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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인도네시아 대선 관전포인트

beautician 2014. 7. 7. 01:27


인도네시아 대통령선거일인 7월 9일이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수하르토 대통령이 오랜 철권독재통치 끝에 하야한 1998년 이후의 대통령들 중 와히드 대통령(구스두르 = Gus Dur)과 그가 총제적 난국에 빠져 하야하게 되었을 때 부통령에서 자동 진급한 메가와티(Megawati) 대통령까지는 과거 한국의 통일주체국민회의 같은 구세대의 산물인 MPR 대의원들이 간접선거로 뽑은 대통령들이었으니 현직 대통령인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가 첫 민선대통령인 셈입니다. 강직한 군인 출신으로 알려졌던 유도요노 대통령은 당시 인도네시아를 고질적인 부패에서 구원할 유일한 희망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숩깔라 부통령과 짝을 이룬 첫번째 임기때엔 기대했던 것과 같이 어느 정도 여러 정책들이 성과를 보이는 듯 했지만 그의 민주당이 이제 충분히 세를 키웠다는 확신이 들자 연정하고 있던 골카르의 유숩깔라 부통령을 용도폐기하고 이번엔 자기당 소속 듣보잡 부디요노 부통령과 파트너를 이루며 단독 정권을 수립했죠. 그러나 그때부터 유도요노 정권은 부정부패 속으로 속절없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두 명의 걸출한 인물이 대선전에 뛰어 들었는데 그들이 바로 특전사령관출신 쁘라보워 수비얀토(Prabowo Subiyanto = 이하 쁘라보워)와 현직 자카르타 주지사 죠코 위도도(Joko Widodo = 이하 죠코위)인 거죠. 물론 가장 처음 대선출마를 시사했던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초창기엔 이 사람의 사진이 수많은 옥외광고판을 뒤덮었습니다.



골카르 당수인 바크리였어요. 

골카르로 줄여부르는 Golongan Karya 당은 원래 수하르토 대통령이 수장이었던 곳이죠. 거대재벌기업인 바크리그룹의 총수이기도 한 바크리는 정주영의 몇배를 뛰어넘는 엄청난 초갑부였어요. 그는 동부자바 시도아르죠(Sidoarjo) 지역의 화산지대를 잘못 건드렸다가 용암처럼 뿜어져 나온 막대한 양의 뜨거운 진흙이 그 일대의 엄청난 면적의 토지를  집어 삼키게 방치한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대선출마를 선언했던 것입니다.



위의 사진은 홍수가 아닙니다. 지하에서 분출되어 솟아오른 뜨거운 진흙이 그 인근 수백개의 마을과 군락들을 이렇게 삼켜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은 2014년 현재 이미 8년째 방치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건 정말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정작 문제는 바크리 자신이 대선 후보군에서 형편없이 인기가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는 결국 대선을 몇개월 앞두고 대통령 후보를 사퇴하고 맙니다. 


이제 본 게임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쁘라보워와 조코위의 대결.



그런데 조코위가 유숩깔라와 러닝메이트가 된 것은 좀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조코위는 민선 주지사 3선을 노리던 노회한 파우지 보워를 꺾고 자카르타 주지사가 된 후 파격적인 행정개혁과 부패척결을 통해 절대적인 시민들의 지지를 얻은 사람이죠. 밑바닥에서 시작해 인생역전을 이루어 잠시 성공적으로 가구사업을 했던 그는 정계에 뛰어들면서 솔로(Solo) 시장으로서도 그 지역 주민들의 절대적 성원을 받았고 초절정갑부로의 초고속 지름길인 자카르타 주지사가 된 후에도 그는 자기 주머니를 채우긴커녕 통장으로부터 구청장에 이르기까지 지독히도 부패한 자카르타 주정부의 철저한 비협조 속에서도 조직을 일신하고 누구도 하지 못했던 최선의 선정을 베풀어 인도네시아의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춰 주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4월 그가 속한 PDI-P 당은 30% 이상의 지지율을 얻지 못해 대선 출마를 위해선 다른 당과 런닝메이트를 결성해 종횡연합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아무도 조코위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습니다. 조코위는 기존 정치인들과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깨끗했던 거죠. 기존 정치인들은 조코위의 절대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를 깎아 내리려 감언이설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과거 한국에도 다른 역대 대통령들과는 너무나 다른 대통령이 한 분 계셨죠. 난, 어쩌면 그 분의 불행한 역사가 인도네시아에서도 조코위를 통해 또다시 반복되는 것이 아닐까 우려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조코위의 손을 잡은 건 현직 유도요도 대통령 첫번째 임기의 부통령이었던 유숩깔라(Jusuf Kalla)였어요. 바크리가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바로 그 골카르당의 핵심원로였던 그는 조코위와 손을 잡음으로써 골카르의 당론을 거역한 배반자가 되어 출당 당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 바크리의 출마의지에 찬물을 끼얹고 그의 출마사퇴를 유도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 되었습니다. 물론 조코위의 투쟁민주당(PDI-P)로서는 천만원군을 얻은 것과 같았죠. 문제는 유숩깔라의 색깔이 과연 조코위가 추구하는 인도네시아의 미래와 맞아 떨어지느냐 하는 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재벌 출신인 유숩깔라보다는 위란토(Wiranto)가 조코위의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쁘라보워와 제대로 맞서 싸울 수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죠. 4성장군 출신인 위란토는 1998년 수하르토 대통령의 하야 당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특전사령관 (Pangkostradat) 쁘라보워를 단칼에 제압해 좌절시켰던 당시 국방장관이었거든요.


