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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내무반 건조대에 하늘거리는 망사팬티

beautician 2016. 9. 10. 10:00

 

요즘 신문기사를 읽다 보면 여군들 얘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주로 사관학교에 지원한 여성생도들의 얘기들이었죠. 그러나 정작 현역 여군들은 주로 성희롱, 성폭력의 희생자들로 기사에 등장하곤 합니다.

 

오래 전 군가산점 제도가 논란이 된 적이 있었지요. 공무원을 채용할 때 군 복무를 마친 남성들에게 가산점을 준다는 이 제도는 군복무 기피를 줄이고 절정의 시기에 2년여간을 군에서 병역의무를 다해야 하는 남성들의 여성들에게 대한 상대적 불이익을 줄여준다는 맥락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부과되지도 않은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날벼락 맞듯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여성들의 입장은 눈꼽 만치도 생각지 않은 무지막지한 남성중심 사고의 편린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의 이기심을 동원한다면, 그리고 아직 내가 군복무를 하던 시절이었다면 그런 불합리한 제도 때문에 어거지로라도 가산점을 받기 위해 군문에 들어서는 여성들을 아마도 쌍수 들고 환영했지 싶습니다. 그렇게 몰려 온 꽃다운 나이의 여성들이 각 일선 소대까지 배치된다면 시커먼 소대원들도 최소한 양말 한번 더 빨아 신고 복장도 더 말쑥해질 것이고 우리 배달의 딸들에게 국방의무를 지우는 정부에서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시설이나 장비에 더 신경을 쓸 것이므로 전반적인 군의 처우도 개선되고 환경도 획기적으로 일신될 것을 기대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나아가 병사들 땀냄새 대신 가끔 향수냄새도 풍겨오는 내무반과 좀더 패션화되어 신병들에게까지 지급될 정복 등등까지 기대할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내무반 옥상 위 건조대에서 산들바람에 하늘거리는 브라며 망사팬티같은 것도 이따금 덤으로 볼 수 있었겠죠..

 

 

ROTC도 앞으로 여자후보생을 받을 예정이란 얘기를 내가 후보생시절부터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강산이 몇 번 변한 지금까지도 전국 어느 학군단에도 여자후보생은 없는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97년도에 드디어 첫 여자생도들이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2001년 소위 임관했고 그 이후 해군사관학교에서도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여자생도들을 받아 들였지요. 하지만 여전히 군대는 극단적인 남성위주의 사회이고 그래서 아직도 여성들은 극소수이고 그나마 그녀들의 전투부대 참여 역시 극단적으로 적은 것이지요.

 

군이란 국방을 위해 국가와 국민이 부여한 합법적인 폭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해야 하는 조직인 만큼 우리 소대에 배속된 여군들을 남자들과 똑같이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적고지를 향해 달음질쳐 오르게 하는 것은 역시 요원한 일일까요? 국군의 날 기념식장에서 고공낙하를 해 내려오는, 남자 한 둘쯤은 단번에 때려 눕힐 것 같은 여성 하사관들 같으면 전혀 다른 얘기겠지만요.  전방지역 일선부대에서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조국의 국경에서 우경계총을 하고 위장크림 바른 매서운 눈매로 전방의 초소를 지키는 여군이란 아직은 대체로 환상 속의 존재인 것 같습니다.

 

 

군시절에는 오후 다섯시만 넘으면 여자는 물론 민간인도 찾아볼 수 없는 GOP 부대숙소에 앉아 잡생각을 하다가 군군의 날 기념식때마다 흰색정복에 기관단총을 들고 가도를 행진하는 그 멋진 여군들이 다들 어디 가 있는지 궁금해 했고 우리 사단 섹터 바로 옆 101여단이 사실은 부대명에서 풍겨오는 이미지와 같이 여군들만으로 구성된 부대라고 혼자 맘내키는대로 망상하면서 나도 몰래 입가에 침까지 흘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난 현역시절 그래도 자주 여군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으니 운이 좋은 편이었지요.

가장 많은 현역 여군들을 보았던 것은 87년 국군의 날 전날과 다음날이었습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초정한 각국 참모총장, 국방장관 등은 두 조로 나누어 그렇게 제3땅굴과 판문점을 시찰했고 당시 땅굴안내장교로 군단장 통역을 했던 나로서는 가장 많은 별들이 동시에 뜨는 것을 본 날이기도 했습니다.. 착석한 수십명의 외국귀빈들의 부인들 뒤에는 대부분 사복을 갈아입은 여군 중.하사들이 수행하고 있었지요.

