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우리동네 천사들 (4) 본문
ep4. 루디 하디수와르노
스테피를 학교에 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초등학교는 명목상 인도네시아에서도 무상교육이었으므로 티티 아줌마가 가까운 초등학교에 수속을 마쳤고 메이를 통해 필요한 교복이나 가방, 학용품을 사주고 내가 일부 경비를 지출하는 것만으로 스테피는 꿈에도 그리던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테피가 기뻐하는 표정을 보니 저 기쁨을 지켜줘야 할 것 같다는 책임감이 조금 더 커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 두 자매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좀 더 노력해 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스텔라가 스테피와 헤어지지 않고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는 게 중요했습니다. 결국 내 거래선들에게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밖에 없었는데 루디 하디수와르노(Rudy Hadisuwarno)사에서 관심을 보였습니다.
“미스터 루디를 직접 만나 보실래요?”
인도네시아 미용계의 거장 루디 하디수와르노와는 제품 납품이나 세미나 찬조 등으로 이전에도 몇 번 미만난 바 있었고 이런 저런 행사에서 마주치며 인사를 주고 받던 사이였어요. 환갑이 넘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 동안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그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동시에 게이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스텔라에게 취업 기회를 주신다면 그 애가 루디학원에서 미용공부 하는 비용은 제가 지원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외국인이 그런 부분까지 염려하시다니 놀랍고 고마운 일입니다. 역시…, 스테피가 문제군요.”
함께 동석한 메이의 설명을 끝까지 듣고 난 미스터 루디는 잠시 숙고하더니 그렇게 운을 떼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짚는 것을 보면 그는 우리 얘기를 정말 경청했던 것 같습니다. 미스터 루디의 인품을 익히 잘 알고 있던 나는 그가 뭔가 좋은 방법을 등 뒤로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우리 교회에 그런 일을 돕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이번 주일에 교회에서 야야산(yayasan-협회) 임원들과 얘기를 해봐야 하겠지만 스텔라 자매를 효과적으로 도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스터 루디는 절대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바로 다음 주 초, 루디 본사에 불려가 실무자와 미팅을 하고 돌아온 메이는 뛸 듯이 기뻐하며 자신이 들고 온 소식을 풀어 놓았습니다.
스텔라는 메니패디와 크림밧부터 시작해 헤어컷과 메이크업 등 미용교육 풀코스를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교육받는 데 교육비 면제는 물론 해당 장비까지 루디 본사에서 무상 공급해 주기로 했고 과정을 모두 수료하면 미용실 아웃렛에서 직원으로 채용하되 학원 수료생들이 대개 지방 아웃렛으로 발령나는 것과 달리 스텔라는 스테피를 돌볼 수 있는 자카르타, 그것도 숙소 가까운 아웃렛에서 일하게 해준다는 것이었어요. 교육과 취업이 동시에 보장된 것입니다.
“스테피는 학교를 옮겨야 할 것 같데요.”
미스터 루디의 교회와 관련있는 야야산에서 서부 자카르타에 상류층을 위한 공립학교 격인 내셔널 플러스 (National Plus) 레벨의 기숙사형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스테피는 그 학교 기숙사에 넣고 모든 비용을 야야산에서 부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스테피에게 용돈까지 지급하기로 했고요.
“게다가 스테피가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후 본인이 원한다면 루디 하디수와르노에서 풀코스 교육과 채용까지 미스터 루디 당신이 개인적으로 직접 보장했대요.” 운은 타고나는 것인데 스텔라-스테피 자매는 처음부터 그런 운을 타고 났던 것같습니다..
인도네시아의 개신교도들 중엔 놀라운 신앙과 존경할 만한 인품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아 부패하고 나태한 정부기관들이 할 리도 없고 그럴 의지조차 없는 고차원적인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모양이었어요. 그리고 하필 미스터 루디가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 학교 야야산이나 루디 하디수와르노 미용체인도 그런 교회 프로그램에 제휴된 단체들이었던 것이죠.
게다가 마침 세대교체 중이던 루디 본사의 특별한 입장도 있었습니다.
이렇다 할 후계자를 키우지 못한 채 환갑을 넘긴 미스터 루디와 그의 창업세대들은 전국에 산재한 160개가 넘는 아웃렛과 그간 쌓아온 명성을 지키고 발전시킬 다음 세대를 급히 키워 내야 할 급박한 필요에 부딪혀 있었습니다. 자식이 없는 미스터 루디는 몇 년 전 은행원 출신 조카를 전체조직의 회장으로 앉히고 급격한 노령화가 진행된 본사 아트팀에 20대 중반의 조카 디아나(Diana)를 영입하는 파격을 단행합니다. 사실 세대교체는 인도네시아 미용계 전반에서 거의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 1세대에서 미스터 루디가 단연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반면, 그 다음 세대에서의 위상은 여러 경쟁자들에게 도전받고 있어서 미스터 루디는 디아나를 보좌할 강력한 아트팀을 구축할 자기 사람들을 키워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와 있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어린 스텔라와 스테피가 루디 하디수와르노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스테피가 새 학교의 말쑥한 교복으로 갈아 입고 티티 아줌마에게 인사한 후 미스터 루디가 내어 준 고급 승용차에 올라 타 기숙사로 떠나던 날 센티옹의 골목길은 놀라움과 찬탄에 술렁이며 발칵 뒤집혔고 사람들은 부러움과 시기의 시선을 던지며 끝없이 수근거렸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그 누구에게도 예전처럼 감히 스테피를 조리돌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꿈도 꿀 수 없게 된 것이죠.
나나 메이도 물론이지만 가장 기뻐한 사람은 역시 스텔라였습니다. 동생이 동네 인근의 허접한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때에도 눈물을 펑펑 흘리며 기뻐했던 스텔라는 말쑥한 고급 교복을 입고 기숙사로 들어가는 스테피의 모습에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그 후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었습니다'로 끝나는 동화와는 전혀 다른 장르입니다. 아직도 어린 스텔라와 스테피의 앞길엔 여러가지 일들이 다이내믹하게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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