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립서비스

beautician 2016. 9. 13. 10:00

 

  

황사장과 우리 형은 고등학교 시절 서로 죽이 잘 맞는 싸움친구였다고 합니다. 형은 그때 아마도 폭력써클 같은 것에 가입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없어져 버린 신당동의 성동중학교를 내가 다닐 당시 형은 바로 그 옆의 배명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죠. 70년대 당시의 신당동은 그리 안락한 곳이 못되어 낮이면 갓길에 세운 봉고차며 트럭들 사이에 인파가 번잡하게 붐비던 신당동 시장 일대가 밤이 되면 술집과 홍등가에 사람들이 넘쳐 났고 시장통 깡패조직들이 종종 백주에 힘겨루기를 하기도 했는데 과장을 조금 보태면 그 수많은 골목 골목마다 나름대로 내로라 하는 학생 양아치들이 밤낮으로 진을 치고 하교길의 아이들에게 소위 을 뜯곤 했습니다.

 

요즘이라고 그런 일이 없을 리 없지만 골목길에 영화 친구에 나오는 그런 교복을 입은 학생들 서너명씩 앞 단추 두 세 개씩 풀고 모자도 삐딱하게 쓰고서 둘러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지나가는 순진해 보이는 중학생들을 위협해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 주먹질을 하며 돈을 뺏는 것이죠. 나라고 용빼는 재주가 있는 게 아니었고 게다가 심하게 모범생 티가 나는 바람에 하교길에 무던히도 주머니를 털렸습니다. 당시 해당 전문용어로는 센터를 깐다였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형한테 그런 고민을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 야속하게도 형은 분명 흘려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길 양아치들이 홀연히 자취를 감춰 버렸죠. 그들은 2~3주가 지나자 다시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는데 또 돈 뜯길 상황이 되면 자기 이름을 대라고 하던 형의 말이 생각났어요.

 

배명 고등학교 배 OO 이 우리 형이에요.”

 

겁먹고 쭈삣거리며 내민 우리 형 이름에 거짓말같이 약발이 먹었습니다. 양아치 형들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저희들끼리 뭔가 수근거리기 시작했거든요.

 

그래…., 그때 그 미친 새끼들…. 지 동생 건드리지 말라고 그 난리를…. 그게 바로 저 샌님 같은 놈…”

 

그날 나는 양아치 형들에게 등 떠밀려서 골목길을 빠져 나왔어요. 다시 눈에 띄면 죽인다는 둥 위협적인 말들을 내뱉었지만 그 후에 몇 번을 그 골목 앞에서 그 형들과 마주쳤어도 소가 닭 보듯 딴청을 부리곤 했습니다. 비단 그 골목 형들뿐 아니라 신당동의 모든 골목에서 내가 무슨 테러범이라도 되는 듯 양아치 형들은 나에게 접근해 오지도 않았고 투수가 강타자에게 고의사구를 던지듯 매번 주루를 허용했어요. 내 말을 흘려 듣는 듯 했던 형이 신당동 학생 양아치들을 상대로 뭔가 단단히 사건을 쳤던 모양이고 그래서 난 그 후 중 2, 3학년의 2년 동안을 한번도 삥을 뜯기지 않고 등하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형이 그 방면에서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형이 드래곤볼의 손오공처럼 대단한 무림고수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싸움을 하는 것을 많이 보았지만 이소룡 영화에서처럼 주인공은 한 대도 안맞고 상대방을 수십명씩 때려 눕히는 것은 정말 영화에서나 있는 일이었고 실제에서의 싸움이란 한 놈이 먼저 겁먹고 뒤로 빼지 않는 한 서로 코피가 터지며 티격태격 나뒹굴다가 결국 맷집 좋은 놈이 이기는 그런 거였기 때문이었죠. 가끔은 형이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들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몇 번 보았기 때문에 아마도 형이 맷집이 특별히 좋은 모양이라는 생각까지는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형이 진짜로 싸우는 모습을 딱 한 번 보게 됩니다.

