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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내 차를 박고 날아간 여인

beautician 2016. 9. 17. 10:00

 

  

오늘의 얘기는 오토바이 택시 오젝이 내 차를 들이 받으면서 시작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술라웨시에서의 목재사업이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우리가 가진 것을 다 날렸다는 사실이 막 피부에 와 닿던 시기였어요. 지갑은 항상 비어 있었고 다이너마이트 심지가 타 들어가듯 이제 우리가 대안을 찾기 위해 남은 시간 역시 시시각각 타 들어가고 있었죠.  살아남기 위해 나와 릴리는 당시 수백 가지 아이템들을 검토하고 실험하는 중이었어요. 그러나 촉박한 시간 내에 뭔가 확실한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도 우린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나와 내 가족들, 직원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미용사업도 그 때 손을 대어 보았지만 그때로서는 이제 막 검토하기 시작해 모든 것이 불투명하기만 한 수많은 아이템 중 하나였을 뿐이었어요.

 

그때 김사장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김사장의 수난 편에 등장했던 그 김사장입니다.

그는 끌라빠가딩 인근 순터르(Sunter) 지역의 지금은 선레이크(Sunlake) 호텔이라고 이름을 바꾼 당시 다나우 순터르 호텔(Danau Sunter Hotel)에 머물고 있었는데 종전과 달리 텍스타일 영업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잠시 잊기 위한 도피 출장의 성격이 짙었어요.

 

옥방 등과 함께 한때 한국 직물업계의 샛별로 여겨졌던 창녕물산에서 일을 배운 김사장은 창녕이 부도가 나자 로드텍스라는 자신의 회사를 차렸고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성격과 원만한 대인관계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거래업체의 도산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 중 엄청난 원단을 가져다 쓴 후 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도산 위기에 처한 한 봉제회사를 인수하기로 한 것이 그의 패착이었죠. 그것은 악성채권을 순손실로 감수하기 보다는 사업확장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의지였겠지만 직물과는 확연히 성격이 다른 봉제사업에는 어두워 원래의 사장에게 그 회사 관리를 계속 맡기고 자금을 지원해 주기로 한 김사장은 그 회사의 숨겨져 있는 채무관계나 사장의 능력을 좀 더 면밀히 검토해 봤어야 했습니다. 그 후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봉제회사는 더욱 큰 사고를 치면서 사장은 야반도주해 버렸고 그 금액이 엄청났으므로 그 회사의 사업자등록 상 사장으로 되어 있던 김사장의 로드텍스 역시 도산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로드텍스는 창업 5년차를 맞아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김사장은 다른 것은 모두 잃더라도 가족들을 먹여 살릴 최후의 보루를 만들기 위해 마지막 몇 개월을 미친 듯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확정되고 정리된 후 막대한 빚을 지고 도산한 회사의 전 사업주,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린 그는 머리를 식히러 자카르타에 날아 온 것이었죠.

 

그는 혼자 온 것이 아니라 경기도 태껸협회의 한 이사님을 대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내가 그 후 1년 정도의 시간을 자카르타의 태껸전수관을 세우고 운영하게 되는 시발점이었어요. 그러나 전날 밤 김사장의 전화를 받고 그날 아침 내 페로자(Feroza) 찦을 끌고 호텔로 향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 미래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집니다.

 

당시 절박한 상황에 워낙 생각이 많았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운전대를 잡고도 곧잘 다른 생각에 사로잡히곤 해서 길을 잘못 드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날 아침에도 호텔로 가려면  한 블록 더 가야 하는데 난 미리 우회전을 해버렸습니다. 그 길로 호텔에 가지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막히는 길을 빙빙 돌아야 했으므로 유턴하기로 마음 먹고 우측 깜빡이를 넣은 후 백미러를 살폈습니다. 가까이 온 차량과 오토바이 몇 대를 보내고 그 다음 오토바이는 100미터 이상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충분히 유턴할 상황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핸들을 우측으로 한껏 꺾었어요. 그런데 불과 2초도 지나지 않아……

 

!

