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영업직원 활약사

외줄타기

beautician 2009. 5. 28. 20:24

 

  

한국에 계시는 분들은 실감이 잘 나지 않겠지만 한국이 좋은 나라라는 것을 자꾸 느끼게 되는 것은 인도네시아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을 수도 없이 겪으면서부터였습니다.

 

그래서 경제위기가 닥쳐 기업들이 넘어지고 고국에 실업자가 넘쳐나며 촛불시위에 데모에 각종 부정부패 사건사고들의 뉴스를 접하고 심지어 전직 대통령마저 자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는 본국의 상황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한국은 언젠가 내가 돌아가야 할 그리운 곳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들이 여기서는 개개인이 스스로의 비용으로 각자 알아서 마련해야 하고 때로는 그것마저 불가능해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마음 준비를 해야 하는 경우가 정말 빈번하게 벌어집니다. 그때마다 이 꼴을 보느니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심정이 굴뚝같았습니다.

 

한국에서 부산 거리 조금 넘는 자카르타와 족자(yogja)까지의 거리( 700km)를 고속도로가 끊어지는 반둥지역부터 편도로 무려 12~14시간이 걸려 차를 달려야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카르타에서 가장 고급 주택지로 꼽히는 뽄독인다(Pondok Indah) 지역에서 불과 2km도 떨어지지 않은 나름대로 쾌적한 주택지인 르박 불루스(Lebak Bulus) 지역조차 상수도가 들어와 있지 않은 곳은 많아 개별 주택들이 일일이 시추공을 박고 모터를 돌려 수질이 검증되지도 않은 지하수를 생활용수로 써야 하는 것도 그렇고 국영통신회사인 TELKOM의 유선 전화회선이 미치지 않는 곳이 많아 한국보다도 훨씬 전 이동통신 이용자가 유선전화 이용자의 숫자를 훌쩍 뛰어 넘은 지 오래라는 점도 그렇습니다.

 

더 이상의 부패를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부패한 공무원들은 뭔가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들이 임용될 당시 채용수속비 명목으로 넣은 1,500~3,000만 루피아(한화 약 150~300만원)의 뒷돈을 수백배, 수쳔배로 보상받으려는 듯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가릴 것 없이 무슨 꼬투리든 잡아 돈을 쥐어 짜내는 것이 그들 본연의 업무가 되어 버렸고 그래서 매년 개인 비자를 연장하고 회사 서류를 갱신해야 하는 외국인 회사들을 수시로 돌아다니며 자신들이 특권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보, 예를 들면 이 회사에 새 외국인 직원이 채용된 지 2개월 되었으니 분명 몇몇 서류가 갖추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식의 정보를 비수처럼 품고 찾아와 불비한 서류에 대해 천문학적인 벌금을 때리며 추방, 감금 등을 언급하며 겁주고 뒷돈을 요구하는 것이 너무나 평범한 일이 되어 있지요. 그들은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공무원이 되어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 현지에서 근무하는 외국인들을 지배하려 합니다.

 

공항 이민국 데스크를 지나려면 서류에 아무런 하자가 없더라도 인도네시아에 꽤 오래 산 것으로 보이면 뒤에 줄 서 있는 사람들 앞에서도 아무런 꺼리낌 없이 담뱃값을 요구하고 기념으로 한국돈을 좀 달라고 요구하는 이민국직원들은 그나마 애교스러운 편에 속합니다.  잘 알면서 뭘 빼냐는 투지요.

 

한국 같으면 의무교육 시스템이라 과외공부 외에는 실질적으로 학교에 들어가는 돈의 부담은 거의 피부에 와닿지 않겠지만 여기서는 아이들을 JIS 같은 국제학교에 보내려면 월급쟁이 부모의 수입 전부를 털어 붓다시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살인적인 학비도 그렇고 현지인들에게는 5년짜리 유효기간으로 발급되는 운전면허증도 외국인들은 근로비자가 1년짜리이니 매년 갱신하면서 면허시험장 공무원들에게 뒷돈을 바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결과적으로 여기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주택, 비자, 차량, 자녀들의 학교 등 어느 하나 만만치 않은 비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없는 셈입니다. 그리고 일반 현지인들이 느끼는 정부에 대한, 공무원에 대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감정 역시 우리들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인도네시아의 미래가 그다지 밝지만은 않게 여겨지는 것은 독립 이후 이미 웬만한 사람 수명만큼의 시간이 지난 지금 해묵은, 그리고 날로 그 도를 더해가는 관료, 공무원, 그리고 그 친인척들의 부패가 이제는 민간에까지 확산되어 누구나 어느 정도의 부패를 저지르고 있거나 저지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물론 일반 현지인들이 겪고 있는 극도의 가난이 그 배경을 이룹니다.

