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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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립서비스’ 편에 기술한 바와 같이 TIKI의 황사장에게 모욕적일 정도로 뒤통수를 맞은 형이 다시 자카르타에 다시 온 건 그 해 11월 초였습니다. 이번엔 백두항운의 홍이사란 사람과 함께였죠.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던 황사장과의 사건으로 시간과 돈만 낭비하고 만 형이 귀국할 때 난 형에게 방향을 한 번 바꾸어 볼 것을 제의했었습니다. 개인 자격으로 무작정 자카르타에 날아와 직장을 찾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입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인도네시아와의 거래를 원하는 쿠리어 회사를 거래 성공부 조건으로 엮어서 다시 들어온다면 현지 업체들을 대하는 입장도 당당해지고 뭔가 이루어질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지금은 7만명을 웃돈다는 베트남의 교민 수가 불과 7천명 전후에 불과하던 90년대말 당시 교민 3만명을 상회하던 인도네시아는 아시아에서 일본, 중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교민과 한국기업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서울-자카르타 간을 매일 운항하는 대한항공은 객석이나 짐칸이나 항상 만석이었으므로 연결고리만 갖추어진다면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보려는 쿠리어, 포워딩 업체들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게다가 성공부 조건이라면 인도네시아 사업이 세팅될 때까지 당장의 출장비 외에는 월급 등 별다른 경비가 들지 않을 것이므로 진심으로 인도네시아 진출을 원하는 한국업체라면 손해될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경비를 많이 절약하는 셈이 될 것이었죠. 그래서 귀국한 후 열심히 뛰어다닌 형은 한국에서 물동량 기준 37위라는 에어카고 업체 B항운과 계약을 했습니다. 같이 온 홍이사는 물론 그 회사 사람이었죠.
항공화물
B항운은 기존에 인도네시아에 적지 않은 양의 쿠리어 카고를 보내고 있었지만 모두 TIKI를 통한 것이었고 황사장이 가져가는 커미션 몫이 너무 커 거의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형이 한국에서 동분서주하는 동안 내가 자카르타에서 한 일은 한국과의 거래를 희망하는 현지 쿠리어 업체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시장조사는 늘 하던 일이었으므로 맘 먹고 들이대자 현지 시장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습니다. 형이 자카르타에 처음 왔던 8월 당시 황사장은 그 노예문서를 만든 회사를 소개해 주면서 '인도네시아엔 쿠리어 업체가 별로 없어서 다들 우리 회사만 쓰는 거야. 이 회사가 그나마 제일 큰 회사야” 라며 생색을 냈습니다.
그러나 전화번호부를 들춰보고 인터넷을 열어보니 자카르타에만 수백개의 크고 작은 쿠리어 업체 들이 있었고 내가 전문을 보낸 업체들만도 200군데에 달했습니다. 그 당시 황사장은 아무 것도 알아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늘 있는 일이지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히 얘기하는 용기는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잘난 척 떠벌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나이와 현지 경력을 담보로 내세우며 실제상황이 아닌 상상력을 동원한 가공의 상황이나 금방 탄로날 명백한 거짓말을 넌 절대 알 수 없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을 가지고 뻔뻔스럽게 강조하곤 하지요.
그렇게 전문을 내서 상담을 시작한 회사들이 십여 군데였고 그중에는 담배재벌인 삼뿌르나(Sampoerna)그룹, 항공재벌인 머르빠띠(Merpati)그룹처럼 인도네시아에서 손꼽히는 대형 업체들의 계열사들은 물론 영세한 군소업체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사전 상담을 진행하면서 인도네시아 쿠리어 업계의 맥락을 짚은 후 우리 보고서를 토대로 한국에서 최종적으로 몇 개의 후보업체를 선정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최종결정을 짓기 위한 미팅을 위해 형과 홍이사가 자카르타에 날아온 것입니다.
