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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블루스

밑바닥 블루스 (5)

beautician 2021. 12. 27. 11:20

 

 

 

ep5. 에필로그 - 밑바닥 사람들

 

 

메이의 가방을 스넨 폴섹에서 찾아온 건 그 해가 거의 저물어가던 2011년 12월 27일의 일이었습니다.

 

원래는 다시 아쩨 북방 어딘가의 시추선으로 돌아간 우신이 돌아오길 기다려 함께 경찰서에 가방을 찾으러 갈 예정이었으므로 그게 2012년 1월이나 2월 쯤이 될 예정이었지만 알정을 당긴 이유는 시추선에 있던 우신이 이삔(Ipin)이란 친구를 대신 붙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만든 3D 만화영화 <우삔과 이삔(Upin & Ipin)>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삔이란 이름의 예쁜 대머리 어린이를 떠올리겠지만 우신의 친구 이삔은 아직도 스넨 지역에서 활동하는 현역 쁘레만이었습니다.

 

말레이시아 만화영화 <우삔과 이삔>

 

폴섹에서는 가방을 내주면서 따로 돈을 더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상대로 없어진 내용물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메이의 지갑 안엔 돈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또 핸드폰 두 개도 그 안에 있었는데 싸구려 에시아(Esia) 전화기는 그대로 있었지만 내가 3년쯤 쓰다가 물려주었던 노키아 전화기는 그 행방을 알 수 없었습니다. 보관소의 보관물품 목록에도 전화기가 적혀 있었지만 그 목록을 직접 만들었던 경찰 측에서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며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여기 적힌 이 핸드폰 말이에요. 이게 왜 없어요?” 

“몰라, 왜 나한테 물어봐? 조서 꾸민 형사를 찾아서 직접 물어 보라구.”

 

보관소 창구의 경관이 오히려 역정을 내더랍니다. 노키아는 핸드폰 시장을 한 때 풍미하다가 이젠 거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지만 제대로 된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인 당시만 해도 블랙베리와 함께 시장에서 잘 나가던 브랜드였습니다.  에시아 전화기라도 돌아온 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이제는 시장에서 퇴출된 지 오래인 CDMA 방식 에시아 전화기엔 거래선 연락처들이 빼곡히 들어가 있었으니까요.

 

그나마 그렇게 해서 스넨 버스웨이 환승장에서 벌어진 소매치기 사건이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메이가 이삔과 함께 스넨 폴섹에 갔던 것은 어차피 중부 자카르타 경찰서에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이네 집안 막내딸로 그 동네 일대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예니가 예기치 않은 사건에 휘말렸는데 그 집안에서 그런 문제를 해결할 용기를 낼 만한 사람이 메이 뿐이었고, 우신이 붙어줘야 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대신 현역 쁘레만이 붙어준 김에 두 군데 경찰서 일을 모두 봤던 것입니다.

 

예니가 사건에 휘말린 건 가방을 찾기 이틀 전인 2011년 12월 25일 성탄절의 일이었습니다.

주말에도 일하곤 하는 우리 회사에서 쉬는 날이 오면 메이는 밀린 빨래 하고 아이들을 뿔로마스 (Pulo Mas) 빠쭈안 꾸다(Pacuan Kuda) 구 경마장에 데려가 조랑말을 태워 주거나 인근 몰에 있는 타임존 같은 곳에서 놀이기구를 태워주면서 집안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거창한 휴일 계획을 세우면 폭우로 홍수가 나 자취방이 물에 잠기거나 메이 아버지가 전날 메이의 딸을 구타한 것을 알게 되어 싸우러 가는 등 생각지 않은 일들이 거의 예외 없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메이는 내겐 운을 가져다 주었지만 스스로는 정말 운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그해 성탄절엔 예니에게 일이 터졌습니다.