 

한때 물건을 수출한 후 선박회사에서 B/L을 받으려 줄을 서 있다 보면 창구직원에게 몇 만 루피아 돈을 찔러 주는 사람이 B/L을 좀 더 빨리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공항에 손님을 맞으러 나가면 기다리는 수십 분 동안 족히 십 수명이 될 만한 사람들이 공항 내 보세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면서 접근해 오지요. 공항에서는 가짜 몽블랑 만년필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밀며 팔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주차료를 내고 들어간 주차장에서 동네 양아치들이 차를 안내하며 또 별도의 돈을 요구하는 건 공항은 물론 스나얀 경기장이나 전시회가 많이 열리는 자카르타 컨벤션 센터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속도로 톨에서 차가 고장나면 부르지도 않은 레카차가 다가와 막무가내로 차를 매달고 정비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동네 조폭들 아지트인듯한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말도 안되는 금액의 돈을 내라고 위협 반, 회유 반으로 강요합니다. 국내 여행을 하면서 비행기시간보다 한 두 시간 빨리 체크인하고 자물쇠로 채운 가방을 소화물로 부치면 도착지에서 찾은 그 가방은 열 번에 한 두 번 정도 자물쇠가 박살 나 있거나 아예 없어져 있고 내용물들은 온통 난장판으로 뒤집어져 있곤 합니다. 십중팔구 출발지 공항의 화물직원들이 돈 될만한 물건을 훔치려 한 짓이지요. 이런 놈들은 전문적인 나쁜 놈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부분은 이런 겁니다. 미용실에, 골프샵에, 트로피 가게에서 머리를 하거나 물건을 고르면서 잠깐 가방이나 핸드폰을 카운터에 놔두면 정말 찰나의 순간 잠시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린 사이 핸드폰이 없어지고 가방 속의 달러가 없어집니다. 다른 손님이 아니라  그곳 직원들의 소행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운전사가 딸린 자동차에 돈봉투가 든 가방을 두고 내려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오면 돈봉투의 돈이 몇 십 만 루피아 또는 몇 백 불 비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운전사가 봉투에서 서너장 빼더라도 아직 이렇게 많은데 설마 주인이 원래 돈이 얼마라고 기억하고 있거나 차에 타자마자 돈을 다시 세어 보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저지르는 일이지요.

 

이런 짓을 하는 직원들, 운전사들은 오히려 수년간 일을 해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을 잘 해오던 직원이 한 순간 눈이 뒤집혀 그런 짓을 하는 겁니다. 극도의 가난 속에서 저 핸드폰을 갖다 팔면, 저 봉투에서 몇 장 만 빼면 앞으로 한 두 달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그들로서는 떨쳐 내기 어려운 유혹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통날 게 뻔한 상황에서도 뻗치는 손을 자제하지 못하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가 돈과 물건을 잘 간수하지 못하고 회사와 사람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이 사람들을 범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화 시절부터 짜꿍 KBN 소재의 우리 공장에서 경리직원으로 일했던 에코(Eko)는 공장이 벨기에 회사인 시온(SIOEN)에 팔린 후에도 10년 넘게 그곳에 남아 경리과장까지 승진했고 내 오랜 파트너인 릴리와도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어느 날 회사돈 십여만불을 인출해 자취를 감추고 만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직장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 있는 직원들 대부분은 일상에서도 합법과 범법 사이의 기로에 서서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고 때로는 상황에 떠밀려, 또 때로는 유혹에 못이겨 범죄에 빠져들곤 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모든 출연자들이 나와 커튼콜을 하며 관객들에게 인사하듯 이런 여러가지 부패와 범죄가 입체적으로 총출동해 동시상영된 사건이 최근에 벌어졌습니다.

 

위키(Wikynoto)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었는데 원래 운전수로 채용되었다가 마케팅에 재능을 보여 전격적으로 마케팅을 나가게 된 지 석 달이 채 되지 않았었지요. 부모님은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꽤 유복한 생활을 하던 이 친구는 가까운 친인척이 인도네시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커다란 횡령사건의 한 축으로 구속되면서 한동안 채권단들에게 쫓겨 다닌 끝에 빠더망안(Pademangan)의 한 꼬스(Kost = 자취방)에서 밑바닥 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밝은 성격을 잃지 않고 우리 직원 대빵인 이메이(Imey)가 자궁종양 수술을 받았을 때에도 한국산 배를 사와 위문하기까지 하는 등 직원들과의 관계도 원만했습니다

 

 

영업능력도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당시 자카르타, 반둥, 수라바야에 국한된 수입 도매에서 미용실 방문판매를 시작한 지 1년 반쯤 되어 직접 거래하는 미용실들이 500군데가 넘어가기 시작한 시점에서 반둥 지역까지 방문 판매를 시작했고 메단(Medan), 덴빠사르(Denpasar), 마카사르(Makassar) 등에 진출을 도모하던 나는 때마침 이런 친구를 만난 것을 행운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땅거랑(Tangerang)지역 BSD에서 사고가 터집니다.