 

형과는 2년 터울이라 형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아직 방배동으로 이사하기 전인 신문로의 서울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어요. 신문로에서까지 신당동에서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어 있는 형의 이름을 팔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2학년 2학기 때 방배동으로 이사하면서 학교 짱을 위시한 전투조들은 우리 학교에서 마주 보이는 언덕 위의 상문고등학교 주먹꾼들과 여러 번 일대 격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일반 학생들은 중학교 때처럼 길거리에서 위협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 즈음 학원가에 들의 시대가 도래하여 학교를 대표하는 짱들이 그 일대를 지배하면서 나름대로의 나와바리를 형성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아직도 서울고등학교가 신문로에 있을 당시 서울 시내와 광주 등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항쟁을 벌였던 운동권 학생들과 야당 정치인들을 짓밟으며 철권정권을 수립한 우리의 경애하는 전두환 장군님께서 그 이후 몇 년 동안 수많은 조폭, 깡패, 양아치들을 정권에 항거하는 인사들과 함께 많이도 엮어 삼청교육대에 보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울의 골목 골목마다 평화가 도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직전, 아직도 신문로로 통학하던 고등학교 신입생 시절의 어느 토요일 오후, 교회에서 돌아오던 길에 또 양아치들에게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우스웠던 것은 형이 즐겨 입던 바지를 평소 눈여겨 오다가 그날 몰래 입고 나갔었는데 그 바지라는 게 무지개색상의 세로무늬가 바지통을 빙 돌아가며 들어가 있는, 지금이라면 누구나 질색을 할 유치찬란한 것이었고 그게 양아치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기 때문입니다. 그건 누가 봐도 양아치 전용 바지였거든요. 집으로 들어가는 꽤 넓은 길목 한 복판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던 6~7명의 양아치들이 그 앞을 지나가려는 나에게 시비를 걸어왔고 난 꼼짝도 못한 채 얻어 맞고 지갑까지 털려야 했습니다. 바지도 쫙쫙 찢기고 말았어요. 더욱 열불 나도록 속상했던 이유는 그게 우리 집을 바로 20여 미터 남겨 놓은 지점이라는 사실이었죠.

 

형은 주말이면 집에 붙어 있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토요일 오후에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형이 혼자 TV를 보고 있다가 눈두덩에 시퍼런 멍이 들어 들어오는 나를 보며 벌떡 일어서는 기세가 마치 눈에서 불꽃을 뿜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새끼들이 이랬어? 어디서 맞았어?”

바로 집 앞이야. 나가지 마. 한두명이 아니야.”

이런 씹어먹을 새끼들을….!”

 

그게 대충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고 있던 5월 중순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대충 입은 형은 내가 만류하는 데도 불구하고 대문을 뛰어 나갔고 그 뒤를 따라 뛰어 나가며 싸움을 말려야 할지 아니면 형이랑 한 편 먹고 함께 한바탕 주먹질을 해야 할지 아직 결정을 못내리고 있던 내 눈 앞에 일대 장관이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형은 길바닥에서 피크닉을 하고 있던 양아치들 앞에서 쨍쨍거리는 목소리고 고함을 치고 있었는데 6~7명의 양아치들을 스프링 튕기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형에게 덤벼 들었고 그날 난 사람이 붕붕 공중을 나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형은 오랫동안 유도를 해왔어요. 형은 양아치들 사이에서 바닥을 박차고 또는 담벼락을 박차고, 심지어 양아치들의 허리며 등을 박차면서 공중을 날고 있었는데 형의 손에 걸리는 상대방도 순식간에 원치 않는 비행을 하며 담벼락과 길바닥으로 날아가야 했고 형이 그들을 모두 때려 눕히는 건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북가좌동 집 앞의 꽤 넓은 하천에는 제방공사가 한창이었는데 형은 양아치들을 모두 제방 밑으로 끌고 내려가 무릎을 꿇려 놓았습니다.