 

앞서 잠깐 소개한 메이의 여동생 중 정식으로 제빵학교를 나온 리스티는 피자헛 직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당시 정직원이 된지 3년쯤 되었고 막내 예니는 쁠루잇(Pluit)에 새로 지은지 얼마되지 않았던 엠포리움(Emporium) 몰 소고(Sogo) 백화점에 다녔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깜짝 놀랄 만큼 빼어난 미모를 가진 말라깽이 예니는, 비슷한 환경의 그 또래 여자들이 흔히 겪는 것처럼 스스로 예니의 애인이라 주장하는 남자가 스토킹하든 주변을 떠돌며 예니에게 다가오는 다른 남자들을 협박과 폭력으로 밀어내고 예니에게도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윽박지르고 있었습니다. 예니로서는 집 안에서는 아버지에게 매일 폭력을 당하고 밖에서 '이노(Ino)라는 이름의 바딱 출신 스토커에게 발목을 잡힌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난 이 친구를 좋아할 리 없었고 메이나 우신도 오래 전부터 이노에게 이를 갈았지만 강단이 없었던 예니는 이노에게 끌려다녔습니다.

 

그런 예니도 직장에서는 책임감 있는 직원으로 인정받았고  같은 책임감으로 가족과 친구들을 감싸곤 했는데 그게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예니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책임감 강한 게 부질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친구들에게 같은 책임감과 진심을 기대하는 것이 대개의 경우 부질없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말입니다. 환경 때문이었는지, 예니의 성격 때문이었는지 주변엔 이노같은 남자들과 예니를 이용하려는 친구들이 꼬였습니다. 그러나가 이번 사고가 터졌습니다.

 

예니가 예전 그랜드 인도네시아 (Grand Indonesia)몰의 블리츠 메가플렉스 영화관(현재의 CGV 영화관) 에서 근무할 때 알았던 친구가 예니와 함께 어딘가로 피크닉 간다는 핑계를 대고 나가 사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 친구의 엄마가 예니에게  수십 통의 전화를 걸어 딸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소고 백화점에서 근무 중 전화통화가 금지된 예니가 제대로 전화를 받지 못하자 친구의 엄마가 12월 24일엔 예니의 집까지 찾아와 소동을 벌였습니다. 메이가 함께 살았다면 일찌감치 선을 그었겠지만 당시 메이는 회사 입장에 서서 사고를 치고 도망간 직원들 문제 후속처리를 하던 중 도로에서 피습당하거나 꼬스에서 누군가 메이의 아기를 납치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2010년부터 내가 따로 저렴한, 그러나 안전한 아파트를 구해 이사시켜 놓은 상태였습니다.

 

예니에겐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으므로 결국 그 친구 어머니도 자기 딸이 거짓 핑계를 댔음을 수긍하는 눈치였고 그 일은 그렇게 일단락 되어 가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인 성탄절 11시경 예니가 살던 센티옹 집에 이번엔 형사가 찾아 왔습니다. 전날 밤 그 친구의 시신이 살렘바(Salemba) 소재 찝토(Cipto) 병원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중에 들은 바로 그 친구는 절명한 상태로 병원 응급실 앞에 버려졌는데 완전히 발가벗겨진 상태에서 성인용 기저귀를 찬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친구의 엄마가 연락을 받고 병원에 간 것으로 보아 연락처나 신분증은 남겨 두었던 모양입니다. 문제는 그 친구의 엄마가 경찰서에서 조서를 꾸밀 때 딸이 예니와 피크닉을 간다고 했던 거짓 핑계를 또 다시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사가 집에 들이닥친 것입니다. 마침 예니는 소고에서 근무 중이었고 메이가 엄마에게서 전화를 받고 형사와 유선상으로 설전을 벌이며 동생을 비호하려 했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답니다.

