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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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천사들

우리동네 천사들 (3)

beautician 2021. 12. 31. 11:23

 

ep3. 모래지옥

 

 

외근 길에 일이 있어 메이가 센티옹 부모집을 들른 적이 있는데 함께 갔던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까위까위(Kawi-Kawi)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기다렸습니다. 어디나 그렇듯 할렘의 동네 아이들이 좁은 골목에서 공도 차고 달리며 몰려다니면서 자꾸 차를 건드려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짖고 까부는 아이들 사이에 확 눈이 띄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다른 취학 전 코흘리개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깡마른 단발머리 여자애였습니다. 팔 다리가 유난히 긴 그 아이는 선명한 이목구비를 하고 있어 앞으로 남자들 마음을 무척이나 흔들 미인으로 자라날 것이 틀림없어 보였는데 그래서 걸치고 있는 넝마 같은 옷가지나 레게 머리를 하려다 만 듯한 떡지고 삐죽삐죽 뻗친 머리칼이 흰 피부와 티없는 밝은 미소에 크게 대조되고 있었습니다.

 

얘가 스테피에요. 스텔라 동생.”

집에서 일을 마치고 차로 돌아오던 메이가 마침 그 아이 팔을 끌고 와 내게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 금방이라도 이와 서캐들이 일개 중대 정도 우수수 떨어져 내릴 듯한 스테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나도 모르게 탄식을 흘린 이유는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던 스테피의 두 눈 때문이었습니다. 스테피는 심한 사시였어요.

 

사실 일반적인 사시는 그리 복잡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간단한 안과 수술을 통해 비교적 쉽게 교정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한 친구가 교통사고로 목이 꺾이며 어떤 신경을 건드려 그 후유증으로 심한 사시가 된 것을 수술로 바로 잡는 것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세 끼 얻어먹기도 힘든 형편의 스테피로서 수술은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죠.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자라날 여자아이가 사시로 놀림당하며 클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스텔라 자매의 당면과제는 스테피의 사시 교정보다는 당장 오늘 또 하루를 살아낼 방편을 찾는 것이었어요.

 

일곱 살의 스테피는 아직도 이부자리에 오줌을 지리곤 했다는데 내가 비록 의사는 아니지만 아이들과 함께 골목축구도 하며 놀 정도의 아이라면 신체적 문제보다 정신적 문제일 거라 생각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까지도 하루에 한 두 끼 먹을 동 말 동한 스테피의 영양상태는 극도로 좋지 못해 온몸에 희끗희끗한 반점들이 돋아 있었고 동네 아이들과 뛰어 놀다가도 곧잘 천식 발작을 일으키곤 했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걸핏하면 동네 아줌마들에게 조리돌림 당하곤 했다는 사실이 어린 스테피에게 정신적 외상을 남겼을 것 같습니다. 널어둔 빨래가 없어지거나 밖에 놔둔 아이들 장난감이 파손되어 있거나 하면 동네 사람들은 아무런 물증이나 증인도 없으면서 무조건 스텔라 남매를 범인으로 지목하곤 했는데 낮시간엔 대개 스텔라가 푼돈을 벌러 어딘가로 나가 있었으므로 스테피가 꼬스에서 끌려 나와 골목에서 아줌마들에게 둘러 쌓여 호된 꾸중과 질타를 당했고 때로는 구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언제가 낮에 스텔라의 꼬스에 들이닥친 둘째 오빠가 스테피를 밀쳐 내고 스텔라가 방세를 내려고 작은 종이박스에 모아둔 돈을 홀라당 털어 가면서 이웃집 세발 자전거를 막무가내로 들고 갔던 모양인데 그걸 보고 있던 동네사람들은 그 험악한 인상에 찍소리도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그렇지 않아도 예기치 않았던 둘째 오빠의 습격에 충격을 받고 망연자실해 있던 어린 스테피를 끌어내 자전거값을 물어 내라며 무자비하개 구타했다고 합니다. 티티 아줌마가 황급히 사람들을 만류하며 뛰어들었을 때 멍한 표정의 스테피는 목이 휙휙 넘어가도록 귀싸대기를 맞으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합니다.

