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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켈광산 영적방어작전

니켈광산 영적방어작전 (9)

beautician 2022. 1. 19. 12:04

ep9. 귀신이 쫒아오는 산속 밤길

 

그러자 디스타로가 끼어들었습니다. 

내가 무슨 편견이 있어서 이런 말 하는 건 아니에요. 난 저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우리 일에 지장만 주지 않으면 아무 상관없다고요. 그건 암본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그쪽 현장에 가서 이런 저런 의식을 할 때부터 이미 저 사람들 기분이 상했어요. 양해를 미리 얻었어야죠. 그런데 그 사람들 면전에서 대놓고 마을에 뽀뽀(Poppo)가 있다느니 산속의 롱가(Longga)가 화가 나서 아이들을 잡아갈 거라고 하면 암본 사람들한테 좋게 들리겠어요?”

 

뽀뽀란 깔리만탄이나 수마트라에서도 각각 꾸양(Kuyang)이나 빨라식(Palasik)같은 이름으로도 불리며 주로 가축이나 작물들을 해친다고 알려져 있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산모의 뱃속에서 태아를 뽑아 먹는 귀신으로도 알려져 있죠. 평범한 이웃주민이 사실은 악마와 계약한 주술사여서 날이 어두워지면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면서 내장을 주렁주렁 매달고 날아다니며 임산부에게서 태아를 뽑아 먹거나 아기무덤을 찾아 유해를 먹어치운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암본 정착촌에 그런 주술사가 숨어 있다는 혐의를 도는 얘기인 것이죠. 암본인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수앙기(Suanggi)라는 귀신도 뽀뽀와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어 금방 이해한 만큼 크게 동요하며 화를 낸 것입니다.

 

한편 롱가는 숲 속에 사는 키가 장대같이 큰 귀신으로 숲에서 길을 잘못 든 아이들 뒤를 쫓아 납치하기도 하고 잡아 먹기도 한다고 하여, 마치 자바섬의 건드루어(Genderuwo)나 웨웨곰벨(Wewe Gombel)의 이야기와 유사하지만 그 모습은 오히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나무의 요정들과 비슷하게 묘사됩니다. 그런데 겨우 그 정도 말에 로니가 정글도를 들고 뛰어 왔을까요?

 

 

여담이지만 왕구두와 광산 사이의 산길을 가다 보면 사람을 닮은 키 큰 나무들이 많이 보였고 그 중 하나는 마치 누군가를 안고 가는 듯한 모습의 나무도 있어 아마도 롱가는 그런 나무들을 보고 유래된 괴담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마그립(magrib) 쯤 되었을 때 저 젊은 친구가 로니네 현장에서 귀신을 내쫓는다며 만트라를 외치고 다녔다는 거에요. 그리고 하필이면 암본 사람들 정착촌 쪽 방향을 가리키면서 귀신들이 저쪽에 득실거린다고....” 골치가 아파왔습니다분명 전날 신들 앞에서 불경한 행동을 한 여자가 있어서 마을과 사업이 부정을 탄 거라고 소리쳐 댔다고요.”

 

왜 그 순간, 전날 밤 라솔로에서 양아치들에게 희롱 당한 암본 처녀가 떠올랐던 걸까요? 그 일로 라솔로 경찰서까지 단숨에 달려가 유치장에서 총질을 해댄 로니가 이번엔 그 젊은 두꾼의 혀를 뽑겠다며 정글도를 들고 토비메이타로 들이닥친 것은 어느 정도 맥락이 통하는 듯했습니다. 로니는 자기 부족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아니면 이런저런 점괘를 얘기하며 뭐 하나 얻어걸리길 바라는 사이비 무당처럼 그가 마구 떠벌인 말 중 어떤 말에 정곡이 찔려 감탄과 경외심 대신 분노에 불이 붙은 것일까요?

