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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이혼파티

beautician 2016. 9. 12. 10:00

 

 

히데키가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자카르타 시내 MT 하리요노 거리(Jl. MT Haryono)의 뜨븟 병원(RS Tebet)을 찾은 것은 2005년 중반 경의 일이었습니다.

 

히데키의 몸에 이상이 온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어요. 90년대 중반에 그를 찌비농(Cibinong)의 공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는 야근과 철야를 밥먹듯 하며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일본 토야마에 본사를 둔 카지산교(Kaji Industry Co Ltd)의 인도네시아 현지공장에서 그는 처음에는 매니저로, 나중에는 현지 법인장으로 공장이 문을 닫던 2002년도까지 성실히 일했지요. 봉제 현장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장을 운영하는 동안 수많은 문제를 직접 온몸으로 부딪히며 해결해야만 했던 그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근면하고 예의바른 일본 직장인의 표본 같은 인상이었죠.

 

그가 쓰러진 이유는 물론 그간 쌓인 스트레스 때문이었습니다. 20대 초반에 일본을 떠나 캐나다와 베트남을 거쳐 인도네시아에 들어온 그는 이미 현지에서 20년 가량 살고 있었고 일반 일본 상사원들이 받는 처우와는 전혀 거리가 먼 열악한 조건에서도 온 몸을 던져 공장 운영에 정열을 불살랐습니다. 일본 본사에서 오는 손님들을 모시고 술집과 유흥가에서 폭주했던 것은 물론 평소에도 매일 밤 한국산 진로소주 1리터 짜리 페트병을 한 병씩 비웠던 그는 일 뿐 아니라, 내게도 오랫동안 얘기하지 않은 복잡한 가정사로 인해서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왔던 것 같습니다. 동갑인 우리가 처음 만났던 96년도에 우리 아이들은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려 하는 중이었지만 그의 딸은 캐나다에서 고등학교 졸업반을 다니고 있었죠. 어쩌면 그는 너무 어린 시절에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지만 여러 가지 문제에 떠밀려 오사카의 노모(老母)와 캐나다의 딸을 놔두고 자카르타까지 혼자 흘러 들어왔으리라 추측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직접 물어본 적은 없었습니다.

 

거기에 본사 결정에 의해 그에 대한 후속대책이나 별다른 보상도 없이 공장이 문을 닫은 후 일회용 고무장갑 등을 일본의 홈센터에 수출하는 무역회사로 전환한 상태에서 중국 경쟁업체들의 약진으로 그의 사업은 부침을 거듭하고 있었으므로 노모와 딸을 부양해야 했던 그가 격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그 무역회사를 하면서 찌비뚱의 싱가폴계 금형공장에도 출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쓰러뜨린 직접적인 이유는 혼자서 매일 밤 거의 치사량에 가까운 소주를 마셔대는 것 말고도 아침 눈을 뜨자마자 해질 때까지 이 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꼬삐 히땀(Kopi hitam), 즉 까팔아피(Kapal Api)나 아베쎄(ABC) 브랜드의 분먈이 잔 바닥에 두껍게 가라앉는 진한 커피를 매일 40잔 정도 마셔대는 독특한 기호 때문이었습니다. 하루에 5~8잔 정도 커피를 많이 마시는 편인 나로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양의 카페인을 매일 섭취하던 그는 어느 날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 검진을 받은 끝에 혈액의 점성이 일반인의 몇 배 이상이 되어 있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심하게 과장하여 표현하자면 날카로운 일본도로 단칼에 목을 배었을 때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야 할 피가 히데키의 경우에는 폭발한 화산에서 뜨거운 마그마가 서서히 끓어 넘치듯 흘러 나오게 될 거라는 얘기였죠.

 

그것은 그의 건강에 심각한 적신호였고 의사는 그에게 매일 8리터의 물을 마시라는 처방을 내립니다. 그날부터 히데키의 사무실과 차량에는 아쿠아 1리터짜리 페트병들이 가득차기 시작했습니다.

 

뜨븟 병원에 누워 있던 그를 만난 건 그런 진단을 받은 지 2년쯤 지난 후였어요. 술도 줄이고 아름다운 부인 나탈리아(Natalia)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카렌(Karen)이라는, 나중에 미인이 될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이 서는 딸까지 낳은 그는 어느 날 아침 평소처럼 일어나 샤워도 하고 양치질도 한 후 아침 식사를 하려고 할 때 자신이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벙어리가 된 것이 아니라 정신을 말짱한데 입에서 나오는 인도네시아 말은 어눌하기 짝이 없고 영어는 물론 모국어인 일본어조차 알아 듣기는 하지만 단 한 마디도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거였어요. 그에게 뇌졸중이 소리 없이 찾아 왔던 것입니다.




