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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켈광산 영적방어작전

니켈광산 영적 방어작전 (8)

beautician 2022. 1. 18. 11:42

ep8. 페리와 로니

 

 물론 벌크선에 가겠다고 해서 무작정 배를 타면 되는 일은 아니었어요. 릴리는 자기 배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바지선을 빌릴 때 팩케지로 따라오는 턱보트(Tugboat)가 있었지만 용도 이외로 사용한다는 문제를 차치하고도, 턱보트로는 본선에 대고 옮겨 타기가 수월치 않았습니다.

 

나랑 같이 갑시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모셈파의 또 다른 현장을 맡고 있던 페리 소장입니다. 그는 인원만 득실거렸지 광산 경험은 거의 없는 로니의 현장을 자주 방문하며 작업상 조언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비록 조언이라 하지만 그와 같은 전문가가 얘기하는 작업절차와 방법에 대한 의견이란 것은 로니 측의 이권과 대립하지 않는 한 반드시 따라야 할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모셈파 현장 전체에서 일정부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페리, 그 사람 평판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광산판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믿어서는 안돼요. 그 사람한테도 끌려 다니지 마세요.” 

심빠티 언덕에서 통화하던 릴리가 그렇게 말했지만 만약 페리가 나서지 않으면 내가 무슨 수로 배와 사공을 구해 바다로 나가 어떤 배에 올라타야 할 지 알겠어요? 당시 모셈파에는 페리와 로니가 맡은 현장 2군데 말고도 릴리가 지분을 인수하기 전부터 그 광산의 다른 지점에서 채광해 모셈파 명의로 수출하는 컨트렉터 세 곳이 더 있었습니다. 디스타로의 현장에선 품위가 낮은 원석들을 야적장에만 잔뜩 쌓아놓고 있었지만 다른 다섯 군데에선 20톤 트럭에 원석을 실어 인접한 제티 두 곳을 통해 바지선들을 채우는 중이었고 그 바지선들은 모롬보 만의 앵커리지에 정박한 수많은 벌크선들 중 릴리의 바이어들이 보낸 다섯 척에 붙여 해상에서 크레인으로 선적을 진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들 말고도 앞으로 1-2주 사이에 모롬보만에 추가로 들어올 릴리 바이어들의 벌크선들은 아직 여러 척 더 있었습니다. 그러니 비용을 들여 배를 구해야 한다면 로니의 현장에서 선적하고 있는 배 한 척에만 갈 일은 아니었습니다. 나간 김에 우리 벌크선들을 다 돌아야죠.

 

 

 

페리는 선착장에서 가까운 해안마을의 정부 출장소에서 선박입출항 증명서를 발행하는 공무원을 불러내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그 배라는 것이 파푸아 식인종들이 쓰던 긴 카누 같은 것인데 노를 젓는 대신 뒤에 모터가 달려 있었습니다. 공무원을 데려가니 벌크선들이 바로 사다리를 내려주었습니다.

 

 

다섯 척의 배를 모두 방문하는 것은 하루 종일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현장에서는 절대 웃지 않는 페리도 선장이나 선원들, 그리고 검사시료를 채취하는 판매자와 구매자 양측의 인터텍(Intertek)이나 카슈린(Carsurin) 같은 국제검사기관의 조사원들에게는 얼굴 한 가득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선적 상황과 문제점들을 파악하는 동안 사람 좋아 보이는 입출항 공무원은 내내 싱글벙글거렸습니다.

 

 

 

결국 로니의 현장에서 채광한 니켈원석을 싣고 있던 배에는 해가 져서야 맨 마지막으로 승선했습니다. 선장 입장에서 화물의 습기를 문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긴 합니다. 니켈 원석 수출자와 바이어 사이에 니켈 품위가 1.8% 이상이어야 한다는 약정이 있다면 검사결과가 약정치 이상일 경우 그만큼 보너스로 추가 대금을 받게 되고 반면 약정치에 못미친다면 그만큼 가격을 까는 것처럼 운송의뢰자와 선사 사이에도 화물의 습기에 대한 기준치가 정해져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습기 기준치가 5%라면 5만톤을 싣는 벌크선은 아무 쓸 데도 없는 물을 2,500톤이나 함께 실어가는 셈이 됩니다. 하지만 우기 한복판에 열대 스콜이 하루 한 두 차례씩 쏟아 붓는 적도에서 암석도 아니고 그냥 봐서는 일반 흙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니켈 원광이, 아무리 타폴린 방수천으로 철저히 덮어 놓는다 해도 바짝 말라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절대 무리입니다. 선장과의 설전은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습니다.