 

위키는 한 시간 전에 들렀던 미용실에서 전화를 받습니다. 혹시 다른 손님 물건이 섞여 가지 않았냐고요. 직원들이 미용사들에게 물건을 팔 때면 방물장수들처럼 가방 안에 물건들을 다 꺼내 보여 주었다가 다음 행선지로 떠날 때 때로는 허겁지겁 주워담게 되는데 그 때 남이 물건이 섞여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위키는 당장 길길이 소리를 지르며 자길 도둑놈으로 보냐며 화를 냈습니다. 모든 것의 화근은 그가 화를 낸 미용실 직원이 위키에게 악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거였습니다.

 

다음 미용실에서 가방을 풀다가 위키는 자기 가방에 정말로 다른 사람 물건이 담긴 비닐봉지가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목걸이, 팔찌 같은 금붙이들이 들어 있었다는데 그 물건의 주인은 비싼 물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그렇게 싸구려 비닐봉지에 넣어 방치했다가 오히려 역효과를 본 것이고요. 당황한 위키가 다시 미용실에 전화하여 물건이 있으니 돌려 주겠다고 하자 미용실 직원은 인근 경찰서에 맡겨 달라고 말했고 그 경찰서에 물건을 가져다 주던 위키는 그 자리에서 절도범으로 체포되어 철장에 갇히고 맙니다. 첫 전화통화 후 경찰서에 신고한 미용사에게 경찰관이 그렇게 지시했다는 겁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정말 위키가 모르고 물건을 챙긴 것인지, 아니면 잠시 유혹에 눈이 멀어 가방에 넣었다가 나중에 마음을 고쳐 먹고 돌려 주려 한 것인지는 위키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없어진 물건도 없고 선의로서 물건을 돌려 했던 것으로 보이는 위키의 긴 감방생활이 시작됩니다. 위키를 고소한 물건 주인이 물건을 돌려 받으려 하자 경찰서에서 그 금붙이가 증거물품이라며 내 주지 않았고 이를 돌려 받기 위해 기소를 취하한 후에도 경찰서에서는 자신들이 기소하겠다고 하며 끝내 증거품(?)들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상황이 묘해졌습니다. 없어진 물건도 없고 물건 주인도 기소를 취소했는데 위키는 유치장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위키가 잡혀 들어갈 때 수금한 판매 대금도 수백만 루피아가 있었고 그의 가방에는 수천만 루피아 어치의 우리 제품들이 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는 그것들도 증거품이라며 내 주지 않아 우리는 결국 위키의 재판이 끝날 때까지 수개월 동안 마냥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사건을 당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초기에 빨리 매듭을 지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정의로운 사람들에게는 타협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고 억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나마 그것이 가장 싸고 후환도 없는 일이기 쉽습니다. 외국에 사는 우리들로서 시간은 절대로 우리 편이 아니며 상대편이 생각할 시간을 오래 가질수록 더욱 철저히 돈을 뜯어낼 수 있는 더욱 창조적인 온갖 방법들이 떠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키의 경우에는 그럴 수 있는 초기 대응시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사건의 성격상 회사가 개입하기에 좀 애매한 부분도 있었지만 위키 스스로도 이 사건을 부끄러워 해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면서도 회사가 나서는 것을 기피했고 우리가 변호사를 보내려 하자 갑자기 나타난 위키의 삼촌이라는 경찰관이 그렇게 하면 일이 더 복잡해지니 자기가 처리하겠다며 우리 앞을 가로 막았어요. 그는 자카르타 경찰청인 POLDA에 근무한다고 했는데 위키가 그렇듯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었고 계급도 꽤 높은 편이라 그가 자신감을 보이는 만큼 위키를 빨리 빼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인도네시아는 반전드라마의 본고장…, 위키 삼촌의 출현은 오히려 역효과를 냅니다. 위키가 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동안 비용은 더 많이 들었습니다. 하루에 한끼, 그것도 거의 사료수준의 식사를 주기 때문에 몸무게가 100kg에 육박하는 위키에게 넣어주는 사식비는 일반 사회에서는 드는 것의 몇 배가 들었고 그나마 위키 손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라면 40개 짜리 한 박스를 사주면 위키는 기껏 2~3개를 먹을 수 있을 뿐이었죠. 담당 경찰관은 물론 심지어 경찰서 청소부까지 음료수, 담뱃값, 핸드폰 뿔사를 요구하며 위키를 인질로 돈을 뜯었습니다. 비록 위키의 삼촌이 경찰관 정복을 입고 나타났지만 경찰관끼리라고 무료가 통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위키 삼촌은 계급으로 짓누르려 했고 BSD의 경찰서에서는 엿먹으라는 듯 위키를 검찰로 송치해 버립니다.

