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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아득한 언어장벽

beautician 2017. 2. 18. 10:00

 

 

인도네시아에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 인도네시아어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습니다.

대충 읽을 수는 있는데 그 의미를 짐작하기는 도통 난해한…, 그래서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영어, 일어, 불어, 독어를 총동원해도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 것이 인도네시아어인 모양입니다.

 

그건 비단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태국, 베트남, 미얀마 등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유창한 영어를 자랑하는 사람들도 그곳에서는 만국 공통어라 할 수 있는 바디 랭귀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 실제로는 외국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보다 영어, 일본어를 꽤 한다는 사람들이 더 애를 먹곤 합니다. 그나마 외국어를 좀 한다고 바디 랭귀지 연마에 게을렀기 때문이지요.

 

영어를 전공하여 군 시절 내내 제 3땅굴에서 영어 브리핑을 했고 거기서 배운 일본어로 한화 본사에서 7년 반 동안 일본 의류수출담당을 맡아 나름대로 어디 가서 말 안 통할 염려는 없다고 자부했던 나 역시 인도네시아에 발령받고 나서 언어소통 문제로 어지간히 애를 먹어야만 했습니다. 자카르타에 부임하기 전 3개월 동안 한국외대에서 교재로 쓰이는 인도네시아어 문법책 두 권을 세 번쯤 통독했지만 부임하자마자 막닥뜨려야 했던 노사분쟁에서 말 한 마디 꺼낼 수 없었어요. 회의실에서 칠판을 두드리며 높은 언성으로 종업원 대표들과 일전을 벌이던 생산담당 유주임이 그렇게 우러러 보일 수 없었습니다. 외국어로 말싸움까지 가능하다니

 

그나마 빨리 현지어를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은 넥타이 매고 시내 고층빌딩 사무실에 출근하여 직원들과 대개는 영어로 얘기하는 지사원들과 달리 영어를 전혀 할 리 없는 저학력, 저소득층의 종업원들을 거느린 공장에서는 관리자의 현지어 능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필요가 공급을 낳는 거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익히게 되는 인도네시아어는 식모에게 밥달라고 할 때, 가라오케에서 술 가져 오라고 할 때나 적절한 수준이고 뭔가 수준 높은 상대방과 격조 있는 대화를 나누기에는 한참 모자란 것이 사실입니다. 늘씬하고 예쁜 아가씨들도 입만 열면 대부분 고성에 따발총 쏘듯 말하기 시작하는 인도네시아어는 대개의 경우 천박하게 느껴지기 십상이고 현지 TV 예능 프로그램이나 이런 저런 행사의 진행자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하나같이 속사포처럼 말을 쏴 내며 정신사납게 떠들어 대는 현재의 트랜드가 그런 감정을 부추기지만 실제로는 다른 언어들과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어 역시 나름대로의 깊이를 가지고 있고 점잖고 분위기 있게 인도네시아어를 말하는 식자들과 부인들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잊을 수 없는 첫 커피의 에피소드에서 밝혔듯이 인도네시아 부임 전 첫 출장 당시 외대 마인어과를 전공한 후배로부터 1)이니 살라 (Ini Salah = 이거 틀렸어), 2) 뻐르바이키 이니(Perbaiki ini = 이거 고쳐), 3) 바구스(bagus = 좋아요) 이렇게 달랑 세 마디만 배워 왔었죠. 제품 검사 목적으로 왔던 것이므로 1), 2) 번을 얘기한 후 잘 고쳐졌으면 3)번으로, 여전히 잘못되어 있으면 1)번으로 되돌아 간다는 생각이었어요. 그것이 벌써 18년쯤 전의 일입니다. 그 세 마디로 소기의 출장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에 살며 주재하기에는 턱도 없었어요.

 

말을 잘못 이해해 화내지 않아야 할 일에 화를 낸 적도 많습니다.

