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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밑바닥 블루스

밑바닥 블루스 (4)

beautician 2021. 12. 26. 12:10

 

ep.4  돈이 정말 문제

 

 

메이는 스넨 폴섹에서 경관에게 취조를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피해자인데 말입니다.

 

이건 뭐야? 이거 사람 이름인가? 그리고 그 옆에 적힌 금액들은 무슨 뜻이야?”

그건 우리 보스가 쓴 메모에요.”

이 돈이 무슨 뜻이냐구?”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난 그걸 XX회사에 전달하면 끝인데.”

이거 받을 돈인 모양인데. 너희 사장 전화번호 몇 번이야? 내가 직접 물어보지.”

 

메이와 경관이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내가 메이에게 적어 준 수금계획내역을 놓고서입니다. 적잖은 금액이 적혀 있으니 경찰입장에서는 궁금하기도 하고 군침이 돌기도 하겠지만 그게 메이가 스넨 환승역에서 겪은 소매치기 사건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요? 메이는 겁을 먹고서도 최선을 다해 말을 둘러대며 방어했지만 경찰의 홈그라운드에서 궁지에 몰리는 건 단시 시간문제였습니다. 내 수금처 내역이 경찰 손에 들어간다고 해서 뭔가 우리 범죄나 비리가 드러나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매우 골치아픈 일이 벌어질 개연성이 커질 것은 분명한 일이었어요.

 

경찰은 메이의 가방을 증거품으로 압수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내용물들까지요.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요?

거기엔 메이의 개인 핸드폰과 회사 핸드폰, 지갑, 집 열쇠, 카드키 등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소매치기의 소지품을 사진찍어야 할 마당에 경찰들은 왜 메이의 소지품들을 사진찍은 것일까요? 꼭 그게 필요한 절차였다 하더라도 가방의 파손된 멜빵고리 사진과 소지품 사진만으로도 증거는 충분했을 것이고 그게 아니면 가방만 증거품으로 보관하면 될 텐데 그 내용물까지 모두 압수해야 한다며 고집부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정말 규정이 그런 것이었을까요?  

경찰에게 뭔가를 압수당하면 거의 회수할 길이 없다는 것을 우린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회수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적잖은 댓가를 또 치르는 것이 보통이었어요. 대개 당시 현지 경찰은 대개 민중에게 감사할 것을 강요하며 그 감사의 표시로 두툼한 지폐봉투를 원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날 메이가 가방에 있던 물건을, 비록 할부지만 모두 팔아 계약금을 받았고 그 외에 적잖은 수금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메이가 가방을 돌려 받을 때 내용물이 없어져 있기 쉬웠고 경찰은 오리발 내밀 것이 뻔했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경찰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답니다. 우신(Usin)이라는 사람이었죠. 궁지에 몰려 있던 메이는 우신의 출현하자 반가움에 울음을 터뜨렸고 우신은 메이를 감싸 안으며 경찰관에게 험악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메이와 동생들이 방(bang) 우신, 그러니까 우신 오빠라고 불리는 이 메단(Medan) 출신의 남자를 소개하려면 그가 메이의 가족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게 마지막 편이어야 하는데 또 길어집니다.

 

메이는 원래 내가 직원으로 받으려 했던 사람이 아니었어요. 수년전 한 한국인의 요청을 받아 그에게 소개해 주려고 만났던 친구였는데 몇 주 후 그 사람이 뻔뻔스럽게도 채용을 번복하고 나몰라라 하는 바람에 떠안게 된 덤터기였죠. 하지만 그렇게 떠안은 메이가 괄목할만한 영업능력을 발휘하며 우리 매출을 주도하면서 우린 순식간에 미용기기 수입판매 업계에서 선두로 치고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복덩어리가 굴러 들어온 걸 그제야 알았고 난 당연히 입이 귀에 걸렸죠. 메이를 채용하기로 했다가 이를 번복했던 그 한국인은 내가 한국에 출장간 사이 월급을 두 배 주겠다며 메이를 빼가려 했지만 메이는 기특하게도 나와 의리를 지켰습니다. 물론 정작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찾아갔더니 채용을 번복해 사람 인생을 꼬일 뻔 하게 만든 사람을 메이가 두 번 다시 신뢰할 리 없었습니다.

