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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소설

악마의 악운

beautician 2019. 1. 25. 10:00

악마의 악운

 

 

1.

강석은 어떤 것에도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건 무의식 중에 터득한 방어기제였다. 경제적 능력이 된다면 뭔가를, 또는 누군가를 소유하고 탐닉하며 오랫동안 사랑하겠지만 그런 호사가 자신에겐 없다고 생각했다. 소중히 여긴다고 해서 그 대상이 반드시 자기 것이 되리란 보장도 없었고 그 소중한 대상이 자신을 그만큼 소중히 여겨주리란 확신 역시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차피 손이 닿지 않는 것들에 미련을 두지 않으려 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반복된 경험에 등 떠밀린 측면도 컸다. 물론 그가 남들보다 훨씬 더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것은 아니다. 누구나 한번쯤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면서 학교친구들과의 사이에 생긴 불편하고도 불쾌한 경제적 간극을 철저히 실감했고 그 과정에서 경제력의 한계가 사람들의 삶에도 분명한 선을 긋는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달아 버렸을 뿐이다. 세상이란 모두가 같은 환경에서 같은 혜택을 누리는 곳이 아니었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 1년을 남기고 공립학교로 전학해야 했다. 대폭 줄어든 아버지의 수입으로 자녀들을 사립학교에 계속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는 4남매 중 막내였고 형과 누나들조차 그에게 아무것도 양보해주지 않았다. 강석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욕심의 한계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욕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그 수단 중 하나가 공부였다. 왠지 모르지만 그에겐 공부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지 수학에서만은 넘지 못할 벽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교회에서 알게 된 한 학년 위의 우수한 누나에게 도움을 받아 이내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가 집요하게 도움을 청하며 따라붙은 건 사실이지만 그 누나도 귀찮아 하지만은 않았다. 그 즈음 강석은 훤칠한 허우대를 갖추고 있었다. 머지않아 외모는 그의 무기가 되었고 나름 괜찮은 매너도 몸에 익혔다.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호의를 얻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니 순진한 교회누나에게 도움을 얻는 것 따윈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때 그 누나의 청초함에 잠시 마음을 뺏긴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애당초 스스로 결정한 대로 어떤 것에도 미련을 두지 않으려 했다.

그렇다고 강석이 늘 번지르르한 감언이설로 사람을 홀려 뭔가 얻어내려고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뭐든 될 때까지 며칠씩 밤을 세워 반복 훈련하는 고집과 오기도 가지고 있었다. 한때 평행봉 공중제비를 연습하다가 바닥에 곤두박질쳐 어깨뼈가 부러지는 큰 사고를 겪고서도 깁스를 풀자마자 곧바로 평행봉에 다시 올라가 끝내 그 동작을 완성한 일도 있었다. 그는 예체능에서도 제법 고른 재능을 보였지만 그걸 과시하지 않았고 노력과 인내심은 대체로 은밀히 발휘되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쟁자라기보다 성실한 동료로 쉽게 받아들였다.

그 결과 아버지가 형과 누나들의 대학등록금과 생활비로 등뼈가 더욱 휘어갈 무렵 강석은, 4년 전액 장학금과 기숙사비는 물론 생활비 일부까지 보조 받는 조건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 조건을 분명히 얻어내기 위해 굳이 명문대를 고집하지 않는 유연성도 보였다. 아름다웠던 그 교회누나처럼 가장 좋은 것이란 가장 얻기 힘든 것의 다른 이름임을 그는 이미 체득했고 있었다. 뭔가 희생하지 않고서는 분에 넘치는 것을 절대 얻을 수 없는 법이다. 세상 돌아가는 법칙이 그랬다.

그가 한계를 뛰어넘는 또 다른 수단은 모든 기회를 빠짐없이 도전해 보는 것이었다. 그는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필수 이수학점의 두 배를 수강했다. 어차피 4년제 전액 장학생이었으니 수강과목을 늘린다고 해서 학비부담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그는 짧게나마 거의 모든 동아리 활동을 경험했다. 운동부나 문학부는 물론 행정고시 동아리나 회계사, 변리사 지망생들의 동아리에 잠깐 적을 두기도 했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알바도 뛰었다. 그런 게 가능했던 것은 하루 두 시간 숙면으로 체력을 충분히 회복하는 체질적 강점도 있었지만 기숙사를 중심으로 동선을 단순화했고 굳이 좋은 학점을 받으려 무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학생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B학점이면 족했다. 그는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편이었고 졸업반 시절엔 생활비가 펑크 나지 않는 선에서 선뜻 밥을 사기도 했다.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호감을 얻는 것은 인생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것과 같았다. 거기에 약간의 진심을 실어주는 것만으로 그는 상대방을 쉽게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남의 마음을 기민하게 읽고 적절히 반응하는 것은 어느새 그의 특기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대학에서 누리지 못한 것은 연애였다. 시간적, 경제적으로 빠듯한 상황에 애인을 만든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호사였다. 하지만 그는 예의 그 교회누나만큼 괜찮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애써 자위했다. 그땐 몰랐지만 그는 그 논리를 평생 써먹게 된다.

그가 대학시절 도전했던 것들 중엔 재미로 보았던 각각 한 번의 사법고시와 행정고시, 두 번의 대학가요제와 세 번의 신춘문예, 그리고 ROTC 지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려 했던 것인데 다른 것엔 모두 떨어지고서도 ROTC에는 덜컥 붙어버리고 말았다. 예상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2학년 겨울까지 서류전형과 면접, 체력측정, 신체검사와 신원조회까지 거치면서 장교임관은 거의 기정사실처럼 여겨졌으므로 그는 일단 자신의 인생경로에 ROTC 과정과 육군 초급장교로 복무하는 것을 끼워 넣기로 했다. 때는 바야흐로 제5공화국이 저물던 1980년대 중반. 만약 군에서 미래가 보인다면 장기복무를 선택할 생각도 있었다. 게다가 군인은 쿠데타를 성공시켜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다. 어차피 경제적으로 석-박사를 딸 여유가 없었던 그는 대학졸업과 동시에 일반 사병으로 입대해 빨리 군복무를 마치고 나와 공무원이 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ROTC가 진로를 바꾸게 만든 것이다.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는 유연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얼마든지 새로운 상황에 맞춰 갈 수 있었다.