 

게다가 암본 사람들은 이슬람도 아니고 모두 기독교인들이라고요.”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정착촌의 암본인들에게조차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성서의 교리가 두꾼들을 공격하는 기제로 작용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난 로이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밤 내가 저 두 분, 아니면 최소한 저 빽구두라도 데리고 산을 내려가는 게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최선일 것 같은데 아저씨 생각은 어떠세요?”

 

결국 그날 밤, 나는 랑기끼마의 숙소로 가는 대신 그 빽구두 두꾼을 뒷좌석에 싣고 시막과 함께 하이룩스를 타고 끈다리를 향해 달려 내려갔습니다. 언제 로니가 마음이 변해 다시 토비메이타의 두꾼들 숙소로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한편으로는 아까 그 정글도의 녹슨 상태로 보아 비록 상처를 충분히 소독했다지만 날 밝는 대로 끈다리 시내에서 파상풍 주사를 맞아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입니다.

 

어렵게 모시고 온 분인데 꼭 데리고 내려가야겠소? 릴리 의견을 먼저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이 밤에 언제 또 저 심빠티 언덕에 가서 전화를 걸어요? 문자를 넣어 두면 내려가는 길에 신호 잡히는 곳에서 문자도 나가고 회신도 들어올 테니 일단은 지금 최선이라 생각되는 일을 하자구요.”

저분이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데.”

로니한테 칼 맞으면 어차피 할 일 못 끝내요.”  

로이 아빠의 만류를 그런 식으로 뿌리치며 빽구두 두꾼을 끌고 토비메이타를 출발했던 것입니다. 낮이었다면 광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시선이 닿는 전경 왼쪽 끝에서 오른 쪽 끝까지 족히 수천 핵타르는 될 몇 개의 산과 골짜기들에 키작은 야자나무인 끌라빠사윗이 줄지어 서 있는 바이오디젤 농장의 장관이 펼쳐졌을 텐데 밤에는 오직 우리 차의 헤드라이트만이 민가에서 멀리 떨어진 그 산속 도로의 유일한 발광체였습니다. 길이 험하고 곳곳에 진흙탕이 남아 있어 자칫 벼랑으로 미끄러질 수도 있었으므로 차는 낮처럼 속도를 낼 수 없었습니다. 토비메이타를 출발한 후 내내, 나는 두꾼들을 시켜 광산에서 뭔가를 하는 게 옳다 또는 그르다를 떠나 어쨌든 릴리가 동의해서 진행한 이 일에 대해 내가 이렇게 조치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하는 생각에 골몰했습니다. 저 사람들을 불러 들인 것도 분명 적잖은 비용이 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총기와 정글도가 난무하는 토비메이타에 저 사람들을 놔두고 나 혼자 랑기끼마나 끈다리로 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일단 한 명이라도 철수시키는 게 맞았습니다.

 

그러면서 불현듯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빽구두는 암본인 정착촌 마을이 있는 방향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전날 밤 라솔로에서 벌어졌던 암본 처녀 희롱사건을 그는 누구한테 들었던 걸까요? 두꾼 노인의 도제 정도라고 생각했던 저 남자는 실제로 남모를 신통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미스터르, 여기서 멈추면 안돼요!” 

뒷좌석에 앉아 있던 그 빽구두 두꾼이 갑자기 심상찮은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습니다. 운전하던 시막은 갑자기 긴장한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고요. 여길 그대로 통과해야 돼요. 왼쪽으로 붙여서 곧장 가세요.”

 

난 그 남자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마치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을 보고 있는 듯 했고 차 안엔 마치 우리들 뿐인데 누군가가 듣지 못하게 하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소근소근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오른쪽은 돌아보지 마세요. 곧장 가야 해요.” 

시막은 그의 말에 겁을 먹었는지 모르지만 난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인적이 없는 오지에서 홀로 산길을 달리는데 바퀴라도 터지지 않는 한 어차피 중간에 절대 멈출 리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남자가 그렇게 얘기하지 않더라도 우리 하이룩스는 산을 대충 다 내려가 왕구두 인근 중간휴게소가 나올 때까지는 곧장 달려갈 판이었죠. 이 남자는 결국 멀쩡히 잘 있는 사람한테 '계속 숨쉬어. 숨 안쉬면 죽어' 이러는 것과 다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내게 지시할 입장이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차를 멈춰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른쪽도 쳐다보지 말라고?