 

그런 메이가 사실은 그 일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심각한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엔 학교를 다니기 위해 부유한 친척집에서 식모 일을 하다가 성폭력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미혼모가 된 후엔 어린 아이들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메이의 팔에 무수히 남은 담배빵 상처들이나 콧뼈가 부러졌다 아물어 붙은 흔적 같은 것들이 메이 아버지의 소행이란 걸 난 나중에 알았습니다.

 

메이에겐 리스티와 예니라는 두 여동생이 있었고 남자 형제도 둘 더 있었습니다. 하지만 맨 위 오빠는 보고르군 자싱아라는 지역의 금광에서 갱도가 무너져 사망하는 사고를 당했고 리스티와 예니 사이에 있던 남동생은 마약사범으로 잡혀들어가 감옥에서 사망했습니다. 경찰이나 형무소에서 조기출소 조건으로 거래를 제의했다고 하는데 메이네 집안에선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니 남동생의 죽음은 메이를 비롯한 모두에게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단지, 메이의 아버지에겐 폭력을 휘두를 대상이 하나 줄은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메이 아버지의 가정폭력이 계속되던 중 음식솜씨가 뛰어난 메이의 엄마는 영화판 밥차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보통은 식모, 파출부로 센티옹과 조하르 바루(Johar Baru) 지역을 바쁘게 오가야 했습니다. 그때 빨래를 해 주던 인도네시아식 자취방인 한 꼬스(Kost)에서 건들거리는 바딱(Batak) 출신 건달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 우신이 있었어요. 험상궂은 표정과는 달리 우신은 메이의 엄마를 살갑게 대했다는데 아마도 어린 나이에 고향을 멀리 떠나온 그는 엄마의 포근함이 필요했던 것 같고 졸지에 두 아들을 모두 잃은 메이의 엄마 역시 우신과 그의 다른  건달 친구들이 자식처럼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우신 같은 친구들을 쁘레만(Preman)이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의 정식 번역은 '건달', '양아치'이지만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정한 직업 없이 자기 몸뚱어리 하나만 믿고 길바닥에서 좌충우돌하며 살아가는 사람 정도일 듯합니다. 앞서 등장했던 랜달 역시 쁘레만이었어요. 그런데 우신은 랜달보다 좀 더 심한 쁘레만이었습니다.

 

그는 도박이 금지된 인도네시아에서 스넨 시장을 배경으로 로또랑 비슷한 숫자 맞추기 복권을 팔면서 경찰서 유치장을 제 집 드나들 듯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시장통은 물론 경찰서에도 잘 알려졌고 어느 새 동네에서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위험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메이 엄마를 자기 엄마처럼 모시며 메이의 집 주변을 맴돌았고 수중에 돈이 생기면 그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기만 해도 엄마 뒤로 숨는 메이의 동생들에게 선물을 한아름씩 사오곤 했습니다.

 

그는 메이의 아버지에게 대항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기고만장한 메이의 아버지가 처음부터 우신에게 겁을 먹었을 리 만무하지만 물벼락을 맞아도, 벽돌로 머리를 맞아 피를 줄줄 흘려도 싱글싱글 웃으며 메이의 엄마와 가족들 앞에 몸으로 가로막고 능청을 떨며 급기야 아버지의 팔목을 비틀어 연장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우신을 메이 아버지가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메이의 아버지는 우신에게 이를 갈았지만 그가 근처에 와 있으면 가족들에게 결코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그런 우신이 1년쯤 모습을 감췄던 적이 있었습니다. 스넨 폴섹이나 중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도 보통은 반나절, 길면 3-4일 후엔 다시 나와 길바닥을 주름잡던 그였습니다. 물론 우신 자신의 능력보다는 그가 예전에 일을 해 주었던 복권조직 보스가 뒤를 봐주었기 때문이었죠. 그 복권조직 보스는 스넨 시장 뒷골목에서 꽤 힘을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종적을 감춘 지 꽤 시간이 지난 후 그 복권조직 보스가 메이의 집에 사람을 보내 연락을 보내 왔답니다. 우신이 찌삐낭 (Cipinang) 교도소에 있다고요.

