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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도로 풍경

beautician 2017. 2. 21. 10:00

 


꽤 오래된 일입니다.

캄보디아에 국제선 여객기가 추락했을 때 인근주민들은 일부 구호활동에 나서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흩어진 승객들의 시신에서 소지품을 빼내고 화물을 들어 내오는 등 약탈에 몰두했다는 신문기사를 기억합니다.. 사람들의 이기심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지만 타인의 비극을 틈타 자신들의 배를 불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혹독한 빈곤을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도 그 인면수심의 몰인정에 혀를 찰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선 그런 일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부임한지 반년쯤 지나서부터였습니다.


 

교통사고현장은 마치 생지옥과도 같습니다. 특히 야간에 일어나는 교통사고는 주로 열악한 도로를 고속으로 달리다가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우기가 끝나는 무렵 인도네시아의 일반도로는 이미 몇 번의 침수를 겪은 끝에 아스팔트가 녹아 없어져 울퉁불퉁하게 자갈이 드러난 부분이 많고 그 위에 아무 규제도 받지 않는 과적차량들이 질주하면서 마치 한차례 포격이라도 당한 듯한 엉망진창의 도로상태를 부추깁니다. 이렇게 해서 파손된 도로 위에 어떤 구멍들은 깊이가 30cm가 넘기도 하고 바퀴가 빠지고도 남을 정도로 폭이나 길이가 큰 것들도 많아 자칫하면 한국보다 현저히 조명이 어두운 밤길을 달리다 여기에 걸려 전복되거나 도로를 이탈하는 차량들이 많이 나옵니다.

 

신문이나 TV를 통해서뿐 아니라 직접 목격한 야간 차량사고만도 이젠 그 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고의 특징은 다른 차량들과의 접촉사고가 아니라 고속으로 달리다가 도로파손이나 타이어가 터지는 등의 이유로 도로를 이탈해 가로수를 들이받거나 길가 배수로에 바퀴가 빠진 것, 로터리 구조물을 들이받고 멈춘 것, 때로는 꺾어진 길에서 자기 하중을 이기지 못해 전복된 트럭이나 컨테이너 로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사고현장에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지요. 그러나 경찰이 제때 도착해주지 못하면 이 구경꾼들이 약탈자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한번은 밤길에 끌라빠가딩(Kelapa Gading) 로터리를 지나면서 로터리 구조물에 충돌해 본넷이 완전히 찌그러진 95년형 혼다 어코드(Honda Accord)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이미 새벽 한 시 경, 차량이 드문 그 시간에 그 사고차량 주변에는 이미 수십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어요. 일부는 운전사와 뒷좌석에 탄 사람을 끌어내 주먹과 몽둥이로 마구 때리는 중이었고 또 일단의 사람들은 차 안과 트렁크에 상반신을 처박고 카스테레오나 내부 장식품들을 뜯어내고 사이드미러, 바퀴들을 뽑아내고 있었습니다.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에 처한 사람을 완전히 짓밟고 그 기회를 틈타려는 인도네시아 사람들  그것이 현지 문화와 정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극도의 빈곤에 처해 있는 도시 빈민들이 어느 한순간에 강도나 폭도로 너무나 쉽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98년 수하르토를 하야시킨 피플파워의 민주화운동과 동시에 발생한 5월 폭동 이후 자카르타는 살벌한 도시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고를 본 것은 5월 폭동이 일어나기 한 1년 전쯤 일입니다. 사고차량을 공격하는 할렘의 주민들... 낮에는 순박한 웃음을 짓고 있던 그들은 밤에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지 고교동문이 모인 모임에서 인도네시아 국립대학을 졸업했다는 한 후배는 이러한 주민들의 공격형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면서 동문들의 주의를 환기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1. 사고가 나면 부랑자로부터 시작해서 인근 빈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2. 운전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이들은 우선적으로 차 키를 뽑아간다. 이것은 아직 차량이 운행 가능한 상태일 경우 차를 움직여 탈출하려는 시도를 사전에 봉쇄하는 방책이며 한편으로는 운전사 등이 병원으로 후송될 경우 차를 통째로 훔치겠다는 의도의 소산이다.

 

3. 이미 중경상을 입고 아직 정신이 혼미하거나 차 밖으로 빠져 나오려는 운전자와 승객을 무차별 구타하여 살해하거나 정신을 잃게 한다.