 

위키가 교도소로 옮겨 가면서 위키의 오토바이와 가방, 그 안의 내용물들도 증거품으로 함께 검찰에 옮겨졌다고 하며 위키의 삼촌이 계속 백방으로 움직이며 노력하고 있다는 얘기를 위키의 누나인 수산(Susan)을 통해 들었지만 처음 BSD 경찰서에서의 2주를 빼고는 그 후 위키의 삼촌과는 한번도 전화통화가 되지 않았고 수산이 마치 그 대변인인 듯 진행상황을 알려 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돈을 빌려 달라고 부탁해 왔고요.

 

그때 위키의 핸드폰과 수금액을 포함한 위키 지갑의 돈도 이미 행방불명이 된 상태였고 당장 돈 될 방법이 보이지 않는 우리 미용기구들만 가방에 남아 있었습니다. 심지어 교도소로 면회간 이메이가 보관소에 맡긴 가방에서도 돈과 핸드폰이 없어지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지요.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모양이지만 대부분 수감자의 가족, 친지인 면회인들은 감옥 안에 있는 사람 입장이 곤란해질까봐 그런 피해를 입고도, 누구 짓인지 뻔할지라도 아무 말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모양이었습니다. 이메이 역시 악 소리 못하고 200만 루피아짜리 새 핸드폰을 그렇게 뺏기고 말았습니다.

 

교도소에서의 비용은 경찰서 유치장에서보다 더 많이 들었기 때문에 위키가 돈을 빌려달라고 이메이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교도소 안에서 핸드폰을 사용한다는 것을 한국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렇게 핸드폰을 빌려주고 턱도 없는 사용료를 받는 교도관들이 있었습니다. 위키에게 돈을 보내주면 그 돈을 받는 구좌 주인이(아마도 교도관?) 10%를 수수료로 뗀다고 하는데 실제로 돈을 만질 길이 없는 위키로서는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외에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교도관이나 다른 수감자들에게 맞지 않으려면 월 30만 루피아, 사식을 하루 세 끼 먹으려면 월 몇백만 루피아, 아파서 병원에 가려면 또 몇백만 루피아…, 한국에서 겨울이 다가오면 일부 노숙자나 부랑자들이 정부가 주는 옷을 입고 주는 밥을 먹으려고 일부러 작은 범죄를 저질러 감방에 들어가려 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인도네시아의 현실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메이의 남동생은 몇 년 전 마약을 한 죄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발병한 간경화로 병원치료를 받으려 했으나 요구하는 막대한 수수료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손도 쓰지 못하고 죽은 일도 있었습니다. 도가 좀 넘을 정도의 비만 상태였던 위키는 매일 엄청난 양의 물을 마셔야 했고 정기적으로 약도 먹어야 했지만 그러기 위해 감방에서 써야 하는 돈은 사회에서는 일반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큰 금액이었습니다. 그 막대한 금액을 수감자의 가족들이 모두 부담해야 하는 것이 인도네시아의 범죄교정 시스템인 거고요.

 

“8백만 루피아면 위키를 빼낼 수 있데요. 빨리 이 구좌번호로 돈을 보내 주세요.”

 

어느 날 새벽 6시에 수산이 이메이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돈을 요구해 왔습니다. 새벽 6시에 8백만 루피아를 지갑에 넣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6시 반, 수산은 다시 전화해와 6백만 루피아로 가격을 내렸으니 즉시 송금해 줄 것을 다시 요청해 왔습니다.

 

수산, 당신은 얼마를 낼 수 있는데요?”

우린 돈이 없어요.”

 

수산은 회사가 전액을 책임질 것을 바라고 있었죠. 이메이는 그렇게 간단히 내게 돈을 달라고 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위키의 가족이 반을 준비하고 회사가 300만 루피아를 준비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그것도 시간이 좀 지나자 몇 번에 걸쳐 내도 된다는 수산의 연락을 받습니다. 그날 회사에 출근하자 이메이가 내게 어렵게 부탁을 해 왔지요.

 

“300만 루피아가 필요하데요. 그런데 우선 100만 루피아를 먼저 보내고 나머지는 상황을 봐서 보내는 걸로 하고요. 준비해 주실 수 있죠?”

