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소설

지독한 인간

beautician 2020. 1. 3. 10:00


[단편소설]지독한 인간



사무실 여직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것은 내가 몰던 토요타 끼장 밴이 자카르타 중앙통인 수디르만 거리로 들어설 때였습니다.  누군가 사무실에서 난동을 부린다는 얘기였는데 전화기를 뺏어 든 문제의 남자는 막무가내로 내게 호통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넌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어른이 왔으면 예를 갖춰 맞아야 할 것 아닌가? 얼른 튀어 들어오지 못해?”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이런 소리를 듣는 것은 아무리 인도네시아라 해도 흔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곤란하니 괜찮으시면 저희가 미팅 끝난 후 연락 드리고 찾아 뵐게요.”

뭐라? 이런 돼먹지 못한 놈을 봤나!!”

물론 난 이런 막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지만 안면근육에 경련을 일으키면서까지 끝내 참아낸 것은 내 차 뒷좌석에 타고 있던 장사장 일행 때문이었습니다. 의약품사업을 하는 내 학군동기 장사장의 서울본사를 맡고 있던 홍대표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그 분 성격상 걷잡을 수 없게 되기 쉬워요. 어머님은 내가 여기 온 걸 왜 굳이 알려드려서...”

결국 우린 어렵게 잡은 현지 의약품 유통업체와의 미팅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빤쪼란의 사무실로 차를 돌려야만 했습니다. 홍대표는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려 애쓰는 표정이 역력했고 그 옆에 앉은 장사장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듯 꾹 감은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습니다.

자카르타에 지사를 낼 거면 나한테 먼저 연락했어야지. 조카가 인도네시아 와서 사기라도 맞으면 내 체면이 뭐가 되냔 말이야.”

우리가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깐깐한 인상을 하고서 내 책상에 버티고 앉아 있던 조사장이라는 초로의 남자는 홍대표 어머니의 동생, 즉 홍대표의 외삼촌이었습니다.

나한테 물어봤으면 능력 있고 믿을만한 놈들을 얼마든지 소개해 줬을 텐데. 지사장 할 만한 스펙 좋은 놈들도 천지고...”

자카르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땀분이라는 지역에서 월급사장을 고용해 제법 규모 있게 자신의 봉제공장을 운영하던 조사장이 그 지위와 재력을 바탕으로 현지 인맥을 나름 탄탄히 다졌음은 의심할 여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내 입장 역시 사뭇 불편해진 이유는 홍대표 측에서 조사장 허락 없이 맘대로 앉혔다는 자카르타 지사장이 바로 나라는 사실 때문이었어요.

지사장께 정말 미안해요. 저희 외삼촌이 원래 앞뒤 안가리는 분이지만 그렇게 대놓고 무시할 줄은 몰랐어요. 규상아, 너한테도 미안해, 잘 모르면서 함부로 말씀하시는 분이라 좀 오해가...”

온갖 핑계를 대어 조사장의 초대를 피해 따로 마련한 그날 밤 저녁식사 자리에서 홍대표는 내게는 물론 장사장에게도 극구 사과를 표했습니다. 사업파트너를 선택할 때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홍대표에게 당부하면서 탐탁잖은 표정으로 장사장을 바라보던 낮의 외삼촌은, 의약품 수출사업을 자력으로 궤도에 올린 장사장이 베트남 시장에 전력투구하기 위해 대학동기였던 홍대표를 영입해 서울 본사를 맡겼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한편 나나 장사장이 조사장에게 끝까지 예의를 갖출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학군동기인 우리들에게 조사장은 20년 터울의 대선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대선배가 잘 모르고 한 말에 자존심 상하는 정도의 문제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점조직 독립군처럼 이역만리 타국에서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하는 나 같은 사람이 안정된 직장생활로 다시 돌아가는 길목에서 한 두 번 수모와 모멸을 겪는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때는 태국발 외환위기로부터 시작된 깊은 나락에서 지난 2년간 모질게 산전수전을 겪은 직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수모가 한 두 번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 여기 영빈관인데. 블록엠 뒤쪽 불룽안 거리에 있는 식당. 그래, 지금 바로 좀 와 주게나.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장사장과 홍대표가 귀국한 후에도 조사장은 퇴근길의 나를 그런 식으로 곧잘 불러내곤 했습니다. 그는 내게 다른 개인적 일정이 있다거나 혼잡한 퇴근길 중간에 갑자기 차를 돌려 시내 특정식당을 찾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모적인가를 전혀 개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단순한 저녁식사 초대가 아니었습니다.