 

4. 그런 다음 경찰이 나타나기 전까지 운전사와 승객의 시계, 핸드폰, 지갑 등 소지품, 가방, 차량 내부물품, 그밖에 차에서 분리할 수 있는 각종부품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뜯어낸다. 이 절차는 매우 숙달된 솜씨로 팀웍을 이뤄 행해지며 경찰은 끝내 도착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록 경찰이 도착한다 하더라도 이들은 강력한 위협을 받기 전까지는 약탈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5. 경찰이 도착해 사고수습을 시작하면 약탈자들은 어느새 순박한 주민으로 둔갑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고현장을 계속 구경한다. 정신을 차린 운전사 등이 구타, 도난사실을 호소해도 대개의 경우 경찰은 이를 수사하지 않는다.

 

대낮의 경찰관들은 현지인들이 매우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 찔레둑(Ciledug)의 한 경찰서 옆 고등학교에서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도로로 몰려 나오면서 교통정체가 야기되자 한 경찰관이 도로에 나와 공중에 권총을 쏘면서 학생들을 길가로 비켜나게 하는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그것도 98년 폭동 전의 일이었지만 한국 같으면 당장 중징계를 당할 일이었죠.

 

내가 처음 부임했던 공장의 공장장은 도난사건이 발생하면 우선적으로 친분이 있는 경찰을 불러오곤 했습니다. 이들은 용의자들을 무조건 구타하는 것으로 심문을 시작하기 때문에 공장은 당장 공포분위기 속으로 침몰합니다. 하지만 예전 자카르타 폭동 당시, 또는 야간상황에서 경찰관 역시 주민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일이 간혹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98 11월 스망기(Semanggi) 인터체인지에서 시위중인 대학생 4명이 보안군에게 피격당해 사망했을 때, 이튿날 아침 스망기 인터체인지를 장악한 대학생들이 경찰들을 눈에 띄는 대로 집단폭행하고, 죽을 힘을 다해 뛰어 도망가는 경찰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일단의 오토바이들이 추격하는 사건도 발생했었죠.

 

그런 강력한 반발을 우려해서인지 5월 폭동 당시 보안군들은 자기들 눈앞에서 중국인 상점을 약탈하는 사람들을 제재하지도 않았고 그 며칠간의 약탈현장에서 가전제품이며 컴퓨터를 들고 유유히 귀가하는 수많은 약탈자들이 TV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이기도 했지만 그 후 누구 하나 체포되었다는 뉴스를 들은 바 없었습니다. 야간 사고차량 집단약탈현장은 한밤중 대개 비무장으로 퇴근하고 있을 경찰들로서도 어지간한 용기가 없다면 나서기 어려운 곳이겠죠.

 

당시로서는 자카르타 거주 한국인 중 몇 안되는 자가운전자 중 하나인 나에게 동문들이 운전사를 고용하라며 걱정스럽게 조언해 주었습니다. 인도네시아 토착민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어 있는 현지 중국인 화교들과 외모가 비슷한 한국인들은 곧잘 이런 테러에 말려들어 폭동의 희생물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대개의 경우 화교보다 많은 현금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한국인들만을 노리는 전문적인 범죄자들도 급증하고 있는 터였기 때문이었죠.

 

특히 당시엔 여성이 운전하는 차량이 도심고속도로 톨게이트에 순서를 기다리고 있으면 갑자기 달려드는 일단의 사람들이 사이드미러를 빼가는 사건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음이 현지신문에 보도된 적도 있습니다. 사이드미러는 차종에 따라 수십만 루피아에서 수백만 루피아를 호가하기 때문에 한 달에 20만 루피아( 3 5천원)도 벌까말까 한 거리의 신문팔이, 물장사, 차 유턴 시켜주는 거리의 프리랜서들보다 더 열악한 생활환경에 있는 도시빈민들에게는 한 건 성공함으로써 몇 달을 버틸 생활비가 마련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비단 어둑어둑해진 시간에 여성 운전자의 사이드미러를 노리는 사건들 말고도 또망(Tomang)처럼 정체가 심한 사거리에서는 백주에, 또는 퇴근 시간에 수많은 운전자들과 보행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차량 창문을 도끼로 깨고 칼을 들이미는 강도사건까지도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짜왕(Cawang) 고가도로 밑에 길게 늘어선 차량행렬 속에서 오후 세 시쯤 신호대기를 하고 있던 내 차 운전적 옆으로 한 남자가 다가와 아쿠아(Aqua) 물을 사라고 집요하게 따라 붙었습니다. 대개 안산다고 손을 저으면 다른 차로 옮겨가는 일반적인 거리의 행상들과는 달리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린 이 친구는(도로는 대기오염이 심해 강도처럼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님) 운전석 차창에 코를 처박을 듯 하면서 아쿠아 물병을 든 한쪽 손으로 계속 차창을 두드리고 있었어요.