 

차를 반도 채 못돌렸는데 아까 100미터 떨어져 있던 그 오토바이가 어느새 달려와 페로자 본넷 앞부분 우측 몸체에 꽂히듯이 냅다 들이박으며 운전자와 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하늘로 날아 올랐어요. 헬멧과 가죽자켓을 입은 운전자는 도로 위에 떨어져 몇 바퀴 구르고 뒤에 탔던 여자는 인도 위까지 날아가 보도에 머리를 찧었습니다. 문제는 그 여자가 헬멧을 쓰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어요.



 

늘 그렇듯 자신이 가장 빨리 달려야 한다고 생각한 오토바이 오젝기사는 유턴하고 있던 내 차 앞으로 지나갈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인데 그 계산이 맞지 않아 내 차를 제대로 들이 받고 만 것입니다. 자카르타에서 여러 번 교통사고를 겪어 보았지만 그렇게 제대로 충돌한 것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닌가 합니다.

 

급브레이크를 밟고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보면서 프리즘에 갇힌 빛살이 좌충우돌 난반사하듯 최초 0.00001초 사이에 머리 속을 들끓었던 생각은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난 사고에 휘말릴 시간적, 정신적, 금전적 여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엔 아직도 98년 자카르타 폭동의 여운이 도시 군데군데에 남아 잘잘못을 떠나 도로에 나선 외국인은 현지 군중들의 집단폭행의 타겟이 되기 쉽던 시절이었고 실제로 2000년도 카사블랑카 도로의 밤길에서 벌어졌던 교통사고에서는 사고를 처리하려고 내가 차에서 급히 내리자마자 십 수명이 그 좁은 내 차 안에 상체를 쑤셔 넣고 핸드폰이며 CD며 돈이 될 만한 것을 모조리 강탈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은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에게나 떠오르는 인지상정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혹독한 훈련을 받은 군인들도 막상 격렬한 전장에 낙하되면 무공을 올리겠다는 생각보다는 당장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겠지요. 난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급히 차 문을 열고 뛰어 나간 나는 부스스 일어나고 있는 헬멧의 운전자를 지나쳐 여자에게 달려 갔어요. 피투성이가 되어 있을 줄 알았던 여자는 상체를 일으켜 머리를 감싸 안고 울고 있었습니다.

 

좀 봐요.”

 

여자의 얼굴은 온통 긁힌 자국투성이였고 머리엔 주먹만한 혹이 나 있었는데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습니다. 피가 나지 않았으므로 짧은 상식에 뇌출혈을 의심했습니다.

 

당신! 오토바이로 내 차를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안내해 줘요. 그리고 거기 당신! 일어설 수 있으면 병원으로 따라 와요!”

 

구름같이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서 여자를 안아 일으켜 차에 태우면서 이름도 모를 오토바이 탄 남자에게 병원 안내를 부탁하고 내 차를 박은 운전자에게도 따라오라고 소리쳤어요. 다친 사람이 있는데 네가 박았니 내가 받혔니 시비를 가리고 있을 때도 아니었고 그렇게 난장판이 되어 버린 출근길에 사람들이 더 몰려 들고 경찰까지 개입되면 일이 어디까지 복잡해질지, 얼마나 위험할 수도 있는지를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병원비가 있든 없든 우선은 병원으로 가는 것이 여자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 최선이었어요.