 

 

2.




위대하신 민족의 영도자, 김일성 장군님 만세!”

하지만 이런 외침이 울려 퍼지는 북한군 캠프에 끌려 들어가는 것은 그가 계획한 일이 아니었다. 광주 상무대 동복유격장에서 2주 동안 계속된 유격훈련의 마지막 날 밤, 도피 및 탈출 훈련을 하던 중이었다. 첫 주 기본유격훈련을 마치면 2주차엔 무등산에 가상의 군사분계선을 긋고 북한에 침투해 시설파괴 및 요인 암살작전을 수행한 후 마지막 날 적지를 탈출해 남한으로 귀환한다는 설정으로 훈련계획이 짜여 있었다. 변변한 안전장치도 없는 가파른 골짜기와 벼랑이 곳곳에 산재한 그곳에서 칠흑 같은 밤에 벌어지는 훈련인데도 거의 부상자가 나오지 않았던 것은 혹독한 군기에 모두의 오감이 칼끝처럼 날카로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고는 어쨌든 일어나기 마련이었고 그게 하필이면 강석에게서 시작되었다. 추격대를 피해 산비탈 샛길을 달리다가 발을 헛디뎌 계곡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 것이다. 옛날 그 평행봉 사고로 부러졌던 어깨뼈에 다시 금이라도 간 듯 그는 일어나지 못한 채 한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하지만 훈련 내내 그를 괴롭히던 무거운 철모와 40킬로그램 내용물이 들어찬 전투배낭이 쿠션 역할을 하며 더 큰 부상을 막아준 상태였다. 그를 계곡 수풀 속에서 찾아낸 것은 같은 조원들이 아니라 유격장 조교들이었다. 조교들은 이 역할극 비슷한 훈련에서 북한군 추격대 역을 맡고 있었으므로 강석은 포로가 되고 말았다. 북한군은 부상당한 포로라고 살살 다뤄주지 않았다.

조교들은 바리게이트를 친 숲 속 공터를 횃불로 밝히고 그 한복판에 인공기까지 게양해 그럴듯한 북한군 캠프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곳엔 유격대 동료들 20여명이 이미 잡혀와 있었다. 게양대 옆 나무틀에 거꾸로 매달린 동료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무시무시한 비명을 질렀다. 당시 남영동이나 서빙고에서 자행되던 잔혹한 고문기술들이 총동원되고 있었다.

아바이 수령동지 만세! 하란 말이야!!

북한군복까지 차려 입은 조교들이 그렇게 소리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그들 입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강석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교들이 유격대원들을 고문한다 해도 어차피 훈련상황이니 반드시 넘지 말아야할 선이 있을 터였다. 그 당시 남자들이 최소한 한 두 번은 당해 봤을 줄빠따 정도는 하물며 군대에서 또 한번 견뎌내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술 취한 조교들이 고문을 가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조교들이 술을 마신 건 스스로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이겠지만 힘조절에 실패한 그들이 온 힘을 다해 휘두르는 저 험악한 쇠파이프는 자칫 누군가의 허리를 절단 낼 수도 있었다.

이 새끼들아! 난 절대 항복 못해!”

이 간나 반동분자 새끼!”

으악! 대한민국 만세!”

공터 중앙 고문대에 거꾸로 매달리면서, 먼저 고문당하던 옆 동료의 과장된 반응에 강석은 자칫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포로로 잡혀온 다른 동료들은 이미 김일성 만세를 부르고서 한쪽 편에 모여 이마를 땅에 대고 엎드려 있었는데 항복하고 말았다는 자괴감에 흐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훈련상황이니 몸이 더 이상 상하는 않도록 하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그런데 저 친구는 이미 얼마나 저랬는지 몰라도 가혹한 고문을 끈질기게 견디며 땀범벅이 된 채 바득바득 저항하고 있었다. 저 정도면 목숨을 건 거라고 강석은 생각했다.

군번 86다시05650, 소위 장재천!”

그 친구는 비명 대신 관등성명을 대며 조교를 노려보았는데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라 생각한 순간 강석의 발바닥에도 쇠파이프 타작이 쏟아졌다. 백파이프가 되기라도 한 듯, 처음엔 애써 참았던 비명이 나중엔 구타가 잠시 멈추는 중간중간에도 내 의지와 관계없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직 견딜 수 있었다. 게다가 옆의 장재천 소위는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의 혹독한 주리틀기를 애써 버티는 중이었으므로 매달린 지 몇 초 되지 않은 내가 바로 항복할 수는 없었다.

이 간나레, 아주 독종이구만. 더 세게 틀라우!”

그와 함께 강석의 정강이 밑으로도 주리를 트는 긴 나무막대 두 개가 거칠게 파고 들었다. 장소위가 다시 끊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저 어설픈 북한 사투리에 분명 웃음을 터뜨려야 했던 강석도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금방이라도 정강이뼈를 조여 부러뜨리거나 무릎뼈를 탈골시킬 것 같은 엄청난 고통에 강석은 급히 상황과 타협해야만 했다. 어깨에 금이 갔는데 다리까지 부러질 수 없는 일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강석은 유연한 사람이었다.

빠각!

아아아아아악~!”

정강이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장소위는 처절한 단발마의 비명을 올렸고 그 순간 강석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김일성 만세를 연거푸 불러 제쳤다.