잘 왔네. 여긴 임사장이라고 버까시에서 박스공장 하시는 분이고 주말낚시 친구라네. 그리고 여긴 중위전역이고 대기업 출신인데 이번에 내 조카가 자카르타 지사장으로 채용한 사람이야.”

아유, 조사장님, 인사도 좋지만 바쁜 분을 이렇게 무작정 불러내시면....”

뭐 어때? 내 조카한테 월급 받는 친군데. 외삼촌이 부르면 와야지, . 그렇지? 자네도 괜찮지?”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이 뒤집히곤 했습니다.

, 그럼 인사도 했으니..., 자넨 이제 가 봐도 돼. 나중에라도 시내에서 여기 임사장 마주칠 일 생기면 인사 잘 하고.”

좋게 생각하자면 조사장은 승승장구하는 홍대표의 회사가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던 것이겠죠. 하지만 한 시간 넘게 극심한 교통정체를 뚫고 도착한 식당에서 테이블에 앉지도 못하고 그렇게 수인사만 나눈 뒤 어정쩡하게 떠밀려 돌아가야 하는 황당하고도 못마땅한 상황은 일주일에 한 두 번은 꼭 벌어졌고 그가 홍대표의 외삼촌이자 학군 대선배라는 이유로 대놓고 거절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다행히 그런 일은 딱 두 달 간만 지속되었는데 그게 꼭 다행이라 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리 된 것은 자카르타 지사가 두 달 만에 문을 닫았기 때문이었으니까요.

, 미안해. 인도네시아는 아직 한국산 의약품이 들어갈 수 없는 환경인데 지사경비 지출하면서 상황이 변하길 마냥 기다릴 순 없어.”

장사장은 좋은 친구였지만 동시에 판단이 빠른 사업가였습니다. 그들의 철수는 내가 외국 땅에서 또 다시 내동댕이쳐진다는 의미였지만 그 사유가 너무나 명백했기에 난 이의를 달 수 없었습니다. 길길이 화를 내며 기염을 토한 것은 오히려 조사장이었습니다.

“2년도 아니고 달랑 2개월이란 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사람 인생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 자넨 왜 그러고도 가만히 있었나? 내 조카한테 요구할 거 요구하고 보상받을 거 보상받아야 할 거 아닌가?”

다시 알아서 살 길을 찾아나서야 하는 내 입장에선 홍대표와의 결별로 더 이상 조사장에게 시달리지 않게 된 것이 가장 큰 보상이라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이란 절대 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죠. 그는 내 인생으로부터 사라져 주지 않았습니다.

배사장, 내가 내년도 학군 인니 지회장이 되는데 자네가 총무를 맡게. 사무국엔 내가 얘기해 둘 테니. 총무 하면서 사람들 많이 만나는 게 배사장 사업에도 도움이 될 걸세.”

나를 부르는 호칭은 예전 조카회사의 지사장에서 어느덧 배사장으로 변해 있었지만 부하직원에게 지시하는 듯한 고압적인 분위기는 여전했습니다. 그러나 지사가 철수한 후에도 내가 빤쪼란 사무실을 유지하며 거기서 한국산 의류부자재 수입사업을 시작하자 조사장은 내게 도움을 주겠다는 책임감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비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갑자기 학군 총무를 맡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습니다. 조사장은 지회 창립멤버이자 차기 지회장 내정자였지만 그 해 처음 일반회원으로 합류하는 내가 덜컥 총무완장을 차는 것은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사장은 회원들의 반발을 묵살하고 부득부득 내 목덜미를 끌어 총무자리에 앉혔습니다. 물론, 내가 총무를 맡은 그 몇 년간 사업상 받은 도움은 미미했지만 마음 터놓을 좋은 선후배들을 만나 어려운 시절 위안과 용기를 얻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게 그간 내게 했던 행동에 대한 그의 사과방식이었습니다. 그의 자존심은 그만큼이나 드높았습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전개된 상황에 그를 계속 조사장이라 칭하면 아무래도 무례한 일이니 이제부터 조선배라 부르기로 합니다. 지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조선배는 호기로운 씀씀이를 보였고 자바섬 서쪽 끝, 우중꿀론이란 항구도시에 그는 낚시용 요트도 가지고 있어 지회 고참회원과 틈틈이 바다낚시를 나가곤 했습니다. 땀분의 봉제공장엔 여전히 오더가 넘쳐났으므로 부동산과 고급승용차를 사들이던 조선배의 생활은 더욱 풍요로워졌고 그의 승승장구는 당분간 계속될 듯 보였습니다. 당시 독립 초창기였던 난 당연히 아직 자리잡지 못한 상태였는데 조선배는 부탁하지도 않은 돈을 여러 차례 빌려주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요. 그러실 분이 아닌데...”