 

내가 나탈리아의 전화를 받고 급히 그의 병원을 찾은 것은 입원 둘 째 날이었고 한국인인 나는 일본어로 말을 하고 일본인인 히데키는 어눌한 인도네시아어로 대답을 하는 이상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히데키상, 도오시타노요? 난또까 좃또 싯가리 시테 미로요!” (어떻게 된 거에요? 좀 정신 좀 제대로 차려 봐요!)

사야….수다바익….하냐비짜….사자버기니….”(대충 이해하자면 괜찮아요. 말하는 것만 좀…” )

 

다행히 반신불구가 될 정도는 아닌 가벼운 뇌졸중이었지만 뇌의 실핏줄과 모세혈관에 혈액순환이 원활치 못해 정보의 창고인 뇌의 어느 일정 부분, 즉 일본어, 영어의 구사능력이 보관된 창고까지의 도로가 막혀 버리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오히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병문안 온 나와 부인 나탈리아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의사도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며 잘 요양하면 언어 능력은 조만간 돌아오게 될 거라고 했어요. 그러나 전에 8리터의 물을 마셔야 할 때에도 잘만 버텨 냈고 그 전엔 175센티 신장에 몸무게가 35킬로그램까지 떨어지는 최악의 스트레스를 견뎌 내던 시절에도 이렇게까지 된 적은 없었으므로 그의 상태는 충분히 심각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일본어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자바섬 출신의 인도네시아인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는 검게 그을린 피부를 하고 있었고 공장 종업원들도 그를 빠 아디(Pak Adi = 아디 씨)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찌비농 공장은 2002년도에 문을 닫았지만 96년부터 2000년까지 우리 오더를 그의 공장에 넣어 주었고 그 후에는 자재를 공급해 주면서 일, 이주에 한번씩은 굳이 업무협의 할 일이 없어도 조금 한가한 토요일 오후쯤 찾아가 식사도 같이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때로는 한국식당이나 블록 엠(Blok M) 안에 있는 아지하라(Ajihara) 같은 일본 식당에서 함께 술도 마시곤 했어요. 한동안 그는 나와 파트너 릴리의 주도로 결성한 금요 소주클럽에 하비비 시절 가족계획청 장관이었던 하리요노 수요노 씨의 막내 딸 리나와 함께 고정 패널 수준으로 늘 초청되었지요. 그러다가 우린 좋은 친구가 되었고 급기야 나중에는 나탈리아와의 결혼식 전 내가 함잡이가 되어(일본식 전통에 대해서는 잘 몰라 그걸 함잡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내가 제일 크고 무거운 물건을 들었어요) 그의 다른 일본인 친구들을 이끌고 나탈리아의 부모님 집에 행진해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나이가 동갑이라는 사실 말고도 한국으로 치면 코트라와 같은 제트로(JETRO)나 일본 상사에서 근무하던 그의 친구들에 비해 명색은 현지 법인장이지만 월급 2천불도 안되는 형편없는 처우를 받으며 블루칼라로 일하고 있던 자신의 상황과 자카르타 부임 후 1년 반 만에 지사생활이 끝장난 것은 물론 곧이어 한화 본사에도 사표를 던지고 인도네시아에 혈혈단신으로 돌아와 끊임없이 맨땅에 헤딩을 하고 있던 나의 처지에서 많은 공통점들을 발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론 가장 기본적인 공통점은 외로움인도네시아에서의 첫 결혼생활이 당시 막바지 파국으로 치닫던 그 역시 나탈리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02년도에 당시 코린도 건물에서 사거리 대각선 건너편의 무스티카 라투(Mustika Ratu) 건물 5층으로 이사해 있던 우리 사무실에 그가 나타난 것은 하루 8리터의 물을 마시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날 내가 그의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이유는 그가 해골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가 하루 40잔의 커피 때문에 생긴 건강상의 문제를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히데키가 어느새 유명을 달리해 지금 그의 유령이 우리 사무실에 들어서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 때 최악의 상황을 겪고 있었습니다. 평소 축구를 즐겨 일본인 축구 동호회에서도 열심히 뛰었던 그에게 그 정도까지 건강의 적신호가 위험스럽게 점멸하기 시작한 것은 현지 공장 문을 닫기로 한 본사의 결정보다도 수라바야 출신의 아내가 일으킨 사건이 더욱 결정적이었지요.