 

그때 땅굴에 왔던 여군 중사 중 한 명은 원래 여군 훈련소에서 차출되었던 모양이라 몇 개월 후 여군 훈련병들을 이끌고 다시 땅굴을 찾았고 안내하던 내게 아는 척을 해왔습니다.

 

중위님, 그때 영어 굉장히 잘 하시더군요.”
…, 보통이죠.”

 

보통은 개코나 맨 앞 줄에 사성장군인 3군 사령관과 우리 김상준 사단장을 위시해서 브리핑실 여기도 별, 저기도 별. 육군 중위 배 중위 사실은 심장마비 카운트다운 중이었거든요. 우리 쓰리스타 군단장님 당신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유창한 영어실력을 가졌으면서도 굳이 한국어로 유머까지 곁들이며 요모조모 구체적인 사항까지 설명하셨는데 난 그거 통역하느라 비지땀을 흘렸습니다.

 

원래 멸공관에서 브리핑을 하려면 사전에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 두께의 브리핑 자료를 한국어와영어는 물론 각자 담당한 외국어로 꿈 속에서도 유창히 읊을 수 있을 만큼 달달 외워 두어야 하는데 거기에 하루에도 몇 번 씩 실전에 활용하며 쌓은 내공 덕을 그 날 톡톡히 봤습니다. 그 황급한 상황에서도 군단장님 한국어 브리핑에 대충 맞는 대목을 23페이지에서 몇 줄, 85페이지에 몇 줄 허겁지겁 갖다 끼울 수 있었으니까요. 유머 통역은 택도 없었고 군단장님이 마지막으로 질문사항이 있느냐고 귀빈들에게 물을 때에는 남미 액센트, 중국 액센트로 날아드는 질문들을 알아 듣지 못할까봐 철모가 들썩거릴 정도로 머리털이 곤두서고 있었습니다. .

 

그때 경호요원으로 오셨던 건가요?”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건 아닌 것 같았어요. 그녀는 인솔해 온 10여명의 여군 하사관 훈련생을 나름대로 터프하게 대했지만 나나 우리 부대원들 눈에는 마치 소꿉장난을 하는 것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땅굴에 내려갔다 온 훈련병들은 그 단발머리들이 땀에 푹 젖어 철모 자국으로 부시시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듯 앳된 얼굴들이 숨이 턱에 차 양볼이 발그래 상기된 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우로 나란히, 좌로 나란히줄을 마추고 다시 발맞춰 차에 오르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정겨워 보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무슨 일로 그토록 떠밀려 그 시절 여군이 되기로 마음먹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연민이 싹트기도 했습니다.

 

선탑해 온 여군 소령은 아마도 여군 훈련소에서 꽤 높은 위치인 것 같았고 그 전에도 가끔 훈련병들을 인솔해 와 낮이 익었지만 계급에 비해 나이가 많아 보이고 우울한 기색에 말수가 매우 적은 여자였습니다.

 

 

사단 정보처에도 여성 하사관이 두 명 있었습니다.

말괄량이같은 중사들이었는데 이들이 우리 부대에 올 때면 우리 소대원들이 갑자기 신사가 되어 친절해지곤 했습니다. 그들이 우리 부대에 오는 것은 GP에 들어갈 때 옷을 갈아입기 위한 것이었죠.

 

“GP에 왜 한복을 입고 들어가요?”

 