몇 년 후 호치민 근교에 의약품 생산공장을 세우며 승승장구하던 장사장이 이번엔 다른 사람을 통해 인도네시아 진출을 타진하며 자카르타를 찾았을 때 이번에도 동행했던 홍대표는 조선배의 근황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그분은 세상이 자기 내키는 대로 돌아가야만 하는 분이에요. 자기 체면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큰 돈을 쓰실 위인이지만 누군가를 진심으로 돕는다는 건 아무래도 좀..., 그분은 자기 가족들조차도 지옥으로 밀어 넣은 분이거든요.”

조카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할 만큼 한국에서의 조선배는 극단의 성격을 휘두르며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갔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유복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서울 소재 유명대학의 영문과를 졸업했고 5.16 정변 불과 몇 해 후, ROTC 과정을 이수해 학군 4기로 병기병과에 복무했습니다. 전역 후 곧바로 시작한 그의 봉제사업은 큰 성과를 올려 서울 한 복판에 자기 건물을 올리고 내로라하는 유명 의류수출 전문업체로서 십 수년간 이름을 떨쳤죠. 그러나 모든 것엔 반드시 끝이 있는 것처럼 그의 사업운이 다하는 날도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불경기로 거래선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극심한 자금난이 도래했고 거기에 건강문제까지 겹치면서 그의 회사는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할 정도로 대대적인 부도를 내고 한국 경제지도에서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끝내 지켜낸 것이 인도네시아 생산기지로 만들어 두었던 땀분의 봉제공장이었습니다. 그 규모는 예전과 비할 바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조선배는 마지막 순간까지 움켜쥐고 있던 나머지 현금과 아픈 몸을 이끌고 인도네시아로 넘어왔습니다. 아마도 절망하고 있었을 그에게 다시 한 번 찾아온 기회는 태국발 외환위기였어요. 20세기 막판에 전세계를 강타한 환율파동은 수많은 기업들을 도산시켰지만 봉제수출회사들은 결재대금으로 들어오는 강력한 달러화의 도움으로 크게 약진하면서 조선배의 봉제공장도 큰 돈을 벌어들이며 튼튼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내가 조선배를 몇 년간 지회의 회장으로, 업계의 선배로 모시면서 알게 된 것은 그런 사업적 프로필뿐이었지 그의 가족관계에 대해선 아무 것도 들은 바 없었습니다. 조선배 역시 개인사에 대해선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단지 빤쪼란 사무실의 첫인상을 통해 그의 가족들을 포함해 주변의 그 누구도 그의 강한 성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조선배가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것은 지회장 임기를 마친 다음 해의 일이었습니다. 종아리에서 채취한 정맥혈관으로 심혈관 바이패스를 설치하는 대수술을 마치고 퇴원한 그는 10킬로그램 가까이 체중을 잃었고 갑자기 노인이 된 듯 폭삭 늙어버린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도장을 찍어주고 말았어.”

그의 눈빛에 언뜻 회한이 비친 듯 해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조선배는 결코 뭔가를 후회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었습니다. 그가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는 동안 두 딸의 어머니인 부인이 잠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병이 아니었어요. 손가락 하나 들 힘도 없이 반죽음이 되어 호흡기를 낀 채 병상에 누운 조선배에게 그의 부인은 절치부심 칼을 갈아온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서류를 내밀며 이혼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조선배가 인도네시아로 건너온 후 이혼이나 다름없는 별거생활을 하던 셈이었는데 남편이 중병으로 쓰러진 순간 부리나케 이혼서류를 챙겨 들고 자카르타에 날아온 부인의 심리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난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 자업자득이고 인과응보인 거지.”

그렇게 헛헛하게 웃는 조선배는 빤쪼란에서의 첫인상과는 너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1년쯤 후 조선배가 어린 현지여자와 바람이 나 한국의 가족들을 내버렸다는 엉뚱한 소문이 자카르타에 나돌았습니다. 더욱이 그 여자가 현지에서 흔히 뻠반뚜라 부르는 식모라는 거였어요.

자기들이 그렇게 말하고 싶다는 걸 내가 어찌 막겠나?”