 

사히드 자야 호텔에서 막 골프샵을 인수했던 당시 직원으로 채용한 예쁘장한 화교 아가씨는 내가 뭔가 말만 하면 부세~!’ 하며 대꾸하곤 했어요. 일본어에는 나루호도라는 좋은 표현이 있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고 , 그렇군요정도로 해석될 이 말이 인도네시아에는 없었던 것인지 이 아가씨는 내가 머리에 쥐가 나도록 인도네시아어를 짜맞춰 기껏 어떤 얘기를 간신히 끝내면 공갈치지 마정도로 해석될 불쉿(bullshit)’ 이라는 영어 단어를 자꾸 이상한 발음으로 반복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급기야 너 보스가 하는 말에 대꾸하는 태도가 왜 그래? 내 말이 말같지 않아?” 하며 인상을 쓰기에 이르렀지요. 그런데 그 말은 사실 설마?’, ‘정말요?’ 정도로 해석될 오리지날 인도네시아 말이었답니다.

 

또 한번은 바익(baik) 이라는 단어 때문에 열을 냈습니다.

좋다는 뜻의 이 말이 전혀 좋게 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사장으로서, 고용주로서 뭔가 당엲한 것을 지시할 때 직원들이 좋다 또는 싫다는 식으로 대답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실제로 사장이 비서에게 거래처에 전화 좀 넣어 봐라고 지시할 때 보통 기대하는 반응은 알았습니다, 사장님내지는 최소한 라는 대답이지요. 거기서 비서가 좋아요라고 대답한다면 당장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가뜩이나 잠도 부족해서 아침부터 사소한 일에도 신경질이 나는 날이면 지가 좋지 않으면 어쩔 건데…? 라는 생각이 들며 혈압 오르기 십상이죠.

 

Baik, Mr”

 

바익 미스터르라는 이 말이 사실은 가장 정중한 긍정의 대답 중 하나라는 것을 나중에 알고서는 그간 혈압 올랐던 사실이 민망스러웠어요. 군대에서도 상관이 지시하면 어김없이 나오는 이 대답은 잘 알겠습니다라고 해야 더욱 정확한 해석이 될 것입니다.

 

어느 나라 말에도 항상 숙어가 있듯이 인도네시아어에도 많은 숙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단어 본연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을 갖는 경우가 많아 인니어를 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외국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요.  Gila(길라)라는 단어가 원래는 미쳤다라는 뜻이지만 끝내 준다’, ‘멋지다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것처럼요.

 

Salah (살라) 틀리다는 의미. Satu(사뚜)는 한 개, 하나 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이게 서로 붙어 살라 사뚜(Salah satu)가 되면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그랬듯 영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언더스탠드(Understand)를 보고 밑에 서 있다느니 물구나무 섰다느니 무등 태우기라는 의미라느니 하며 억지를 쓰는 것처럼 십중팔구 틀린 것 한 개정도의 뜻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 중 하나 라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Bodoh (보도)는 바보스럽다, amat (아맛)은 매우 라는 의미이므로 보도 아맛(bodoh amat)이라고 함께 쓰게 되면 당연히 매우 바보스럽다라는 뜻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될 데로 되라지, 난 신경 안 써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Kalau kamu minum terus begitu, nanti pasti mabuk berat. Tidak bisa pulang”

(너 그렇게 계속 마셔대면 나중에 너무 취해서 집에도 못 가)

“Bodoh amat!”

(쉰 소리 그만 해. 될 데로 되라지)

 

대충 이 정도의 용법이 되는 거지요.

 

그 중 압권이 하나 있습니다.

김프로가 리포 카라와치에서 2년쯤 지낸 후 끌라빠가딩으로 돌아왔을 때였지요. 난 그 때 디자인 회사를 맡아 운영하는 중이었고 5톤짜리 트럭이 한 대 있었는데 마침 그 날은 주말이었고 바쁜 일도 없었으므로 아침부터 직원들을 총출동해 김프로의 이사를 도왔어요. 인원도 충분했고 김프로의 짐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어서 이사는 이른 오후에 다 끝낼 수 있었습니다.