두 여군 중사들이 옷을 갈아 입는 동안 한번은 정보처장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심리전의 일환으로 저 두 여중사들은 북한쪽 GP에서 훤히 들여다 보이는 아군 GP 영내 언덕에서 가져간 음식을 가지고 병사들과 함께 피크닉을 하는 모양인데 화려한 한복으로 갈아입는 것은 역시 그들이 여성임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도록 세계만방에 고하기 위함인 것 같았습니다. 80년대 후반…, 그 당시에는 남쪽이나 북쪽이나 그렇게 촌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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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명의 여군과 직접 많은 얘기를 해볼 기회는 없었지만 가끔은 그런 임무를 수행하는 그들의 기분이 정말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군대에서조차 그들이 군인이라는 사실보다 여성이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되고 그렇게 활용되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요. 성희롱이라는 말이 한국사회에 처음 소개되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 개념이 모호했던 그 시절 그 어떤 사회보다도 폐쇄되어 있던 군대에서 여군들은 과연 어떤 생활을 하고 남성 상관들로부터, 또는 동료나 병사들로부터 어떤 처우를 받고 있었는지도 정말 궁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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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에는 진, , 미 뿐 아니라 미스 아모레, 미스 한국일보도 있었고 그래서 대회가 끝나면 한국일보에서 막 당선된 따끈따끈한 미스코리아들을 매년 버스에 태워 땅굴에 데리고 오곤 했습니다.  그녀들을 안내하는 것은 선임 안내장교로서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권리이자 영광이기도 했습니다. 상관인 보좌관님은 물론 실장님까지 칼같이 줄을 잡은 새 군복을 입고 나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그날은 그 분들이 뒤에서 불러도 못들은 척하고 미스코리아들의 버스에 올라 탔지요. 버스 안에서는 당시 미스코리아 진 장윤정씨를 비롯한 대한민국 최고 미녀들이 미소를 던지고 있었습니다. 짙은 화장 때문에 모두 똑같아 보였지만요.

 

그날 미녀들의 버스에 함께 타는 영광을 얻은 다섯 명의 미국인들도 있었습니다. 미국 웨스트포인트의 사관생도들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은 한국인 2세였고 또 한 명은 금발에 파란 눈을 한 단발머리 아가씨였습니다. 미스 코리아보다도 더 눈에 띄는 귀여운 소녀같은 모습이 날렵한 생도복과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도라 전망대와 제3땅굴을 돌아 보는 동안 미국 사관생도들은 끝도 없이 미스코리아들에게 장난을 걸었고 그 소녀는 동료 남자생도들 못지 않게 몹시도 장난이 짓궂었습니다.

 

이제는 그 소녀도 아직 군에 남아 있다면 아프가니스탄도 다녀오고 이라크도 다녀와 지금은 중령 계급장 정도를 달고 있겠지요. 그 파란 눈의 소녀 사관생도는 당시 땅굴에서 올라와 양볼이 발그레 상기되어 있던 우리 여군 하사관 훈련병들과는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활기차고 건강한 웃음을 크게 웃으며 동료생도들과 함께 무던히도 미스코리아들을 집적거리던 그 소녀는 지금은A few Good Men의 데미 무어같이 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당시 우리 훈련병 소녀들은 왠지 그들을 데리고 왔던 그 여군 소령의 표정을 닮아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은 왜일까요?

 

 

군대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좀더 합리적이고 안전한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청춘의 최절정을 군에서 보내야 하는 우리 후배들에게 사회의 일반 회사에서 받을 수 있는 월 급여의 최소한 50%라도 줄 수 있도록 국방부의 재원이 남아 도는 부자나라가 되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를 통해서라도 충분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국복무 기간이 자기계발 기회의 시기라고 인식될 만큼 긍정적인 프로그램과 제도들이 병행된다면 좋겠고 남북관계가 상호대치에서 공존과 협력을 통한 상호 번영의 관계로 호전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정치, 사회의 지도자 자녀들이 대부분 군대갈 무렵에는 면제대상에 해당되는 거의 공식적 병신, 금치산, 한정치산자였다가 면제가 확정되면 갑자기 멀쩡한 박사가 되고 사장이 되는 이상한 풍속의 나라가 더 이상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군대 안가는 남성 연예인들을 씹어 대고, 그렇찮아도 아직 불리한 사회적 환경에 있는 여성들을 싸잡아 몰아 세우는 군 가산점 제도 같은 치졸하고 비겁한 제도가 다시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되는 좋은 사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새천년이 밝은지 이미 오래인 지금 이 사회와 이 세계에서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 언제쯤 되면 완전히 없어질까요?  그리고 여성들이 남성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던 영역을 하나씩 잠식하는 현재의 추세에 더욱 탄력받아 이제 군대가, 소대장이나 사단장 보직이 왜 남성들만의 것이냐며 여성들이 들고 일어나는 날은 언제쯤 올까요?

 

그래서 일선 소대 내무반 건조대에 망사팬티가 하늘거리는 날은 앞으로 또 며칠밤을 더 자야 오는 걸까요?

 

그날이 오면…,
나 군대 다시 갈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