그런 그가 조코위의 손을 잡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가 손을 내민 곳은 골카르당의 바크리 총재였습니다. 그러다가 바크리가 사퇴하자 바크리의 러닝메이트였던 위란토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1998년 당시부터 하비비정권 내내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를 누렸던 위란토로서는 상당히 위신 상하는 일이 되고 말았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는 그는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중이었고 바크리 못지 않게 인기가 바닥이었으므로 뾰족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보수주위자인 그가 조코위와 는색깔이 맞지 않는 게 사실이지만 그가 뒤늦게나마 조코위 지지성명을 발표한 것은 최소한 쁘라보워에게 정권을 내줄 수는 없다는 분명한 입장표정이기도 했습니다.  쁘라보워와 위란토의 악연을 1998년 자카르타 폭동을 거치면서 당시 뉴스와 신문을 관심있게 봤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대충은 기억하고 또 짐작하는 일입니다.


왼쪽이 2014 대선의 강력한 후보인 그린드라당의 쁘라보워 총재, 오른쪽이 하누라당의 위란토 총재


위란토 총재는 1998년 수하르토가 하야한 후 당시 하비비 정권의 국방장관이었고


당시 육군중장이었던 쁘라보워장군의 당연한 상관이었습니다. 쁘라보워는 Komando Cadangan Strategy Angkatan Darat 흔히 Kostradat 이라 부르는 전략지원특전사령부의 사령관이었어요.


하지만 위란토는 그의 계급장을 떼어버립니다.(이 사진은 진급견장을 붙여주는 장면이지만요)


1998년 3월 쁘라보워는 특전사령관으로 발령을 받습니다. 

당시 외환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하는 중이었고 인도네시아 역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죠. 게다가 재선된 수하르토의 7번째 임기가 막 시작되고 있던 떄였습니다. 그런 엄중한 순간에 수하르토가 사위인 쁘라보워를 특전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경제상황 뿐 아니라 그러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사회적 저항을 예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그리고 예상했던 최악의 사건이 실제로 벌어집니다. 그해 5월 뜨리삭띠 대학에서 벌어진 데모에서 경찰군의 발포로 학생들이 여럿 숨졌고 이 사건은 거대한 반정부시위로 확대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불붙어 갔습니다. 그 상황에 편승한 도시빈민들은 자카르타 전역의 화교상업지역에서 대대적인 폭동과 약탈을 벌이며 자카르타를 전쟁터처럼 만들어 버렸죠. 


