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인도네시안 드림 (6) 본문
ep6. 어려울 때 친구
교민사회 역사의 많은 부분이 이루어지는 곳이 교회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특정 신앙이라는 주관적인 부분을 차치하면 빈부와 업종을 초월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비교적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 교회이기에 운이 좋으면 기대했던 것 이상의 다양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조리용 도마에 올라 토막토막 다듬어져 권사들과 여신도들 송곳니에 찔리고 어금니에 씹히기도 하는 곳이지요.
양프로도 절대 나가지 않을 것 같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부인 손에 이끌려 나갔을 것이 틀림없는 그가 교회 체육위원 감투까지 쓴 것은 자신의 골프레슨사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기대했던 것이라 이해하지만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카르타에 도착한 이후 적진에 침투한 스나이퍼처럼 늘 사면초가가 되어 이리저리 얻어 맞았던 양프로로서는 드디어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그곳에서 만나게 된 것 같았습니다.
반면 내 미용사업은 약간의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우리 매출의 40% 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위탁판매 매출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카리조(Makarizo)라는 현지 브랜드의 배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납품하던 주력 미용가위를 중국 광동성의 한 공장에서 그대로 복제하여 거래 3년 만에 자기들 브랜드로 내 놓았던 것입니다. 품질은 천양지차였지만 디자인에서 거의 모든 디테일이 우리 제품을 매우 유사하게 모방한 그들의 제품은 포장지 색상만 조금 다를 뿐이었어요. 그 방법이 야비했지만 원가가 획기적으로 싸게 먹히는 자사 브랜드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우리처럼 작은 업체가 마카리조 같은 큰 업체에 밟혀 죽어도 찍 소리 못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다반사였죠. 그래서 우리 제품에 대한 마카리조의 발주는 매월 급격히 줄어들다가 그로부터 1년 후 급기야 거래중단에 이릅니다. 양프로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던 시기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최사장의 일을 돕고 있다는 사실에도 있었어요. 20대, 30대 시절엔 사람의 능력이란 무한한 것이어서 노력하면 일의 양이나 난이도에 관계없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것이 신념이라기보다는 미신에 가깝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죠. 실제로 의류사업을 하던 90년대 말, 형의 국제택배사업을 돕는다며 2년간 전력을 다한 끝에 형의 사업은 어느 정도 띄워놓고서 오히려 내 사업이 거의 다 망가졌던 일도 있었고 골프샵과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면서도 틈틈이 매진한 미용사업은 투자되는 절대시간의 부족으로 획기적 발전기회를 번번히 놓치고 있었습니다. 나 자신이 슈퍼맨이 아니라는 당연한 진리를 깨닫고 내 능력이라는 것이 스스로 상상했던 것만큼 그렇게 대단치도 못한 것임을 절감하는 시간이었죠.
디자인 회사를 나온 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린 미용사업은 지방 도매상들과의 거래를 더욱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몇 차례 찾아 왔지만 최사장의 광산일에 말려들면서 또 다시 자꾸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지방도시들을 날아다녀야 판매 네트워크를 다져야 할 시간에 핸드폰 신호도 잡히지 않는 오지의 광산들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마카리조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고 있었으나 거래선 포트폴리오를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타격을 고스란히 감수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양프로에게 나누어주는 수익금의 감소로도 이어졌습니다.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 됩니다.
양프로는 당시의 그런 설명을 잘 믿지 않는 눈치였어요. 그는 수익금 분배가 줄어드는 이유를 의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겪기 시작했던 무수한 고난이 이제 그를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고 회의적이면서도 당하고만 살진 않도록 좀 더 영리하게 만든 것이 분명했지만 그 의심의 화살은 목표를 놓친 열탐지 지대공 미사일처럼 그를 괴롭혔던 사기꾼들 대신 나를 향해 날아 왔습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분명 내 편이 되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사람들이 오히려 등뒤에서 덤벼들며 어금니를 드러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는 하필이면 내가 마카리조의 변심으로 한창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자신이 맡긴 1만불을 돌려달라며 숨통을 조여왔습니다. 그는 교회와 골프장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에게 내게 맡긴 돈 얘기를 했던 모양인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수많은 부정적 가능성을 적시하며 그의 상상력을 불길한 방향으로 부추겼던 것 같습니다.
그 무렵 그는 너그러운 집주인을 만나 획기적으로 적은 임대료로 끌라빠가딩의 한 아파트에 입주합니다. 당시 레슨수입이 변변치 않았던 양프로는 그나마도 돈을 일부 빌려서야 임대료를 지불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내가 맨바닥에서부터 사업을 일으켜 버는 돈 모두를 재투자와 아이들 학비에 올인 시키는 동안 줄곧 영어과외를 하며 생활비를 보탰던 내 아내는 오랫동안 꾸준히 모았던 돈으로 끌라빠가딩의 양프로네 아파트 단지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양프로가 먼저 이사해 온지 3개월쯤 후의 일이었죠. 그러나 오해는 여기서도 생깁니다. 양프로의 새 친구들은 내가 수익금을 빼돌리지 않았다면 비싼 아파트 임대료를 내지 못했을 거라고 속삭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안에 대한 인식은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철저히 달라질 수 밖에 없는데 양프로가 그랬습니다.