 

 

3.

이 빨갱이 새끼들 어떻게 좀 해봐.”

1990년대 하반기엔 각종 노조파업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는데 황국장이 강석의 책상 위에 던져 놓은 파일은 그 중 파업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한 외국계 유통업체 노조 간부들의 명단이었다. 강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국장님, 우리가 이런 것까지 해야 됩니까?”

이런 거라니? 대선이 코 앞이야. 이 회사는 모처럼 유치한 프랑스 자본인데 저 윗분들한테 얼마나 중요한 지 몰라서 그래? 오강석이, 너 그렇게 감 떨어지는 놈이었어?”

언젠가는 저 황국장을 한번 들이받아 주고 싶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황국장은 여당 주류의 줄을 단단히 잡고 있어 앞으로도 한동안 승승장구할 것이었으므로 웬만하면 그와는 각을 세우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차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던져 준 파일을 펼쳐보던 강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 마디 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녀석도 빨갱이라고요?”

그래, 그 놈이 제일 새빨간 놈이야. 어디 파묻든 새사람 만들든 알아서 해보라고. 왜 마음에 걸려? 동기라서? 3팀장한테 넘길까?”

강석은 정색을 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건건이 반목하며 경쟁하고 있던 3팀장에게 일을 넘기는 건 강석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파일 속 사진에서는 그 장재천이 미소 짓고 있었다.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김일성 만세를 끝내 부르지 않았던 그가 군복을 벗고 파업현장에 뛰어들어 빨갱이라 불리는 게 재미없는 농담 같기만 했다. 황국장은 강석과 재천의 접점을 이미 알고서 시험하려 드는 것이었다.

 

그때 유격훈련이 끝난 후 강석은 몇 주 동안 팔을 매달고 다닌 끝에 상무대 퇴소 전 완치되었지만 다리 골절로 후송 갔다온 장소위는 깁스를 풀고서도 퇴소식날 다리를 조금 절고 있었다. 정강이뼈가 으스러지면서 작은 뼛조각들이 계속 신경을 건드려 나중엔 결국 민간병원으로 나가 재수술을 받았다고 들었다. 강석은 그 날 밤, 신속히 김일성 만세를 부른 것이 그의 인생 중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고 늘 생각했다. 재천은 703 특공여단에 발령받았다. 8사단에 배속된 강석도 훈련과 행군으로 점철된 초급장교 시절을 보내야 했지만 당시 막 창설된 특공여단에서 특전사 못지 않은 혹독한 훈련을 장소위의 다리가 버텨줄 지 살짝 걱정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차피 그의 다리였고 그의 인생이었다. 강석은 상무대 동료들이 뿔뿔이 자대로 흩어질 때 장소위의 일도 더 이상 괘념치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대위 계급장을 달고서 특전사 위탁교육을 받을 때였다. 강석은 그와 서먹서먹한 눈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훈련 셋째 날, 재천은 특공부대에서도 이미 수십 번은 했을 점프훈련 도중 새삼 또 다시 다리를 다쳤다. 그때 부러졌던 정강이였다. 이번엔 금이 간 것이었지만 그는 또다시 한동안 깁스를 해야 했고 결국 강석이 훈련을 모두 마치고 중대장으로 부임한 후에야 돌아와 남은 교육을 간신히 수료했다. 군문에서 그의 불운은 그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강석이 동기들 중 가장 빨리 소령 계급장을 달고 주요 보직들을 섭렵할 때 몇 차례나 진급기회를 놓친 재천은 결국 대위로 군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군은 사고와 부상이 잦은 장교를 결코 중용하지 않았다. 전역 후 그는 곧바로 그 프랑스 유통회사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는데 군 장교경력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재천이 그때 군에 일말의 고마운 마음을 가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몇 년 후 강석도 중령 진급심사에서 누락되면서 인생의 첫 실패를 맛보았다. 하나회가 숙청되었다지만 여전히 육사출신이 요직을 독식하던 군에서 우수한 ROTC 장교가 간단히 고급장교 대열에 올라서게 놔둘 만큼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정보기관의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야전부대 초급장교시절을 거쳐 전방부대 중대장과 특전사 팀장, 소령 시절 연대참모와 국방부 보직을 거친 그의 경력은 고급장교로 올라서기엔 불충분했을 지 몰라도 미묘한 정보를 다룰 기관원으로서의 자질은 충분히 입증되었던 것이다. 강석으로서도 어차피 어느 쪽이든 똑같은 국가 공무원이었고 당시 안기부와 경쟁하던 신설 정보기관에서 월급을 더 많이 주겠다며 손을 내미는데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미련 없이 군복을 벗었다.

그는 용의주도한 일처리로 주목을 받은 끝에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렵지 않게 2팀장 자리에 올랐고 곧 최연소 국장이 될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기관에서 하는 은밀한 일들은 왠지 모르게 강석의 적성에 딱 맞아 떨어졌다. 그러니 최고참 3팀장이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고 황국장이 그런 3팀장과의 사이를 교묘히 이용하려 드는 것을 강석이 모를 리 없었다.

 

 

4.




안가에서 재천과 마주 앉은 강석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저열한 악당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눈두덩에 시퍼렇게 멍이 들고 터진 코피로 입 근처가 피투성이가 된 재천은 테이블 건너편에서 등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 강석을 험악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콧대도 찢어져 피가 베어 나왔지만 다행히 내려앉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 자리가 영 불편했던 강석은 잠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지용아, 임마. 모셔 오랬지 잡아 오랬냐?”

말도 마십시오. 얼마나 반항하는지……”

공지용이 그 딱 벌어진 어깨를 잔뜩 웅크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을 하자 강석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옆에서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 있던 한동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져 왔어? 그거 줘 봐.”