 

박봉에도 불구하고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던 그는 20년 넘게 해외에서 일하면서 일본과 캐나다의 가족들을 부양했을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에서도 꽤 많은 재산을 모아 아직도 집값이 쌌던 시절, 보고르(Bogor)에 꽤 큰 집을 샀고 상당한 재산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부부 사이가 왜 언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를 처음 만나던 시절에도 그는 굳이 바쁜 회사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IMF 경제위기 시절에는 천정부지로 치솟은 달러 환율로 인해 밀려든 오더들 때문에도 거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공장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설치하고 매일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했었는데 그때 그들의 부부관계에는 이미 파국이 도래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이지만 그의 부인은 언제부터인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밤이면 집안에 남자들을 불러 들이기 시작했고 때로는 집에서 밤을 지내고 돌아가는 남자들이 한번에 여러 명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안의 값나가는 물건들이 하나 둘 없어지기 시작했는데 나중엔 너무 많이 비어 히데키가 도저히 모른 척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그의 부인은 이 참에 끝장을 보겠다는 듯 급기야 집과 차는 물론 돈이 될만한 히데키의 전 재산을 몽땅 다 팔아 치우고 그 돈을 뺴돌려 버리고 맙니다.

 

히데키가 내 사무실에 온 것은 그 아내를 고소하여 유치장에 들어간 지 이미 몇 주가 지난 상태였지요.

 

돈은 돌려 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차라리 형을 살고 나와서 그 돈을 자기가 잘 쓰겠답니다.”

 

고행하던 시절의 부처 싯다르타처럼 두 눈은 들어갈 대로 들어가고 광대뼈가 튀어나올 데로 튀어나와 해골의 윤곽과 이마의 실핏줄마저 선명히 드러나 보이던 히데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습니다.

 

그 수라바야 부인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으며 왜 그 부인과 아이를 갖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간 어떤 일이 있어 그런 파국에 도달한 것인지는 결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무척이나 궁금하지만 조금이라도 불편해 할 만한 부분은 서로 물어 보지 않는 것이 그를 처음 만난 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들 사이의 무언의 약속처럼 되었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 변호사를 통해 부인에 대한 사기죄 고소와 이혼소송을 함께 진행하고 있던 그가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모든 폐쇄 절차가 끝나 건물과 부지 등 자산의 매각만이 남은 황량한, 그러나 당분간 그의 숙소이기도 한 찌비농의 공장, 인도네시아 20년의 세월과 함께 거의 모두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잃은 만 빈 손, 그리고 건강을 잃고 해골같이 변해버린 몸뚱이뿐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테이블 위로 두툼한 봉투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일회용 장갑은 오사카의 홈센터로 수출이 시작됐고요…, 전에 부탁했던 것, 많이 늦어졌지만 도움이 되길 바래요.”

 

그 봉투 안에는 백불 짜리 50, 미화 5천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결혼생활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면 그때 나와 릴리의 사업 역시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술라웨시 떵가라(Sulawesi Tenggara) 주의 아세라(Asera) 지역에 세운 제재소는 릴리의 큰 오빠 아미르(Amirudin)가 관리하면서 끝없이 돈을 잡아 먹는 중이었고 나는 그것을 우리가 전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과 향후 수년동안 우리를 지옥 같은 생활로 밀어 넣을 함정이 될 것임을 아직 감지하지 못한 채 당시 백방으로 돈을 구해 밑 빠진 독에 붓고 있던 중이었죠. 히데키의 처지를 아직 몰랐을 때 그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었는데 몇 개월이 지난 후 가장 최악의 순간을 맞고 있던 그가 내게 돈봉투를 내밀었던 것입니다.

 

히데키상, 이건…”

지금 도와 주지 못하면 앞으로 오랫동안 돕지 못할 것 같아서요…”

 

그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깡마른 손으로 내 손을 잡아 돈봉투를 쥐어 주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 돈을 받던 나보다도 그 돈봉투를 내 손에 쥐어주던 그가 오히려 뭔가 짐을 던 듯한 홀가분한 표정이었습니다.