 

제티로 돌아와 페리는 자기 현장숙소로, 공무원은 바닷가 마을로 돌아가고, 내가 시막이 가져온 차량을 타고 토비메이타로 출발한 것은 이미 밤 8시가 넘고 있었습니다. 저녁식사를 할 시간도 없었으니 베이스캠프에서 남은 밥을 먹어야 할 판입니다. 요리는 마을에서 사람을 사서 할 수도 있었겠지만 자바 출신 디스타로는 자기 입맛에 맞는 요리를 하는 자비인 요리사를 데려다 놓았는데 음식솜씨가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 숙소는 토비메이타에서 바이오 디젤용으로 조성된 광활한 끌라빠사윗 농장 샛길을 가로질러 40분 정도 거리의 랑기끼마(Langgikima)라는 다른 마을에 있었습니다. 다른 광산회사들의 베이스캠프가 잔뜩 들어선 그 마을은 토비메이타보다 조금 큰 규모로, 작은 상설 시장도 있었고 그 시장 가까이에 허름한 여인숙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침에 새까만 꼬삐히땀(Kopi hitam-가루가 내려앉는 새까만 커피)과 함께 라면을 하나 끓여주는 것이 유일한 서비스인 그 여인숙은 그나마 늘 만원이어서 우린 방 1-2개를 상시 임대해 놓고 있었는데 내가 광산에 올라갈 때마다 묵는 곳이었습니다. 어차피 한번 광산에 올라오면 그날로 왕구두나 끈다리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한 일정이었으니까요. 저녁 6시부터 밤 9시까지만 전기가 공급되었으므로 잠들기 전 어둠 속에서 몸을 씻지 않으려면 9시 전에 도착해야만 하는데 이미 시간을 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토비메이타에 들어설 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난 최소한 랑기끼마로 떠나기 전 로이 아빠와 두꾼 두 사람이 어디에 묵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들이 이미 디스타로의  베이스캠프 앞에 나와 있었으므로 아침처럼 굳이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단지 문제는 그 분위기가 살벌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암본인들이 베이스캠프 울타리 밖 마을 중앙통에 잔뜩 늘어서서 웅성거렸고 쩔쩔매며 만류하는 로이 아빠와 디스타로를 밀치며 그들에게 꽥꽥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로니였습니다. 새벽에 그 사고를 치고 들어간 라솔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어느새 나와 이제 토비메이타에서 후속사고를 막 치려는 중이었어요. 저 사람은 지치지도 않습니다.

 

내가 그 혀를 잘라 놓고야 말겠다!! 이리 와! 이 새끼야!!” 

내가 급히 차에서 내려 달려 갔을 때 그렇게 소리지르는 로니의 오른손엔 정글도가 들려 있었습니다. 라솔로 경찰서에서 로니를 풀어주면서 권총만은 돌려주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요? 이분들은 릴리 손님들이라구!”

미스터르는 빠지쇼! 이건 인도네시아 사람들 일이야!!”

릴리 일은 내 일이란 말야!”

외국인은 좀 비키라구!!” 

영문도 모른 채 달려들어 그를 만류하며 승강이를 벌였지만 로니는 힘이 장사였어요. 그가 한번 몸부림을 쳐 뿌리치자 그를 붙잡고 있던 나나 디스타로, 로이 아빠는 물론 부두목과 또 다른 암본사람이 후두둑 나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로니의 손에 들고 있던 정글도가 내 왼손을 스치며 그의 암본 동료 턱을 후려쳤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움켜쥐고 쓰러진 남자의 손 사이로 피가 솟아나왔습니다. 내 왼팔에서도 피가 솟았습니다. 그 장면에 로니가 당황한 것 역시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심하게 녹이 슨 그 정글도의 날이 일부만 시퍼렇게 서있었다는 겁니다. 내 왼팔에 비스듬히 난 상처는 반쯤은 베였고 나머지 반은 찢기면서 살점이 조금 날아간 상태였어요. 큰 상처가 아닌데도 피가 꽤 많이 나왔습니다. 나와 함께 칼을 맞아 넘어진 암본 친구는 턱이 날에 베인 게 아니라 십중팔구 칼등에 맞아 입 안이 터진 모양이었습니다. 

 

이 상황의 급박함은 이 상황이 종료되고서도 한참 후에야 실감이 되었습니다. 꽤 위험한 상황이었다는 실감 외에도 릴리가 줄곧 이런 일들을 겪으며 광산일을 해왔다는 걸 미루어 짐작하며 릴리가 참 대단한 여자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일단 당장의 상황은 아직 전개되는 중이었습니다.

 

빠 로니!! 이게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이번엔 디스타로가 덤벼들어 로니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그도 차마 허리춤의 권총에는 손을 대지 않았어요. 로니는 내가 손수건을 꺼내 왼손을 감싸는 걸 보며 험악한 표정으로 혀를 차더니 사과도 없이 암본사람들을 이끌고 물러났습니다. 아침에 만났던 그 부두목은 사람들을 시켜 뒷정리를 하면서 내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습니다. 뭐 어쩌라는 걸까요? 아무튼 이 정도로 끝난 것도 어쩌면 외국인 프리미엄인 셈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치닫는 동안 로이 아빠가 데려온 두 사람 중 노인은 저 뒤쪽에 서서 묵묵히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30대 빽구두는 로니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위협하던 와중에도 한 번 해보라는 듯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끼워 넣고 히죽히죽 웃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못마땅함을 넘어 약간 소름이 끼쳤습니다.

 

로니가 왜 저래요?” 

디스타로가 베이스캠프에서 구급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소독하는 동안 내가 로이 아빠에게 묻자 그는 우물쭈물 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