 

너희들, 내 동생한테 사과해라. 죽고 싶지 않으면…!  그리고 다시는 이 동네에 나타나지 마.”

 

물론 이 말의 앞뒤, 중간에는 필설로 다하지 못할 무시무시한 욕설들이 섞여 있었고 그날 나는 처음으로,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그게 마지막이기도 하겠지만, 나 이상으로 눈탱이가 퍼렇게 부어 오른 채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리는 양아치들에게 사과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형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돗자리를 거둬 들고 총총히 자리를 떴고 집에서 부모님의 우려를 한 몸에 받던 형은 그날 이후 내 영웅으로 등극합니다.

 

 

형은 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도 한동안 주먹세계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했던 일은 전경환씨 소유라고 알려져 있던 강남 터미날 인근의 한 나이트 클럽 기도였고 가끔은 눈꺼풀 위에 칼자국을 달기도 하고 옆구리를 깨진 병에 찢겨 피범벅이 되어 집에 돌아 오기도 했지만 등등한 기세만은 늘 여전했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얼굴이 만신창이, 피투성이가 되어 밤늦게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이런 적 한 번도 없었잖아?”

 

방배동의 교회를 겸한 집의 한 방에서 2층 침대의 나는 1, 형은 2층을 쓰고 있었어요. 형이 그 정도로 맞고 온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던 나는 거의 패닉상태에 이르렀지만 정작 형은 그 얼굴을 하고서 어두운 방안에서 허허 웃고 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 때리기 싫다. 이제부턴 맞고 살지,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트클럽을 그만 둔 형은 다른 직장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로 일하기 전, 형은 대학을 여러 번 낙방하면서 재수를 해 오다가 간신히 상지대에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에게 등록금을 부탁하기엔 우리 형편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던 형은 합격통지서를 내게만 보여 주고 찢어 버리고 맙니다. 형은 어느 새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고 아제 보통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은 형의 결심은 정말 형다운 영웅적인 것이었습니다.

 

남자들이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는 먼지 풀풀 나는 낡은 사고방식의 시대에 살고 있던 우리는 그래서 서로 속내를 다 드러내는 법이 없었지만 학창시절을 마치고 험난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도 서로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내가 자카르타에 온 후에도 형은 내가 늘 그리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황사장이 형을 자카르타로 부른 것은 지난 90년대 말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당시 친구들 중 홍사장이라는 사람을 자카르타로 불러 들인 일이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원수 같은 사이가 되어 버린 전력이 있어 형이 자카르타에 도착할 때 나는 썩 편한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태권도를 했다는 황사장은 고등학교 당시 형, 홍사장 등과 함께 싸움을 하러 다니던 패거리였답니다. 홍사장은 그리 싸움은 잘 못했지만 타고난 입담 때문에 늘 선봉에 섰다고 하고요. 영화 황산벌을 보면 백제의 계백 장군이 신라군과 싸움을 벌일 때 전투가 벌어지기 전 늘 먼저 앞에 나서 질펀한 욕설로 상대방의 열불을 끓게 하는 욕부대가 나오지요?  형의 학창시절은 아직도 퍽이나 고전적, 낭만적인 주먹꾼들의 시대였고 홍사장의 역할은 그런 거였답니다.

 

그리고 우리 형의 역할은 전투부대. 욕부대끼리의 욕싸움이 끝나면 양쪽 주력부대가 맞붙어 자웅을 다투지요. 형과 또 몇몇 친구들은 상대방의 예봉을 꺾는 정예부대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나면 이제 마지막으로 양쪽 장수들이 말타고 달려 나와 대장들끼리의 결전을 벌이는데 그게 황사장의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북가좌동에서 내가 봤던 형은 그렇게 붕붕 날아 다니고 있었는데 그 패거리의 좌장 격이었던 황사장은 그 당시 정말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싸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어 아마 황사장은 축지법이나 장풍도 쓸 수 있었으리라 상상밖에 할 수 없었죠.

