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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천사들

우리동네 천사들 (1)

beautician 2021. 12. 29. 12:18

 

ep1. 엑소더스

 

수마트라 북쪽의 바딱 지역

 

 

15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도록 한껏 무르익은 스텔라(Stella)는 거의 성숙한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성의 순결을 강요하는 무슬림 규범에도 불구하고 자유분방하기 이를 데 없는 대도시 할렘 청소년들의 성의식을 따랐다면 벌써 남자친구 여러 명을 난잡하게 사귀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고 경제적 이유로 13-14세의 여아를 30-40대의 남자에게 팔아 치우듯 돈을 받고 조혼시키곤 하는 인도네시아 촌구석의 전통적 관습을 생각한다면 이미 아이를 한 둘 낳았어도 이상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스텔라가 그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했던 것은 학교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가난하다는 것이 어린 딸을 돈 많고 나이 많은 친인척, 동네 유지에게 둘째 또는 셋째 처로 서둘러 조혼시키는 이유가 되는 것이 현실이었지만 그나마 그렇게도 되지 않은 이유는 조혼시킬 부모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빈한한 환경 속에서도 자상하게 가족을 돌봤던 아버지가 병은 얻어 세상을 떠난 게 스텔라가 10살쯤 되던 해였고 어머니마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어린 스텔라가 무슨 수로든 돈을 벌지 않으면 가족들이 모두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스텔라가 초등학교 3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엄혹한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선행과 나눔을 강조하는 이슬람 사회에서 왜 스텔라의 가족들에게 닥친 가혹한 불행을 나몰라라 방관하고만 있었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 합니다. 사돈에 당숙, 팔촌에 먼 친척까지 광범위한 가족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는 인도네시아에서 친인척들은도대체 뭘 하고 있었냐고도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텔라의 이웃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스텔라의 가족들이 외지인이라는 것이었어요. 스텔라의 부모는 둘 다 수마트라 북쪽 메단을 중심으로 한 바딱 지역 출신입니다. 바딱 사람들은 성마르고 딱딱거리고 성질 급하고 화도 잘 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리하고 힘도 잘 쓰고 때로는 합리적이기까지 해서 인도네시아에선 군, 경찰, 정치, 법조계는 물론 재계에서도 광범위하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부족입니다. 그래서 자카르타 토박이인 버따위 사람들이나 느려터진 자와, 순해빠진 순다족들에게 바딱 사람들은 대체로 질시의 대상이었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딱족인 스텔라 가족은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뛰어난 재력으로 현지인들 위에 군림하던 화교들이 1998년 자카르타 폭동 당시 폭도들에게 공격당하고 화교여인들이 대대적으로 겁탈, 살해당했던 것처럼 센티옹 빈민가의 버따위 사람들에게 바딱 사람을 대놓고 짓밟을 흔치 않은 기회가 찾아 온 겁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이웃들은 스텔라 가족들의 종교를 차별과 멸시의 이유로 들었습니다.이슬람이 압도적 대세인 인도네시아, 센티옹의 그 동네에서 스텔라의 가족들은 대부분 바딱족 사람들이 그렇듯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이웃들은 굳이 기독교인들을 도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이웃들에 비해 스텔라 친가나 외가 친척들은 더욱 못된 짓을 했습니다.

스텔라가 14살 되던 해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스텔라와 여동생 스테피(Stephy)는 어머니를 브따위 땅에 묻고서 친가 삼촌 손에 이끌려 메단으로 가게 되지만 이후 곧 도망쳐 나와 몇 개월간 구걸을 하며 긴 길을 걷거나 차를 빌려 타고 나중엔 페리에 간신히 올라타는 등 힘겨운 대장정 끝에 센티옹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과정이 너무 처절했습니다. 

 

대신 부모처럼 돌봐 줄 것이라 기대했던 삼촌부부는 스텔라와 스테피를 노예처럼 부려 먹었고 스텔라는 시시때때로 삼촌이나 사촌오빠들에게 폭행을 당했어요. 손찌검을 넘어 언제 강간당할 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에 처했는데 아직 어린 스테피도 똑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스테피는 그때 불과 일곱살이었는데 말입니다. 거기선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한 스텔라는 마침내 동생과 함께 메단 탈출을 시도하기에 이릅니다. 메단을 떠난다면 그들이 돌아갈 곳은 센티옹 뿐이었어요.

 

메단과 자카르타는 비행기로도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지만 스텔라 자매에게 비행기 삯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돈이 있다 한들 어떻게 비행기표를 사야 하는지도 모를 어린 아이였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바닥으로 도망쳐 나와야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만큼 스텔라는 스테피를 위해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중학교 갓 들어갔을 정도 나이의 아이가 거기서 도망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던 모양입니다.