 

잠깐, 잠깐! …, 둘째 오빠란 인간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그게 둘째면 큰오빠도 있는 거야? 스텔라랑 스테피, 걔네들 두 자매 뿐이었던 아니었어?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뭔가 장황한 얘기를 설명들을 때 앞뒤 맥락이 잘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벌어집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다시 따져 물으려 하면 얘기하던 사람은 그것도 이해 못하느냐는 듯 뚱한 표정을 짓곤 하지요. 바로 메이가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어요

 

놀랍게도 스텔라에게는 두 명의 친오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텔라를 낳아준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엄마가 재혼하여 스테피를 낳아 준 아버지가 바로 얼마 전에 돌아가신 분이었어요. 스텔라와 스테피는 서로 다른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았던 거에요. 두 사람의 외모가 그렇게 천양지차를 보였던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오빠들은 스테피에겐 아버지가 다른 오빠들이었죠. 두 오빠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나가 살며 길바닥 양아치 생활을 하고 있었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마약에 깊이 빠져, 돈이 완전히 떨어지면 부모의 약값이나 병원비를 털어가곤 했는데 이젠 여동생들 목에 풀칠할 푼돈까지 긁어갔습니다. 차라리 없는 것이나을 오빠들이었죠.

 

그날 그 소식을 듣고 사색이 되어 달려온 스텔라가 스테피를 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는 대목에서는 내 마음이 몹시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어디 스테피를 맡겨 둘 만한 곳이 전혀 없단 말이야?”

 

스테피보다 앞서 메이의 아파트에서 스텔라를 먼저 만났어요. 메이의 아이들을 봐주던 뻠반뚜(pembantu-가정부)가 그만 둔 지 오래 되어 도움이 절실하던 때에 마침 메이와 스텔라의 이해가 서로 맞아 떨어졌던 거에요. 메이는 누군가 믿을 만한 사람에게 애들을 맡겨 놓지 않고서는 마음 놓고 출근할 수도 없는 처지였고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던 스텔라에게 아파트에서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동네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돕는 것보다는 비교적 편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스텔라는 티티 아줌마의 장녀인 메이의 말이라면 군소리 없이 잘 따랐어요.

 

스테피는 우리 엄마한테 맡겨 놓았어요. 그래야 스텔라도 안심이 되죠.”

티티 아줌마는 센티옹의 본가에서 남편과 피자헛 다니는 둘째 딸의 아이들도 돌봐야 했으므로 얼마간 거리가 떨어진 쯤빠까마스까지 와서 메이의 아이들을 봐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네에 사는 스테피를 잠시 봐주는 건 가능했지만 늘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테피는 홀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스텔라로서는 어린 동생 저녁밥이라도 제대로 챙겨 먹이려면 일찍 퇴근해야만 했고 동생에게 일이 생기면 모든 걸 팽개치고 달려가야 했으므로 어딘가에 진득하게 오래 일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성년도 되지 않아 제대로 취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요. 어쨋든 스테피는 스텔라가 안정적인 직장을 얻는 데에 있어 결정적인 걸림돌이었습니다. 소중한 동생이 그녀의 두 발을 칭칭 감는 무거운 족쇄였던 것입니다.

 

족쇄

 