예전 같았으면 분노하며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 분명한 조선배는 허허 웃을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소문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습니다. 조선배가 발작을 일으킨 순간부터 앰뷸런스를 부르고 수술과 입원수속을 진행하며 퇴원할 때까지 줄곧 조선배의 곁은 지켜 간호한 사람이 당시 그의 뿔로마스 집에서 일하던 어린 가정부였던 것입니다. 조선배는 그녀를 생명의 은인이라 여겼습니다. 오래 고심하던 조선배는 조심스레 가정부와 그 가족들의 의향을 물었습니다. 이제 한국의 가족들과 모든 연을 끊은 그는, 당시 발작으로 세상을 등졌다면 소리소문도 없이 공중분해 되고 말았을 현지의 모든 재산을 생명의 은인인 가정부에게 상속해 주기로 마음 먹고 그녀를 정식 아내로 맞아 들이려 한 것입니다. 한 호텔의 작은 펑션홀을 빌려 치러진 조촐한 결혼식에 신부측 가족들이 대거 참석한 반면 한국의 친인척 그 누구의 참석도 기대하지 못했던 조선배는 교민사회 지인들만 제한적으로 초청했는데 그들 중에서도 그런 수군거림이 들려 왔습니다.

한번 크게 앓았다더니 노망이 드신 모양이네.”

이제 처가 쪽에서 줄줄이 돈 뜯어갈 일만 남은 셈인데...”

조선배는 재혼을 결심한 경위를 굳이 지인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린 아내 거느리기 쉽지 않으실 텐데 조사장님은 정정하시단 말이지.”

벌써 몇 년째 조선배의 땀분공장을 도맡아 돌리고 있던 강사장은 짐짓 혼주를 자처하고 나서 그날 결혼식 사회를 보게 된 나와 나란히 홀 입구에서 하객들을 맞으면서 키득거리며 그렇게 속삭였습니다. 조선배보다 몇 살 더 연배였지만 노인이라 보기 힘든 다부진 체구와 구수한 입담, 그리고 만만찮은 눈매를 한 그는 조선배가 누구보다도 신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학군동문들을 제외한 하객들은 대부분 공장 거래선들이었는데 늦은 재혼을 사뭇 겸연쩍어 했던 조선배는 초청장에 축의금사절이라 명기했고 그래서 접수테이블도 따로 두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래선 사장들이 들고 온 두툼한 봉투들을 강사장은 그의 양복 안주머니에 차곡차곡 받아 챙겨 넣고 있었습니다.