 

난 대략의 설명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젊은 여자의 시신이 거의 나체였다는 건 성폭행-강간사건일 개연성이 컸고 왜 하필 성인용 기저귀였냐는 부분은 석연치 않지만 옷을 입혀줄 수 없거나 옷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 같았습니다.어두웠거나 난장판이 되었거나 죽은 후 장소를 옮겼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시신을 아무 데나 유기하지 않고 기저귀를 채워 번잡한 시내 찝토 병원에 시신을 버리고 도망친 것으로 보아 일말의 양심을 가진 지인들, 친구들의 소행일 가능성인 듯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은 그런 추리가 아니라 예니를 보호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분명 큰 힘이 되어 줄 것이 우신은 물리적으로 1000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아쩨 북방 해상에 있었고 메이의 아버지나 리스티의 남편 백수 우타이에겐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메이 엄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스토커 이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스스로 법을 전공하는 법학도라고 자랑하던 그는 정작 도움이 가장 절실한 시점에 바쁘다며 꽁무니를 감추었습니다. 이런 장면 한 두 번 보는 게 아닙니다.

 

96년 내 사업을 처음 시작하던 당시 내 첫 직원이었던 에피(Evi)가 서부자바의 경게인 찌레본(Cirebon) 출신으로 흑진주처럼 윤기 흐르는 피부와 눈부신 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하필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것은 어쩌면 그녀의 운명이었을 겁니다. 본부인이 몇 차례 테러를 가해왔지만 곧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해 주겠다는 남자의 약속만 믿었던 에피는 임신한 몸으로 고향에 돌아가 결혼식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약속한 결혼식날 남자는 결국 나타나지 않고 하객들을 불러 모았던 에피의 부모와 친척들은 가문의 치욕을 피하려고 당일 에피의 사촌을 급히 신랑으로 급조해 결혼시켰습니다. 이런 일은 실제 비일비재하게 벌어집니다. 다행히 다정다감한 그 사촌은 사실 오래 전부터 에피를 흠모해 왔던 터여서 정말 행복한 부부가 되기를 꿈꾸었지만 몇 년 후 정말 이혼하고 나타난 그 불륜남이 그 사촌을 밀어내고 에피를 데려가 버렸죠.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99년에 코린도 5층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던 당시,여직원 아구스티나(Agustina)가 임신한 사실을 파트너 릴리가 발견하고 내게 귀띔을 해왔습니다. 임신시킨 남자가 연락을 끊고 도망가 버린 상태에서 아구스티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자살까지 시도했습니다. 낙태할 방법도, 비용도, 아구스티나는 스스로 감당할 상황이 되지 않았어요. 릴리는 같은 여자로서 격분하며 아구스티나가 처한 상황을 동정했으므로 우린 빠듯한 경비를 쪼개 비용을 내주었습니다.하지만 수술을 마치고 퇴원한 아구스티나는 사무실에 한 남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우릴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 아구스티나, 이 사람 누구?”

제 남자친구요.”

 

아구스티나가 낙태문제를 해결하자 비용부담을 성공적으로 떠넘긴 남자친구가 쪼르륵 돌아온 것입니다. 난 그날 눈에서 불똥을 튀기며 격분한 릴리를 말리느라 애를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이노가  궁지에 몰린 예니를 슬그머니 외면하는 건 놀랄 일도 아닙니다. 예니의 문제가 해결되면 이노는 또 슬그머니 나타나 예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삔(Ipin)을 찾아! 아무래도 지금 도울 수 있는 건 그 놈밖에 없는 것 같다.”

 

우신은 메이의 도움요청을 받고 그렇게 말하며 이삔에게도 따로 연락을 넣었습니다.