시내는 전쟁터가 되고

Kelender의 한 몰에선 약탈자들이 지른 불에 안에 있던 약탈자들 1,200여명이 한꺼번에 불에 타 죽기도 하고 

화교상점들을 털어 단단히 한몫을 챙긴 도시빈민들도 당시 수두룩했지만 아무도 검거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자의인지 타의인지 절대 알수 없는 일이지만 수하르토 대통령은 1998년 5월 21일 대통령 사퇴를 선언하고 하야합니다. 쁘라보워 특전사령관이 움직인 것은 바로 그 다음날인 1998년 5월 22일이었습니다. 위란토 장군은 자카르타 외곽의 부대들이 자카르타로 향하고 일부 정체불명의 부대들이 하비비 관저 방향으로 이동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쿠테타가 벌어진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들이 있습니다. 대선을 맞아 시중엔 조코위와 쁘라보워는 물론 하비비와 위란토의 자서전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그 내용들은 많은 부분에서 서로 어긋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죠.  일각에서는 수하르토 하야에 편승한 위란토 장군이 그동안 눈엣가시 같았던 쁘라보워를 이 참에 제거하기 위해 모함을 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쁘라보워의 쿠데타 시도를 위란토와 하비비 정부가 효과적으로 잘 막아낸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후세의 평가인 것이고 그 당시 자카르타 시민들은 시시각각 전파되는 뉴스속보를 통해  쁘라보워의 부대가 시내 주요거점들을 장악했고 쁘라보워장군이 하비비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해 그날 밤 대통령궁에 들어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분명 쁘라보워는 당시 하비비 정권과 건곤일척의 담판을 지으려 했던 것이고 수하르토 전대통령, 즉 자신의 장인어른이 그를 특전사령관에 임명했던 원래의 취지에 100% 부응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다음 날 수하르토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취소하고 다시 대통령궁으로 복귀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날 면담이 끝나자 대통령궁을 에워쌓던 쁘라보워의 부대는 철수하기 시작했고 쁘라보워장군의 특전사령관 보직도 그날로 해제되고 맙니다.  번개불에 콩구워 먹듯 쁘라보워 장군의 군생활은 그날 이후 급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고 그는 군복을 벗었을 뿐 아니라 도망치듯 황급히 요르단으로 출국해 버리고 말았어요. 짧지 않았던 망명생활의 시작이었죠. 그날 밤의 면담에서 실제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당사자들 외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자리에 배석했던 위란토 장군이 모종의 발언을 통해 쁘라보워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 버린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쁘라보워는 당시 철저히 우세한 군사력을 앞세우고서도 지레 위란토에게 겁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건을 통해 쁘라보워는 위란토를 증오해야 할 분명한 이유를 갖게 된 것이고 위란토 역시 그날 밤 이후 이를 갈며 와신상담 했을  쁘라보워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게 된 것이죠.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쁘라보워가 대통령이 된다면 난 그가 어떤 식으로든 분명 보복을 시작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쁘라보워가 돌아와 그린드라당을 만들고 국회의석 상당수를 차지하더니 급기야 2014 대선에 가장 강력한 대선 후보 중 한명이 되리라고는 당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쁘라보워는 아직도 마음 속으로 수하르토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를 몇 군데에서 보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린드라당을 만들 초창기에 그는 수하르토의 막내아들인 또미 후토모를 대통령 후보로 밀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바도 있었어요. 당시 대기업 총수의 자리까지 올라 기아의 세피아 승용차를 인도네시아의 국민차 띠모르(Timor)로 둔갑시키는 말도 안되는 마술을 연출했던 또미는 자카르타 폭동 이후 증권거래소 건물 지하2층 주차장의 폭탄테러사건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고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던 판사의 권총살해사건을 배후에서 사주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던 차였습니다. 실제로 또미는 몇년간의 도피 끝에 1년 남짓 황제같은 수감생활까지 했었죠. 결국 또미는 대선후보가 되더라도 직선제 상황에서는 전혀 당선 가능성이 없는 인물이었어요.  물론 그것은 그린드라당이라는 전국규모의 정당을 단시간 내에 조직하고 구축해 낼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그 동안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던 수하르토 일가의 막대한 비자금을 끌어들이려는 제스쳐였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쁘라보워 자신이 직접 대선에 나선 것은 그래서 현명하고도 당연한 결정이었던 거죠.


그의 러닝메이트인 PAN 당의 하타 라자사는 현직 유도요노 대통령이 강력하게 지원하는 후보임에 이견이 없으리라 봅니다. 그는 현직 대통령의 사돈이니까요. 현재 모든 비리와 부패의 중심에 서게 된 민주당과 유도요노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에게 비호의적인 정당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만큼 곤혹스러운 일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법처리가 되어야 할 일들이 현정부에 산적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이번엔 반드시 사돈이 부통령이 되어 그걸 막아줘야 한다는 것이 유도요노 대통량의 속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ㅂㄱㅎ의 당선을 빌며 국정원을 비롯한 모든 정부기관, 심지어 군 사이버사령부까지 동원하여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MB의 마음이 그런 거였겠죠.


그 하나가 센츄리 은행 문제입니다. 이 문제 하나만으로도 소설 몇 권쯤은 충분히 쓸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민주당 재무담당자였던 나자루딘 사건이죠. 몇년 전 빨렘방에 유치된 SEA 게임 준비를 위해 경기장과 선수촌 건설에 배정된 수십조 루피아 단위의 돈을 횡령했던 이 사건에서 해외로 도피한 나자루딘은 콜롬비아에서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자수하기 앞서 유튜브를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와 자료들이 담긴 노트북과 CD들을 흔들며 신변보장을 확보하려 시도했죠. 그러나 그의 신병이 인도네시아로 인도되는 과정에서 그가 들고온 자료들이 모두 분실되었거나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검찰 발표가 나옵니다. 참 신기하죠? 그는 대통령을 향해 자신이 입을 다무는 대신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는 요구를 하기에 이르고 그가 갇힌 감옥에 대통령이 직접 찾아가기까지 합니다. 물론 당수와 예전 재정담당자라는 인연이 있다곤 해도 구설수에 오를 게 분명한 행동이었는데  만약 부패척결의지가 충만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면 이 나자루딘 사건을 다시 파해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센츄리은행 사건의 서막 쯤 되는 안타사리 사건 역시 다시 되짚어 봐야 할 사안입니다.