조선배는 오랫동안 살던 뿔로마스의 단층집을 떠나 중부 자카르타 경계의 쯤빠까마스 아파트로 둥지를 옮겼습니다. 당시 넘쳐나던 재력에도 불구하고 변두리 저렴한 아파트에 단촐한 신혼살림을 차린 그의 집은 방 한 개를 서재로 만든 것을 빼면 여느 인도네시아 가정과 다를 바 없는 조촐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그가 그곳에서 하루 다섯 번 기도를 올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슬람에 입문하는 것은 현지 이슬람여인과 결혼하여 종교부로부터 정식 결혼증서를 받기 위한 필수조건이었지만 조선배는 이를 단순한 요식행위로 받아들이지 않고 진짜 이슬람교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나와 처음 만나던 당시 인도네시아 국립대에서 인도네시아어 고급과정까지 이수하고 현지 방언인 자와어까지 공부하던 그는 이제 회교사원에서 이슬람경전인 알꾸란을 배우며 한편으로는 아랍어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알꾸란은 기본적으로 아랍어경전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인도네시아 국적 취득도 목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을 바라보며 과연 어디까지가 그의 진심인가 잠시 의문을 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손을 벌리고 줄줄이 찾아오는 처가 친척들에게 그는 돈을 주고 가게나 새우농장을 만들어 주는 등 단 한 명도 거절하여 내치지 않았고 급기야 친척아이를 입양해 완전한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가족들에게서 겪었던 실패를 이번만은 절대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를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파국이란 사면초가에 몰린 끝에야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생각하던 순간 가장 탄탄하다고 믿었던 사업과 가장 신뢰했던 사람에 의해 등 뒤에서 벼락처럼 날아와 꼽히는 비수입니다.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현지 파트너가 자기 가문의 명예를 걸면서까지 제안해 온 바닥재용 목재사업에 섣불리 손을 댔다가 발 밑이 무너져 내리면서 깊고 깊은 파산의 나락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당시 조선배는 틈틈이 나를 불러내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몇 번인가 돈을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한 번 부도를 겪어봤던 경험 때문이었을까요? 그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게 빌려준 돈을 꼭 갚도록 종용하고 격려하며 유도했습니다. 당시 극도로 절박했던 상황에서 그런 조선배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빚으로부터 무작정 달아나기보다 채권자에게 욕을 먹고 수모를 당하더라도 끝내 말미를 얻고 양해를 구해 당시 산더미 같던 부채들을 오랜 기간 하나하나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배의 그런 훈련 덕택이라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내 처지에 관심을 갖고 선처하고 간여하며 지혜를 빌려주었던 조선배도 정작 자신에게 닥쳐오던 파국을 미리 예견하진 못했습니다. 내가 파산의 구렁텅이에서 간신히 기어 나오고 있던 2006년 하반기에 그가 누구보다 신뢰해마지 않았던 강사장이 땀분공장에 대형 부도를 내고 야반도주했던 것입니다. 노회한 강사장이 자신의 노후를 위해 오랫동안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부도액은 땀분공장 규모에 비해 비현실적이라 할 만큼 거대했으므로 조선배는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부터 수십 년간 크게 사업을 벌이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사업가였고 더욱이 인도네시아로 건너오기 직전, 이번의 몇 백배인 가히 역사적이라 할 만한 규모의 부도를 내 본 경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인터폴과 공조해 횡령한 돈을 들고 중국으로 도망간 강사장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고 공장과 관련자산들을 처분해 굵직한 빚들을 우선 갚는 선에서 사건을 대충 마무리하면서 제 3자 명의로 분산되어 있던 나머지 재산들을 지킬 수도 있을 터였습니다. 그는 예전에도 어쨌든 인도네시아의 땀분공장을 지켜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경건한 이슬람교도가 되어 있던 조선배는 한국을 떠나올 당시와는 사뭇 다른 생각을 가진 듯 했습니다. 그는 공장과 관련자산들은 물론, 살고 있던 아파트, 부동산, 그리고 우중꿀론의 요트까지 모두 매각하고 처가에 빌려주었던 돈과 자산도 최대한 회수해 모든 빚을 철저히 정리했습니다. 결국 모든 채무를 변제한 그는 한없이 떳떳한 입장이 되었지만 그 대신 철저한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결정을 지지하고 따른 어린 아내의 강단도 대단했지만 타국에서 환갑을 넘기고서 모든 자산을 그런 식으로 정리해 결과적으로 경제적 벼랑 끝으로 스스로를 밀어붙인 조선배의 의중을 난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 난 늙었고 심장수술까지 했던 사람이야. 그러니 더더욱 빚을 남겨놓을 수 없지. 그건 하람이야. 게다가 내가 빚을 남기고 죽으면 내 아내가 얼마나 고생하겠나? 절대 그럴 순 없어.”

조선배는 자존심을 굽히고 한 후배의 포워딩회사에 들어가 행정일을 돕기도 했고 지인들의 사업에 이런저런 사업적 조언과 도움을 제안하며 소득을 창출하려 했지만 대부분 여의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나이를 부담스러워 했고 무엇보다도 그의 사람 좋은 미소 뒤에 아직도 남아 있는 과거 강한 성격의 흔적을 버거워했기에 그와 사업적으로 엮이는 것을 대체로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나 역시 당시 어느 정도 재기에 성공하고 있었지만 아직 누구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엔 역부족이었고 그것은 조선배도 충분히 알고 있던 터였습니다. 막판에 그는 유창한 영어와 독일어, 인도네시아, 그리고 자와어와 아랍어를 앞세워 번역 일에도 뛰어 들었지만 그조차도 30-40살 터울의 젊은이들과 불꽃 튀는 경쟁을 벌여야 했으므로 더 이상 자카르타에서의 생활을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나와 쯤빠까마스 아파트 5층의 간이공원에서 만난 것은 그가 파산한지 2년쯤 후의 일이었고 아내의 고향인 중부자바 스마랑 인근의 촌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언제 다시 자카르타에서 만날지 기약도 없는 출발을 앞두고 그는 체념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분명 신의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해. 배사장이 그 동안 그 고생을 한 것도, 내가 자카르타를 떠나야 하는 것도, 거기엔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거야. 단지 우리가 그걸 깨닫지 못할 뿐이지.”