 

그 돈이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그로부터 1년도 안되는 사이에 우린 모든 사업과 모든 돈을 잃고 뼈아픈 심정으로 무스티카 라투의 사무실을 정리했을 뿐 아니라 길바닥에 나앉아 나락의 밑바닥을 헤매어야 했으므로 오랫동안 갚을 수 없었죠. 그동안 히데키는 독촉은 물론 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그 돈을 다시 히데키에게 돌려 주기까지 5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로부터 반년쯤 후 히데키가 블록엠 아지하라 식당에 저녁 7시까지 와달라고 전화를 해왔습니다. 그가 특별히 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으므로 그저 평소처럼 술 한잔 하자는 것으로 생각했지요. 당시 히데키는 비로소 나탈리아와 정식으로 교제하기 시작했으므로 그녀와도 몇 번 식사를 같이 하면서 인도네시아에도 참 괜찮은 여자가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모임에 나탈리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가득 찬 8인 좌석 테이블에는 나를 빼고는 모두 일본인들이 둘러 앉아 있었습니다. 몇 번 만나긴 했지만 그저 얼굴만 아는 정도였던 그들은 나중에 나와 함께 함을 들고 나탈리아 부모님 집에 가게 되지만 아직은 무척 서먹서먹 했고 히데키가 나를 이 자리에 불러 낸 이유도 알 수 없었습니다.

 

히데짱. 오메데도오네. 혼토니.”

 

이렇게 말하는 도레이(Torey) 현지공장의 나가누마 법인장이 그 중 가장 연장자였습니다. 그는 소주클럽 친구였고 그때쯤엔 그리스 대사관으로 직장을 옮겨가 있던 리나가 예전에 2년 동안 모셨던 상사였으므로 잘 알고 지냈던 터라 조금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히데키의 무엇을 축하하는지 그때까지도 알지 못했어요. 히데키 생일인가….?

 

이혼소송이 끝났어요. 이제 정식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마음껏 마시면서 제 이혼을 축하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히데키는 더 이상 35킬로그램의 체중으로 깡마른 해골 좀비 같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이제 간신히 50킬로그램을 넘는 정도로, 여전히 예전의 몸무게를 되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일본인들의 전통이란 것이 이혼을 하면 그렇게 사람들을 파티에 초대해 공지를 하는 것인지, 걱정해 주었던 가까운 사람들에게 근황을 전하려는 히데키만의 방식인지, 아니면 단순한 블랙유머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히데키는 예전보다 안정되고 여유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험한 일을 겪었는데 이게 꼭 축하해 줘야 하는 일인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예전보다 훨씬 편해 보여 다행이에요.”

바쁜데 와줘서 고마워요. 원래는 가족들도 부르고 싶었지만 이건 남자들만의 모임이라…”

 

내 어정쩡한 축하에 그는 멋적게 웃어 보였는데 그 웃음이 그날따라 더욱 서글서글해 보였습니다. 그날밤 나가누마 법인장이 분위기를 흥겹게 주도하면서 히데키는 맘껏 축하를 받았고 나도, 히데키의 일본인 친구들도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셔 댔지요.

 


 

그후 1년이 채 안되어 히데키는 나탈리아와 결혼하면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나도 히데키를 만나는 기회가 급격히 줄어 들었습니다. 이제 막 신혼살림을 차린 히데키를 방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을뿐더러 2003년 파산을 인정한 후 끝없이 추락하고 있던 나로서는 친구들을 예전처럼 자주 돌아 볼 여유가 없었죠.

 

앞서 언급한 바 그가 뇌졸중으로 뜨븟 병원에 입원한 것은 내가 파산의 악몽에서 어느 정도 간신히 헤어 나오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사이 그의 신변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 일회용 장갑 수출사업은 저가 중국산, 말레이시아산의 물량공세로 막바지에 몰려 있었고 옛 카지산교 직원이자 오래 비서로 일했던 뜨리(Tri)라는 아가씨에게 그 일을 맡겨 놓은 채 자신은 멀리 찌비뚱의 싱가폴계 금형공장에 취직하여 출근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일본 귀국을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이었죠.