 

대략 이런 느낌

 

그 황사장을 처음 본 것은 95년도의 일입니다. 내가 인도네시아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죠. 당시 그는 당시 우리 형 이름을 들고 공장에 찾아 그때까지만 해도 일면식도 없던 나에게 무척 친한 척을 했습니다. 명함을 건네며 통성명을 한 후 물건을 맡겨 달라고 부탁해 왔었죠. 그 후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한인 유치원 체육대회에서도 마주치고 식당에서도 여러 번 마주쳤지만 그와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형의 자카르타에 도착하기 불과 며칠 전이었습니다.

 

내가 너무 바빠서 말이야. 미안해, 미안해.”

 

블록엠(Blok M) 한국식당에 약속시간보다 훨씬 늦은 저녁 8시 반에 나타난 황사장은 그렇게 너스레를 떨고 있었습니다. 한화그룹을 나와 봉제 에이전트 사업을 시작한 지 몇 년 차였던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와 말투는 깍듯이 존대말을 하던 95년도의 한화 공장에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형이 오면 와 있는 동안 자주 만나게 될 텐데 굳이 그 며칠 전에 불러낸 이유를 잘 알 수 없었고 불러 낸 사람이 1시간 반이나 늦게 나타나는 경우는 또 무엇인지 조금씩 불쾌해 지던 차였습니다.

 

너희 형이 하도 부탁을 해서 오라곤 했지만 자카르타가 만만한 곳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리고너, 너희 형한테 내가 한번도 밥 안사줬다고 하면 곤란하잖아. 그래서 불러낸 거야.”

 

겨우 그런 이유였습니다. 나는 그날 형 문제로 만나자던 그의 전화를 받고 다른 약속을 미루고 나온 것인데 그는 밥이나 한번 같이 먹자는 것이었죠. 그가 학창시절 주먹으로 날리던 얘기, 자카르타에서 얼마나 벌었다는 얘기와 이젠 벌만큼 벌었으니 미국으로 이민 가겠다는 얘기가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형의 얘기대로라면 황사장은 예전 그들 그룹의 두목이었고 과묵하면서도 뭔가 심상찮은 아우라를 발산하는 게 영화에서 본 조직의 두목들의 전형이었는데 황사장은 욕부대 용사들 못지않은 다변을 자랑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나는 또 한편으로 자카르타에 사는 한국사람들 중 많은 수가 왜 그렇게도 자기가 번 돈 액수를 자랑하지 못해 안달을 하며 그들이 떠나고자 하는 다음 행선지는 왜 항상 미국이어야 하는지 의아해 했지요.

 

"내가 2차 살께. 이건 니가 내 "

 

저녁을 사겠다고 불러내고서 식사 내내 식당에 모인 다른 한국사람들에게 아는 척을 하며 이 테이블에서 저 테이블로 옮겨 다니던 그는 내가 숟가락을 놓기 무섭게 자리를 일어서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아마도 어디 가라오케라도 예약해 두었기 때문이리라 짐작했었죠. 그러나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올 때 자기 차 앞에서 두 명의 인도네시아 여학생들과 노닥거리고 있던 황사장이 하는 말에 난 할 말을 잊고 말았습니다.

 

"아까 여기 오다가 꼬셔 논 애들인데 얘들 데리고 가서 놀자."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이었습니다. 황사장은 그들을 꼬시느라 약속시간에 한시간 반을 늦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블록엠은 한국의 명동이나 압구정동쯤 되는 곳이어서 고급 백화점들과 재래시장이 공존하는 번화한 우범지대였고 일본인 가라오케와 한국인 가라오케가 경쟁적으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시간을 죽이려고, 누군가 유혹하려고 또는 유혹을 당하려고 찾아오는 현지인 학생들과 청년들로 항상 끓어 넘치고 있었죠. 황사장에게 배시시 눈웃음을 흘리고 있는 그 학생들은 우리가 저녁식사를 하는 한 시간 가까이 거기서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간 곳은 가라오케가 아니라 멀라웨이(Melawai) 호텔의 싸구려 펍(pub)이었습니다. 좁은 공간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단 한 개 있던 포켓볼 당구대 주변에는 어린 창녀들이 우글거리며 현지인 콧수염 아저씨들에게 웃음을 팔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맥주 피쳐 한 개를 막 마시자마자 황사장은 내 등을 떠밀었습니다.