“배사장, 이거 어떻게 된거야?? 도대체 얘기가 보고한 거랑 틀리잖아!? "
또 한명의 희귀한 사람을 발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까뿍(Kapuk)에 있던 인도익스프레스(PT. Indoexpress Buana) 본사에서 부사장 알피안(Alfian Sutanto)과 상담을 진행했다가 홍이사가 대뜸 내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요. 내가 통역해 주겠다는 것을 극구 사양하며 그는 알피안과 직접 영어로 상담을 붙었죠. 영어를 썩 잘 못하는 형에게 자기 실력을 과시하려 한 것이 분명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알피안은 학창시절 인도네시아 국립대학(Universitas Indonsia = UI)과 한국의 고려대 격인 트리삭티(Trisakti) 대학, 인도네시아 카톨릭 대학(Universitas Katolik Indonesia = UKI) 등 세 군데 대학에 동시 입학하여 각각 다른 전공을 이수하며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루에 잠을 2시간만 자는 생활습관을 어릴 적부터 몸에 익혔다고 하더군요. 그 후 삼뿌르나 그룹에 입사한 그는 고속승진을 거듭한 끝에 불과 29세의 나이에 그룹 계열사인 쿠리어 전문인 인도익스프레스와 에어카고 전문인 글로벌(PT. Global Putra Indonesia) 두 회사의 부사장으로 전격 취임합니다. 삼뿌르나 그룹의 로얄 패밀리와의 친분이 분명 큰 역할을 했겠지만 나를 처음 만났을 때 갓 31세가 되어 있던 알피안은 무서울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국내파인 그의 영어는 아주 유창하지까지는 않았지만 또박또박 알아듣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홍이사는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은 물론 나도 홍이사가 영어라고 하는 말을 도저히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그때 한참 하고 있던 얘기는 가격 경쟁력 제고에 대한 것이었어요. 당시 황사장이 있던 TIKI를 사용하고 있던 B항운은 인도익스프레스와 계약하여 kg 당 최소 U$1.50의 비용을 줄여, 연간 최소한 15만불 이상을 절감할 수 있는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건 매출의 20%를 개인 커미션으로 가져가는 황사장의 몫이 빠지기 때문이었죠.
더욱이 인도익스프레스는 이 일을 처음 시작하려는 회사가 아니라 지난 7년간 UPS와의 합작경험으로 조직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인도네시아 전국 주요도시를 연결하는 지점망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사업확장을 추구해 오고 있던 알피안은 월 40톤이 넘는 한국으로부터의 물량 중 상당부분을 B항운을 통해 흡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 있던 터였죠.
그런 상황을 전날 밤 공항에서 픽업하여 식당으로 모시고 늦은 저녁식사를 대접하며 차근차근 설명해 줄 때 그렇게 기뻐하던 홍이사는 이제 알피안이 내가 했던 말과 100% 똑 같은 조건을 영어로 말하고 있는데 얘기가 틀리다며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도저히 감당이 안되니 통역해 달라고 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이사는 자기 체면 차리기에 급급했어요. 그 회사의 직원이 될 사람은 우리 형이었지만 그는 내게도 상관처럼 굴려 들었습니다. 내가 다시 통역을 맡아 차근차근 설명하자 다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홍이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저 친구, 내가 보니까 영국식 영어를 쓰는 것 같은데. 난 미국식 영어로 배워서 말이야. 게다가 부사장씩이나 된다는 사람이 영어 발음이 뭐 저래?”
가소로웠지만 참았습니다. 그는 내가 영어를 전공했고 땅굴에서 군생활 2년 내내 영어로 브리핑을 하며 살았다는 것을 절대 알 수 없었겠지요. 그 옆에 앉아 있던 형이 오히려 민망해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고 있었습니다. 영어를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모르는 걸 아는 척하는 건 분명히 죕니다.
삼푸르나 스트레티직 스퀘어 빌딩
알피안은 무던히도 잘 참고 있었지만 홍이사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알피안이 이야기하는 동안 홍이사는 회전의자를 삐딱하게 돌려 놓고 앉아 알피안을 곁눈으로 흘겨보면서 연신 코를 후비고 있었거든요. 검지 손가락 두 번 째 마디까지 콧구멍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알피안은 짐짓 못 본 척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나까지도 얼굴마저 화끈 달아 올랐습니다.
나흘 간의 출장일정 동안 알피안은 매일 저녁식사에 우릴 초대했지만 우린 한 번밖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계약이 정식으로 체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계속 얻어 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는 음식 받아 먹자고 나서는 홍이사를 말리는 것 역시 만만찮은 일이었습니다.
또 다른 후보업체인 머르빠띠그룹의 메가카고(Mega Kargo) 역시 매일 저녁식사를 초대해 왔습니다. 사실 형과 홍이사가 자카르타에 오기 전에 이미 대세는 인도익스프레스와 계약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전반적인 회사 프로필이나 시스템, 열의, 그 모든 것들에서 인도익스프레스가 우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시 열의 하나만은 인도익스프레스 못지 않았던 메가카고는 어느 새 형이 일할 사무실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일단 먹구 보는 거야."