 

그 집요함에 이상하게 생각되어 사이드미러를 보니 다른 한 손으로는 송곳을 들고 문 손잡이를 뜯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경적을 울리며 차창을 두드리자 그는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평범한 행상의 모습으로 돌아가 다른 차들에게 물병을 흔들며 내게서 떨어져 갔지만 나는 완전히 너덜거리게 된 문 손잡이를 나중에 정비소에서 새 것으로 교환해야만 했습니다. 백주 대낮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운전사가 그들과 같은 인도네시아 현지인이라면 그런 황당한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실재로 현지 한국교민들은 운전사를 일종의 보험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가족들이 인도네시아에 같이 살고 집에 차가 한 대 뿐이라면 출근한 다음 차를 다시 집으로 돌려 보내야 하고 손님들이 많아 밤에 술을 마셔야 할 일이 잦으면 이런 경우 운전사를 고용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뿐만 아니라 강도를 미연에 막고 심지어 재산, 인명사고가 나더라도 운전사 개인에게 책임을 지워버리면 된다는 좀 비열하고도 얄팍한 의도도 작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현지 화교들은 자기 차가 사고를 내며 운전사에게 책임을 미루고 차주 자신은 절대로 변상요청에 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고용한 운전사가 도둑으로 둔갑해 집으로 보낸 차가 중간에 실종돼 버리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비록 주민증, 운전면허증을 카피해 놓아도 주민관리 전산망이 허술하고 22천만 인구에 광대한 영토를 가진 인도네시아에서 잠적한 범인을 잡는 일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과 같은 일이 됩니다. 내가 자카르타에 부임하기 직전 공장에서 운전사가 공장 차량을 가지고 도망가 버린 사건이 있었어요. 그 차는 내 부임 1주년 기념일이 가까워지던 즈음에 수라바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운전자가 차를 버리고 도주해 버려 경찰이 차량을 수거했던 거에요. 그러나 이번엔 경찰이 집요하게 돈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 차를 돌려 받기 위해 수라바야에서 자카르타로 차를 가져오는 경비와 차값의 50% 정도를 경찰에 지불해야만 했고 그런 다음에 망가진 차의 수리비까지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나 역시 가끔은 운전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느끼곤 했던 이유는 뒷차가 날 살짝 들이받아 범퍼가 찌그러지거나 옆에서 끼어든 오토바이가 본넷 옆구리를 들이받고 한 바퀴 공중회전을 한 다음 나가 떨어지는 일이 발생해도 난 피해를 보상받기는 커녕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들보다는 부유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로, 그리고 대개는 그들 누구도 차량보험에 든 사람이 없다는 사실때문에 오히려 내가 그들의 수리비를 대준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당시 우리 공장의 창고장은 주말에 도심고속도로를 자가운전 하다가 뒤에서 추돌한 한 화교운전사에게

 

"여긴 인도네시아고 당신은 한국사람이니 당신이 변상해!"

 

라는 턱도 없는 소리를 들었다고도 합니다. 실제로 한국 같으면 얼굴 붉히고 잘 하면 주먹질까지 할 만한 웬만한 접촉사고도 인도네시아에서는 내가 받쳤더라도 봐서 좀 찌그러지고 긁혔거나 범퍼가 좀 내려앉은 정도면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고 감사해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외국인으로서 그들 홈그라운드에서 싸워 봐야 이길 수도 없고 운전사 1년치 월급을 다 모아도 차량 수리비를 맞추기 힘든데다가 무보험 차량이 대부분이어서 웬만큼 독하지 않으면 변상받더라도 10년 할부로 받기 십상이지요.