 

거기서 가까운 병원이 어딘지 알 수도 없었거니와 만약 나 혼자 여자를 태워 출발한다면 현장을 도피하는 유괴범 취급을 받아 군중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 틀림없었어요. 그것이 다른 오토바이에게 안내를 부탁한 이유였죠. 예상했던 것처럼 내가 부탁한 오토바이 말고도 정의의 기사를 자처하는 다른 오토바이 십여대가 마치 에스코트 하듯 내 차를 둘러싸고 병원으로 향했고 난 마치 도망가려는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의 검사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병원까지 따라온 정의의 기사들은 저마다 자기가 여자의 가족이니 친척이니 하며 목청을 돋웠지만 조금 지나 진짜 남동생이 병원에 찾아 오고 여자의 직장에서도 동료들과 상사들이 하나 둘 병원에 모여 들자 그들은 슬그머니 해산해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전 카사블랑카에서의 사고 때에도 사고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다리가 부러져 나뒹굴고 있는 부상자도 아랑곳 않고 자기 이익 챙기기에 급급했고 병원까지 찾아와 가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병원비가 많이 들 거고 후유증도 있을 거라며 돈을 뜯어내려 했는데 그들은 내가 외국인임을 알아채고 그 와중에 한번 사기를 쳐보려던 사람들이었어요. 카사블랑카 건은 자정 가까운 시간에 벌어진 사고여서 그들에겐 더할 수 없는 호기였겠지만 병원에서 경찰이 개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급히 날아온 릴리가 나타나 내가 자기 남편이라고 주장하며 눈에 불을 켜고 기염을 토하자 모두 하나 둘 슬그머니 사라지기 시작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릴리까지 불러 내지도 않았고 그런 떨거지들에게 신경 쓸 마음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호텔에서는 기다리는 김사장이 있었고 오늘이 이렇게 지나간 후에도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벌어 먹여야 할 가족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래, 너희들 짖어 대 봐야 목만 아플 것이고 난 내 할 도리만 다할 것이지만 너희들이 그토록 뜯어내고 싶어하는 돈을 난 한 푼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 체념에 가까운 생각은 오히려 내 맘을 침착하게 가라앉혔고 부상자 처리에만 전념할 수 있게 했습니다.

 

사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벌벌 떨면서 울고 있던 여자는 병원에 누워 이런 저런 검사를 하는 동안 조금씩 진정하기 시작했어요. 그 떄 찾아 갔던 순터르 사티아 느가라(Satya Negara) 병원은 나와 인연이 있는지 2008년도 말에 내 필드캡틴 이메이의 자궁종양 제거수술도 그 곳에서 해 주었습니다. 최첨단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검사설비를 갖추고 있었던 그 병원에서 의사는 엑스레이 결과에 이렇다할 두개골 골절이나 뇌출혈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헬멧을 착용하지 않았던 관계로 뇌진탕이 좀 심하게 온 상태지만 곧 호전될 것이라는 설명도 곁들이면서요. 난 한시름을 놓았습니다.

 

우미(Umi)라는 이름의 그 여자가 말을 하고 다시 웃기 시작할 때까지 난 진료실과 검사실, 약타는 창구와 결재 데스크를 쉴 새 없이 오가며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생각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사고는 오젝 기사가 낸 것인데 마치 내가 무슨 큰 사고를 친 것처럼 덤탱이를 쓰고 사후처리와 그 비용까지 떠맡게 된 형국이었거든요. 병원에 온 우미의 회사 동료들과 상사들 눈엔 도로에서 내가 우미를 깔아 뭉갠 사람처럼 보여졌을 것입니다. 최소한 그 부분에선 적절한 정리가 필요했어요.

 

이건 분명히 해야겠어요. 당신이 날 박았소? 아님 내가 당신을 박았소?”

 

우미는 PT. Aneka Warna 라고 하는 회사의 영업담당 이사의 비서였어요. 그 여자 이사와 인사하면서 난 눈에 시퍼런 멍이 든 오젝 기사를 불러 그렇게 물었습니다.

 

박긴 내가 박았지만…”

이 분들 앞에서 분명히 얘기해요. 당신한테 병원비 내란 얘긴 안할 테니까. 아무일 없이 살살 지나가고 있던 당신 오토바이를 내가 와서 들이받은 거요? 아니면 유턴하는 내 차에 당신이 들이 박은 거요?”

내가 박았죠…”

당신 오토바이 고칠 돈은 있어요?”

없어요….”

