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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마피아 통관 – 한국산 중고의류

beautician 2016. 9. 11. 10:00

 

 

오래 전 망가두아(Mangga Dua) 상가의 뒷골목 창고에서 포대로 포장된 중고의류를 사다가 내수판매를 시도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판매를 위해 현지인 대학생들을 동원했는데 결과부터 얘기하면 쫄딱 망하고 말았지요.. 학생들이 잘 팔긴 했지만 수금한 돈이 전혀 입금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움켜 쥐고 관리해도 성공할 동 말 동 한 것이 인도네시아에서의 사업인데 알바들을 동원해 물건을 줘 보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고 결과적으로 학생들 학비만 보태준 셈이 되었죠.

 

그러다가 릴리의 언니인 띠니(Tini)가 블록 엠(Blok M) 터미날에서 무작정 상경한 한 여자아이를 데려와서 함께 살았는데 수방(Subang)에서 작은 가구공장을 하던 아버지가 90년대말 IMF를 맞아 공장이 망해 살 길이 막막해지자 자기라도 돈을 벌겠다며 자카르타에 왔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중고의류 몇 포대를 사다가 그 소녀의 아버지에게 수방에서의 현지 판매를 맡겨 보았지요. 결과는 또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집은 살아났지만 이익금의 분배는커녕 원금도 돌려받지 못했거든요.

 

아무런 담보 없이 사람의 신용만을 믿고서 물건을 맡기거나 돈을 맡겨서는 철저히 낭패를 보고 마는 것이 인도네시아라는 것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그 여자아이는 한동안 계속 띠니의 집에서 함께 지냈으므로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얼굴가죽이 외관 보다는 물론 그들이 흔히 떠들어 대는 종교적 도덕심과는 관계없이 매우 두껍고 질기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그때 구매한 중고의류라는 것은 포대에 물건을 넣어 가로 1m, 세로 1m, 높이 1m 정도로 빵빵하게 포장하여 다시 그것을 다시 굵은 철사로 꽁꽁 묶은 것이었는데 그 정확한 내용물은 알라신도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현금 박치기로 구매하는 순간까지도 장부에는 대략의 종류만 표시되어 있을 뿐 그 포대 안에 정말로 무슨 모델이 몇 장이나 들었는지는 전혀 확인할 길이 없어 나중에 사무실에서 풀어 보고 낭패를 당하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내용물이 당초 얘기와 전혀 다르더라도 환불은 절대 불가능, 게다가 돈을 먼저 쥐어 줘야 어딘가의 창고에서 포대를 무더기로 가지고 나와 넘겨 주는 마피아식의 거래방식이었습니다. 자켓이라고 해서 샀는데 학교 로고가 자수된 교복 상의가 잔뜩 섞여 있는 것도 있었고 청바지라고 해서 샀다가 브라자만 잔뜩 나오는 경우도 있었어요
.

당시 들은 얘기로는 이 중고의류들은 싱가폴을 경유해 들어와 자카르타나 수라바야에서도 일부 통관되지만 대부분은 바탐(Batam)이나 메단(Medan)같은 수마트라 북부의 항구에서 한 컨테이너 당 막대한 뒷돈을 치르고 정식 수입절차 없이 아는 세관 직원을 통해 돈을 주고 빼는 소위 '마피아 통관', 요즘 말로는 보롱안(Borongan) 통관을 해서 시중에 깔린다고 들었고 그래서 거래하는 사람들도 007 작전을 하는 식으로 물건을 사고 팔았던 것 같습니다
..

IMF
한파가 맹렬하던 시절, 이 마피아 통관은 도산한 대구지역 원단공장들의 원단재고를 중량으로 달아 땡으로 사온 것이나 당시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수입이 금지되어 있는 중고컴퓨터 같은 것들을 통관하는 데 많이 사용했다고 하며 당시 이런 통관을 전문적으로 취급해 왔던 송아그린 이라는 당시 교민사회에서 꽤 저명했던 한국계 포워딩 회사도 수년간 이 업무를 통해 짭짤한 이익을 보다가 어느 해 말 컨테이너 20개 정도가 항구에서 세관에 압류되어 빼낼 방법이 없어지자 화주들의 빗발치는 독촉을 피해 본국으로 야반도주 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