 

상황이 어찌 되었든 일단 사람을 살리고 보자는 내 입장을 이미 이메이와 직원들에게 얘기한 바 있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큰 돈도 아니었기에 나는 흔쾌히 동의하고 100만 루피아를 먼저 송금했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200만 루피아의 송금을 계속 독촉하던 수산이 그날 정오쯤 다시 전화를 걸어 왔답니다.

 

그게 알고 보니 사기였어요. 돈을 달라고 한 사람은 재판에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사람이래요.”

 

그들은 재판소 서기랑 얘기를 하고 있었답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런 상황이 몇 번 씩이나 반복되면서 두 달, 세 달이 지나갔고 위키의 재판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법령에는 어떻게 나와 있는지 모르지만 재판 비용을 고발한 사람, 즉 원고가 내는 것이 이 나라의 관행이랍니다. 그러나 고소한 물건 주인이 기소를 취하한 후 끊임없는 경찰의 회유를 피해 전화기를 끄고 지방으로 내려가 버린 상태에서 이제는 거꾸로 위키의 가족들이 재판비용을 내라는 요구를 받고 있었습니다.

 

수산은 다시 6백만 루피아를 부택해 왔습니다. 판사에게 줄 돈이라는 겁니다.

난 그 때 2년형을 구형받았어요. 그런데 판사한테 100만 루피아, 검사에게 100만 루피아만 줬지요. 그러고서 6개월형을 받았어요. 6백만 루피아는 말도 안되는 금액이에요.”

 

마약복용 혐의로 감방에 갔다 왔다는 또 다른 직원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친구 채용할 때는 그런 말 한 마디 없었는데 회사에서 그럭저럭 자리매김을 하고 나니 진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 친구 과거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었어요. 꿩 잡는 게 매. 마케팅 전문인 우리 회사로서는 잘 파는 직원이 왕이고 그 친구가 다시 나쁜 짓을 하지 않도록 관리하고 배려하는 것이 사장으로서의 내 임무인 것이죠. 그러나 이메이가 열을 내기 시작합니다.

 

미스터르, 내가 수산이랑 얘기 할께요. 위키가 불쌍하지만 돈 주면 감형된다든가 걸어 나온다든가 하는 확신도 없이 달라 데로 다 줄 수는 없잖아요?”

 

이메이가 어떻게 수산과 얘기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후 위키가 1 4월의 징역형을 구형 받았다는 얘기가 들리고 수산이 다시 돈을 요구해 왔습니다. 선고가 나기 전에 판사에게 돈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이번에도 그들은 한푼도 준비하지 않고 또 우리에게 모든 짐을 지웠습니다. 결국 위키는 1년형을 언도 받습니다.

 

 

위키의 재판이 있기 아직 오래 전, 그가 검찰에 송치된 직후 우린 우리 물건 일부를 돌려 받았지만 아직도 반 이상의 제품들이 비었습니다.

 

위키 가방에 있던 건 그것뿐이었어요. 다른 물건이 더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 얘기에요.”

 

물건을 건내 주며 수산의 하는 말에 이메이가 정색을 했습니다.

 

사무실에서 물건을 가방에 넣을 때 해당 목록을 늘 기록해 두거든요. 위키가 당일 서명하고 가져간 물건의 목록도 여기 있어요. 없어진 물건이 있다면 그건 위키가 나중에라도 꼭 물어 내야 하는 거라구요. 그렇지 않아도 위키한테 들어가는 돈이 많은데 물건 값까지 합치면 위키가 감옥에서 나와도 최소한 2년 이상은 월급도 없이 일해야 할 거에요.”

 

그제서야 수산은 삼촌에게 알아 보고 전화하겠다고 하더니 다음 날 나머지 물건은 검찰에 증거품으로 잡혀 있다고 연락해 왔습니다. 좀 석연치 않았어요. 증거품이라는 물건을 어떻게 일부 빼올 수 있었느냐 하는 점부터, 검찰이 무슨 근거로 이 가위는 증거품, 저 매직기는 증거품이 아니고…, 하는 식으로 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수산의 설명으로는 삼촌이 계속 검찰과 얘기 중인데 아마도 물건을 빼내려면 돈이 좀 필요할 거라는 했고 내 입장에서도 수천만 루피아 어치의 물건이니 2~3백만 루피아 정도를 써서 물건을 뺄 수 있다면 빨리 진행하라고 지시를 내려 놓은 상태였어요. 그러나 이 상황은 위키의 형이 확정된 이후까지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내 핸드폰에 위키의 SMS가 날아 들었습니다.

 

이메이가 내가 빌린 돈 300만 루피아 중 200만 루피아를 이미 회사에 돌려 줬나요? 그리고 회사 물건은 지금 삼촌이 가지고 있습니다.”