 

나쁜 놈들 사이에도 개중엔 정의감 넘치는 사람도 섞여 있기 마련이라 스텔라 자매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던 다른 친척에게 약간의 돈을 받아 메단을 빠져 나오는 데 성공하지만 이제 자카르타가지는 육로로 2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차를 얻어 타고 음식을 구걸하면서 한달 가까이 걸려 자바 섬이 멀리 건너 편에 보이는 순다 해협 앞의 항구도시 람뿡(Lampung)까지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배삯을 구하기 위해 오랫동안 구걸한 끝에 마침내 페리를 몸을 실은 그들은 순다 해협을 건너 자바섬의 메락(Merak)에 내렸습니다. 차를 탄다면 자카르타까지 네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스테피 자매는 메락에서 자카르타의 센티옹까지 다시 몇 주가 더 걸렸습니다.

 

그들은 그 거리 대부분을 구걸하며 걸어야 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센티옹에 도착한 스텔라와 스테피의 행색은 너덜너덜한 넝마를 걸친 영락없는 영양실조 거지꼴이었고 스테피는 심한 기침을 했는데 폐결핵이나 천식이 의심되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온 센티옹에서는 아무도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센티옹엔 외가쪽 이모뻘 되는 친척이 집에 많은 방을 벌집처럼 넣어 개조한 자취방인 꼬쓰(Kost)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스텔라 자매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앓다가 죽은 곳도 바로 그곳 자취방이었죠. 지치고 허기진 아이들이 밤새 문 두드리는 소리를 이모 부부는 분명히 들었을 것이고 살짝 내다보기도 했겠지만 끝내 스텔라 자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스텔라와 스테피는 동네 도둑고양이들과 함께 쓰레기통을 뒤져 썩은 음식찌꺼기로 주린 배를 채운 후 꼬스 문간에 웅크려 앉아 서로 껴안고 쪽잠을 잤습니다. 하지만 썩은 음식 먹은 게 탈이었습니다. 그날 밤 스테피가 경기를 일으켜 눈을 뒤집어 깐 채 거품을 물었고 어쩔 줄 몰랐던 스텔라는 울음을 터뜨릴 뿐이었지요. 그 소동에 잠이 깬 반장 격 에르떼(RT)가 마지 못해 나서지 않았다면 스테피가 그 날 어떻게 되었을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에르떼가 문을 두드리고 사람들이 꼬스 앞에 뭉게구름처럼 모여들자 이모 부부가 어쩔 수 없이 스텔라 자매를 안으로 들였고 스테피도 응급치료를 받을 수 있었어요. 이모는 마지못해 예전에 그들이 어머니가 임종했던 그때 그 방을 내주었지만 단단히 다짐을 받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세상엔 공짜란 없는 법이야. 그러니 이 방에서 살고 싶다면 합당한 월세를 내야 해. 한 달에 50만 루피아야. 다음 월말까지 월세를 낼 수 없다면 나도 너희들을 공짜로 재워줄 수 없다.”

 

한화로 6만원. 하지만 2012년 쯤의 일이니 그 가치는 지금으로 치면 30만원 쯤 되지 않을까요? 그 월세를 당시 14살이던 스텔라로서는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언제 다시 경기를 일으키며 발작할 지 모를 스테피를 데리고 길바닥으로 쫒겨날 수는 없었으므로 스텔라는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몇 달에 걸쳐 메단에서 자카르타까지 오면서 겪었던 그 모든 수모와 고통와 위기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때보다는 훨씬 상황이 나아진 거라고 스텔라는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엄혹했어요. 스텔라는 월세 50만 루피아 말고도 스테피와 함께 먹고 살 음식도 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스텔라는 다음 날부터 센티옹 온동네를 돌아다니며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4살짜리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이 집에 들어가 빨래를 해주고 저 집 아기를 봐주기도 하고, 또 다른 집 아주머니가 시장에 가면 구매한 물건들을 집까지 들어다 주기도 하면서 아줌마들에게 꼬깃꼬깃한 잔돈을 받았지만 하루 종일 쫄쫄 굶으며 모아도 하루에 몇 천 루피아가 고작이었어요. 그 돈으로는 월세는커녕 스테피와 하루 한끼 챙겨 먹기에도 부족했습니다. 세상은 어린 스텔라에게 너무 가혹했고 그녀의 고단한 삶에는 그 어디에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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