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도네시안 드림

인도네시안 드림 (1)

beautician 2022. 2. 7. 11:14

 

1.

파산 이후 다양한 스펙트럼의 업종과 사업현장들을 돌고 돌다가 디자인 회사 봐주던 일을 막 그만 두게 되었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의 사업이나 봐주는 바보짓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정말로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달리 먹고 살 방법이 없다면 어떤 일이든, 그 대가가 얼마이든,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파산 후 반둥공장 꼬린 가멘타마에 헐값으로 팔려 갈 뻔 했던 것도, 박치기 대마왕이 지배하던 빠룽의 봉제공장에서 자존심의 시련을 겪어야 했던 것도, 골프샵에서 사장 첩의 집사 노릇까지 감수해야 했던 것도 그 만큼 절박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그런 막다른 골목에서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은 그 뒤끝이 한결같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디자인 회사의 운영을 맡게 될 즈음의 상황은 분명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미용기기 수입판매 사업은 초창기의 부진을 털며 서서히 궤도에 올랐고 나와 내 회사의 위상도 현지 미용업계에서 서서히 분명한 자리매김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싸구려 중국산이 판치던 현지 미용기기 시장에서 비교적 고가의 외국 브랜드를 수년간 광고하며 인지도를 꾸준히 높여온 회사가 그때까지만 해도 전무한 상황에서, 처한 상황이 어쩔 수 없어 그 쉽지 않은 길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달렸던 것이 마침내 결실을 맺고 있었던 것입니다. 웬만하면 잘 참아낸 내가 잘나서 살아났다고 으쓱거렸을 텐데 그렇게 한번 지옥에 다녀오니 나처럼 부족한 인간에게 이런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었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또는 자기도 모르게 제공한 수많은 협조와 배려가 부활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생생하게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전력을 다하던 시기였으므로 디자인 회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처음엔 결사적으로 고사했던 것이었고 1년 후 결국 어영부영 맡게 되었다가 퇴직금도 없이 밀려 나듯 다시 길바닥에 나왔을 때엔 또 한번 토사구팽 당했다는 억울함보다는 오히려 더없이 홀가분한 기분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내 일에만 전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렇게 나온 것이 파산 당시 빚을 갚기 위해 차를 판 이후 오랫동안 렌터카를 쓰다가 토요타에서 나온 끼장 이노바 밴을 24개월 할부로 구매한 지 막 2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생활의 중심이 당시 현지에서 간디스쿨을 다니던 내 아이들이었던 만큼 그 차량의 주용도 역시 아이들 등,하교용이었으므로 난 주로 택시나 버스웨이를 타고 돌아 다녔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미니버스라는 이름이 더욱 적합할 스즈키 APV 밴을 비로소 임대할 수 있었어요. 

 

당연히 사무실도 없이 다녔습니다. 예전 빗발치는 빚독촉을 받던 시절엔 내가 치명적인 전염병 보균자라도 되는 듯 안전거리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사무실을 무료로 나누어 쓰자며 제의를 해오기 시작했지만 모두 정중히 거절했던 이유는 세상엔 공짜라는 게 없는 것이어서 꼭 돈이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고 그것이 대개는 사무실을 빌려주는 사람의 다양한 업무와 편의를 봐주는 것으로 귀착되기 쉬웠으므로 이제 내 일에만 전력하려던 나로서는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카르타 북부 중심인 끌라빠가딩에서는 당시 새로 개장한 아르타가딩 몰 3층 푸드코트를, 남부에서는 서양식 카페촌인 끄망 입구 당시 웬디스 햄버거집이 있던 건물 2층 책방 안 작은 카페를 내 사무실인양 쓰면서 업무도 보고 장래 사업계획도 세우며 활기차게 살고 있었어요.