 

200만 루피아는 그때 준비는 했지만 지출하지 않은 돈이었죠. 물건이 삼촌에게 있다는 얘기는 드디어 물건을 검찰에서 찾아 왔다는 뜻이었으니 경찰관인 삼촌에게 수고비를 좀 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이메이는 생각지도 못한 보고를 해왔습니다.

 

내가 위키로부터 SMS를 받기 직전 이메이는 위키와 전화로 일대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위키의 재판이 끝난 지 이미 한 달이 넘고 있었으므로 며칠 전부터 나는 직원들에게 검찰청에 가서 우리 물건의 상황을 파악해 보라고 지시를 내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직원 한 명이 검찰청에 갔고요. 내 지시를 당장 수행하지 않았던 이유는 위키는 며칠 전부터 이메이에게 200만 루피아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찾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라면서요. 그러나 내가 닥달을 하자 어쩔 수 없이 검찰청에 직원을 보내면서 위키의 삼촌이 어디까지 진행해 놓았는지 알아 보려 전화를 걸었던 이메이에게 위키는 필사적으로 검찰청 행을 막았습니다.

 

, 나 감방에서 더 썩게 만들려는 거야? 검찰에 가서 내 사건을 물어 보면 여기서 내 입장이 더 어려워진단 말이야. 삼촌이 처리 중이니까 절대로 검찰에 사람을 보내면 안돼!”

이건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야. 미스터르가 변호사를 검찰청에 보낸 거야. 너 재판 끝난 지가 언젠데 회사가 언제까지나 우리 물건을 검찰에 맡겨 놓을 수 없는 거잖아? 너희 삼촌도 연락 안돼. 그러니 미스터르가 그렇게 지시할 수 밖에.”

 

위키의 반응이 이상스러워 이메이가 한번 뻥을 쳤습니다. 검찰청에 내가 보낸 사람은 변호사가 아니라 우리 일반 직원일 뿐이었죠. 그러자 대뜸 전화를 끊어 버린 위키는 그떄부터 나름대로 바빠졌던 모양이고 이메이는 검찰청에 간 직원에게서 의외의 보고를 받습니다. 위키가 검찰에 송치되던 날 오토바이와 일부 현금만 증거품으로 검찰에 전달되었고 우리 물품들은 애당초 증거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일 위키 가족이 BSD의 경찰서에서 수령해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제품의 일부를 전달받았을 때 나머지 물건들도 수산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위키가 그럴 리 없어…”

 

내 마음 한 구석에서 뭔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반둥에 다이렉트 마케팅을 시작하면서 이번 BSD에서의 사건으로 심리적 외상을 입었을 위키가 감옥에서 나오면 반둥지점을 맡기고 좀 여유를 가지고 상처를 치유하도록 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의 몸무게를 복원시키기 위해 부페식당 목록까지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황은 위키가 수산과 짜고 우리 제품을 빼돌리려 했을 뿐 아니라 물건이 검찰에 있다는 허위사실을 날조해 그것을 빌미로 200만 루피아를 뜯어 내려 했다고 강변하고 있었고요.

 

위키의 전화가 또 날아 듭니다. 9. 교도관이 핸드폰을 대여해 주는 시간입니다.

 

사실은 에도(Edo)가 돈이 필요해서 내 이름으로 200만 루피아 가불해서 에도를 빌려 주려고 한 거에요. 미스터르도 에도랑 이메이가 잘 되기를 바라잖아요? 난 그 친구들을 사랑해서 그렇게 한 건데 이렇게 오해를 받고 말았어요. 시간이 없어서 길게 설명은 못해요. 아무튼 다른 뜻은 없었어요. 에도를 도와 주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전화받고 있는 내 앞에서 에도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위키는 에도가 가끔 심하게 멍청하다는 것과 내가 그의 멍청함 때문에 많이 속상해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키가 모르는 것은 오랜 약혼자 사이였던 에도와 이메이의 사이가 이메이의 자궁종양수술을 받던 즈음부터 금이 가기 시작해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깨져 버렸고 회사 일에도 막대한 지장을 주었던 서먹서먹한 과도기를 지나 이제서야 간신히 안정을 되찾으면서 에도에게도 새 애인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위키는 분명한 거짓말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우리 제품이 수산의 손에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변명도 대지 못했습니다.

 

이게 정말 다에요.”