 

난 그에게 오토바이 수리비로 15만 루피아를 주었습니다. 병원비를 내고 남은 돈이었어요. 이게 뭐하는 짓인가도 싶었지만 그땐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기왕에 호텔에 있던 김사장을 병원에 택시 타고 오도록 해서 미화 100불을 빌린 상태였습니다. 그때는 페로자 찝에 기름넣을 돈조차 없었거든요. 그렇다고 그 잔돈을 내 지갑에 넣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비록 찌그러진 내 차 몸체를 펴지는 못하더라도 이번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이나마 비록 그들의 잘못이었다 하더라도 그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너무나 가난했던 만큼 나보다 더 가난한 우미나 오젝 기사의 처지를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 우미의 회사사람들이 날 바라보는 표정은 살벌하기 그지없었지만 우미가 굳이 집에 가서 가료하겠다며 병원을 나설 즈음엔 실제 사고경위를 오젝기사와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그들은 친절한 미소를 띄우며 내게 감사의 악수를 청해 왔습니다. 그런 치하를 들으려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우미의 상관인 그 여자 이사가 병원을 떠나면서 뿔테 안경 너머로 내게 눈인사를 하는 부드러운 시선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미씨, 이건 내 명함이에요. 혹시라도 요 며칠 사이에 머리가 아프거나 구역질 나고 그러면 빨리 병원에 가야 돼요. 비용 걱정 말고 병원으로 빨리 달려 가고 나한테는 전화만 한 통 넣어 줘요. 그럼 나도 달려 올테니까…”

 

병원을 떠날 때 이젠 거의 참외만한 크기의 혹을 달고 있던 우미에게도 그렇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호텔로 돌아가 그런 얘기를 내가 해주자 김사장은 혀를 끌끌 찰 뿐이었습니다. 그의 심정 모르는 바 아니죠. 피차 다소 남은 돈의 차이가 있을 뿐 나나 김사장이나 피차 망한 처지에 사고처리의 비용을 떠안고 사후처리까지 약속한 내 행동이 김사장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겠죠.

 

 

우미는 이틀을 쉰 후 다시 회사에 출근하기 시작했다고 연락해 왔습니다. 조금 더 마음이 놓였어요. 하지만 그후에도 처음엔 며칠에 한 번씩, 나중엔 2주에 한번 정도 순터르에 있는 그녀의 회사에 찾아가 안부와 추이를 묻기도 하고 던킨 도너츠 같은 간식을 사다 주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우미의 같은 부서 직원들도 모두 알게 되었고 부서장과 담당 이사들과도 인사를 나눴습니다. 다행히도 우미는 아무런 후유증을 보이지 않았고 사고 후 3주쯤 지나자 머리의 혹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요.

 

미스터르. 우리 이사님이 좀 뵈었으면 하는데..., 혹시 시간 되시면 오늘이나 내일 우리 사무실로 좀 와주실 수 있어요?”

 

무슨 일일까 싶었어요.

그때는 이미 한국으로 돌아간 김사장이 출장 당시 부탁했던 태견전수관의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뿔로마스(Pulo Mas) 수퍼린도(Superindo) 마트 건물 2층의 300sq.m를 임대해 내부 수리와 인테리어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야야산(Yayasan = 협회) 등록을 진행하는 중이었어요. 큰 수입을 기대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그 당시 내가 지고 있던 엄청난 빚을 갚을 재원을 마련할 발판이 되기에는 턱도 없었죠. 그러나 손가락만 빨면서 타들어가는 심지가 다어너마이트를 폭발시키는 순간을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수관이 완성되면 최소한 나와 릴리는 다시 우리가 부활할 길을 도모할 작은 사무실을 전수관 안에 마련할 수 있었으므로 최선을 다했어요. 사실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돈이 되지 않는 일에 일하는 시간을 일부러 쪼개 방문하고 싶지 않았지만 가까운 거리였으므로 어떻게 시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PT. Aneka Warna에 도착하자 우미는 몇몇 회사 친구들과 사옥 현관 앞까지 나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난 그 사이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 회사에서 꽤 인기가 좋은 방문자가 되어 있었거든요.