이삔은 예전 메이의 엄마가 자취방의 우신을 처음 만나던 날 거기서 함께 어슬렁거렸던 메단 출신 건달 중 한 명이었어요. 우신과 함께 이삔, 술탄, 이런 친구들이 함께 몰려 다녔는데 고졸 출신 우신은 시추선에 올랐고 대졸 출신인 술탄은 우월한 외모까지 겸비해 스넨 시장통 아낙들의 선망의 시선을 받다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는데 우신의 세 배쯤 되는 덩치를 한 이삔만 아직도 스넨 시장에서 어슬렁거리는 현역 쁘레만이었습니다. 그나마 나이를 좀 더 먹어가며 중고책 파는 작은 가게를 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해 글도 잘 못읽는 이삔이 책가게를 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지만 그건 포장이었고 사실은 옛 보스 밑에서아직도 숫자 맞추기 복권을 몰래 팔고 있었습니다. 월요일인 12월 26일 메이에게 상황 얘기를 들은 이삔은 27일 화요일 아침 일찍 가게 문을 닫고서 메이와 예니를 데리고 중부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동네에서 내로라 하는 건달들 깡패들 양아치들이 모두 메이의 편이 되어준다는 사실이 신기했습니다. 메이네 본가가 있는 센티옹의 까위까위 동네 입구에 늘 죽치고 있는 양아치들 중 치렁치렁한 머리 때문에 '곤드롱'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한 나이 많은 쁘레만은 얼마 전까지도 메이나 예니가 출근에 늦으면 오토바이 뒤에 태워 출근시켜 주곤 했답니다. 오래 전 메이가 첫 직장인 라와망운(Rawamangun) 지역 아리온(Arion) 몰에 입점한 핸드폰 가게를 다닐 때 그 동네 양아치 한 명에게 나쁜 짓을 당해 울면서 집에 돌아가자 그 소식을 알게 된 동네 건달들 30여명이 밤새 라와망운을 뒤져 그 양아치를 찾아 나서 그쪽 건달들과 길바닥에서 대단한 패싸움을 벌인 일도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전통적인 거리 패싸움 따우란(tauran)

 

친구의 거짓 핑계에 이름이 한 번 올랐던 것뿐인데 경찰은 예니를 증인으로 사건에 포함시킨다는 방침이었어요. 조사받던 증인들이 진범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며 겁을 주면서요. 하지만 소고 직원인 예니는 그런 일에 연루되어 멀리 떨어진 경찰서를 오락가락 하게 되면 진위 여부를 떠나 구설수를 피하고 싶은 회사로부터 해고당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예니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직도 기간제 계약직 직원이었으니까요. 이런 순간에 동네 건달은 변호사보다 100배는 더 효과적입니다.

 

형님들, 내 얼굴 기억 안나요? 나 이삔이요. 나 봐서 내 동생들 좀 괴롭히지 마쇼. , 형님?”

 

이삔의 얼굴은 스넨 폴섹이 아니라 중부 경찰서에서도 통했습니다. 소매치기도 아닌 살인사건 관련 조서를 꾸미는 자리에서 가히 거인같은 덩치의 이삔은 중간에 좀 과하다 싶으면 브레이크를 걸고 농담도 던지면서 메이와 예니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습니다. 나중에 메이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이삔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싹싹한 태도로 형사들에게 사근거렸다고 합니다.

 

조사는 두 시간 만에 끝났습니다. 내가 현금카드 분실, 차량도난 등으로 받아본 경찰조사는 거의 4-6시간 정도 걸렸으므로 두 시간이며 매우 빨린 끝난 겁니다. 예니는 거기서 자신이 이 사건과 무관하다는 증언과, 생계/직장유지에 지장이 있으니 증인채택을 재고해 달라는 Surat Keberatan, 즉 '이의서’ 를 만들어 서명했습니다. 이삔이 연신 담당 형사에게 굽신거리며 부탁하고 유도한 결과였습니다. 아침 일찍 시작한 조사가 끝난 게 오전 9시 경. 예니는 소고 백화전 오후 쉬프트 교대시간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그런 후 메이가 이삔과 함께 스넨 폴섹에 가서 스넨 버스웨이 환승역 소매치기 사건의 증거물로 압수되었던 가방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수고해준 이삔이 오히려 메이에게 점심을 사주고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2011년 한 해가 저물던 그 시절, 자카르타 빈민가 저 밑바닥엔 아직 사람냄새 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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