 

직원들에게 수고비를 좀 줘도 되죠?”

물론이죠.”

 

직원들도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으므로 나는 김프로를 말릴 이유가 없었어요. 김프로는 내 직원들에게 10만 루피아 짜리를 한 장씩 건네면서 정말 고마워하는 표정으로 일일이 악수를 하며 치하의 말을 했습니다…, 아니 하려 했습니다. 그 의미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너희들 덕택에 이사를 아주 편하게 잘 했다라고 말하려는 것이었죠.

 

“Enak aja ya.” (에낙 아자 야.)

 

Enak(에낙)은 편하다, 맛있다 라는 뜻이죠. Aja Saja의 줄임말로 단지’ ‘~라는 뜻도 있지만 대개는 말을 부드럽게 끝내는 접미사 같은 용도로 쓰이고 ya 역시 더욱 더 부드럽게 말을 매듭짓는 접미사입니다. 좌우간 김프로는 편했다는 뜻으로 얘기하는 것이었죠. 그러나 그 말에 난 머리털이 쭈삣 서도록 당황했고 직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킥킥 웃기 시작했습니다.

 

..뭐가 잘못 된 거죠?”

 

김프로도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는지 나에게 그렇게 물어 왔고 그 대목에서 나 역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nak aja를 그렇게 붙여서 쓰면 그 뜻은 놀고 있네.’ 또는 웃기지 마정도의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 외의 다른 뜻으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없거든요.

 

놀고들 자빠졌어요. 정말.”

 

결국 김프로는 이 말을 우리 직원들에게 고마워하는 표정으로 공손하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Enak Aja는 이런 느낌

  

외국에 나와 일하는 사람들로서 그 나라 말을 그 나라 사람들만큼 꼭 완벽하게 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현지어 구사력은 대개의 경우 가스총이나 태권도 등 몸에 익힌 무술처럼 자신을 지키는 자구책이 되기도 합니다.

 

시장개척을 하겠다고, 사업을 벌이겠다고 처음 인도네시아 땅을 밟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현지에 오래 살고 있던 한국사람들을 채용하거나 도움을 청하고서 오히려 뒤통수를 맞고 사기를 당하고 돈을 떼이는 이유는 현지어가 되는 사람이 정보를 독점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잔뜩 부풀려진 가격에 제품을 구매하거나 사무실을 임대하게 되고 공무원들에게 돈을 뜯길 때에도 도와준다던 사람이 중간에서 이익을 챙기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엔 사업 자체를 말아 먹거나 뺏기는 경우도 생기지요.

 

자카르타에 처음 왔던 한 지인이 렌터카 지입을 한다면 투자했던 돈 대부분을 한국인 렌터카 사장이 가로챈 것이나 그가 세운 골프 아카데미를 현지에 오래 살았던 다른 한국인 프로가 간단하게 집어 삼킬 수 있었던 것도, 한국 조직 주변의 어떤 사람이 대박이 났던 바다이야기 도박장사업이 본국에서 집중 단속을 받자 자카르타 끌라빠가딩으로 옮겨 왔던 컴퓨터 도박장을 현지의 한국인 애송이가 어렵지 않게 가로채 버린 것도 모두 그런 사유 때문이었지요. 우습게 여기기 쉬운 현지어가 때로는 그런 파괴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조직력으로 움직이는 대기업의 경우라면 현지어가 가능한 역량있는 인물을 채용해 잘 관리하면 될 일이지만 그렇지 못한 중소기업이나 개인 투자자로서는 영어 몇 마디 구사하는 것만으로, 일만 열심히 잘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현지어를 공부할 필요가 분명히 있는 것이죠.

마치 전투에 투입되는 군인들이 미리 방탄조끼를 입는 것처럼요.



2009.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