 

당신이 그 동안 우리 우미에게 하는 일을 쭉 봐왔어요.”

 

우미의 상관인 영업담당 이사는 안경너머로 예의 부드러운 시선을 던지며 그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그 때 그 사고…, 당신이 낸 것도 아니면서 끝까지 책임진 것 우미의 상사로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여기 사는 외국인들 중 당신 같은 사람도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낯이 슬슬 간지러워 왔습니다.

 

당신 얘기가 며칠 전 우리 중역회의에서도 거론되었어요. 우리 사장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셨고요. 그리고….”

 

그런 사고가 중역회의에까지 거론될 사안이었을까요?

 

사장님도 동의 하셨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든 믿고 거래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동안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는데…., 혹시 우리와 거래할 만한 아이템이 있으면 뭐든 제시해 주세요. 우리가 구매할 만한 물건도 좋고 당신이 우리 제품을 사용하는 일이라도 상관없고요.”

 

이사의 말에 난 가슴이 벌렁벌렁 거릴 정도로 놀랐습니다. 그런 제의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것은 마치 백지수표를 받아 드는 기분이었어요. 파산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다시는 없는 기회가 찾아 온 것입니다. 난 미팅을 마치고 난 후에도 하루 종일 공중에 붕붕 떠 있는 것 같았습니다.

 

PT., Aneka Warna는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순터르(Sunter)에 꽤 큰 사옥을 갖추고 200여명이 종업원들이 일하고 있는 견실한 중견기업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캐논, 코닥, 엔카드 등의 사진인화기계, 대형 배너 출력기계 같은 제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것이었고 다수의 관련 소모품들도 취급하고 있었어요. 적절한 제품만 있다면 우린 파산의 나락으로부터 당장 되살아 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마침 시기적절하게 멋들어진 제품을 만나게 되어 PT. Aneka Warna에 프로포절을 넣고 재기의 발판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렀다....라고 해야 뭔가 감동도 있고 반전도 있는 드라마같은 모양이 될 터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것은 드라마와는 전혀 딴판의 세상이었습니다.

 

그 후 3주 정도의 시간이 흘르는 동안 그 시간은 내 한계를 절절히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난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그때까지 줄곧 봉제업에 매달려 있었고 잠시 목재, 농산물에 손을 대기도 했다가 파산한 후 무려 200여가지가 넘는 아이템들을 검토하고 실험했지만 그 어느 하나도 PT. Aneka Warna와 사업적으로 연계할 만한 것이 없었어요. ROTC 선배들에게도 자문을 구하고 새로 아이템들을 찾아 보려 노력했지만 아무 것도 손에 걸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하는 준비라는 게 그렇게 보잘 것 없는 것이었어요. 살겠다고 죽도록 노력하며 그렇게 많은 아이템들을 건드렸으면서도 정작 당장 필요한 것은 보이지도 않다니요. 허탈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사족이지만 몇 년이 흐른 후 내가 디자인회사를 맡게 되었을 때 비로소 관련된 사업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회가 지나간 후였죠. 디자인 회사를 하는 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엔카드 프린터기를 수리 보수해 줄 수 있는 회사는 자카르타를 통틀어 PT. Aneka Warna 한 군데뿐이더군요.

 

그 마음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얼마 후 있었던 마지막 미팅에서 프로포절(proposal)을 기대하던 여이사에게 난 그렇게 말하며 그 기회를 반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막상 그런 기회가 왔을 때 나 스스로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가슴 시리게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기회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맺어졌던 우미와의 인연은 몇 년 동안 가끔 방문하고 전화로 안부를 묻는 사이로 지속되었어요오젝 오토바이와의 충돌로 시작했던 그 사건은 처절했던 나락의 밑바닥 시절에 겪었던 사막 속 오아시스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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