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소설

후배 등치는 게 당연한 세상

beautician 2022. 7. 5. 12:07

 

존경스럽지 않은 선배들

 

 

인도네시아에 학군 동문회 지회가 발족한 것은 1996년의 일이다. 그저 사업상 업무상 현지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당시 학군 동문회에 참석해서야 자신들이 동문이란 걸 그제서야 알게 된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를 선배들에게 많이 들었다.

 

내가 그 동문회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99년. 발족한지 4년 지난 후였다. 난 1995년에 인도네시아에 발령되어 부임했지만 학군 모임이 있는 것도 모르고 지냈다. 당시엔 그런 공지를 교민전체를 대상으로 낼 방법이 없어 알음알음으로 한정된 주변지인들 정도에만 알릴 수 있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커지던 교민사회에서 당연한 일이지만 개인적 또는 사업적으로 한국인들끼리 충돌하는 경우도 생기고 회사에서 괴롭힘이나 반목도 벌어지고 심지어 주먹다짐이나 송사로 비화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렇게 서로 얼굴을 붉혔던 사람들이 나중에 동문 모임에서 만나 서로 학군 동문 사이였다는 사실에 당황하며 곤혹스러워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자카르타에서 생활하던 동안 많은 학군 선배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고 특히 20기 선배들은 내가 가장 어렵던 시절 내 손을 잡아주었던 고마운 사람들이다. 물론 반목하거나 충돌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서로 서로 동문이란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던 사이였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8~10년 선배들이었는데 때로는 대놓고, 또는 슬그머니 등 뒤로 다가와 칼을 들이밀었다.

 

대기업 H사 현지공장에 근무할 당시 회사돈을 빼돌린 공장장 편에 서서 나를 쫓아내려 앞장섰던 시내 지사장은 16기 선배였다. 그는 본질적으로 살인미수범이다. 그는 1995년에 장부에 기재되지 않은 거액의 공금 펑크를 내게 떠넘기려던 공장장과 공모해 사람을 시켜 내 자동차 바퀴에 몰래 칼자국을 내놓았고 그가 목표한 대로 톨에서 바퀴가 터졌지만 난 살아남았다. 공교롭게도 그날 운전사가 출근하지 않아 내가 직접 운전해야 했고 차가 톨에서 도로 밖으로 처박혔다면 나 혼자 변을 당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는 부인하지만 우연은 그런 식으로 겹치지 않는다.

 

내가 파란만장한 어려운 시절을 겪고 어느 정도 회복하고 있던 2018년경, 한 선배는 내가 여전히 허덕이고 있다고 여겼다. 또 내가 늘 선배들 말을 잘 듣는 편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작은 댓가를 약속하는 것만으로 어렵거나 지난한 일을 간단히 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보통의 경우라면 어려운 상황이 후배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입에 발린 격려라도 하는 게 보통이지만 그는 나의 그런 상황을 오직 자기에게만 유리하게 사용하려 했다. 기본적으로 그는 반격할 수 없는 상황의 후배라면 아무렇게나 부려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 선배는 자기가 직접 하기엔 품이 많이 드는 수출용 제품 머챈다이징 업무를 부탁하며 이익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달 후 머챈다이징을 마치고 수출계약 직전까지 가자 한국 측이 LC를 개설하려던 단계에서 갑자기 나서 그 일은 그냥 알아보기만 하려했을 뿐 실제 거래진행의사는 없었다면서 부랴부랴 날 배제해 버렸다. 실제로 그렇게 중단되었는지, 아니면 나를 배제하고 해당 수출이 이루어졌는지는 이후 전해들은 바 없다.

 

그는 내 시간을 인건비 지불없이 멋대로 이용해도 되는 거라 생각했던 것 같고 어쩌면 자신이 선배이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천상 꼰대였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가끔 동문회에서 마주치는 그는 그때 자신의 한 일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자각도 없다. 

 

 

또 다른 사람은 조금 차원이 다르다. 높은 차원이란 게 아니라 그 반대방향이란 뜻이다.

언젠가 자카르타에서 발족된 첫 시민사회단체를 그가 공개적으로 '이상한 단체'라고 매도했다가 그 단체가 항의하는 사건이 있었다. 한국에서 사회적 참사 희생자 가족을 인도네시아로 초청하던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연히 그 사회단체가 해당 발언을 강력히 항의하자 그의 반응은 이랬다. '내가 인도네시아 국적자로서 내 나라에 와서 불법 정치행위를 하는 너희들을 가만 두지 않겠다. 비밀경찰을 보내 다 잡아넣겠다!' 아필 그 단체의 가장 여리여리한 젊은 여성간사에게 전화하여 그렇게 위협하며 기염을 토한 것이다.

 

문제는 내 쓸데없는 정의감이 거기서 고개를 들었다는 것인데 좁은 교민사회에서 자기 입김이 충분히 작용할 것이고 저 신생 사회단체는 감히 자신을 거역하거나 반격하지 못할 거라 믿는 그가 겁박을 거두고 시민단체와 자카르타를 방문하 희생자 가족 방문자들의 안전을 도모하려면 교민들과 한국시민들 대다수의 여론이 그의 편협한 극우 가치관과 사뭇 다르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어느 정도는 충격적으로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으며 당당해 하던 터였다. 난 말도 붙여보지 못했다.