아무튼 이렇게 수입관세를 줄여 아는 세관직원들에게 뒷돈 주듯 내고 물건을 들여오는 마피아 통관은 수입금지 품목을 수입하거나 수입허가가 없는 업체들이 제품을 수입하기 위해 최근까지도 종종 사용되고 있었고 이런 부패한 통관 문화를 배경으로 몇천불만 내면 세관에 문제가 되어 잡혀 있는 컨테이너를 빼주겠다고 접근하는 한국인, 현지인 브로커들이 자카르타는 물론 보고르(Bogor), 땅거랑(Tangerang), 버까시(Bekasi) 등 자카르타 인근지역에서 맹활약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몇몇 고위 관리들을 부패 독직협의로 구속하긴 했지만 대통령의 노력도 뿌리깊은 부패를 근절하지 못해 부패는 없어지는 대신 지하로 숨어들어 무상이어야 마땅한 공무원들의 서비스 가격은 부당하게 천정부지로 높아지기만 하고 정식통관검색을 한다며 수입자재며 컨테이너들을 길게는 3개월 이상 세관 창고에 잡아 놓는 상황이 벌어졌지요. 그래서 수입업체들은 전보다 더 많은 돈을 세관에 치르게 되었으면서도 오히려 더 오랜 통관기간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한동안 기염을 토하던 보롱안, 마피아통관업체들도 단속이 강화된 이후 수개월 동안은 복지부동하면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듯 합니다.

아무튼 이 망가두아 물건을 취급하던 당시 적잖은 한국산 의류들이 이 물건들 중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특히 블레저(Blazer) 포대를 열어 보면 주로 한국 중고생들이 입던 교복 상의들이 대부분, 뿐만 아니라 청바지나 일반 면바지, 브라우스 같은 경우에도 한국 브랜드가 달려 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업계에서 들려오는 얘기를 가지고 이 물건들의 경로를 추정해 보자면 홍콩 쯤에 이런 중고의류를 집하하는 업체가 있는 모양이고 거기에서 한국, 일본, 홍콩, 중국 등지의 중고의류들을 모아 싱가폴로 보내 다시 인도네시아로 들어오는 모양이었습니다. 물론 최종 목적지는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인디아, 스리랑카, 아프리카 지역도 포함되어 있었겠지요
.




이 대목에서 이런 한국산 중고의류의 출처가 어디인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의류수출을 생업으로 십수년을 살아 보면 이런 물건들이 대기업 매장이나 시장의 땡물건이 아니라는 건 척 보아서 알 수 있는 겁니다. 말 그대로 중고의류인 것이죠. 실제로 최소 몇 개월에서 몇 년간 사용되었던 옷이 틀림없다는 증거는 폴로셔츠나 브라우스 목 부분에 낀 때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물건들을 한국에서는 누가 사 모아서 수출하는 것일까요?

포대를 열어보면 나오는 교복상의의 학교 마크는 모두 제각각이고 교복이란 학생으로 재학하는 동안만 한시적으로 필요하고 졸업 후에는 더 이상의 효용가치가 없는 물건임을 감안하면, 어쩌면 우리들이 아파트나 주택단지의 '재활용물품' 함에 넣었던 물건들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강하게 듭니다. 재활용품이란 해체, 처리해서 다시 제품으로 가공할 수 있는 물건이거나 자선단체를 통해 기부되어야 하는 물건 등, 잘은 몰라도 최소한 재활용물품 함에 들어간 상태 그대로 이렇게 상업적으로 수출되어서는 안되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궁금해지는 것은 재활용물품 함에 들어간 물건들이 어느 경로를 통해 어떻게 처리되는지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사이 자선과 재활용에 쓰여야 할 이런 옷가지들을 어떤 업체들이 음성적인 경로를 통해 이렇게 포대 철사포장을 하여 홍콩이나 싱가폴로 내보내며 자신들의 주머니를 부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요즘도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내 차 옆으로 지나가는 수많은 오토바이들 중에 "XX여고 사격부", "XX 시장 번영회", "XX 교회 청년부" 등의 한글 프린트가 등에 찍힌 추리닝 상의나 점퍼를 자주 보게 됩니다. 도대체 저 옷들은 어떻게 인도네시아에 흘러 들어왔을까요?

 

그중에는 물론 현지에 부임한 한국가정에서 자선바자회나 구호물품 모집 때 나온 것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물량은 십중팔구 망가두아에서 나왔을 거라는 필이 꽂히면서 이 물건들이 도대체 어떤 경로로 자카르타에 흘러 들어오는지 추적해 보면 자못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액션소설이 한 편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이런 일을 정식으로 하는 업체들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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