 

며칠 후 쁠루잇(Pluit) 지역에 있는 메가몰(Megamall)에서 만난 수산이 내미는 제품 가방 안에는 아직도 물건들이 많이 비고 있었습니다. 수산은 그것이 바로 어제 삼촌에게서 받은 제품 전량이라고 설명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삼촌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사실 그동안 수산이 그 물건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비는 물건들은 판매량이 가장 많은, 그래서 미용사들에게 별도의 설명조차 필요 없는 우리 주력 제품들, 돌려 받은 물건들은 전문지식 없이는 팔기 힘든 물건들이었지요. 수산은 우리 물건들을 팔아 그 돈으로 위키의 옥살이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어려우니 돈을 좀 빌려 달라고 솔직히 부탁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메이가 내 앞에서 필사적으로 회사의 이익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회사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물건마저 모두 회수되면 내가 더 이상 위키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리라는 그런 생각….

 

그런데 위키가 감방에서 나오면 계속 미스터르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거죠?  아니면 다른 직장을 찾아 봐야 하는데….”

 

헤어지기 전 수산이 하던 말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위키는 희대의 사기사건에 연루된 친척 때문에 신원조회가 심하지 않은 작은 회사를 찾았던 것이고 그나마 별로 관심을 끌지 않을 운전수직에 이력서를 내밀었던 것입니다. 나는 전과자를 채용하는 것을 크게 꺼리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가 어떻게 감방에 가게 되었는지 잘 아는 상황에서 오히려 안타까움에 누구보다도 그의 출소를 목마르게 기다리는 입장이었지요.

 

그러나 그들이 내 마음을 알 리 없습니다. 내가 위키의 마음을, 수산의 마음을 몰랐던 것처럼요. 위키는 내가 수산을 만나기 전날 밤, 사직서를 SMS로 보내 온 상태였습니다.  그날 밤 또다시 위키와 전쟁을 벌인 이메이의 핸드폰에 들어와 있던 위키의 문자 메시지들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너는 친구를 팔아먹은 아주 나쁜 년이야. 미혼모가 된 게 마땅해. 아직도 널 원하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 불가사의다.]

 

[밤길 조심해. 전에도 사람 시켜서 나쁜 놈 하나 골로 보낸 적 있어. 밤길 혼자 다닐 때 등 뒤에 내가 보낸 사람이 있을 거야. 네 딸도 좋은 경호원이 필요할 거야.]

 

위키가 미친 모양입니다.

내가 직원을 채용할 때 늘 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케팅 전문회사로 적은 인원으로 광대한 지역을 커버해야 하므로 팀웍이 가장 중요하다. 혼자서 한다면 자카르타의 일부도 담당할 수 없지만 팀을 이루면 인도네시아 전체도 관할할 수 있다. 그래서 팀웍을 심각하게 해치는 사람이 있다면 나이가 몇이든, 능력이 있는 없든, 나량 몇 년을 일했든, 가장 신속하게 그 사람을 해고하는 것이 내 의무다

 

위키를 정말 버려야만 할까요?

 

예전 박해받아 유치장 간 목사님 편에서 기술했던 것처럼 그 전에도 유치장에 갇힌 사람을 위해 발벗고 뛰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의 인도네시아 감옥에서 극에 달한 폭력과 부패에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노출되어 버렸을 때 사람의 사고가 어떻게,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 얼마나 피해망상에 사로잡히게 되는지를 그때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위키의 머리 속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의 의도와 진심이 어떻게 삐뚤어지고 왜곡되어 받아들여 질 것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감옥이란 본능만이 지배하는 정글같은 곳이어서 쥐어짜도 더 이상 바칠 돈이 없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감지되는 모든 조짐을 자신을 찌르려 다가오는 칼끝처럼 여기게 되는 자기보호본능만으로 가득 차게 되기 때문이겠죠.

 

위키를 거기까지 밀어붙인 이 나라의 사법제도와 범죄자 교정시스템에는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감옥에 간 위키는 거기서 아직도 합법과 범법의 경계선 위에서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면서 자칫 범법의 영역으로 떨어지려 하는 중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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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는 라마단 휴무가 끝난 직후인 9월 28일 우리 사무실을 찾아 왔습니다.  1월 중순에 BSD에서 경찰서에 잡혀 들어간 후 8개월이 조금 지난 후의 일이었지요.

 

100kgs이 넘던 그의 몸무게는 88kgs 정도로 줄어 여전히 뚱뚱해 보이긴 했지만 살이 많이 빠졌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광복절 특사와 라마단 특사를 각각 2개월씩 받아 당초 1년형에서 4개월을 감형받고 나온 것인데 원래 라마단 휴무, 현지에서 르바란(Lebaran)이라고 부르는 축제가 시작되기 전 나와 가족들과 함께 축제를 보내는 것이 정상이었을 텐데 그는 그 축제기간을 형무소에서 보낸 후 그 직후에 출감한 것입니다. 그 마지막 며칠 동안 내일 내보내주겠다는 약속을 계속 어겨가며  최후의 순간까지 돈을 뜯어 내었을 간수들의 행동이 눈에 선했습니다.