 

그에게 찾아온 뇌졸중이 그런 고민을 더욱 깊게 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차도가 있어 그가 며칠 후 보고르에 임대한 그들의 보금자리로 퇴원해 나간 후 나와 내 아내가 그의 집을 찾아가 사골국이며 이런 저런 건강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가 다시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게 되기까지는 몇 개월이 더 걸렸고 그 사이에 그는 귀국에 대해 더욱 심각하게 숙고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인도네시아에서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귀국길에 오릅니다. 그로서는 근 25~26년 만의 귀향이었죠. 새파란 20대의 나이 때 떠나온 오사카에 이젠 40대 중반이 되어 병든 몸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또한 고국을 떠나 먼 나라에 살면서 몇 명 되지도 않는 절친한 친구 중 한 명을 떠나 보낸다는 것이 나로서도 쉽지 않았어요. 그러나 우리들의 인생은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누가 대신 결정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따라 귀국 비행기에 올랐고 나는 또 나대로 인도네시아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오사카에 있는 동안 보내온 몇 통의 이메일에서 그가 낮에는 홈센터에서 창고일을 보고 밤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하고 주말이면 막노동판에도 나가는 등 몇 개의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물가가 소문처럼 그토록 살인적이기에 그렇게 여러 가지 일을 쉴 새 없이 해야만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고향에 돌아간 그가 가족을 충분히 부양할 만한 급여를 주는 회사에 취직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원래 근면한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이 하나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어요. 단지 모르긴 몰라도 지난 뇌졸중의 후유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텐데 그의 건강이 그의 부지런함을 지탱해 줄 수 있을지 걱정되었죠.

 

어쩌면 영영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가 인도네시아에 다시 돌아온 것은 떠난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아는 사람이라곤 남편 말고는 아무도 없는 일본에 가서 혼자 계신 시어머니와 카렌을 돌보며 타지 생활을 시작한 나탈리아는 곧 지독한 향수병과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그 해 지독히도 추웠던 겨울, 넋 놓고 백일몽을 꾸며 고무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이 꽁꽁 언 채 찬물로 설거지를 하다가 깨진 접시에 손을 깊이 베이고도 씽크대가 온통 피범벅이 될 때까지 자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히데키가 걱정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어머니가 아들 부부에게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명했다고 하더군요. 70을 훌쩍 넘은 연세에 아직도 인근 공장에서 실밥을 따는 등 평생을 해 온 봉제업을 놓지 않고 있던 히데키의 노모는 자립심도 대단했을 뿐 아니라 날로 수척해지는 사랑하는 며느리에 대한 연민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시내 교에이 프린스 건물 (Wisma Kyoei Prince) 3층의 일식당에서 저녁 늦게 만난 히데키는 결국 고향에 정착하지 못하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이제 정말 고향에 돌아온 듯한 푸근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인도네시아에서의 고단한 삶을 다시 시작하는 중이었어요.

착하고 진솔한 사람들의 인생은 영화에서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여기저기에서 딴지 걸리기 마련입니다. 그는 예전 싱가폴 회사에 다닐 때에도 시내 멘뗑(Menteng) 지역에 집을 얻고 한시간 거리의 찌비뚱(Cibitung)까지 출퇴근했었는데 이번에도 땅거랑(Tangerang)지역 BSD에 집을 얻고 출퇴근 편도가 족히 두 시간을 걸릴 찌깜벡(Cikambek)의 일본계 공장에 취직했지요. 그는 몇 개월씩 출장을 나가 베트남 지사를 만들어 주지만 토사구팽은 한국 사회에서만의 전통은 아닌 듯 베트남 지사장을 맡을 듯 했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그 회사를 그만 두고 맙니다. 그 후 얻은 직장도 일본계 신발부품 회사였는데 BSD에서 그렇게 살인적으로 멀진 않은 세랑(Serang)에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겠지요.

 

그렇게 해서 결국 우리들은 완전히 동떨어진 생활권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미용사업을 하는 나는 직원들과 함께 자카르타는 물론 BSD를 포함한 인근 위성도시 전부를 거의 매일 돌다시피 하지만 히데키는 내가 BSD에 있을 시간엔 세랑에 가 있고 우리 둘 모두 퇴근시간은 밤 10시경이니 서로 얼굴 보는 일이 하늘의 벌따기처럼 어려워져 버렸죠. 예전 소주클럽 멤버들이 대개는 리나의 주선으로 1년에 한 두 번 어렵게 시간을 내 시내에서 함께 식사할 수 있다는 것 정도로 만족할 수 밖에 없게 되었어요.

 

요즘 나이 들어가면서 가끔 베스트프렌드나 우정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바쁜 삶을 살면서 서로 돌아볼 여유가 없는 중에 어린 시절처럼 매일 부딪히고 부대끼면서 만나는 친구를 갖기는 참 힘든 일이죠. 그러나 앞서 다른 에피소드에서 소개했던 홍사장이나 일본인 친구 히데키 같이 뜬금없이 그리운 얼굴이 떠오르고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되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어쩌면 내 인생의 한 조각을 소중히 나누어 갖고 있는 좋은 벗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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