당시 부패척결위원회인 KPK의 수장으로 의욕적인 활동을 벌이며 인도네시아 정재계 거물들 다수의 비리를 포착해 수사를 진행하던 안타사리는 추잡한 치정에 얽히 살인교사사건의 주범으로 전격 체포되었죠. 골프장 캐디인 라니라는 아가씨를 사이에 두고 연적인 PT. 라자왈리의 사장 줄카르나인을 살인교사했다는 것입니다. 가장 공정하고 깨끗해야 할 위치의 공직자를 이런 식으로 가장 추잡한 사건에 연루시켜 당사자의 명예를 먼저 말살시키는 것은 원래 인류역사상 즐겨 사용되어온 가장 효과적인 정치적 암살방식입니다.  당시 줄카르나인이 누군가의 막대한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던 것이 KPK의 수사대상에 올라 있던 상태였으므로 그에게 비자금 관리를 맡겼던 미상의 인물들은 꼬리를 자르기 위해서라도 줄카르나인의 입을 막아야만 했던 상황인데 그렇게 히트맨을 두 팀이나 보내 오토바이로 승용차에 따라붙어 줄카르나인을 권총으로 사살하면서 이 참에 안타사리를 캐디와의 삼각관계 치정에 눈이 먼 살인교사범으로 엮어 일석이조를 노렸던 것이죠.


그런 뻔한 수를 읽지 못해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고 만 안타사리가 안타깝고 그럴 수 밖에 없도록 캐디를 사전에 안타사리에게 접근시키는 등 물밑작업을 했을 미상 세력의 치밀함은 무서울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엔 앞뒤가 맞지 않는 수많은 정황들이 보이고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찰고위직의 양심선언까지 터져 나왔지만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안타사리는 이해할 수 없는 판결로 장기징역형을 받아 현재 복역중입니다. KPK는 그 후 형식적으로나마 몇명의 부빠띠, 주지사들과 공직자들을 부패혐의로 잡아 넣으며 건재를 과시하려 했지만 사실상 안타사리 이후의 KPK는 이승만시절 역관광 당한 반민특위와 비슷한 입장에 처했던 것이라 보입니다.


이러한 이유로라도 유도요노 대통령이, 아니 현 정권이 조코위와 유숩깔라가 대선에서 승리하는 꼴을 절대 두고 볼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타 라자사는 사돈이고 쁘라보워는 군 후배이니 부패를 절대 용인할 리 없는 조코위나 자신이 직접 용도폐기해서 분명 감정의 앙금이 남았을 유숩깔라보다는 훨씬 안전할 테니까요.


이런 배경과 역사를 가진 2014년의 대통령선거가 이제 이번주 수요일 전국에서 시작됩니다. 외국에서의 부자재투표는 이미 시작된 상태이고요.

개표는 1주일 정도 걸리겠지만 3-4일 안에 대세는 판가름 나겠죠. 


이 선거가 과연 공정하고 투명하게 치루어질까요?

만약 조코위가 앞서간다면 투표결과가 확정되는 순간까지 조코위의 신변안전은 과연 보장받을 수 있는 걸까요? 그는 과연 살아남을까요?

유도요노 대통령과 위란토 총재는 남은 며칠 동안 어떤 신의 수를 두려 할까요?

아직도 수하르토 시절이 좋았다고 얘기하는 수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은 청렴결백할 뿐 아니라 효율적 행정능력까지도 검증된 조코위를 버리고 옛정권의 사위인 쁘라보워를 정말 대통령으로 뽑으려 할까요?

우리가 2012년의 한국의 시계를 1979년 이전으로 돌려놓았던 것처럼 인도네시아인들은 2014년의 시계를 1998년 이전으로 돌려 놓으려 할까요?


이런 것들이 이번 대선의 관전포인트라 생각합니다.



2014. 7. 6. 



P.S. 이상의 내용들은 당시의 기억은 물론 당시의 기사, 인터넷 상의 다양한 자료를 참고했지만 사실과 다른 내용들이 포함되았을 가능성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따라서 팩트의 정정, 보완 등을 적극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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