 

그 당시 우린 독일 브랜드인 재규어(Jaguar)가위와 현지 미용가위 시장에서 자웅을 겨루던 시기였고 론칭 4년차인 우리 브랜드의 시장 점유율은 날로 높아 가고 있었지만 당시 내가 차도, 직원도, 변변한 사무실도 하나 없이 회사 이름과 브랜드만 가지고 자카르타를 천방지축 발로 뛰면서 맨 땅에 헤딩하는 원맨쇼를 하고 있는, 그야말로 유령회사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다행히 업계에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재규어 가위

 

물론 턱없이 부족한 부분들이 많아 불편한 점도 한둘이 아니었지만 당시 자원사업 쪽에 가 있던 오랜 파트너 릴리가 필요할 때마다 비자나 허가 부분을 기꺼이 지원해 주었고 한번 겪었던 파산의 경험은 그런 부족한 상황마저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나마 사업은 점점 번창하고 가족들을 굶기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과도 같았어요.

 

꼭 만나 보시라니까요. 정말 좋은 분들이에요. 돈도 많은 분 같은데 광산업을 하면서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데요.”

 

그렇게 말하며 미팅을 종용하는 양프로는 그때 자카르타 북부 끌라빠가딩의 한쪽 구석에서 골프레슨을 하고 있었습니다. 양프로는 그간 자신이 지사를 유치했던 한국측 골프협회와 어긋나 골프샵 석사장에게 지사 운영권을 뺏긴 후 리포카라와치 지역에 주택을 임대해 한국으로부터 골프 꿈나무들을 받아 임페리얼 골프장과 따만사리골프 연습장을 오가며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그의 지인과 학생들 인솔자로 따라왔던 또 다른 프로가 앞다투어 가로채 갔으므로 양프로는 또 한번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예전 인도네시아에 처음 왔을 때 잠시 몸담았던 그 끌라빠가딩의 골프연습장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포항사람들인데요. 석사장 같은 사람이 절대 아니에요. 한국에서도 사업을 크게 하셨던 모양이고 골프장에서 돈 쓰는 거 보면 장난 아니에요. 한번 만나 보셔도 절대 손해 될 사람들이 아니라구요.”

 

양프로가 그 때 왜 날 그렇게까지 강권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양프로는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내 처지가 매우 어려워졌다고 생각해 나름대로 도움을 주려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미용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내 얘기를 모두 뻥이라고 생각하고서 말이죠. 사실 외관상, 나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직 차도, 직원도, 사무실도 없이 거리를 전전하는 유령회사 사장이었으니까요.

 

양프로가 그런 말을 하기 한 달 전만 해도 나는 일과가 끝나면 디자인 회사의 차량인 미쯔비시 쿠다(Kuda) 밴을 타고 골프장에 와서 양프로와 함께 저녁식사 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것이 매일의 일상이었습니다. 회사 안에서의 일상은 전투를 방불했지만 퇴근 후의 생활은 나름 우아한 편이었죠. 그러나 당장 디자인 회사를 나오면서 차량지원과 월급이 끊긴 후에는 그런 우아함보다는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당장의 과제여서 미용사업에 죽기살기로 매달려야 했으므로 골프장에 양프로를 만나러 가는 일도 뜸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양프로는 내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또 다른 이유 때문에 부담스럽게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내가 디자인 회사를 맡기 1년 전, 부동산 경기가 바닥을 기고 있을 때 양프로는 경기도에 있던 시세 8억의 다세대 원룸주택을 5억에 급매하며 큰 손해를 보았고 은행융자를 정산하고 각종 채무 등 다른 비용들을 정리하면서 돈은 순식간에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집을 팔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사방에서 손을 벌리는 친지들과 지인들을 사람 좋은 양프로가 거절하지 못하면서 나머지 돈마저 순식간에 공중분해 되고 있었습니다.

 

허무하기 짝이 없죠? 8억짜리 집을 팔았는데 불과 한두 달 만에 남은 돈은 3천만원뿐이에요.”

 

원래 양프로의 계획은 그 집을 팔아 남은 돈의 일부를 당시 인도네시아 프로골프협회 부회장 누르살람씨와 함께 추진하고 있던 골프 전지훈련 유치사업에 투자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집을 팔고 이제 남은 돈은 몽땅 쏟아 부어도 뭔가 사업을 성사시킬 만한 금액이 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나마도 제대로 관리하고 지키지 못하면 현지 생활비로 야금야금 끌어 쓰다가 머지않아 흔적도 없이 증발하고 말 상황이었지요. 나도 인도네시아 생활 초창기에 전 직장의 퇴직금이 그런 식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제의를 했어요.