그가 말하는 신이란 당연히 이슬람의 신이었지만 인간의 불행과 몰락에 신이 품은 깊은 뜻이 숨어있다 한들 정작 그 일을 당하는 인간에게 어떤 긍정적 의미가 있을 수 있을지 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난 그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 나 스스로 처절한 파산을 직접 겪으며 얻은 깨달음이란 내 경제적 절박함이 드러나는 순간 주변사람들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긴커녕 오히려 그 약점을 무자비하게 짓쳐 들어와 곤경의 벼랑 끝으로 더욱 몰아가곤 한다는 것과 내가 치명적 보균자나 위험한 테러리스트라도 되는 듯 안전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냉정한 모습 정도는 그나마 호의적인 축에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환갑이 넘어 소득원을 완전히 상실하고 재기의 가능성마저 없어 보이는 조선배에게 교민사회와 지인들이 얼마가 냉담했을까는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맘에도 없는 립서비스나 날리는 지인과 후배들을 그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있을 리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낙향하는 조선배의 모습을 보며 처연해지는 내 마음의 과연 어디까지가 진심인가도 난 곰곰히 생각해 봐야 했습니다. 이젠 주변사람들에게 민폐 덩어리가 되어 인생 막장에 봉착하고 만 조선배를 나 역시 부담스럽게만 느꼈던 것은 아닐까요?

남자가 독해야 하는데 자넬 두고 가자니 걱정이 앞서는군.”

그 말은 내가 독하지 못하단 말이었을까요? 헤어지기 전 악수로 맞잡은 그의 손이 왠지 작아진 듯 느껴졌습니다.

 

스마랑으로 떠난 후 감감무소식이던 그가 몇 년 후부터 다시 소식을 전해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인건비가 급격히 오르면서 최저임금이 전국최저수준인 스마랑 지역으로 한국계 공장들이 대거 이전하는 중이었고 고령에도 불구하고 전문 번역사가 되어 있던 조선배는 그들 회사로부터 오더를 받아 밤을 세워 가며 번역에 몰두했던 것입니다. 오랜 만에 다시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 건강했습니다.

회장이 이번 만은 꼭 참석해 달라 해서 말이야. 워낙 간곡히 부탁하니 어쩌겠나? 그러니 배사장이 시간 내서 호텔로 픽업 올 수 있겠는가?”

당시 학군 인니지회 활성화를 모색하던 신임 지회장은 인도네시아에 계시는 대선배들의 참석을 촉구하면서 조선배에게도 비행기티켓과 숙박비 지원의사를 밝혔지만 극구 사양한 조선배는 부인과 양딸을 동반하고서 불편하고도 시간 많이 걸리는 열차 편으로 자카르타에 들어와 변두리 호텔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지회장은 운전사가 딸린 자기 승용차를 호텔로 보내 주겠다고도 했는데 조선배는 그마저도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제 고물차보다 지회장님 승용차가 아무래도 더 편했을 텐데 왜 거절하셨어요?”

최근 더욱 혼잡해진 자카르타 시내에서 일을 보다가 시간 맞춰 변두리로 돌아와 그를 픽업하여 다시 시내 모임장소까지 가는 일이 이제 와서 꼭 소모적이라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닙니다. 내가 동행하기를 고집한다면 그런 수고가 불가피한 것임을 이젠 그도 익히 공감하고 있을 터였습니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야 자네가 백 배 편하니 그런 거 아닌가?”

그 말이 전혀 밉살스럽지 않았으므로 나는 다시는 같은 질문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도 조선배는 지회모임에 참석하려고 일년에 한 두 번 자카르타에 올 때마다 어김없이 내게 픽업을 부탁했고 나 역시 그 일정에 맞춰 하루를 통째로 비워두곤 했습니다. 그렇게 호텔과 모임장소를 왕복하는 두 시간 남짓 우린 그간의 근황을 나누었고 나중엔 한 달에 한 두 번 서로 전화로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이 집에서 돈 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 배사장도 주변에 번역 필요한 사람들 있으면 좀 소개해 주시게나.”

이미 70대에 접어들어 극히 제한된 소득으로 극도의 절약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대놓고 손을 벌리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번역일 소개를 청탁하는 것만으로도 과거 그 드높은 자존심은 크게 꺾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개의치 않는 듯 했습니다. 단지 그는 자신이 스마랑에서 얼마나 바쁘게 지내고 있는지 늘 상세히 설명하곤 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지 않았다고, 아직 현역에서 너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고, 난 아직도 살아 있다고, 그러니 자신을 연민하거나 걱정할 필요 없다고 강변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나 역시 자카르타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이 진행하는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비교적 소상히 말씀 드리곤 했습니다. 재기에 성공해 얼마간 돈이 벌리는 듯 했던 내 주력사업이 다시 하향곡선을 그리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는 얘기로 걱정을 끼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요즘은 번역 일도 많이 줄었어. 다른 거라도 뭐든 일거리가 있으면 좀 소개해 주겠나?”