 

그런 상황을 적당한 기사로 갈무리해 국내 한 진보언론의 협조를 얻어 지면에 싣자 예상대로 한국에서 비난여론이 형성되었다. 그 기사에 등장한 극우인물이 누구인지는 오직 그 자신만 알 수 있도록 조율해 두었지만 본인은 당시 추상같은 여론의 질타에 식겁했을 것이 분명하다. 비난여론은 해당 기사를 거론하며 목소리를 높였으므로 당시 교민여론이 들끓었던 이유가 내가 송고한 그 기사 때문이란 걸 그는 분명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해당 기사가 나온 지 불과 이틀만에 시민사회단체와 화해하는 모습을 보였고 사회적 참사 희생자 가족들의 인도네시아 교민사회 방문은 무사히 진행되었다. 

 

문제는 그때, 즉 2017년에 그가 내게 깊은 앙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뭐,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자신은 현지 비밀경찰도 동원할 수 있는 힘있는 사람인데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던 후배에게 뒤통수를 맞았으니 말이다. 난 감히 그런 대단한 선배를 먼저 공격한 나쁜 놈이 되어 버렸다. 내 입장에선 불러도 돌아보지 않아 목청껏 소리질러 돌아보게 한 셈인데 선배 입장에서는 자기 등에 칼을 던졌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는 일이니 변명하지 않겠다.

 

2020년 그는 브로커로 변신해 있었다. 그는 자기를 아버지처럼 따르는 사람 둘이 현지 국회의원이 되어있어 특정 목적으로 정계 로비가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그런 빌미로 한 한국장비업체를 도와준다며 접근해 원래 있던 이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더더니 자기가 데리고 있던 직원들을 대거 그 회사에 집어넣었다. 물론 그가 자신했던 일들이 사실상 수행되지 않고 그가 현지법인을 장악한 후 비정상적인 운영으로 회사에 피해를 입혔다는 것을 안 본사에서 결국 그를 쫓아냈는데 바로 그 무렵 그 선배가 내가 일을 돕던 회사의 사장을 알게 되어 역시 같은 수법으로 프로젝트 성사를 도울 수 있다며 마수를 뻗쳐왔다. 나는 그 회사의 통번역을 위해 돕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다가 당시엔 결국 행정, 대관업무, 회계 등 회사업무 대부분을 관리하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원래 그 선배가 처음부터 그렇게 망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한때 자신가 믿는 정의를 위해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하기도 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아끼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2017년 이후에 듣게 된 그의 행보는 그가 수십년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쌓은 평판과 신용을 스스로 갉아먹고 있었다. 그가 우리 사장을 만나 브로커 계약을 하면서 내건 조건들 중 하나는 반드시 나를 해고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언젠가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칠 것이라며 사장을 만날 때마다 계속 다그쳤다고 한다. 결국 난 2020년 2월 해고당했다. 그 선배의 뜻이 관철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회사에 약속했던 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회사에서 이미 많은 경비를 받아가 주머니를 채운 그는 우연한 기회에 회사가 국회 고위인사가 연결되자 그 사이의 소통을 독점하려 들며 자신을 중심으로 양쪽과 개별계약을 각각 추진하다가 그 정치인의 심기를 건드려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중 말다툼 끝에 쫓겨났고 그 길로 프로젝트에서도 아웃되고 말았다. 70을 바라보던 나이에 노욕을 부린 것인데 최소한 당시 일련의 상황을 통해 그는 회사에서 꽤 많은 돈을 챙겼고 어쨌든 나를 해고하도록 만들어 복수에도 성공했다. 그 의지와 집념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일부 선배들과는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물론 그 기수의 모든 선배들이 파렴치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몇몇 선배들의 오만, 배신, 막무가내가 학군 동문에 대한 내 오랜, 그리고 깊은 신뢰에 작은 스크래치를 냈다.

 

동문들 중 인도네시아에서 꽤 악명을 떨친 유명한 사기꾼도 두 명쯤 알고 있다. 누군가의 등에 비수를 꼽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저 위 세 명의 선배들도 어쩌면 같은 위상에 두고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물의를 일으키고 누군가를 해쳤다면 가해자가 관계를 재건하고 사회에 복귀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진심 어린 사과인데 요즘은 가해자들이 사과를 하긴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피해자에게 사과를 강요하는 걸 보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이 옳았다고 믿는다. 태산도 옮길 만한 믿음이다. 그들이 믿는 신이 머리 쓰다듬어 줄 만하다.

 

35년 지기 선배에게 큰 돈을 사기당했는데 도망도 가지 않은 그 선배가 오히려 떵떵거리며 사람들 앞에서 피해자인 자신을 조롱한다며 상심하던 한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문득 저 선배들을 기억해냈다. 그 중 둘은 아직 자카르타에 있고 예전 내 차 바퀴에 칼자국을 차량전복과 내 죽음을 기도했던 그 시내 지사장 출신 선배는 그 후에도 오래동안 다녔던 대기업을 퇴직한 후 강남 모 건물 지하에서 볶음밥 전문점을 한다는 얘기를 10여년 전에 들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어쩌면 매우 높은 확율로 그들은 오늘도 누군가의 등에 비수를 박아 넣고 있을지도 모른다.

 

 

2022. 6. 22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이 이야기  (0) 2023.08.21
랩톱에 깃든 작은 이야기  (0) 2022.06.20
그의 원한  (0) 2020.06.05
지독한 인간  (0) 2020.01.03
[소설] 넷째 날  (0) 2020.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