 

나한테 천만원만 맡겨요. 미용 쪽이 그런대로 돌아가고 있으니 함께 돌리면서 매달 수익금을 나눠 줄께요. 물론 원금도 보전하고요. 최소한 원금 날릴 일은 없을 거에요.”

 

그렇게 해서 미화 1만불, 당시 환율로 치면 9백여만원 정도를 양프로에게서 받았습니다. 2년 후 정산을 할 당시, 원금과 그간 분배해 준 수익금 총액이 원금이 두 배를 훨씬 넘어섰으므로 최소한 연리 50% 이상의 이익율이 된 셈이었습니다.

 

디자인 회사를 맡기 전 자카르타 시내 맘빵지역에 잠시 양프로와 사무실을 함께 쓴 적이 있었는데 내가 그의 전지훈련사업을 돕는 것처럼 그도 내 미용사업을 도우면서 한번 함께 가보자는 합의가 깔려 있었습니다. 양프로에게 1만불을 받았던 것도 그 당시의 일이었어요. 그러나 여러 번 출장 끝에 바탐섬에 전지훈련장을 준비한 후에도 양프로가 그토록 믿어 마지않았던 한국의 지인들은 전지훈련팀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큰소리만 쳤던 거였어요. 비용은 다 들어갔지만 수입이 전혀 생기지 않으니 사업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급기야 양프로가 리포카라와치로 옮겨가 골프 꿈나무 교육과 연습장 레슨에 전념하게 된 것도 전지훈련사업이 시작도 못한 채 그렇게 망가져 버렸기 때문이었어요. 그렇게 전지훈련사업이 무너지고 나니 함께 가자고 했던 약속은 결과적으로 나 혼자 미용사업을 돌려 수익금을 나누며 지키고 있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습니다.

 

양프로가 그 포항사람들을 소개해 주려 하던 시점은 내게 1만불을 맡긴 지 1년이 막 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때로는 월 1,500불 정도까지도 수익금을 나누어 줄 수 있었지만 때로는 불과 수백불 정도 밖에 챙겨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양프로는 아마도 내가 디자인 회사를 그만 두고 수입이 줄게 되면 내가 수익금 분배에 장난을 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어쩌면 아예 원금을 떼이진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당시 그가 사귀기 시작한 사람들 몇몇이 그에게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어요. 그는 내가 예전과 같이 복수의 수입원을 유지하며 변제능력을 잃지 않기를 원했고 그것이 자신의 1만불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양프로가 그 포항사람들을 소개해 주겠다며 몇 주 동안이나 집요하게 내게 제의해 왔던 배경엔 그런 이유도 깔려 있었습니다.

 

“양프로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만나는 보겠지만 남의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남의 일이라서…, 지금은 우리 일, 내 일을 제대로 해 놓아야 할 때거든요. 좀 있으면 우리 애들도 대학 가야 하는데 내 사업 잘 되면 내 돈으로 애들 학비 내겠지만 남의 일 도와 준다고 그 사람들이 우리 애들 학비 내 줄 리 없잖아요?”

 

양프로와 언쟁 비슷하게 그런 얘기까지 했지만 결국 내가 한발 물러서 최사장 부부를 만나기로 했어요. 지금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인 끌라빠가딩 몰 건너편의 한성관이라는 식당 2층이었습니다. 양프로와 내가 룸에 들어설 때 최사장 부부는 이미 거나하게 취해 서로 어루만지며 부둥켜 안고 있었습니다. 이건 어디서 많이 봤던 장면입니다. 최사장은 50대에 막 접어들고 있었고 부인은 최사장보다 10년은 더 어려 보였습니다. 순간, 골프샵에서의 악몽이 되살아 났습니다.

 

, 외람되지만 두 분 정상적인 부부 사이…. 맞으신가요?”