 

무슨 소리요?”

묻지 말아요. 아무튼 절대 오른쪽을 보지 말라고요!” 

귀신이라도 쫓아온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로니가 여기 어딘가에 매복을 시켜두었다는 얘기일까요? 어느 쪽이든 난 그에게 휘둘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부턴 말도 하면 안돼요. 내가 좋다고 할 때까지는 절대 말을 꺼내지 마세요.” 

그가 하는 이 말에 난 결국 뚜껑이 열렸습니다. 참 저렴한 표현이지만 이것 말고 달리 그 심정과 상황을 표현할 보다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시막, 차 세워.”

?”

차 세우리고!” 

그러자 뺵구두가 황급히 소리지릅니다.

 안된다고!!  안된다니까!!”

말 안들려? 차 세워!!”

 

꼭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시막이 급브레이크를 밟자 하이룩스는 진흙탕 길에서 미끄러지면 비스듬히 멈췄습니다. 누구보다도 시막 자신이 가장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난 빽구두를 돌아 보았어요

입 닥치지 못해?” 그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습니다.

귀신이 보이면 너 혼자 보고, 오른쪽 보기 싫으면 너 혼자 오른쪽 보지 말란 말이야!” 

그의 입가에 다시 히죽거리는 미소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위험한 곳을 막 벗어나서...”

너야말로 내가 좋다고 할 때까지 입 다물고 있지 않으면 여기 산길에 버리고 갈 거다.”

당신들은 내가 보호하고 있으니 여기선....”

시막!”

?”

이 새끼, 내다 버려.” 그의 미소가 싹 사라졌습니다. 

미스떠르...?”

이 아저씨 끌어 내리란 말이야.” 

물론 내가 그렇게 말한다고 시막이 산길 한 복판에서 두꾼을 끌어내릴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 제스쳐는 효과가 있어서 빽구두는 이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차 안에는 껄끄러운 적막이 흘렀고 그는 새벽 세 시가 넘어 끈다리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안되는 거였어요. 아이 참, 그러면 안되는데...” 

다음 날 아침 일찍 사무실에서 상황설명을 할 때 릴리는 내가 빽구두를 데리고 내려온 부분을 책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을 그냥 놔두고 왔어야 해? 로니, 그 미친 놈이 돌아다니는 동네에?” 

 

물론 막판에 험한 소리가 오간 것까지 내가 다 잘했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릴리가 그날 아침 전전긍긍하는 모습에 난 결국 빈정이 상하고 말았습니다. 명색이 일을 하는 것인데 부빠티나 경찰서장이나 바이어에게만 굽신거리는 게 아니라 두꾼들, 주술사들에게도 목을 매야 하는 것일까요? 

 

그날 오전 내가 메이에게 전화해 자카르타 상황을 파악하며 내 미용사업에 대한 업무지시를 하고 인근 클리닉에서 파상풍 주사를 맞고 오는 동안 릴리는 여러 군데에 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날 오후 내게 종이봉투를 한 장 건내 주었습니다. 자카르타 행 비행기표였어요. 벌크선 다섯 척이 모롬보만에 들어와 있고 아직 몇 척이 더 앵커리지를 통해 항해해 오면서 생산과 선적일정이 피크를 향해 다가가던 시기에, 제발 시간을 내달라며 온갖 방법으로 구슬려 끈다리로 불러들인 나를 이제 자카르타로 돌려 보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건 쫓겨나는 게 분명했고 그 주술사들과 엮인 사건 때문인 것도 분명했습니다.

 

2021년 2월엔 수라바야에서 인도네시아 두꾼 협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두꾼들은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비밀스러운 직업이 아닙니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