회에 편입된 사람은 스텔라가 아니라 스테피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스텔라는 자신의 동생에 대한 권리를 내세우며 스테피 양부모에게 기대면서 부담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동생을 위해서라도 그래서는 안되는 것인데 스텔라는 그런 것을 자각하기에 너무 어렸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토록 동생을 아끼고 위하던 스텔라도, 스테피의 가파른 신분상승을 목격하면서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동생을 시기하게 된 것일까요?
동생을 빌미로 그 양부모 집안에 무임승차 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를 완곡하게라도 꼭 해줬어야 했는데 난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현지인 여인과 결혼한, 꼭 한국인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맞닥뜨리는 골치 아픈 상황 중 하나가 천지사방에서 몰려들어 손을 벌리는 친인척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조금 경우는 다르지만 스텔라는 그런 친인척과 비슷한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꾸 기대어 오는 스텔라를 스테피의 양부모가 언젠가 부담스럽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그로 인해 급기야 스테피를 입양한 것마저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죠.
그러면서 우린 자연스럽게 스텔라 자매에게서 차츰 멀어졌습니다. 언젠가 한번 수금하고 나오던 길에 끌라빠가딩몰 로비에서 스텔라와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우리에게 깎듯이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하던 스텔라는 스테피의 양부모 검사 아들의 처와 쇼핑을 나왔던 거였습니다. 그런 쟁쟁한 집안의 며느리가 스텔라와 팔짱을 끼고 몰을 거니는 것이 한편으로 대견스러워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딘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메이는 그날 내내 심기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메이는 어린 시절을 동생들과 함께 매일매일 공포 속에서 살았어요. 아버지가 휘두르던 터무니없이 잔인한 가정폭력은 메이의 가족 구성원 모두의 심신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겼고 훗날 장성하여 칠순의 나이에도 집안에서 집안에서 정글도를 휘둘렀습니다.
메이와 일한 지 3년 쯤 되었을 떄 메이의 딸 차차 머리가 깨진 걸 보고 센티옹 까위까위 골목까지 꾸역꾸역 찾아가 메이 아버지를 대면한 적이 있습니다. 일 때문에 메이가 딸을 엄마에게 맞겼는데 뭐가 뒤틀렸는지 아버지가 손녀에게 자전거를 집어던졌다는 겁니다. 차차 머리가 5센티 정도 찢어졌는데 차차가 자지러졌을 장면을 떠올리니 눈이 뒤집혔던 겁니다. "한 번만 더 애를 건드리면 당신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어!" 나는 이렇게 협박하며 으르렁거렸고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약자들에게만 강한 사람들의 전형이었죠.
나중에 아버지의 팔을 잡고 넘어뜨릴 수 있게 된 20대 후반에서야 메이는 마침내 지긋지긋한 가정폭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혼모란 굴레는 지금도 메이를 옥죄고 있죠. 조금만 잘못해도 딸의 손등을 벽돌로 찍고 정강이에 담뱃불을 지져 끄는 현실의 친아버지 대신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는 포근한 아버지 이미지를 늘 상상 속에서 그렸을 메이는 까위까위 골목에서 가장 천대받던 스테피에게 실제로 나타난 양부모와, 그들과 함께 싱가포르로 날아가는 스텔라 자매를 보면서 자신의 고단했던 과거를 다시 한번 곱씹게 되었던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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