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이상한 이름의 인도네시아 남자 본문
한국만큼이나 인도네시아에는 많은 영어학원들이 있습니다.
주로 EF, ILP, LIA 등 알파벳 약자로 표시되는 영어학원들은 체인을 형성해서 시내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고 그간 성황을 이루어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유학원들에서는 IBT TOEFL이나 IELTS, TOIEC 등도 가르칩니다. 그만큼 인도네시아인들의 영어 수요도 만만치 않다는 얘기지요.
실제로 현지 대기업 직원들은 나름대로 영어를 말하거나 알아들을 수 있고 관리자 급에서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같은 대졸 사원이라도 영어를 곧잘 하면 급여도 많이 받을 수 있고 진급기회도 빨리 올 수 있는 데다가 급여나 복지제도가 월등히 뛰어난 외국계 회사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 영어는 인도네시아에서도 강력한 경쟁력을 가진 능력인 셈입니다.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늘어나면서 통역은 물론 골프장 캐디, 가라오케 여종업원까지도 영어가 되는 사람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사람들에게도 그러하듯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도 영어가 만만치만은 않은 이유는 비록 같은 영어 알파벳을 쓰고 있지만 읽는 방법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영어에서 대개 ‘ㅊ’ 이나 ‘ㅋ’ 으로 발음되고 때로는 ‘ㅅ’ 으로도 발음되는 영어 자음 C 는 인도네시아어에서는 ‘ㅉ’ 으로 발음됩니다.
그래서 자카르타 해양공원이 있는 Ancol 지역은 ‘안쫄’ 이라고 읽고 Cokraminoto 라는 거리 이름도 ‘쪼끄라미노토’라고 읽지요. 그런데 coca cola는 왜 ‘쪼짜쫄라’라고 읽지 않고 원래 발음대로 ‘코카콜라’라고 읽는지 모릅니다.
마치 한국어처럼 한 개의 자음, 한 개의 모음은 대부분 한 개의 발음을 갖는 것이죠. 그래서 영어에서 여러가지로 발음되곤 하는 C, Ch, G, S. 등의 자음은 물론 모든 영어 모음들이 현지인들의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knock-knock을 ‘끄녹 끄녹’이라고 읽고 니트 옷의 knit도 ‘끄닛’이라고 읽는 사람들이 많아요. LPG 가스를 싣고 가는 탱커에는 ‘ELPIJI’라고 씌어 있고 제왕절개수술인 씨저스 오퍼레이션(Caesar’s operation)은 ‘세사르’라고 읽습니다.
A. I, O. U는 무조건 아, 이, 오, 우 로 발음하는 것이 인도네시아어이거든요. 그런데 인도네시아어의 E 발음은 현지인들에게도 혼란스럽지 않을까 합니다. ‘으’와 ‘어’ 사이의 중간발음이라는 E는 실제로는 ‘으’로도, ‘어’로도, ‘에’로도 쓰입니다.
Menteng – 멘뗑 (지역이름)
Tebet – 뜨븟 (지역이름)
Tangerang – 땅어랑 (지역이름)
이렇게 말이죠. 그래서 종잡을 수 없는 E 발음과 한 문자, 한 발음의 타 모음, 자음들의 언어습관이 영어를 배우려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발목을 잡습니다.
인도네시아어의 원래 발음에는 sh 발음이 없다는 것도 약점입니다. 그래서 영어학원을 다녔다는 사람들도 English를 ‘잉글리쉬’라고 읽지 못하고 ‘잉그리스’ 라고 읽는 사람들이 태반이고 Shine(샤인)과 Sign(싸인)을 듣는 것만으로는 대부분 구분하지 못합니다.
R 도 문제지요. 호루라기 불 듯 혀 끝을 경련시키면서 내야 하는 이 자음은 그래서 information을 ‘인포르메이션’으로 읽게 하고(심한 경우 ‘인포르마티온’으로 읽습니다. 인도네시아 독립초기 장군들 중 나수티온 장군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Nasution이라고 쓰고 ‘나수션’이라고 읽지 않으니까요) Mr를 ‘미스터르’로, beer는 ‘비~르’(실제로는 비르르르르르르)로 읽지요. R 발음은 한국사람들에게도 원래 없는 발음이어서 쥐약이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너무 심하게 굴리는 바람에 예외가 아닙니다.
자음에 연음이 없다는 것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영어를 배울 때 헷갈리게 합니다. 자카르타 서남부에 있는 앞서 예를 든 반텐주 Tangerang을 ‘땅거랑’ 이라고 읽지 않고 ‘땅어랑’ 이라고 읽는 게 원래 정상입니다. ,왕자라는 뜻의 Pangeran은 ‘빵에란’이라고 읽고요. 그래서 Danger가 ‘당어르’로 읽히곤 하는 건 한국사람들이 흔히 ‘단거’라고 읽기도 하는 것과 대략 비슷한 맥락이고 오렌지(Orange)도 ‘오랑에’.로 읽히곤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이 있지요. 유니버시티(University)의 인니어는 원어를 상당부분 차용한 Universitas(우니페르시타스)이고 secretary(세크리터리 –비서)는 sekretaris(세끄레따리스), ~tion으로 끝나는 외국어 차용어들은 모두 ~si로 끝나게 되어 Information은 informasi, immigration(이미그레이션)은 imigrasi(이미그라시 – 이민국을 뜻하기도 하는 이 단어는 한국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민그라시’라고 읽는 사람도 많습니다. 느낌이 확 와 닿죠), Action(액션)은 Aksi(악시)가 됩니다. 비슷비슷하지만 상당히 틀린 이 단어들이 외국어를 본격적으로 접해 보지 않은 인도네시아인들이 영어를 쓰려 할 때 혼란을 줍니다.