아무리 중소기업의 이사라지만 이렇게 나오는 홍이사는 염치없는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홍이사야 한번 왔다 떠나면 그만이지만 계속 자카르타에 남아 이들과 앞으로 또 어떤 일을 함께 하게 될지도 모를 내 입장에서는 분명 B항운이 계약하지 않을 메가카고가 쓸데없는 희망을 가지고 홍이사에게 계속 비용을 지출하도록 놔둘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메가카고가 밥을 사지 않더라도 홍이사가 배불리 먹을 밥은 나라도 사 줄 수 있는 거였습니다.
홍이사는 출장기간 중 잠깐씩 종적을 감추곤 했는데 하루는 그의 먼 친척 형님 되신다는 홍사장이라는 분을 찾아 간다고 하여 내가 차를 운전해 갔지요. 이제는 주인이 바뀌었다고 들었지만 당시 스칼렛(Scarlet)이라는 가발공장과 아울렛들을 거느리고 있던 홍사장은 그간 번창한 사업에 힘입어 자카르타 근교에 근사한 저택을 직접 짓고 살고 있었는데 인품과 생활에 품위가 엿보이는 분이었습니다. 대화 내용을 들어봐서는 그렇게 가까운 인척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홍사장은 여기서도 선을 넘어갑니다.
“왜 사업을 인도네시아에서 하셨어요? 베트남이 얼마나 좋은데요? 베트남으로 방향을 잡으시면 제가 전부 다 준비해 드릴께요. 부탁만 하시면 제가 다 알아봐 드릴 수 있어요.”
허허 웃던 홍사장이 한마디 질문을 던집니다.
“자네 베트남에서도 좀 살아 봤나?”
“아, 제가 두 달 전에 호치민에 이틀 출장을 가 봤는데요. 뭐, 한 두 시간 돌아보면 다 아는 것 아니겠어요? 다 파악이 됐죠. 호치민에 사무실 차릴 돈만 형님이 지원해 주시면…”
형과 함께 둘러 앉아 차를 마시던 내 얼굴이 또 화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10년을 살아도 잘 모르는 것이 남의 나라인데 단 한 번, 그것도 달랑 이틀 출장 간 것으로 홍이사는 베트남 전문가를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얘기들은 남들 보지 않는 데서 단 둘이 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 놓고 우리 앞에서 떠버리는 홍이사는 정말 자기가 그렇게 얘기하면 모든 사람이 믿어줄 거란 터무니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너희들은 듣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우릴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 감을 잡기 힘들었어요. 나는 곁눈질로 형을 째려 보았고 형은 못 본 척 찻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인도익스프레스에서는 출장 마지막 날 이미 계약서를 만들어 놓고 있었지만 그래서 난 B항운에 믿음이 가지 않았고 형이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비록 물동량 37위의 회사라고 해도 자금력과 조직력으로 움직이는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개인의 역량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고 그래서 직원을 잘못 들이면 회사가 흔들리기 쉽고 사장이 망가지면 회사도 무너지는 것이죠. 아무리 중소기업이라도 이사라면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인데 홍이사가 자카르타에서 머무는 나흘 동안 보여준 이미지는 한 마디로 안하무인, 천방지축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모르긴 몰라도 회사로서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을 인도네시아와의 거래선 교체를 위해 출장 보냈다는 게 잘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당장이라도 서명할 듯 계약서를 독촉하던 홍이사는 막상 계약서를 받아 들더니 말을 바꿉니다. 불과 이틀 전만 해도 자기가 사장이나 다름없으니 이 정도 조건이면 즉시 서명하겠다던 그가 갑자기 사장과 협의해야 한다며 한 발을 뺀 것입니다.
참을성 많은 알피안은 흔쾌히 그러라고 했지만 형은 귀국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갈 때까지도 찜찜한 표정이었죠. 그리고 곧 서명해서 보내주겠다던 계약서에 대해 B항운은 내가 그 해 연말 한국에 출장갈 때까지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형의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출장 첫 날 내가 회사를 방문했을 때에도 홍이사와 사장은 인도익스프레스와의 계약서에 곧 서명하겠다고 말할 뿐 계속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습니다. 뭔가 석연치 않았지요. 그리고 12월 31일, 98년의 마지막 날, 파국이 찾아옵니다. B항운이 황사장과 계약을 연장한 것입니다.