작년 마지막 학군모임에 참석하려고 자카르타를 방문한 조선배가 이런 얘기를 꺼냈을 때 난 마침 몇 가지 시장조사의뢰를 받고 있던 차였으므로 조선배에게 중부와 동부자바지역에서 조사해야 할 부분을 맡기고 의뢰비를 나누어 드리는 방법을 심각하게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자 그 모임에 참석한 다른 선배가 내 등을 팡팡 두들기며 유쾌하게 말했습니다.

그거 조선배가 엄살부리는 거다. 요즘이야 오더가 좀 줄었는지 몰라도 그 동안 근근이 모은 돈으로 지난 달에 스마랑 시내에 집 짓고 이사하셨는데 뭘. 요즘 우리 동문들 스마랑 출장 가면 꼭 당신 집에서 자고 가야 한다며 난리도 아니다. 너무 좋아하시더구만.”

스마랑에 넘어 오면 자기 집에서 지내라는 초청은 나도 받고 있었습니다. 조선배는 오롯이 그간 자신이 번 돈 만으로, 쪼들리는 가운데에서도 일정액을 떼 저축하여 부인의 고향인 그 촌구석으로 들어간 지 6년만에 기어이 시내에 번듯한 집을 짓고 나왔던 것입니다. 지방도시의 저렴한 땅값시세나 건축비용 같은 것보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의 안락함을 위해 계획하고 끊임없이 노력한 조선배의 강철같은 의지가 원동력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의 스마랑 집에서 묶고 온 동문들의 후기도 지회 단톡방에 하나 둘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을 지은 것은 축하해 마땅한 하나의 성과였다 하더라도 삶은 계속 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조선배 역시 계속 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그가 스마랑으로 돌아간 후 우린 시장조사 일로 거의 매일 카톡을 주고받았습니다.

 

어느 날 새벽, 지회 단톡방에 이런 멘션이 떴습니다.

[이른 아침에 죄송합니다. 조선배님 가족이라 밝힌 사람이 조선배님 카톡계정으로 알려온 내용입니다. 조선배님이 어제 오후 5시에 운명을 달리하셨다 하며 금일 아침 8시에 묘지로 안치할 예정이라 합니다.]

조선배의 영리한 아내는 그의 핸드폰에서 한국어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연락 가능한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부고를 냈던 것입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자카르타 학군모임에 마지막 참석한 것이 불과 2주 전이었고 바로 이틀 전까지도 나와 감자스낵 제조업체 시장조사방식을 협의했었는데 말입니다. 단톡방엔 조문이 잇따랐고 마침 스마랑 인근에 있던 동문 두 명이 급히 상가로 출발했습니다. 이젠 한국 가족들에게 연락을 내야 했는데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조카인 홍대표의 연락처는 나도 따로 보관하고 있지 않았지만 호치민의 학군동기 장사장과는 연락이 닿았습니다.

[홍대표 외삼촌 되시는 조선배가 어제 별세하셨다. 몸이 좀 불편하다고 하시면서 방에 들어가 누웠는데 영영 일어나지 못하셨대. 그 분 말년엔 정말 좋은 할아버지가 되어 현지에서 많은 도움 주고 받았다. 그 분에 대한 홍대표나 한국가족들 기억은 많이 다르겠지만 이곳 사람들이 그분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그들도 알았으면 좋겠어.]

[알았다. 나도 들은 얘기지만 그분 예전에 좀 못나게 사셔서 자식하고도 안보고 사는 걸로 알고 있어.]

[연 끊고 사는 거 나도 알지만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분이 돌아가셨으니 최소한 연락은 받아야 할 거라 생각해.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지만 홍대표 통해서 연락 전해줘.]

곧 홍대표의 카톡이 날아들었습니다.