내게 돈을 맡기던 당시 아직 양프로의 수중에 남아 있던 나머지 2천만원마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양프로는 골프연습장에서 나오는 레슨비 만으로 살아 갈 수 없다면 유산으로 받은 제주도와 강원도의 땅이라도 팔아야 할 처지였어요. 그의 새 친구들이 양프로가 많은 고난을 당한 것을 알게 된 그를 어떻게든 보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절박함을 공감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나를 알지도 못하는 그들은 상황을 넘겨짚으며 내가 양프로 돈을 사실상 가로챈 것이라고 몰아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실 떠안지 않아도 그만이었을 최사장과 그의 모든 문제들까지 양프로가 강권하여 내 등에 지워 놓았던 것이 마카리조와의 거래중단으로 이어지는 사업위기에 첫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이고 구차한 변명이었을까요? 그러나 그런 것은 양프로 주변의 조언자들이 알 수도, 알고 싶지도 않을 일이었습니다. 예전 내가 그들 도와 인도네시아 프로골프협회와 제휴하고 상금대회까지 치렀던 것, 골프샵 사장의 파렴치한 공격을 함께 온 몸으로 막아 냈던 것, 그리고 지난 3년간 변함없이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 되어 주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새 친구들의 속삭임에 솔깃한 양프로는 이제 내가 수익금을 횡령해 먹는 파렴치한이라고, 친구를 돈에 팔아 먹는 가롯 유다 같은 놈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미용을 하시니까 혹시 사장님도 아실지 모르겠네.”
그와 같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나와 절친한 사람들도 당연히 있었으므로 교회에서의 그의 근황을 가끔은 듣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양프로라고…, 골프 레슨 하는 친구죠. 그런데 그 친구도 미용재료 사업을 하는데 바빠서 직접은 못하고 아는 사람한테 자금을 대주면서 사업을 맡겼대요. 배사장님도 그쪽 계통이시니 잘 아시겠네요.”
“네?”
“그런데 그 놈이 양프로가 대준 돈을 빼돌려서 아파트를 샀대나 어쨌대나… 아무튼 자카르타 사는 한국 놈들 중에 돼먹지 못한 놈들이 너무 많아요.”
그들이 그렇게 옮기는 말 속에서 난 양프로가 돈을 주고 부리는 하수인 주제에 양프로의 돈을 빼돌려 먹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후 난 며칠간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양프로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다리를 몇 개 건너온 말은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말이 돌고 돌아 그런 얘기를 내가 듣게 되는 상황이 올 정도로 도대체 양프로는 애당초 무슨 말은 했던 것일까요?
이 대목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런 얘기한 사람을 찾아가 네가 이런 말 한 게 사실이냐 네가 제 정신이냐 하며 따져 묻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좀 다릅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건 그건 그 사람의 자유죠. 그 사람 입이 내 얼굴에 붙어 있지 않고 그 사람 얼굴에 붙어 있는 건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그 말에 책임질 수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의 버릇을 고쳐 놓는 것도 내 책임이 아닙니다. 난 그의 아버지도 선생님도 아니니까요. 내가 할 일이란 그 사안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죠. 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때 내가 할 일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맡아 두었던 돈을 돌려줄 때가 된 것입니다. 억세게 운도 없이 그게 하필 그렇게 돈이 쪼들리는 상황이었다 해도 말입니다. 물론 매달 충분한 배당을 받는 호세월이었다면 맡긴 돈을 회수하려 하지도 않았겠죠. 그래서 어느 날 그를 사무실로 불러들여 미용사업의 현황을 다시 한 번 세세히 설명해 주었고 마카리조의 매출감소 문제를 비로소 충분히 이해한 그는, 예상했던 대로 맡긴 돈을 돌려달라고 다시 요구해 왔습니다. 더 이상 비젼이 없다고 확신한 것이죠.
“지금 양프로가 맡긴 1만불은 우리 운영자금에 섞여 돌아가고 있어요. 지금 당장 빼 달라면 어디서 빚을 내서 빼 주어야 하는데 만약 이번 월말까지 기다려 준다면 내가 크게 무리하지 않고 수금하는 돈으로 만불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거에요. 물론 수익금도 월말까지는 종전과 같이 계산하고요.”
“뭐, 그렇게 하시죠.”
양프로는 내 앞에선 여전히 예의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와 돈 문제를 깨끗이 매듭지어 그간의 돈독한 관계가 돈 때문에 금 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러나 애써 지우려는 불씨에 기름을 붓는 사람들은 늘 있습니다.
“양프로가 당신한테 그러면 안되는데…., 배사장 욕을 하도 해대서 내가 좀 야단을 쳤어요.”
골프연습장에 다녀 올 때마다 최사장은 양프로가 내 험담을 한다며 분개하곤 했습니다. 내가 아는 양프로는 사람들 욕을 아무에게나 대놓고 할 사람도 아니고 이미 상환일정을 확정한 마당에 아직도 내가 돈을 갚지 않는다고 울분을 터뜨린다는 얘기는 현실감이 없었습니다.
“배사장이 양프로를 어떻게 봤는진 몰라도 그렇게 마음 써 줄 친구는 아닌 것 같소. 양프로는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 말을 하는 최사장이 더 얄밉게 보였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의 매일 양프로를 비난하는 최사장의 얘기를 들으며 마음을 더욱 굳혔습니다. 그를 소중하게 여겨왔던 시간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간처럼 만들어 버리지 않기 위해 그에게 너무 실망하지도 말고 제3자가 전하는 말에 너무 가슴 아파하지도 말자고요.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람들 사이의 믿음과 신뢰란 것은 그렇게 깨어지기 쉬운 한낱 유리조각 같은 것이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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