 

"너는 걔 데리고 나가. 잘 모시라고 내가 잘 얘기해 놨다. , 여자값까지 선배가 내 줄 수는 없는일이고…, 그리고 여자는 내가 구해 줬으니 술값은 니가 내.”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밥값도 술값도 내가 내면서 모든 생색은 그가 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짠돌이가 밥을 사?  그걸 따라가는 너도 미쳤다, 미쳤어. 그 녀석은 자기밖에 모르는 놈이야. 나한테도 여기 오면 뭐든 다해 줄 것 같이 얘기하더니 정작 한국 사업 정리하고 들어오니까 완전히 얼굴을 바꿔 버렸어. 이사짐도 빼주지 않아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말도 못한다.”

 

역시 형이 온다고 해서 만나게 된 홍사장은 동양 최대의 비즈니스 클럽이라고 광고를 때리는 자카르타 시내 초대형 가라오케의 운영사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블록엠에서 황사장과의 저녁식사 얘기를 하자 그는 입에 거품을 물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홍사장은 평소에는 욕부대 출신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게 홍사장은 말쑥하고 젊잖은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한국에서 꽤 크게 부동산업을 벌이던 당시 형과 함께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그는 원래 인도네시아에서도 부동산업을 하고 여유가 되면 집도 지어 팔겠다는 생각으로 인도네시아에 들어왔지만 모든 걸 책임지겠다던 황사장은 홍사장이 도착하자 슬그머니 뒤로 빠져 버렸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이미 많은 돈을 쏟아 부은 홍사장은 사면초가가 되어 맨땅에 헤딩하다가 어찌어찌 가라오케에 다른 사람들과 공동투자를 해 운영을 맡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전엔 돈 좀 벌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절대 아니야. 흥청망청 술 처먹고 엄한 데 투자한다며 돈 뿌리고 다니는데 지가 아무리 돈이 많이도 그게 남아 나겠어? 그 놈 말하는 거 다 뻥이니까 절대 믿지 마라.”

 

원래 주먹 출신들은 의리의 사나이들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실상은 이런 이미지

 

황사장과의 개인적 첫 식사에서의 인상이 그랬기 때문에 그가 형에게 약속했다는 일자리 역시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화통화에서 형은 황사장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요.

 

자카르타에 도착한 형은 초췌한 모습이었습니다. 북가좌동에서 날아 다닐 당시 26인치였던 형의 허리는 38인치로 불어나 있었고 FEDEX를 그만두고 더 좋은 조건으로 옮겨 간 새 직장은 곧이어 닥쳐온 IMF 한파를 맞아 여지없이 부도가 나면서 형은 여러 달을 실직상태로 있던 중이었어요.

 

나이트 클럽 기도 이후 형이 입문한 것이 국제택배업. 형은 열심히 일했고 내가 자카르타에 부임하기 훨씬 전부터 인도네시아에도 물건을 보내기 시작했어요. 그 당시 형과 함께 일했던 황사장이 프론토라는 업체를 업고 인도네시아 현지의 TIKI (Titipan Kilat) 이라는 현지 택배업체와 계약이 되어 지사장으로 인도네시아에 먼저 들어 왔지요.

 

지금의 TIKI는 국내 택배만을 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한국-인도네시아 간의 국제택배를 거의 처음으로 시작한 업체였고 TIKI가 다진 초석 위로 그후 맥트랜스, , 등등 수많은 한국업체들이 몰려 들어와 90년대 말, 200년대 초에 국제택배의 춘추전국시대를 이루지요. 황사장은 그 선구자 격에 속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무런 경쟁자가 없던 시장에서 황사장은 초창기에 한국계 기업들의 투자진출 붐에 탄력을 받아 대성공을 거두며 실제로 큰 돈을 벌었고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깨를 움추리던 98, 99년도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호기있게 친구들을 불러 들여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려는 배경을 이룹니다.