[외삼촌 별세소식 들었습니다. 조금 전 어머님께 알려드렸어요. 아시다시피 외삼촌께서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하셨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친족들은 연락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한국 친척분들께 연락하실 겁니다. 학군 후배분들이 외삼촌 마지막 가시는 길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홍대표의 전문은 정중했지만 조선배의 부인을 현지인이라 칭하며 숙모를 인정하지 않는 뉘앙스에 흠칫 했습니다. 병상에서 이혼을 당하고서도 스스로 인과응보라 받아들일 만큼 조선배가 한국에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험한 짓을 저질러 연이 끊어졌다 하더라도 친누나와의 사이에선 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혼한 지 오래된 전처, 딸들과의 연락이 영영 끊어진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홍대표나 본가 친척들 그 누구도 조선배의 묘소를 나중에라도 찾아오지 않은 것은 좀 너무하다 싶었습니다. 조선배가 인도네시아 여인과 가정을 꾸리고 국적을 인도네시아로 바꿨기에 외국인이라고 철저히 배격당한 것일까요? 한때 세상을 내려다보며 청운의 포부를 품었던 조선배는 스마랑에서 차로 세 시간 떨어진 뜨갈이라는 소도시 근교의 채 한 평도 안되는 초라한 무덤에 묻혔습니다. 빤쪼란 사무실에서 나와 처음 만난 지 16년차 되던 해였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스러지고 그래서 누군가에겐 또 한 시대가 저물어버렸겠지만 우린 금방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조문행렬이 줄을 잇던 지회 단톡방에도 이런저런 모임과 결혼식, 생일공지가 다시 뜨기 시작했고 나 역시 밀린 일들과 결재해야 할 비용들에 파묻혀 다시 허덕여야 했습니다. 한 번 떠나가 버린 사람은 서로 부대끼며 서로의 기억을 새롭게 할 기회가 없으니 필연적으로 잊혀지는 법이죠. 그러다가 어느 날 카톡 내용을 정리하면서 조선배의 계정이 ‘(알수 없음)’으로 이름이 바뀐 것을 보았습니다. 주인을 잃은 조선배의 핸드폰이 이제 번호가 바뀌어 다른 사람 손에 쥐어져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제 내게 남아 있던 그의 모든 흔적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오갔던 대화들을 다시 한번 쭉 읽어보면서 유독 많이 반복된 문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배사장, 전화 안받으시네. 틈나면 전화 부탁. 화이팅 하시고.]

[너무 바쁜 모양? 시간 나면 전화해 주시게.]

[아직도 미팅 중이시군. 전화 한 번 주게나.]

그가 전화해 왔으나 내가 받지 못했던 전화가 그토록 많았던 것입니다. 아니, 기억해 보면 일부러 받지 않았던 전화도 있었습니다. 미팅 중이어서, 운전 중이어서, 때로는 그저 그의 전화 받기가 부담스러워서. 그 후 마지못해 전화를 걸기도 했지만 그냥 그렇게 뭉개버렸던 경우도 많았습니다. 온몸에 날카로운 가시가 삐죽삐죽 돋아있기라도 한 듯 모든 사람들에게 지독한 인간이었던 조선배가 지난 16년 동안 서서히 부드러워지고 살가워지고 인자해지던 동안 난 사실 여전히 그를 부담스러워 하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홍대표가 외삼촌의 변화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죠.

다 자업자득이고 인과응보지, .”

그가 살아있었다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습니다.

전처와 두 딸을 비롯한 한국의 가족들에게 있어 조선배는 가정에서도 폭력과 폭언을 서슴지 않고 끝내 대형 부도로 집안을 풍비박산 내고서 아무런 사과나 설명도 없이 모든 책임을 뒤로 한 채 인도네시아로 훌쩍 떠나버린 무책임한 남편이자 괴물 같은 아버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마랑에 남은 가족들에게는 자신의 자산과 남은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바쳐 가족의 명예를 지키고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며 생활을 지탱하려 했던 헌신적인 가장이었습니다. 과거의 사실을 지울 수 없듯 인도네시아에서 변해버린 그의 모습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의 한 조각이었습니다.

내게 있어서도 빤쪼란에서 만난 조선배는 한없이 교만한 존재였지만 스마랑에서 일년에 한 두 번 찾아오던 그는 더없이 살가운 대선배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두 얼굴 사이엔 엄청난 괴리가 존재하지만 그가 내게 마음을 활짝 연 후에도 난 여전히 어제의 첫인상으로 오늘의 미소를 상쇄하면서 마음을 모두 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의 재력이 넘쳐나던 시절을 훨씬 지난 후여서 당시엔 그리 실감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마지막 몇 년 동안 오직 조선배만이 모든 면에서 온전히 내 편에 서주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엄마 젖을 뗀 후, 나와 얘기하는 동안 백 퍼센트 나를 위해서만 생각하고 전력을 다해 충고해 주는 사람을 가져 본 적이 언제 또 있었던가요?

남자가 독해야 하는데 자넬 두고 가자니 걱정이 앞서는군.”

내가 임종을 지켰다면 그는 숨을 거두기 전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며 엷은 미소를 지었을 것만 같습니다.

핸드폰을 닫으며 그제서야 상실감이 몰려왔습니다.

예전에 그토록 지독한 인간이었던 그가 떠난 후, 오늘 이토록 그리움이 밀려올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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