그래서 그들과 얘기하는 우리들도 혼란을 겪지요.
인도네시아에도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아 유창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을 시내 비즈니스 빌딩에서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유려한 영어의 과시입니다. 그래서 상대방과 얘기를 할 때 그것이 외국인이든 인니인이든 영어 단어 반, 인니어 반으로 섞어 쓰다가 중간 중간에 완전한 영어 한 문장을 집어 넣어 버리는 거에요.
“Biarkanlah dia urus masalahnya sendiri. Kalau kita harus intervene, jadinya masalah ‘self-respect’ kita gitu loh. Makanya biarkan saja dia clean up his own mess for himself!”
(그 문제 그 놈 혼자 처리하도록 내버려 둬. 우리가 간여해야 한다면 그건 우리 자존심의 문제가 되는 거지. 그러니 지 똥은 지가 치우도록 내버려 둬)
대충 이런 식으로 영어가 담뿍 들어간 문장이 되는 거에요.
이런 식의 영어 혼용은 비단 미팅이나 대화에서뿐 아니라 TV 쇼프로나 대담프로의 사회자들도 즐겨 사용하지만 실제로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인도네시아 전국민의 10%도 넘지 않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알아 듣느냐 아니냐 보다는 자신의 영어 실력을 과시하는 것이 그토록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생산공장이나 로컬영업을 하는 회사에서는 영어능력이 그리 중요하지 않고 그래서 영어를 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 회사 역시 현지 마케팅 전문회사여서 영어의 필요성은 최소한이고 혹 필요한 단어나 문장이 있다면 그건 그때 그때 가르쳐 주면 되는 것이죠.
하지만 나 역시 여기서는 외국인이고 영어는 이미 생활 저변에 알게 모르게 깔려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문제와 에피소드도 가끔 벌어집니다.
“미스터르! 아까 화장실 가셨을 때 핸드폰에 전화 왔었어요.”
“아, 그래? 누구 전화지?”
핸드폰에 발신인 전화번호가 찍힐 수 있다는 것은 인도네시아에 와서 처음 알았습니다. 16년 전이었던 그 당시에는 번호만 찍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번호를 그 번호 주인의 이름으로 입력시킬 수 있게 되었지요. 그것도 무척 오래 전의 일입니다.
“웅크눈이라는 분한테서 온 전화였어요.”
“웅크눈….?”
인도네시아에 와서 벼라별 이상한 이름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마이클이니 다니엘, 알렉스, 죠나단, 윌리엄 등 제대로 된 영어식 이름을 쓰는 현지인들도 접하게 되었지만 ‘웅크눈’은 정말이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핸드폰에 찍혀 있을 거에요. 5분전쯤에 온 전환데…”
이렇게 보고하고 있는 사람은 우리 필드캡틴 이메이 입니다. 뭔가 잘못 읽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름이 떴다면 내가 저장한 것일텐데 ‘웅크눈’이라는 이름은 저장한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메이가 전 직장에서 종횡무진할 당시의 얘기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눌 비즈타 패밀리 가라오케에서 깜짝 파티를 계획하던 한 부인이 제대로 준비를 못한 가라오케에 따질 때였다지요.
“어제부터 전화해서 설명했잖아요! 오늘 저녁 여덟 시에 파티 한다고요! 가라오케에서 케익도 준비 안해주면 이 시간에 언제 어디 가서 그걸 준비해서 이름까지 써넣어 와요?!”
“아, 그거, 수프리스죠?”
목에 힘줄을 돋구고 언성을 높이는 부인을 달래려고 이메이가 끼어 들었답니다. 이메이는 사람들을 잘 다루는 재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오히려 눈꼬리를 올리며 이메이를 흘겨 보았답니다.
“수프리스? 이 아가씨가! 우리 남편 이름은 아놀드라고! 아놀드!”
“아니, 남편 분 성함이 아니라…, 오늘 파티가 수프리스 맞지요? 그…, 당사자 모르게 준비해서 깜짝 놀라게 해 주는 거…?”
“깜짝 놀라게 하는….? 아, 아! 서프라이즈?”
아줌마를 비롯해 그 자리에 있었던 이눌비즈타의 매니저와 웨이터, 웨이트리스 모두 포복절도하며 쓰러져 버렸고 그 부인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이메이가 매우 재미있는 아이라며 파티 내내 룸 안에서 서빙하도록 요청했다고 합니다.
‘수프리스…, 수프리스….”
그 에피소드를 기억해 내며 내 핸드폰에서 부재중 전화 목록을 열었어요. 거기서 이메이가 말한 ‘웅크눈’이라는 이름을 정말 발견하고는 박장대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UNKNOWN
영어가 이메이도 고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009. 9. 2.
Unkn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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