 

내가 너 위해서 기가 막힌 일자리를 찾아 놨어. 그런데 내가 좀 바빠서 말이지, 도무지 시간이…”

 

형이 도착한 후 며칠동안 황사장은 그렇게 전화통화를 하며 바람을 맞췄습니다. 골프약속이 있고, 가족들과 안여르 비치(Anyer beach)에 가야 하고, 오늘은 다른 손님이 있고... 그가 형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야말로 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기다린 끝에 비로서 그를 만나고 돌아온 형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전화로는 당장 취직이 가능한 것처럼 말했던 것과 달리 황사장은 '지금 널 위해 딴 일 제쳐놓고 열심히 찾고 있는 중' 이라며 말을 바꾸었고 이내 골프얘기, 돈 얘기, 여자얘기로 그날 밤을 다 보냈다는 겁니다.

 

자존심 강한 형은 자세히 물어보지도 못했답니다. 미루어 보건데 당시 절박한 심정이었을 형은 한국에서 황선배의 전화를 받고서 그저 실없는 헛소리임에 틀림없었을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급기야 이 먼 인도네시아까지 날아 왔던 것입니다. 내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황당해 하던 형을 보며 황사장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더 좋은 자리가 나와서 캔슬시킨 거야. 입이 딱 벌어질 조건이 나와 있어. 조금만 더 기다려 봐.”

 

그 한번의 만남으로 면죄부를 얻은 것처럼 생각했을 황사장은 그 후 매일 밤 형을 불러 냈습니다. 술자리가 끝날 때쯤 되면 그는 나를 가라오케로 불러 형을 픽업해 가라고 하면서 그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나에게 가라오케 술값 결재를 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죠. 매일 밤 얄팍한 지갑을 톡톡 털다 못해 매일 은행에서 돈을 찾아 와 술값을 대는 나를 보며 형은 자신이 인질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에 불쾌해 했고 황사장의 진짜 속마음을 의심하기도 했지만 어렵게 인도네시아까지 온 노력과 비용을 수포로 돌리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계약서 받았어. 아주 좋은 조건이래!”

 

비행기를 세 차례나 연기하여 이제 밤 10시면 그 비행기를 타고 출발해야 하는 날 오후에 황사장의 핸드폰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에서 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비행기를 타려면 이제 곧 출발해야 할 시간이 다 되어 황사장은 형을 내 집 앞에 내려다 주고 내얼굴도 보지 않고 도망치듯 그대로 출발해 버렸습니다. 뭔가 석연치 않았죠. 형도 그렇게 기쁜 표정은 아니었습니다. 황사장이 소개해 준 회사가 맘빵(Mampang)거리의 골목을 돌고 돌아 들어간 막다른 골목에 달랑 세 명 일하는 코딱지만한 포워딩 회사였기 때문입니다. 더욱 더 석연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근무 조건만은 기가 막히게 좋다며 형이 들고 온 인도네시아어로 된 계약서 초안을 들여다 보고 난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임시직 직원 계약서…. 월급 없음. 차량지원 없음. 비자 및 주택도 스스로 해결할 것. 사무실 책상과 집기도 개인 비용으로 구매할 것. 전화비는 자기가 쓴 만큼 낼 것. 자체 발생시킨 수익에 한하여 회사와 개인이 8:2로 분배.... 이건 노예문서와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 옛날 내가 무지개 바지를 입고 맞고 돌아 왔을 때 형 눈에서 불꽃이 튀던 심정을 비로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내 눈에서 불꽃이 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랜 친구를 한달 가까이 거짓말로 농락한 후 그렇게 헐값에 팔아먹은 황사장은 일찌감치 꽁무늬를 뺀 상태. 목표물을 놓친 나는, 황사장에게 속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미 속이 상할 대로 상한 형에게 대신 분노의 십자포화를 퍼붓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그렇게까지 변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날 밤 수카르노하타 공항에서 귀국 비행기를 타기 전 형이 한 말입니다.