강석은 두툼한 누런 봉투 두 개를 건네 받아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 봉투들을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오강석, 너 이 자식, 기관에 들어갔다더니 고작 사람이나 납치하고…… 그동안 이런 남부끄러운 짓 하면서 먹고 산 거냐?”

강석이 대꾸하지 않고 봉투 하나에 손을 집어넣자 재천의 안색이 변하며 더욱 핏대를 세웠다.

여기서 날 쏴 죽인다 해도 세상 일이 너희들 뜻대로 돌아가진 않을 거다!”

?”

재천은 강석이 영화에서처럼 봉투에서 권총이라도 꺼내 자기 머리를 날려버릴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정작 봉투에서 나온 것은 냉장고에서 막 꺼내 온 1리터짜리 플라스틱 소주병이었다. 저리 진지한 놈이 언제 그런 영화들을 보았을까 싶은 생각에 강석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파업 좀 했다고 막 쏴 죽이고 그러지 않아.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또 다른 봉투에서 나온 몇 개의 햄버거 때문에 이번엔 강석이 당황할 때 한동수가 와인용 얼음통과 찜질용 얼음팩이 든 트레이를 들고 들어왔다. 강석은 한동수에게 햄버거를 들어 보였다.

이게 안주냐?”

마음에 안드십니까?”

강석은 또 다시 혀를 차야 했고 한동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허겁지겁 재천의 수갑을 풀어주고서 방을 빠져나갔다. 강석이 플라스틱 잔에 소주를 가득 담아 건넬 때까지도 재천의 눈빛엔 적의가 번득였다. 강석은 햄버거 두 개도 재천 앞으로 밀어 놓았다. 얼음팩을 눈두덩에 올리며 강석을 응시하는 재천의 입 꼬리가 빈정거리듯 살짝 말려 올라갔다.

날 회유하려는 거냐?”

회유할 만한 놈이나 회유하는 거야.”

그건 그냥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동복유격장에서 바득바득 고문에 저항하던 재천은 애당초 말 몇 마디에 홀라당 넘어갈 인간이 아니었다. 강석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재천의 잔에 부딪힌 자기 잔을 입에 털어 넣은 후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냥 있는 데로 얘기할게. 우선 험하게 데려와서 미안해. 원래 그러려 한 건 아닌데 저놈들 둘 다 말귀 못알아듣는 신입이라 모든 게 서툴러. 네가 좀 이해해 줘. , 그리고 오늘 아침에 제수씨 만나고 왔다”.

콧방귀를 뀌던 재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 이 새끼!!”

! 잠깐! 그냥 만나기만 했어! 날뛰지 좀 마!”

테이블을 타고 넘어오려는 재천에게 강석이 한 팔을 내뻗어 제지했는데 그 통에 소주병을 박아 넣은 와인용 얼음통이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아이스큐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포장도 뜯지 않은 햄버거들도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예의 두 사람이 권총을 들고서 몸을 굴리며 뛰어 들었다. 강석이 얼척없다는 표정을 짓자 두 사람은 황급히 총을 집어넣더니 바닥의 햄버거와 술잔, 얼음들을 주섬주섬 주워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서 다시 방을 나갔다. 재천은 그들의 등뒤로도 눈을 부라렸고 강석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또 한번 한숨을 내쉰 후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냥 만나기만 한 거야. , 집에 생활비 갖다 주지 않은 게 벌써 석 달 째더군. 갚지 못한 은행대출도 있던데 대위 퇴직금은 어디다 다 써버리고 그 모양이야? 그런 주제에 노조위원장이 되어서 파업을 주동해? 큰 애 학교 보내는 걸로도 빠듯해서 둘째, 셋째는 유치원도 안보내고. 너한테 빌린 돈 갚는다고 둘러대고서 제수씨한테 내가 봉투 하나 드리고 왔다.”

날 매수하려는 거냐?”

매수하려면 너희 회사가 매수해야지. 그리고 누차 말하지만 매수당할 놈이나 매수하는 거야.”

강석은 내용물이 다 쏟아져 버린 플라스틱 잔에 다시 소주를 가득 따랐다. 재천도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이번엔 잔을 받아 들었다.

잘 들어. 우린 원래 이런 일 하지 않아. 이런 얘기도 잘 안해. 하지만 이번 만은 예외다. 너 같은 꼴통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몇 번이라도 설명해 줄게.”

먼저 하나만 묻자. 누가 다치게 되나?”

그게 중요해? 결과가 중요하잖아? 모두 다 이기는 상황이 되면 되잖아?”

그런 길이 있다면 애당초 우리가 파업을 했을 리 없어!”

길은 있어.”

재천은 사뭇 의미심장한 표정이 되었다. 꺼내 놓은 소주와 햄버거를 함께 먹으며 강석은 설명에 공을 들였다. 턱을 매만지며 강석의 말에 골똘하던 재천은 나중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먼저 잔을 부딪혀 왔다.

, 이 자식. 정말 악마 같은 놈이구나.”

단순한 놈. 그리 나올 줄 알았다.

강석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뒤끝이 씁쓸했다.

 

재천을 납치한 그날, 파업현장엔 한 밤중에 공권력이 투입되어 파업 참가자 대부분을 무자비하게 연행했고 노조간부들은 가혹한 취조를 받은 끝에 24시간도 되지 않아 눈두덩과 입술이 퉁퉁 부은 채 반성문과 조서에 서명해야만 했다. 그 대신 일반노조원들은 그날 밤 모두 석방되었고 간부들은 하루 밤 유치장에서 지내야 했지만 이례적으로 구속영장은 청구되지 않았다. 더욱 의외의 일은 바로 다음날 그 프랑스 유통회사가 기자회견을 열어 노조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동안 강경 일변도였던 사측에서 파업이 진압된 후 갑자기 호의적으로 태도를 바꾼 것은 수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사측은 인도주의와 경제정의를 깊이 고민한 끝에 내린 결단임을 강조했다.