 

쁘레만들은 이런 저런 일을 청부받아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우신은 이번에도 할부금을 제때 내지 않는 사람에게 돈을 받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몇 명과 함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둘러리로 나섰습니다. 시내 금은방들 말고도 특별히 정부 고관 부인이나 군, 경찰 고위간부 부인들만을 대상으로 귀금속 장신구를 판매하는 은밀한 조직의 의뢰였습니다. 고관 부인들 중에서도 찌질하게 대금을 떼어 먹는 경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문제는 우신 일당이 쳐들어간 곳은 모 육군 장군 집이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멋모르고 거기서 행패를 부리다가 모두 바로 잡혀 들어간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총 맞지 않은 게 다행이었죠.

 

나중에 교도소에서 나온 우신은 메이의 엄마 앞에 와서 다시는 경찰서에 잡혀갈 일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했습니다. 합법과 불법의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 보통인 쁘레만 우신에게 어쩌면 일생일대의 결정이었습니다. 교도소 안에서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죠. 그 후 그는 이리저리 일을 알아 보던 그는 고향 메단에서 가까운 북부 수마트라 유전지대 시추선에 올라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개월마다 휴가를 받아 여동생들 줄 선물을 잔뜩 안고 센티옹의 메이 집으로 돌아왔지요.

 

쁘레만

공교롭게도, 정확히는 다행스럽게도 메이가 소매치기를 당하던 날 마침 우신이 마침 자카르타에 돌아와 있었으므로 메이가 경찰서에 도착하면서 우신에게 전화로 도움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다른 일 때문이었다면 보통 나한테 전화했지만 메이는 경찰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경찰은 우신 차지였어요..

 

에이, 형님들, 내 동생한테 수작 좀 걸지 마쇼. 담배값? 그건 나랑 얘기하자니까. , 글쎄. 중요한 건 소매치기 이미 잡았다는 거 아니요? 좀 쉽게 갑시다. ”

 

그 지역의 유명한 잡범 출신 우신은 경찰들과 말다툼도 하고 담배를 사와 얼르기도 하며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스넨 폴섹에서 그간의 안면을 십분 발휘하면서 메이를 빼내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증거물로 잡힌 가방은 결국 빼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우신은 오빠 노릇을 톡톡히 했고 메이는 마침내 안전히 집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그런 설명을 모두 듣고 나서 난 뭐라 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결국 그 날 수금한 돈을 날린 셈이 되었지만 경찰에 더 이상 엮이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몇 번 경찰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잃은 돈을 경찰과 선을 긋는 비용으로 치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도 너 경찰에 더 이상 엮이는 거 원치 않으니 그 가방은 포기하자. 내가 다 감수할 테니 걱정하지 마. 네 잘못 아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이 대목에서 마술을 부립니다 그리고…, 이거요.”  메이가 슬그머니 책상 위로 내민 것은 두툼한 흰 봉투였어요.

 

이건…?”

어제 수금한 돈이요.”

 

경찰에 뺏긴 게 아니었어? 그날 스넨 환승역에서 폴섹으로 이동하는 동안 경찰 오토바이 뒤에 탄 메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급히 가방 안에 있던 돈을 바지 속으로 열심히 옮겨 넣었던 것입니다. 정확히 어디에 숨겼던 것인지는 차마 알고 싶지 않습니다. 메이는 자기 돈 15만 루피아가 든 지갑을 가방 속에 남겨 둬 경찰들이 지갑에만 관심을 두게 만드는  용의주도함과 희생정신을 발휘한 것입니다. 메이가 가져온 돈은 수금내역과 단 한 푼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메이는 회심의 미소를 싱긋 지어 보였고 그 돈을 받아 드는 내 손이 살짝 부끄러웠습니다.


비상용 지갑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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