하지만 정작 대형사고가 났을 때 운전사, 승객 구분없이 몰려든 빈민들에게 구타당하고 약탈당하는 것을 직접 보고 들은 나로서는 내 생명을 운전사 손에 맡기는 것보다 내 손에 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동문들과 헤어져 집에 오는 길에서 곧장 대형사고 한 가운데로 뛰어들고 말았습니다
.

새벽 한 시쯤, 지나는 차량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도로 위에 열대의 우기답지 않게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습니다. 카사블랑카 거리를 지나 딴중쁘리옥(Tanjung Priok) 톨을 가로지르는 지하도로 내려가면서 도로색깔이 전조등 불빛에 검정색이 아닌 누런색으로 비치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지하도 밑엔 웬 찝차 한 대가 쳐박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뭔가 이상한 생각에 살짝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차는 왼쪽으로 회전하면서 달리던 속도 때문에 지하도의 오르막까지 미끄러지다가 지하도가 끝나는 부분에서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는 대신 이미 방향이 그렇게 틀어져 있던 도로 왼쪽으로 돌진하면서 지상차도와 지하차도를 구분하는 레일링을 들이받고 말았습니다. 그 누렇게 보이던 것은 저녁에 그 곳을 지나던 덤프트럭에서 흘린 대량의 흙덩이들이 비를 맞아 지하도 전체를 진흙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날 모임에서 맥주를 몇 잔 마시지 않았다면, 당황하지만 않았다면 그 전에 차를 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엑셀이나 브레이크 모두 듣지 않는 상황에서 난 무엇을 밟아야 할 지 알 수 없었고 나도 모르게 엑셀을 계속 밟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레일링 가까이 세워져 있던 오토바이 한대가 튕겨 날아갔고 레일링 위에 걸터 앉아 있다가 황급히 피하던 사람 한 명을 받았어요.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이었습니다.

 

그나마 운지 좋았는지 라디에이터가 박살나고 본넷이 완전히 찌그러지는 사고의 와중에서도 안전벨트를 매고 있던 나는 작은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습니다.

 

'아차! !'

 

후배의 말이 무의식중에 생각나 키를 막 잡을 때 반쯤 열어 놓았던 차창 밖에서 손이 하나 쑥 들어와 키 홀더를 잡아 챘습니다. 고리가 끊어지면서 차 키는 내 손에 남고 홀더는 창 밖으로 채어져 나갔어요. 제정신을 차려보니 아직 도로 한 가운데인 지상도로와 지하도 사이의 레일링에는 벌써 수십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고 어디서 달려왔는지 오토바이들도 대여섯대가 서 있었습니다. 인도는 레일링 바깥 쪽에 있었지만 그렇게 절대로 정류장이 있을 리 없는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사고가 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람들의 숫자가 갑자기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몰려들던 사람들은 이 정도 사고면 정신을 잃고도 남았을 거라고 생각한 운전자가 급히 차문을 열고 나서자 주춤하는 표정이었죠. 하지만 그들의 분위기는 충분히 살기등등했습니다
.

"
부상자를 차에 태우세요. 보호자 한 분하고. 가까운 병원으로…."


내가 부산하게 상황을 진정시키는 와중에도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뭐라고 아우성치며 험악한 소리를 질러대고 있고 그 뒤로는 칼 같은 것도 번득이고 있었습니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지만 야간에 다니는 사람들은 굳이 범죄자가 아니더라도 급증한 강력범죄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끄리스(Kris) 같은 칼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옛날 한화시절의 내 운전사도 그렇게 칼을 소지하고 다녔었죠.

그러는 사이 잠깐 뒤를 돌아보니 내가 방금 전에 나온 차에는 족히 여남은 명은 될 사람들이 페로자의 양쪽 문으로 상체를 쑤셔 넣고 물건들을 집어가기에 바빴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끄집어 내고 문을 닫는 짧은 순간 사이에 차 안에 있던 핸드폰과 톨게이트에서 쓰려고 꺼내 놓은 잔돈들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차 앞쪽에서는 또 다른 일단의 사람들이 레일링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전조등 전구를 빼내고 있었어요.