너희 노조간부들을 모조리 잡아다 족칠 거야. 그건 피할 수 없어. 그 장면을 꼭 보고 싶어하는 분들이 계시거든. 너희도 좀 양보해 줘야 해. 하지만 검찰은 우리가 손써 둘 테니 하루 밤만 고생하면 돼. 이미 몇 개월 고생했는데 그 정도야 감수할 수 있잖아? 그 대신 그 프랑스인 지사장도 손봐 줄게. , 잡아와서 때려줄 순 없어. 외교문제로 번지면 큰일 나. 그런데 조금 알아보니 참 재미있는 분이더군. 회사 돈도 좀 빼돌린 것 같고 특히 독특한 성적 취향이 인상적이었어. 아이들을 참 좋아하시더군. 프랑스어 잘하는 직원 써서 안부 전화 한 통 넣어 드렸으니 뭔가 느끼는 바가 있겠지. , 외국 회사가 스스로 노조 요구를 들어주겠다는데 거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거 아냐?”

하지만 회사측은 단 하나의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파업손실에 대해 노조에게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는 대신 파업을 주도한 노조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이건 기본적으로 거래야.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사람들이 납득할 테니 말이야. 어설프게 했다가 나중에 재조사 들어가면 시끄러워져. 그러니 누군가 한 명쯤 사표 정도는 내야할 텐데 어떻게 할래?”

재천이 다른 사람에게 총대를 매게 할 사람이 아님을 강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부당해고된 직원들이 돌아오고 사업장의 근로조건이 개선된다면 그는 기꺼이 감옥이라도 가려 할 사람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던 강석은 황국장에게 파일을 넘겨받은 후, 남들 같으면 가장 먼저 돌아볼 자기 가족, 즉 아내와 아이들을 이 친구가 정말 사랑하긴 하는 것인지 의심하면서 이 모든 것을 신속하게 디자인하여 실행한 것이다.

 

 너 무슨 마술을 부린 거야? 그리고 이건 또 무슨 장난이야?”

황국장은 자기 책상 위에 놓인 경과보고서에 애써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물의를 빚으며 끝나기 쉬웠던 외국기업에서의 파업이 비교적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된 것은 정권의 부담을 크게 더는 일이었다. 다른 기관이 공작했던 파업장에선 엄청난 재산피해와 함께 사상자까지 나오던 중이었다. 황국장은 기막힌 수완이었다며 기관장에게 칭찬까지 들은 터였다.

그 놈 제리코 가면 잘 할 겁니다.”

이 빨갱이 새끼가?”

제가 보장하죠. 파일 보셨겠지만 근무성적은 톱이었어요. 현장엔 그런 놈이 적격입니다.”

기관에서 은밀하게 운영하던 인도네시아 현지법인 제리코는 국내 발전소에 매월 벌크선 단위로 석탄을 공급하는 무역회사였다. 거대한 비자금 창구이기도 했지만 현지에서 돈이 줄줄 새는 느슨한 관리를 손볼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 강직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대목에 착안한 강석은 공작경과보고를 하면서 이제 막 백수가 된 재천을 제리코 관리직에 추천한 것이다. 마침 재천이 그 프랑스 유통회사에서 했던 일도 재무관리와 총무였다. 황국장은 입맛을 다셨다.

스펙이 딱이긴 한데 …… 이 새끼 사고 치면 너도 책임지고 옷 벗는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이 새끼가 사고 치면 이 새끼가 옷 벗어야죠.”

강석은 그렇게까지 재천의 뒤를 봐주려는 자신이 스스로 새삼스러웠다. 북한군 캠프에서의 고문을 견뎌낸 재천이 빨갱이라 불린 것에 진심으로 울컥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그의 아내와 아이들도 눈에 밟혔다.

그 사람을 꼭 도와줘요.”

강석이 재천의 집을 방문했던 아침, 재천의 아내가 한 말이 그의 귓전을 오랫동안 맴돌았다. 강석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분이 한껏 고조된 황국장은 그날로 기관장 승인을 받아 주었고 재천은 두 달 가량 준비를 마친 후 가족들과 함께 자카르타행 비행기에 올랐다. 제리코 부분은 강석이 안가에서 설명해 주지 않은 이야기였으므로 재천은 그후 오래동안 자신이 운이 좋아 바로 취직이 된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해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었다.

 

 

5.

정권이란 돌고 돌기 마련이지만 그 안에 같이 휘말려 돌아가는 사람들의 사정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진보정권 10년동안 끈 떨어진 갓처럼 한직을 맴돌던 황국장은 보수정권의 귀환과 함께 1차장이 되어 본청으로 금의환향 했다. 매번 솜씨 좋게 줄을 갈아타며 국장을 거쳐 차장 자리를 넘보던 강석에겐 재앙이 아닐 수 없었다. 우직하게 황차장의 줄을 잡고 함께 추락했던 3팀장과 비교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팀장은 강석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빨갱이 새끼들한테 부역하고서 무사할 줄 알았어? 세상사 사필귀정이야. 인생 공평한 거라고.”