스텔라가 성인이 되어서 제대로 된 직장을 잡고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될 때까지 스테피를 고아원 같은 시설에 잠깐 맡겨 놓을 수도 없는 건가?” 외근 길에 메이에게 따로 물었을 때 메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그게 어떤 법규 때문인지, 아니면 자선단체나 독지가로부터 후원을 받기 위해 꼭 필요한 절차였는지는 몰라도 고아원들은 모두 하나같이 스텔라에게 친권포기각서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건 스테피가 고아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당장 누군가에게 입양될 지도 모른다는 뜻이었고 니중에 고아원이 원칙을 들먹이며 스테피가 입양되어 간 곳을 알려주지 않으면 스텔라는 동생과 영영 생이별을 하게 될 판이었습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런 규정의 헛점을 틈타 사설 고아원들이 영-유아들을 국내외에 팔아먹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들었습니다. 스테피의 고아원행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스텔라도 어쩌면 그런 온갖 무시무시한 소문들을 들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얼마 후 정식 뻠반뚜를 구하면서 메이 집에서 보모 알바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자 스텔라는 어떤 방문판매 조직에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월급도 많고 장래성도 있는 일이라며 스텔라가 한껏 들떠 있었다는데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미성년의 스텔라에게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기에 난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월급 나올 거라 기대했는데 막상 월급날 되니 6개월 간은 훈련기간이라서 급여가 없다고 하더래요. 물론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물건을 팔면 높은 판매커미션을 약속했지만 훈련교육비라는 게 있어서 커미션으로 상쇄하고도 모자라, 그만큼을 스텔라가 회사에 내야 한데요. 하지만 훈련기간 끝나고 나면 웬만한 은행원들 월급의 몇 배는 받게 된데요. 취업사기 같은 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어리숙한 스텔라가 정통으로 걸려 든 것이었고요. 그 얘기를 전하는 메이의 목소리에도 한숨이 섞여 있었습니다. 당장 그만 두고 나오라 해!”

 

결국 스텔라를 그 방판 사기조직에서 빼내오긴 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교육도 경험도 일천하고 아직 나이도 미성년인 스텔라에게 그나마 안정적인 직장이란 현실적으로 어딘가에 입주 가정부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테피를 돌봐야 하는 스텔라에겐 선택지가 될 수 없었습니다.

 

미용실에서 샴푸부터 좀 배워 보라고 하지? 크림밧이나? 크리스토퍼(Christopher)나 마이살롱(My Salon) 같은 데에 좀 부탁할 수 있잖아? 이런 제안이 목젖까지 올라 오는 것을 매번 애써 참곤 했습니다. 사실 당시 우리가 움직이고 있던 미용시장에 끌어들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스텔라를 도울 수 있는 일이었고 메이도 내심 내가 그렇게 접근해 주기를 기대하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양날의 칼 같은 것이었어요.

 

미용업계는 당시 내 인생의 텃밭과도 같은 곳이어서 나름대로 힘도 쓰고 영향력도 발휘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을 섯불리 보증했다가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그간 노력하여 쌓아 놓은 것들 전부, 또는 일부가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내 뒷덜미를 잡아 당겼던 것입니다. 사업에서나 생활에서나 나와 내 사업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사람들과 어느 정도 일정한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스텔라를 미용업계로 끌어 들이는 것은 그녀를 내 공간 안으로 너무 깊숙히 들여놓는 것이었고 스텔라의 등엔 '배 아무개의 사람'이라는 라벨이 붙을 터였습니다. 그럼 이제 15살 짜리 여자아이의 행동과 태도가 내 회사의 평판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난 당연히 주저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약쟁이 둘째 오빠 얘기와 스테피가 목이 휙휙 돌아가도록 동네 아줌마들에게 귀싸대기를 맞으며 조리돌림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서 그 시점에서 뭔가 결심하지 않으면 골든타임을 놓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텔라가 자신의 미래를 가지려면  티티 아줌마 외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오히려 폭행와 폭언에 무방비로 노출되곤 하는 센티옹 까위까위 골목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내가 메이와 그녀의 아이들을 거기서 빼낸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스텔라 혼자 아둥바둥 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설령 내가 거래선들 도움을 얻어 스텔라의 직장을 얻어 주고 스텔라 자매의 숙소 문제를 해결해 준다 해도 언제나 모든 계획의 끝에 스테피는 방치되는 모양새였습니다. 내 능력과 방법으로 두 소녀를 모두 구할 수 없었습니다. '역시 스테피는 고아원에 보내야 하나?'  내 생각은 늘 그 막다른 골목에서 멈췄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이들을 구한다는 명분을 사실은 그나마 남아있던 '가족'이란 관계를 내가 나서 와해시키는 꼴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어요.

 

고아원보다…., 일단 학교부터 보내자.”

 

우선의 결론은 그랬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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