 

집단 강도행위나 다름없는 그들의 행동을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꾸 쳐내는데도 앞으로 몰려든 사람들의 손길이 계속 지갑이 든 뒷주머니를 더듬었고 일전에 보았던 비슷한 사고현장들이 자꾸 떠오르면서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습니다. 하지만 험한 꼴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선 만만치 않게 보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으므로 나 역시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러 댔지만 그것은 전혀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렇게 끝이 뻔한 승강이를 벌이고 있을 때 갑자기 경찰 두 명이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근무가 끝나고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중 사고현장을 보고 달려온 이들은 한명은 제복은 입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일상복, 비무장이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쪽 관할도 아닌 어린 티가 물씬 풍기는 젊은 경찰관들이었어요. 그들이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내가 폭행을 당했는지 여부와 사고 부상자의 상태였고 차 키를 아직 가지고 있는지 물은 후 부상자는 택시편으로 병원에 보내고 나를 차와 함께 바로 현장에서 빼내 병원으로 달렸습니다.

 

사고현장 표시, 증인 확인 등의 절차도 전혀 없었습니다. 위험천만의 장소를 급히 빠져 나오는 것이 경찰들로서도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는지, 아니면 그들 역시 위험을 느껴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고는 5월 자카르타 폭동이 있은 지 불과 반년만에 벌어진 일이었고 자카르타는 여전히 정글로(Jungle law)가 판치는 흉흉한 도시였습니다. 그 때 경찰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끝까지 해보기로 마음 먹었던 내 저항이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내 팔이나 목덜미를 만져보고 자꾸 말을 거는 등 내가 폭행당했다고 확신하는 눈치였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그들이 나타나기까지 약 20여분 동안 우린 서로 위협하듯 소리를 질러 댔을 뿐 나는 실제로 신체적인 위해를 당하진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부상자의 가족이라고 주장하는 수십명의 사람이 있었지만 곧 진짜 친척이 나타나고 한밤중에 소식을 듣고 릴리가 황망히 달려오면서 사고수습은 빨리 진전되었습니다. 지금도 TI(Transparency International)이라는 국제기관이 발표하는 가장 부패한 국가순위에서 매년 당당히 상위권에 오르고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부패의 대표적 상징으로 공공연히 운전자들의 돈을 뜯는 노회한 경찰들과는 달리 그 날 두 젊은 경관은 사실은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었던 사건 현장에 뛰어 들어 이 사건수습을 위해 병원에서 밤을 새며 도와주었습니다.

 

부상자의 입원비와 치료비, 합의금, 튕겨 나간 오토바이 수리비와 반파되었지만 신기하게도 아직 굴러가던 내 차의 수리비로 적지않은 돈이 들었지만 사건은 그렇게 원만하게 마무리되었고 몇 달 지난 후 당시 부상당했던 사람이 내 집까지 찾아와 인사를 하기도 했어요. 그것은 어쩌면 돈을 더 달라는 제스쳐였는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마음에 나름대로 그들의 방문에 성의를 보여 주었습니다.

 

사족이지만 당일 사고현장에서는 내가 사고를 낸 후 다음날 아침까지 네 건의 대형사고가 더 일어났고 그 사고들 속에서 두 명이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98 10월에 일어난 사건이었어요.

난 내가 그 사고현장에서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을까 그 동안 여러 번 스스로도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부상을 입지 않은 멀쩡한 몸으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같이 맞서 악을 써대며 대항했기 때문이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다시 밤길에 집단폭행을 당하고 있는 사고 운전자를 지나치게 되었을 때 난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부상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요. 내게 구체적으로 피해보상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현장의 군중들은 나를 손대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른 피해자 없이 혼자 로터리 구조물에 충돌하거나 도로 위에 돌발한 구덩이에 빠져 전복되거나 앞바퀴가 터져 중앙분리대를 들이받는 야간 사고자들이 결국 약탈자들의 공격에 무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후에도 몇 번의 교통사고를 더 겪었지만 카사블랑카 지하도에서의 사건만큼 심한 사고는 다행히 없었습니다. 그만큼 조심하게 되었던 것이고 집에서 가족들이 쓰는 차에는 반드시 운전사를 붙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동차보험에 든들 교통사고에서 결국 살아남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래서인지 인도네시아에는 오늘도 상당수의 차량들이 무보험으로 도로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2009. 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