그는 그렇게 이죽거리며 강석에게 배신자의 낙인을 찍었다. 그 후 강석은 인내력과 충성심을 끝없이 시험당했는데 첫 5년간 이라크. 수단, 차드. 소말리아 같은 격오지나 내전 중인 아프리카 국가들을 전전해야만 했다. 물론 강석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그는 꾸준히 반성문과 충성의 맹세를 제출하며 중앙복귀를 도모했다. 앞서 밝힌 것처럼 그는 유연한 사람이었다. 그가 마침내 싱가포르에 안착한 것은, 그러나 몇 년 더 리비아와 아프가니스탄, 요르단을 마저 거친 후의 일이었다. 9년만에 이제 좀 사람답게 살 만한 곳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보낸 혈서 동영상이 주효했던 거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싱가포르 지부는 동남아를 총괄하는 허브였으니 그에 대한 신뢰가 상당부분 회복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문서를 보려면 돋보기 안경을 써야 했고 머리는 반백이 되어 있었다. 유배생활이 혹독했던 것이다. 인간의 일생에 있어 9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정권의 생명은 그보다 훨씬 더 짧았다. 그 해 겨울 본국 국회에서 대통령이 탄핵소추되자 그 동안 진급을 거듭해 기관장이 된 황차장과 그의 1차장 자리를 물려받았던 서국장( 3팀장)은 꼬리에 불붙은 여우처럼 어쩔 줄 몰라 했고 지대공 미사일을 피해 회피기동하며 몸부림치는 전투기가 디코이 플레어를 화려하게 흩뿌리듯 국내외 모든 지부에 하루에도 몇 차례씩 수많은 지령을 날려 보냈다. 정보 파쇄와 말소를 반복적으로 지시하고 재확인하는 내용 일변도였다. 한편 강석은 그 즈음 자카르타에서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었다.

서부 자카르타에서 찍은 오늘 아침 사진입니다.”

남비서가 강석의 책상 위에 올려 놓은 태블릿 PC 화면엔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공지용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베테랑 블랙요원이 된 그가 하필 이때 자카르타에 나타난 것이다.

전 정권 당시 본국 국영기업이 제리코의 대지분을 인수하면서 대대적인 현지 광산개발에 나선 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제리코의 경영진이 친정부인사들로 물갈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후 제리코는 갑작스러운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자본금을 모두 날리고 막대한 부채까지 짊어지며 급속하게 부실화 되었다. 탄핵이 아직 헌법재판소에 계류된 상황에서 권한대행체제의 정부가 제리코를 지원한다며 수천억 원의 추가예산을 편성하고 있었는데 기자회견이 잡혀 있던 제리코의 한국인 과장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강석이 아프리카로 쫓겨나기 전까지만 해도 막대한 흑자를 내던 기관 비자금의 보고가 정권이 바뀌자 갑자기 깡통회사가 되어 버렸다는 건 누군가 의도적으로 털어먹었다는 의미이기 쉬웠다. 사실 지난 몇 년간 전세계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된 본국 국영기업들의 해외투자는 대부분 거덜난 상태였다. 무너져 내리던 정권은 파산직전의 회사들을 헐값에 매각하여 꼬리를 자르거나 거액의 막판 재투자를 계획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마지막으로 한번 더 털어먹겠다는 의도였다. 예의 제리코 직원은 본국 모 방송사 탐사보도팀과 자카르타 모처에서 접선할 예정이었는데 바로 직전 실종된 것이다. 그 시점에 본청 현장요원이 자카르타에 나타난 것은 어쩌면 물리적 증거인멸이 시도되고 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싱가포르 허브를 패싱하고 본청에서 직접 자카르타를 휘저으려는 모양인데 저걸 그냥 두고 보실지, 순한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지, 지부장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남비서의 말투는 냉소적이기 이를 데 없었지만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그저 강석을 떠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싱가포르 지부를 붙박이로 지킨 남비서가 그저 가슴만 큰 싸가지 없는 여자일 리는 없었다.

장재천 이사도 어제부터 잠적했어요. 실종된 직원이 접촉하려 했던 한국측 탐사보도 팀에게 넘길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마 결정적 증거라 간주될 만한 것이겠죠. 한국에선 기자 두 명과 현직 국회의원도 둘이나 함께 왔으니 아무리 본청 블랙요원이라도 함부로 손대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장재천 이사가 겁을 먹고 잠적한 건지 어떤 세력의 보호를 받고 있는 건지는 분명치 않아요.”

누군가 제리코를 통해 천문학적 거금을 한번 더 털어먹으려는 도상에 하필이면 그 꼴통, 재천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강석 때문에 인도네시아에 오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재천은 당시 레바논에 있던 강석의 연락처를 찾아내 전화로 노발대발했으니 이 자금증발사건의 추악한 전모를 처음 알았을 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재천이 오른팔 같은 젊은 직원을 몰래 탐사보도팀에게 보낸 것일 텐데 그의 실종으로 이제 어떤 각오를 다지고 있을지 강석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요원들과 장비들도 현지에 대기시켰어요. 지부장님이 직접 진두지휘 하시길 다들 기대합니다.”

무슨 장비?

남비서가 자카르타에서의 화려한 추격전과 총격전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것 같아 강석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짖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의 나라에서 우리 요원들이 무작정 총싸움 하고 그러지 않아. 이런 말이 거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때 들어온 핸드폰 메시지를 지긋이 응시하던 그는 간단히 답을 단 후 이내 남비서를 올려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이왕 그리 준비했다면 이 참에 남비서가 좀 다녀오지. 장재천이 찾아서 현지 안가에 모셔 놓던가 싱가포르로 모셔와. 모셔오는 거야. 잡아오는 게 아니고. 뭐야? 그 표정은? 다른 사람 시킬까?”

맡겨 주세요. 다녀오겠습니다.”

정색을 한 남비서가 급히 가방을 챙겨 나가는 것을 보며 강석은 어느새 옛 상관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곧 양복 상의를 어깨에 대충 걸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보수정권이 무너지는 것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그럼 곧 자신의 시대가 돌아올 것이다. 정무수석에게 보낸 그 혈서 동영상에 대해 청문회에서 누가 묻는다면 국가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였다고 둘러댈 계획도 이미 서 있었다. 그날이 오면 누굴 어디로 유배 보낼까?