그가 자카르타 출장동안 말도 없이 종적을 감추곤 하던 것은 그때 형 몰래 TIKI의 황사장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인도익스프레스가 제공한 방대한 시장자료와 계약서 초안을 흔들며 황사장에게 딜을 걸었고 황사장은 물량을 전부 놓치느니 자기 몫을 좀 줄이는 선에서 가격을 인하해 주었던 것입니다. B항운의 인도네시아 전문팀으로 사무실에 들어와 업무개시를 준비하고 있던 형과 형의 옛 프론토 동료들이 악 소리도 못내고 그날 부로 사무실에서 쫒겨난 것도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연말이었습니다. 나도 그랬지만 당사자인 형은 허무하고 억울한 마음을 달래기 힘들었을 겁니다.
우리가 완전히 당했다는 소식을 알피안에게 이메일로 보내는 새해의 기분은 정말 참담했습니다. 알피안에게 면목이 없었던 것은 물론 소위 인도네시아보다는 훨씬 좋은 나라, 조금은 더 선진국 국민이라고 자부하던 한국사람으로서 홍이사가 알피안에게 한 비열한 행동이 마치 나 자신의 치부인 것처럼 부끄러웠기 때문이었죠. 다른 업체를 찾기 위해 뛰기 시작한 형과 그 동료들을 보는 것도 안쓰럽기 짝이 없었고요.
거의 반년이 걸렸던 작업의 원점에 서서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심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잘 모를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모두 내가 잠시 방심했기 때문인 것만 같아 형에게도 가슴 쓰리도록 미안했어요. 하지만 자카르타에 돌아와 만난 알피안의 반응은 의외로 밝았습니다.
"비록 내 윗분들이 좀 실망은 하겠지만 최소한 이 일로 우리 회사가 구체적으로 손해 난 건 없지요. 너무 실망하지 말고 또 노력해 봅시다. 좋은 방법이 생기겠죠. 그리고..., 며칠 전에 보내준 실패 보고서. 정말 잘 썼더군요. 우린 직원들한테도 다 읽어 보라고 했어요. 요즘은 실패한 걸 사실대로 보고하는 놈도 없고 정말로 미안해 하는 놈도 없거든요. "
알피안이 그렇게 얘기해 준 것이 내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나와 처음 만나 한국과의 거래를 얘기한 이후 알피안은 어느 시점부터인가 서울지사 설립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며칠 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그는 형이 한국에서 세팅해 놓은 인도네시아팀을 인도익스프레스의 서울 지사로 활용하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해 왔습니다. 나는 물론 형과 동료들까지 흥분하기 시작했지요.
밤을 새워 만든 프레젠테이션을 토대로 알피안이 기본틀을 확정하면서 서울지사 설립은 아연 급진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알피안이 경비송금을 시작하면서 형의 숨통이 트였고 항공화물업체들을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다니던 형과 동료들은 이제 사무실을 알아보고 회사설립을 위한 절차를 밟으며 거래선들을 확보하러 뛰어 다니느라 더욱 바빠졌습니다.
"여기 세관이나 공항관리들은 썩을 대로 썩었어요. 하지만 이 일을 하려면 우리도 거기 맞춰 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문제는 늘 뒷돈이죠. 보통 업체들은 지금 통관장에서 일하는 사람들한테만 뒷돈을 주죠. 하지만 우린 모두에게 줍니다. 맨 밑에서 맨 위까지, 맨 끝에서 다른 끝까지. 현직은 물론 전직 관리들, 옆 부서 관리들 한테도요. 나중에 누가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갈지 모르니까요. 가끔 공항에 감사가 나올 때는 아무도 일 못합니다. 며칠씩 말이죠. 미스터 황 회사도 못해요. 쿠리어 물품 통관은 법대로 하자면 법에 맞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우린 통관을 못하는 일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 감사도 우리 돈을 받은 사람일 테니까요."
업무협의를 하는 동안 알피안이 하던 말이었어요. 구정 후에 있을 그의 서울출장일정을 협의하는 자리에서였습니다. 인도익스프레서의 서울지사 그랜드 오프닝과 시간을 맞춘 거였죠. 그리고 그가 묶을 호텔을 정해야 했습니다. 하루 밤 수백불 하는 특급호텔들을 거론하자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특급호텔을 전전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사실을 얘기할까요? 난 수마트라(Sumatera) 바딱(Batak) 출신입니다. 사람들 성격 험악하고 자존심만 한없이 높은 지역이죠. 우리 아버지가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무슨 돈으로 했을 거 같아요? 너무 어려운 시절이라 어떤 사람을 사기 치셨죠. 그 사기친 돈으로 자카르타에 와서 사업을 하신 거에요. 지금 크게 성공하시기 전까지 실패도 많이 하셨죠. 난 그 아버지의 장남입니다. 춥고 배고픈 거 잘 참아요. 호텔은 잠만 잘 수 있으면 됩니다. 아무데나 잡아도 상관없어요."