 

위키는 다시 내게 와서 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우린 계속 늘어나고 있는 사업규모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고를 치고 나가 버리는 직원들 때문에 인력보충이 절실한 상황이었고 마침 위키의 출소는 시기적절했습니다.

 

그가 형무소에서 다른 범법자들에게 나쁜 영향만 받지 않았다면, 비록 우리 물건을 가지고 누나 수산과 함께 장난을 쳤다는 정황이 뻔히 드러나 보이긴 했지만 그것은 형무소 안에서 절박한 마음에 어쩔 수 없이 저질렀던 실수라고 치부하고 나는, 그리고 우리 직원들은 진심으로 위키를 환영하며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우린 끌라빠 가딩의 다미식당에 방을 잡아 그동안 먹지 못했을 기름진 음식들을 잔뜩 차려 놓고 그의 출소를 환영했습니다.  비록 그는 한달에 한 번 경찰서에 가서 소재지를 신고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한동안 감수해야 했지만 일을 시작하기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습니다. 단지 문제는 증거물로 경찰서에 보관되어 있던 그의 오토바이를 찾아 오는 것이었는데 예전 이메이 등 우리 직원들이 BSD 경찰서에 가 보았을 때 그런 식으로 압류되어 있던 수백대의 오토바이들이 대부분 뼈대만 남아 있었다는 얘기를 기억하면서 위키 역시 그의 오토바이를 제대로 된 상태로 회수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어요. 경찰서의 사람들은 그렇게 압류된 오토바이의 부품들을 팔아 먹거나 자기 오토바이를 고치려고 함부로 부품을 빼가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명색이 증거물이었으므로 오토바이 자체를 팔아 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수백배의 오토바이들이 스산한 백골이 되어 압류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위키는 며칠간의 말미를 요구한 후 그 다음 주 월요일 첫 출근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토바이를 찾으러 간다며 중간에 조퇴한 그는 그 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로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오토바이 뼉다귀라도 가지고 나오려면 돈을 줘야 한데요."

 

위키는 그 사이 이메이에게 돈을 요구했었는지 이메이가 그런 보고를 해왔습니다.

이제 경찰에 관한 일이라면 아무리 어이없는 소리를 들어도 별로 놀라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난 사실 위키가 일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회사에 오토바이를 한 대 더 사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어찌되었건 그는 회사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가게 된 것이니 그가 현재 겪는 어려움을 될 수 있는데로 경감해 주는 것이 회사로서 할 도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일주일 쯤 더 지난 후 이메이가 전해온 위키의 요청에 난 난색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명의로 오토바이를 사주면 매월 월급에서 차감하는 식으로 정산하겠데요. 하지만 자기 명의가 아니면 안된다니 좀...."

 

그렇습니다.

회사 명의로 오토바이를 사서 그가 회사에 할부금을 내 2년쯤 후에 완불되면 그의 이름 앞으로 명의를 바꾸어 주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없는 정상적인 방법이지요. 그러나 방금 출소해 지난 2주일 동안 단 하루 출근했던 위키를 위해 그의 명의로 오토바이를 사준다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지만 그가 오토바이를 갖고 잠적해 버리면 우린 이미 없어진, 그리고 우리 명의도 아닌 오토바이때문에 앞으로 2년간 계속 할부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지요.

 

위키의 그 요청을 이메이가 이미 거절한 상태였습니다. 회사 명의로 구매한다는 전제를 달면서요.

그러나 위키와의 연락은 그것으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위키는 형무소에서 사귀었던 사람들과 여전히 전화통화를 하며 지냈고 감방에서 만난 한 무기수를 존경하는 듯한 말을 하곤 했지요. 그는 8개월간의 감방생활을 하면서 이제 우리들의 말보다 형무소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그런 식으로 오토바이 구매를 요청한 것 역시 형무소 사람들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겠지요.

 

그는 내가 그의 명의로 오토바이를 사줄 수 없다는 얘기에 마음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원래 그렇게 요청해서 만의 하나 내가 그 요청을 받아 들여 오토바이를 사주면 그 오토바이를 가지고 잠적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죠.  아무튼 그가 감방 안에 있을 때까지도 일주일에 두 세 번 전화통화를 했던 나나 이메이는 그 오토바이 사건 이후 다시는 위키와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쩌면 우리가 우려했던 것처럼 지난 8개월의 감옥생활을 하면서 결국 외줄타기를 포기하고 범죄의 바다로 떨어져 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의 능력을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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