형은 한 달 전 도착할 때보다 더욱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친구에게 배신당한 형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건 배신이라기보다는 소인배의 파렴치한 야바위짓 같은 거였죠. 형도 나도 그 즈음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결코 달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이미 몇 번의 실패와 배신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친하다고 생각했던 학창시절의 친구에게 철저히 뒷통수를 맞고 만 형의 심정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지요. 나 역시 형이 도착하기 1년 전 한화에서 8년을 함께 지내고 독립하여 3년 가까이 한 솥 밥을 먹었던 친구들에게 철저히 뒷통수를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심정이란 그 친구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할 수만 있다면 모두 지워버리고 싶은 그런 것이죠.  

 

출국장으로 들어가던 형의 그 허탈한 뒷모습이 그 후 2년간 형의 일을 도와 국제 쿠리어 사업에 전력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시간을 쪼개 열심히 한다면 뭐든 이루어 낼 수 있을 거라는 철없는 자신감에 충만했던 시절, 자신의 능력의 한계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한 채 형의 일을 돕는데 전력을 다한 것이 결과적으로 내 본연의 사업기반을 흔들게 될 것이라는 것을 당시에는 예측도 못한 채 형이 그렇게 처연한 뒷모습으로 자카르타를 떠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카르타에서 황사장과의 예기치 않았던 조우는 그 후에도 계속 되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더 큰 돈이 되는 사업을 위해 황사장이 쿠리어 사업을 떠나면서 마케팅이 이루어지지 않자 TIKI는 국제택배 부분을 급기야 페쇄하기에 이르고 신발사업에 투자했다가 큰 돈을 잃은 황사장은 이번엔 운영이 어려운 공장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시작하지만 오히려 야반도주하는 사장들에게 많은 돈을 떼입니다. 그래서 현지은행을 대상으로 한 융자사기에까지 손을 대던 시절 자카르타를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의 교포 사업가들과의 저녁만찬에 초청받아 사무실에 내 걸 사진 한 장을 박으려 백방으로 줄을 대지만 참석 희망자들의 신원조사를 하던 안기부 파견 영사가 그의 평판을 듣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후로는 끝없는 추락만 있을 뿐이었죠.

 

그래서 한 때 인도네시아-한국 간 국제택배사업에 한 획을 그었던 황사장은 사기꾼이라는 평판만을 남기고 어느 날 자카르타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그가 사라지던 당시 인도네시아의 담배 재벌인 삼푸르나 그룹 (Sampoerna Group)의 택배관련 계열사 인도익스프레스(Indoexpress)의 한국 지사장이 된 형의 사업은 한창 성장 일로에 있었고요.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맞습니다.

 

황사장이 그때 한국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장담하던 대로 미국에 가서 사업을 시작했는지는 그 후 아무런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황사장이 아직도 자카르타에 있을 당시 그로 인해 많은 에피소드를 겪어야만 했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그 사건들 속에서도 한 가지 배운 것은 정점에 이르렀을 때 겸허함을 잃는다면 그 순간부터 파멸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한다는 점이었어요.

 

겸허함을 잃은 황사장은 그래서 결국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똥물을 튀긴 끝에 스스로의 평판에도 똥물을 뒤집어 쓰고 그렇게 무대에서 퇴장하고 만 것이죠.

 

정점에 선다는 것이 꼭 주먹세계의 대부가 되고 정주영 회장처럼 성공하고 이명박 대통령처럼 일국의 원수가 되는 것만은 아니겠지요. 누구에게나 전성기가 있듯이 나름대로 인생의 정점이 있는 법이죠. 단지 문제는 그 정점이 언제 올지, 지금이 이미 정점에 서 있는 것인지, 아니면 더욱 높은 지점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것인지 미래를 투영할 능력이 없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있던 말이던가요?

교만은 멸망의 앞잡이

 

그 말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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