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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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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천사들

우리동네 천사들 (8)

beautician 2022. 1. 5. 11:19

 

ep8. 그 후로도 오래동안

 

메이 막내동생 예니 결혼식에 신부 가족으로 참석한 스텔라(오른쪽 두 번째)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시간은 약이 됩니다.

 

1년쯤 시간이 흐르면서 그때 스텔라에게 가졌던 메이의 시린 마음도 눈 녹듯 녹아갔습니다. 그 사이 아르타가딩몰의 살롱 루디는 문을 닫았습니다. 아르타가딩몰이 개장한 이래 수익을 내지 못해 닫은 미용실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끌라빠가딩엔 이미 너무 많은 몰들이 들어차 있었던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스텔라는 레레 등과 함께 위스마가딩 아파트(Apt. Wisma Gading) 인근의 살롱 루디 아울렛으로 옮겨 갔습니다. 마침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고급 미용스파 체인 로저스(Roger’s)의 끌라빠가딩 지점도 문을 닫아 그곳을 그만 둔 특급미용사들이 루디에 합류하면서 그 아웃렛은 아연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우리와도 거래가 많아졌어요. 당연히 스텔라와 자주 마주치게 되었죠.

 

스텔라는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OM은 물론 미용실 동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근태도 획기적으로 좋아졌고 나름대로 열심히 일한 덕에 충실한 단골도 생기고 커미션을 포함한 월급이 자카르타 주정부가 정한 최저임금을 윗돌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고 외모와 분위기가 많이 변했습니다. 스텔라는 스테피처럼 미인형은 아니었지만 처음 볼 당시 무서울 정도로 번져있던 여드름이 그간 꾸준히 약을 먹었는지 완전히 가라앉았고 약간은 신경질적이던 표정도 잘 관리해 무척 차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거기서 레레는 물론 수석미용사 이르판(Irfan)도 침이 마르도록 스텔라 칭찬을 했습니다. 물론 그게 내 앞이라 조금 더 과장한 면이 없지 않았겠지만 최소한 스텔라는 미용실 초짜 티를 완전히 벗었고 언니 오빠 뻘인 미용실 동료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어요.

 

스테피도 잘 지내지?”

그럼요, 걔가 이번에 학교에서 2등을 했어요. 스테피가 천재인 줄은 이제까지 나도 몰랐어요.”

스텔라는 신이 나서 스테피의 학교생활을 자랑했어요. 물론 까위까위 골목에서 껑충한 키와 떡진 머리를 하고서 글을 읽지도 못하고 유치원 근처에도 못 가본 일곱살 짜리 여자 아이가 아직도 밤엔 기저귀를 차고 잤었는데 불과 1년여만에 어엿한 사립 초등학교 2학년생이 되어 반에서 2등을 하는 천재(?)가 되었다니 듣는 사람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눈은 완전히 정상이 된 거지? 자주 만나니?”

그게…, 자주는 못만나요.”

안색에 살짝 슬픈 기색이 스치는 것을 난 놓치지 않았습니다.

 

스텔라의 양부모가 엄격히 제한하면서 스테피 만나는 걸 좀처럼 허락해 주지 않는 모양에요. 그래서 스테피가 졸라 댈 때만 한 달에 한 번 꼴로 만나는 것 같아요. 지난 달엔 스텔라가 스테피를 센티옹에 데려와 엄마 집에서 놀다 갔대요.”

나중에 메이의 설명을 들으며 스텔라와 스테피 두 자매가 얼마나 서로를 그리워 하고 있을까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 모종의 선을 그어 놓으려는 스테피 양부모의 생각도 이해되지 않는 바 아니었어요. 비록 두 사람은 친자매이지만 스테피가 입양되던 그 시점부터 두 사람이 사는 세계는 서로 전혀 다른 곳이 되어 버린 셈이었어요. 스테피 양부모 측에선 스텔라와 거리를 두려 하는 것이 분명했고 스텔라 역시 그동안 스테피의 세계를 잠깐씩 들여다 보면서 자신의 현 위치, 즉 입양된 사람은 동생 스테피이지 스텔라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하는 가슴 아픈 학습과정을 거쳤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구름 위까지 떠올라 허공을 헤매던 스텔라는 먼 길을 돌아와 마침내 다시 지상에 두 발을 딛게 된 것이죠.

 

이미 뿔로가둥으로 숙소를 옮긴 상태였지만 그 후 스텔라는 좀 더 자주 우리 주변에 출몰했습니다. 가끔 음식이나 선물을 사들고 센티옹 티티 아줌마 집에 나타나 함께 수다를 떨며 설거지, 빨래를 도와주기도 하고 뻠반뚜 문제로  메이가 곤경에 처하면 자기가 미용실에서 쉬는 날 메이 집에 찾아와 애들을 봐주기도 했습니다. 예전처럼 메이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무조건 다시 따르기 시작했고요. 그녀는 이제 센티옹의 까위까위 골목을 완전히 떠나 세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갔지만 오히려 우리 곁에 완전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메이의 애들을 봐주러 온 스텔라를 아파트 로비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검정고시를 보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어요. 인도네시아에도 빠껫(paket)이라 부르는 그런 비슷한 제도가 있는 모양인데, 나중에 대학은 물론 유학도 가게 될 스테피가 언니를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최소한 고졸 자격증까지는 따 두라고 했었죠. 메이는 스텔라가 그날 저녁 내내 검정고시에 대해 메이에게 묻고 또 묻더라고 전해 왔습니다. 메이는 그런 마음을 먹는 스텔라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처음 이 글을 마무리짓던 2013년 8월 당시엔 스텔라가 두 달 후면17번째 생일을 맞던 때였습니다. 스텔라를 알게 된지 2년이 지나던 시절이었죠. 

 

이제 그로부터 10년쯤 더 시간이 흘렀습니다. 소녀들은 모두 성장해 스텔라는 20대 후반에 접어들려 하고 있고 스테피는 기숙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일은 입양되었던 스테피가 파양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란 그렇게 가벼운 것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스테피의 학업은 미스터 루디의 교회에서 계속 지원하고 있습니다. 학교를 마치면 미스터 루디가 애당초 계획했던 대로 미용교육을 받게 될 공산이 큽니다. 물론 스테피가 다른 꿈을 꾸고 있다면 전혀 다른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되겠죠.

 

한편 스텔라는 1년 전 쯤 애인과 함께 족자로 간 후 연락이 끊긴 상태입니다. 연을 끊듯 연락을 끊은 것은 아니니 언젠가 다시 연락이 닿겠지만 스텔라 역시 나름 격동의 20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 자카르타에서 긴 얘기를 하는 기회가 곧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이 아이들이 커가는 동안 여러 사람들이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한국 속담에도 아이를 키우는 데에 한 마을이 필요하다 하는데 그것은 인도네시아에서도 역시 진리입니다. 양육이란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교육과정에서 아이가 스스로 여러 단계의 결정을 통해 결국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 결정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주변 사람들이 스텔라와 스테피에게, 아주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닐지 모르나, 나름 최선을 다했던 것 같습니다. 미스터 루디와 메이를 포함해서. (끝)

 

 

 

2021. 12. 25

(2013. 8. 23. 원본을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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