 

보통의 상황이라면 초면에 이렇게 묻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더욱이 함께 일할 것도 아니니 묻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전 골프샵 석사장이 속눈썹 미스박을 자카르타에 심으면서 그 후 1년간 벌어졌던 일들을 절절이 겪었던 나로서는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 첩을 먼저 데려오거나 현지처부터 만들려는 사람들과는 장기적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는 믿음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의 일을 돕는 것은 물론 가까이 지내는 것조차 좀 꺼려지는 일이었어요. 손바닥만한 교민사회에서 쉽게 불붙는 구설수에 간단히 휘말려 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석사장은 자신이 한국에서 데려온 첩과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고 빠사라야 백화점 후문의 자카르타 중앙교회에서도 사실이 들통나는 날까지 시치미 떼고 20세 연하의 아가씨와 무리한 부부행세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석사장으로서는 영웅본색편에 등장했던 유사장처럼 1년에 몇 번씩이나 현지처를 찾아 인도네시아에 날아오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더 편했던 것이고 좀 껄끄러운 사람들이 골프샵에 찾아오면 미스박을 뒷방 사무실에 숨겨놓곤 했었죠. 한 손으로는 사랑스러운 첩을 어루만지면서 다른 한 손에 든 전화기를 통해 한국의 본처와 자녀 진학문제를 협의하는 모습은 그리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그 뜬금없는 질문에 놀란 표정을 짓는 최사장 부부만큼이나 양프로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최사장은 곧 허허 웃으며 대답합니다.

 

, 서로 중고라, 신품은 아니지만…, 각각 이혼하고 만나 이렇게 함께 살게 됐어요. 초면에 질문이 좀 당돌하시네.”

 

살짝 위기를 맞았던 우리들의 대화는 그 순간을 유머러스하게 넘긴 최사장의 기지와 그 직후 내가 정식으로 사과하면서 정상을 되찾았습니다. 술이 센 최사장 부부는 나와 양프로가 도착한 후에도 대략 다섯 병 정도의 소주를 더 시켜 나눠 마시며 그간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벌이면서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들을 토로했습니다.

 

최사장 말에 따르면 그는 한국에서 현대 자동차 순정부품 전문매장을 했고 그 후 쓰레기로 공업용 벽돌을 만드는 폐기물 처리공장을 해서 큰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순정부품매장을 자기가 냈고 한국에서 폐기물 관련법이 제정된 것도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대목에서 이 분 뻥도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지요. 최사장의 폐기물처리사업은 얼마 후 경쟁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경영이 어려워지자 해외로 눈을 돌려 3년 전부터 깔리만탄의 발릭빠빤 지역 실리카 모래 광산에 투자해 한화 30억원을 들인 광산설비를 갖춘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해 초부터 인도네시아의 모래수출이 중단되어 시작도 하기 전에 판로가 막혀 버렸고 광산은 완공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생산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인도네시아 국내의 시멘트 공장이나 유리공장 등에 실리카를 공급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했으므로 해당 마케팅을 도와줄 사람을 구하던 중에 양프로가 나를 추천했다는 설명도 최사장이 덧붙였습니다.

 

최사장은 수출금지문제로 제약을 받게 된 실리카 대신 그 해 들어 가격이 폭등하고 있던 비철금속 중 납 원석 수출도 시작했다고 했어요. 그는 그 자리에서 여러 번 간곡히 부탁했고 양프로도 계속 내 옆구리를 찔러 오면서 급기야 내 우유부단함이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어요. 냉정히 거절했어야 하는데 상황이 급하면 잠깐 짬을 내 볼 수는 있을 거라고 말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내 일을 버리고 최사장 일을 전적으로 봐줄 수는 없는 상황임도 충분히 설명했어요. 그러니 다른 사람을 빨리 찾아보라는 취지였어요. 그러나 내가 정중한 거절이라고 생각했던 이 대답을 최사장은 어정쩡한 승낙이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날부터 최사장은 막무가내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실리카 야적장

 

(계속)

 

'인도네시안 드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네시안 드림 (6)  (0) 2022.02.12
인도네시안 드림 (5)  (0) 2022.02.11
인도네시안 드림 (4)  (0) 2022.02.10
인도네시안 드림 (3)  (0) 2022.02.09
인도네시안 드림 (2)  (0) 2022.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