강석은 길 건너 래플스팰리스 호텔 라운지에 들어섰다. 유배 후보자 한 명이 거기 와 있었다.  3팀장, 아니 현직 1차장 서민국이 또 한 사람을 대동하고 라운지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같이 앉은 사람은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물들기 시작한 한동수였는데 역시 베테랑 요원이 되어 있던 그는 서차장의 보디가드 역할일 터였다. 아까 남비서가 보고할 때 메시지를 보내 미팅을 요구한 것이 바로 서차장이었고 이 라운지는 강석이 지정한 곳이었다. 안주머니에 무엇을 넣고 다닐지 모를 적대적인 상대를 호젓한 밀실에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오지부장, 당신이 장재천이 빼돌렸지? 명색이 고위 공직자란 사람이 그런 빨갱이 새끼를 언제까지 싸고 돌 거야? 이건 이적행위라고!”

서차장은 한동수를 라운지 외곽으로 물리더니 격앙된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애써 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장재천이는 20년 가까이 묵묵히 우리 무역 일을 해 준 친구입니다. 그런 순진한 사람한테 약점을 잡혔다면 본청 일 처리가 너무 허술했던 거 아닐까요?”

이 새끼가 어디서! 좀 더 아프리카로 뺑뺑 돌려줄까?”

그 과장이 왜 기자들을 못만났을 것 같아요?”

뜬금없는 질문에 서차장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설마 공지용이 자기가 막았다고 보고하진 않았겠죠?”

그럼……. 그 놈도 당신이?”

내가 그 사이 있었던 나라들을 생각해 봐요. 다 이슬람 국가들이었죠. 인도네시아는 최대 무슬림 인구를 가진 나라고요. 포섭하고 조직하는 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내가 그동안 이슬람조직들과 나름 인연을 맺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죠. 그들 통해서 자카르타에서 사람 한 둘 납치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제리코 내부사정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건 나도 원치 않는 일이라 급히 막아드린 건데 본청에선 내 충정을 믿어주지 않는군요.”

서차장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결국 사람을 가로챈 거 아니오?”

서차장의 말투가 갑자기 존대말 비슷하게 변했으므로 강석은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결코 표정엔 내비치지 않았다.

자카르타는 내 관할입니다. 오히려 본청이 공지용이를 보내 가로채려다 실패한 거죠.”

그럼 그 과장도, 장재천이도, 오지부장 당신이 확보하고 있단 말이오?”

차장님, 날 뭘로 보세요? 내가 확보한 게 그것뿐이겠습니까?”

강석이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몇 개 누르자 서차장의 폰에 알람이 울리며 서류가 하나 떴다. 그걸 열어본 서차장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제리코 케이스의 핵심은 돈의 흐름이죠. 서울에서 온 기자들도 그 막대한 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캐러 온 거고요. 제리코가 겉으로는 광산개발을 빌미로, 직진 밖에 모르는 장재천 이사를 오지현장에 처박아 놓고서 그 사이 제리코 사장을 통해 돈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건 누구나 짐작하는 일입니다. 저 순진한 장재천이는 지금 그걸 고발하겠다고 기염을 토하지만 기껏해야 제리코 회계장부나 들고 있겠죠. 하지만 지금 보여드린 그 파일, 낯익지 않으세요? 제리코 자금이 흘러 들어간 그런 차명계좌들이 싱가포르 시중은행에 수백 개쯤 있더군요. 그걸 조사해준 것도 금융계에 있는 이슬람 친구들이에요. 그 계좌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그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확연히 보이겠죠. 문제는 그걸 왜 우리 기관이 나서서 숨기려 하느냐는 거고요. 물론 서차장님이나 황원장님은 이 문제에서 순결한 신부처럼 결백하시리라 믿지만요.”

서차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너 이 새끼, 언제 그걸 다……?”

역시 남비서가 모르는 건 서차장님도 모르시는군요.”

그건 지금쯤 공항으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을 남비서가 강석의 감시역이라는 반증이었다. 애당초 이제 와서 본청에서 갑자기 그를 다시 신뢰할 리 없었다. 물론 그건 강석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싱가포르 발령을 받는 순간부터 그는 남비서에게도 비밀로 한 채로 아프리카와 아랍을 떠돌며 알게 된 이슬람 네트워크를 통해 미심쩍은 정보들을 끌어 모아 조사해 두었던 것이다. 이슬람 조직들과의 연계는 끈끈하면서도 위험스러웠고 갑갑하면서도 효율적이었는데 유배지를 전전하던 강석에게는 가장 유리한 보험이었다.

보아하니 정권이 뒤집힐 조짐을 내다보고 나를 장재천이랑 엮어 저 빼돌린 돈에 대한 혐의를 통째로 덮어씌우려 했던 거죠. 그래서 굳이 유배를 풀고 날 싱가포르까지 불러들인 것 같은데 감지덕지하며 어리버리 늘어져 있지 않아 실망시켜드렸군요.

서차장의 머리 속에서 계산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역시 비밀과 배신이 판치는 정보기관에서 오랜 기간 타잔처럼 유려하게 줄을 타온 사람이었다. 서로 들고 있는 패를 알았으니 이를 토대로 서로 최선의 배팅을 할 차례였다. 강석은 서차장의 반응에 따라 수십 가지의 다른 시나리오를 이미 짜 놓고 있었다. 하지만 너구리 같은 서차장이 최소한 자기 무덤 파는 폭력적, 파괴적인 반응을 보일 리 없었다.

그래서, 당신 원하는 게 뭔데?”

우선, 나는 존경할 만한 상관을 모시고 싶습니다.”

나랑 황원장에게 물러나란 말이오?”

그의 고조된 감정이 대답에 묻어나자 강석은 서차장이 제대로 미끼를 물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내가 두 분께 그런 돼먹지 못한 요구를 할 리 없죠. 제가 1차장이 되어 서차장님을 원장님으로 모시고 보필하려 합니다만.”

휘둥그래진 서차장의 눈가에 다시 교활한 미소가 깃들었다.