그의 솔직담백함은 날 멍하게 할 정도였어요.
알피안의 짧은 서울출장 마지막 날 밤, 나는 그와, 이제는 그의 서울지사장이 된 형과 그 동료들을 남산 밑 '동보성'이라는 정통 중국집에서 저녁을 대접했습니다. IMF 경제위기의 한파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미국이나 유럽의 어떤 선진국도 아닌 인도네시아의 한 회사가 서울에 지사를 세우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세상 일이란 그렇게 사람들 예상대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알피안은 내가 만난 인도네시아 사람들 중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인도익스프레스를 운영하던 4년 동안 자카르타에는 잇달아 들어온 한국계 쿠리어 업체들의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고 인도익스프레스는 전국에 80개 지점망을 갖추며 현지업계 1위 TIKI와 업계 2위 Pandu Siwi(현재는 PSI로 개명)의 뒤를 바짝 따라 붙으며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이르러 황사장은 신발공장, 고리대금업으로 업종을 바꾸면서 TIKI는 국제택배부분을 완전히 폐쇄했고 황사장을 믿고 TIKI와 거래했던 B항운은 닭 쫓던 개 꼴이 되어 버리고 말지요.
그러나 아쉽게도 인도익스프레스의 번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어요.
그가 부사장으로서 실질적인 CEO의 일을 하던 인도익스프레스와 글로벌 포워딩의 두 회사는모두 위나르코(Winarko)라는 사람이 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삼대째에 이른 삼푸르나 그룹 현직 회장의 사촌이었고 그룹의 감사로도 등재되어 있었죠.
단 한번도 인도익스프레스 사무실에 나타난 적이 없던 그가 이 두 회사를 직영하려 하기 시작한 것은 지점의 숫자가 80개를 넘어서던 때였습니다. 국내택배와 국제 쿠리어 양쪽에서 적지 않은 이익을 내던 인도익스프레스가 어느덧 위나르코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현장 업무를 전혀 모르는 그가 현업에 개입하면서 알피안과의 갈등이 증폭되었죠. 그러던 어느 날, 공교롭게도 내가 한국에 가 있던 추석연휴에 형은 위나르코의 소환을 받고 인도네시아에 날아와 삼푸르나 그룹 사옥의 호화로운 사무실에서 통역도 없이 혼자서 그를 대면해야 했습니다. 알피안은 그 당시 회사자금을 한국으로 빼돌렸다는 그룹측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알피안은 심각하게 고민했고 나와도 몇번 함께 한국식당과 현지 클럽에서 소주와 데킬라를 마시며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천하의 알피안도 삼푸르나 라는 대그룹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는 없었어요. 지치고 염증을 느낀 알피안이 결국 두 회사의 부사장직을 물러나고 그룹을 떠나면서 위나르코가 알피안의 개인조직으로 치부한 서울지사는 그룹으로부터 버림받고 형은 또 다시 궁지에 몰리게 되었죠. 지금은 중국 광주에서 역시 택배사업을 하고 있는 형은 그 후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알피안 역시 처음에는 조금 움추리는 듯 했지만 곧 여러가지 자신의 사업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장남으로서 물려 받아야 할 가업도 있었습니다.
알피안이 떠난 인도익스프레스는 위나르코의 일천한 경륜으로서는 지탱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쿠리어 사업은 막대한 돈을 퍼부어 이권을 따내는 대형 프로젝트 같은 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사장을 몇 번을 갈아 치웠지만 급격한 하강곡선을 긋기 시작한 인도익스프레스의 추락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고 알피안이 회사를 떠난 지 불과 1년 만에 인도익스프레스는 문을 닫고 맙니다. 위나르코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거였어요.
인간사 새옹지마지요.
우리 형이 겪은 일도, 알피안이 겪은 일도, 형의 쿠리어 사업을 돕는 동안 내가 겪은 일들도, 모두 당시에는 하나같이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 돌이켜 보면 인도네시아에서 많은 해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몇 번씩 이미 겪어 본 비슷비슷한 일상다반사의 일들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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