그럼 황원장만 묻어버리자는 거요?”

윗분한테 그런 짓 하면 안돼요. 새 정권 들어서면 기관장, 단체장 자리가 만 개쯤 날 텐데 우리 둘이 힘쓰면 쟁쟁한 자리 하나 마련해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들 약점을 쥐고 당신이 기관을 쥐락펴락 하겠다는 거군.”

그런 야심가가 아니란 걸 잘 아시잖습니까?”

강석은 미소를 흘렸지만 그의 제안을 저울질하는 서차장의 표정에서 그의 생각이 언뜻 읽혔다. 이런 악마 같은 놈……

그러니 지금 진행되는 일들을 중단해 주시면 좋겠어요. 장재천이나 제리코 직원에 대한 수배령도, 제리코 털어먹은 세력을 비호하는 활동도. 그리고 날 감시하고 도청하는 일도요.”

, 그건...... 피차 분명한 보장이 필요한 일 아니오?”

난 차기 원장이 되실 차장님 결단만으로 충분하다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웅이 되고 싶지 않으세요?”

두 사람은 그 후에도 그 자리에서 10분 정도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차장은 서늘한 미소를 입꼬리에 달고서도, 에어컨 한기가 몸서리쳐지도록 차가운 라운지에서 이마에 식은 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 강석이 하는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6.

자카르타 모처의 호텔방에서 하염없이 제리코의 내부고발자를 기다리던 탐사보도팀은 생각지도 않은 인사의 비밀스러운 방문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국정원과 쌍벽을 이루는 국내 정보기관의 2인자 서민국 제1차장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정보원 비공개를 전제를 한 인터뷰에서 서차장은 제리코의 비자금유출 자료 일부분을 보여주며 사건의 전모를 소상히 설명했다. 그 자료는 앞서 강석이 보내준 것이었다. 물론 그 사건에 개입했던 서차장과 황원장의 역할을 완전히 탈색한 자료였다. 정권교체가 임박했다고 예측되지만 그와 관계없이 성역 없는 자체조사를 엄중히 진행할 것이고 필요하다면 검찰에 자료를 넘겨 공개수사를 의뢰할 것이라고 서차장은 재차 강조했다.

우린 기본적으로 빨갱이들과 싸우는 조직입니다. 이렇게 정부 시스템을 움직여 사적인 이익을 챙기는 부류들이야말로 적을 이롭게 하는 빨갱이들이죠.”

탐사보도팀 중엔 서차장의 애국심에 감복한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정보기관 2인자의 말은 제리코 내부고발자의 증언보다 더욱 신빙성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인터뷰가 몰고 올 엄청난 파장이 임박한 대선정국에서 자칫 역풍을 불러올 것이라 판단한 기자들과 국회의원들은 자체 협의를 거쳐 인터뷰 내용을 일단 봉인해 두기로 결정했고 이로서 이 사건은 언제 터질 지 모를 메가톤급 시간폭탄이 되어 수면 밑에 감추어졌다. 그 역시 강석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7.

일주일 뒤, 자카르타 변두리의 한산한 노천식당에서 강석은 테이블로 다가오는 재천에게 손을 흔들었다. 재천은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동복유격장에서 부러졌던 그의 다리는 평생 그의 짐이 되고 있었다. 재천은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진 테이블 건너편에 앉으며 활짝 웃음을 지어 보였는데 앞니 한 개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말도 못하게 반항했다고 들었다. 그 이빨은 보상할게.”

재천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악마 같은 놈. 너랑 엮이기만 하면 이 모양이지.”

누가 할 소리를.

게다가 그에게마저 악마라는 소리를 듣고 싶진 않았다. 자주 그리 불리긴 했지만 악마 같다는 건 분명 능력 있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었다. 하지만 늘 찾아오는 악운과 역경 속에서 정의롭게, 때로는 무모하게 고군분투하는 재천에게까지 그렇게 불리는 건 정말 악마가 되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물론 두 사람이 서로 엮일 때마다 일이 더욱 복잡해지는 건 상성이 좋지 않은 서로의 마음 속, 천사와 악마가 충돌하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제수씨는 잘 계시고?”

아무래도 마음고생 좀 했지. 너랑 엮이면 무조건 손해니 조심하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한다.”

학창시절에 수학 가르쳐 준 보답으로 훤칠한 육군장교 소개해 줬으면 손해 아닌데 그 여인 참 빡빡하네.”

그 사이 인도네시아 광산전문가가 되어버린 재천은 제리코가 저대로 파산하면 다시 백수가 될지도 모르는데 또 어떻게든 손을 써 뒤를 봐줘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은 재천의 미워할 수 없는 강직함보다, 이젠 화석처럼 남은 옛 교회누나에 대한 아련함이 작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두 사람을 소개해 준 것은 대위 시절이었다. 특전사 위탁교육을 마치고 잠시 휴가를 얻어 참으로 오랜만에 옛 교회에 갔을 때 첫 결혼에 실패하고 돌아온, 옛날 그 아름다운 누나를 다시 만났다. 그녀가 다시는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강석은 뜬금없이 재천을 떠올렸다. 재천은 그가 아는 한 가장 곧은 심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강석의 소개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 두 사람은 얼마 후 덜컥 결혼식을 올렸고 강석은 물론 거기 참석하지 않았다.

물론 고맙다고 전해달라고도 했어. 늘 마음 써주는 거 잘 안다고.”

늘 마음을 썼다고? 그럴 리 없지 않은가. 강석은 자기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엔 별다른 의미도, 미련도 두지 않는 사람인데 말이다.

그 누나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

그렇다니까.”

재천과 건배를 하며 강석은 어떤 뿌듯함 같은 것을 느꼈지만 제천에게 그런 감정을 들키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어떤 것에도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이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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