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니켈광산 영적 방어작전 (6) 본문
ep6. 흑마술
그 두 사람과 로이 아빠가 그날 아침 내가 끈다리를 출발할 때 사무실에 나와 있지 않을 것이란 사실도 릴리는 사전에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어요. 전날 밤 먼저 출발해 현장에 올라간 것일까요? 로이 아빠의 전화는 먹통이었습니다. 끈다리를 벗어나면 아세라만 해도 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이 많았고 토비메이타 지역의 광산지대에 들어서면 심빠띠(simPATI) 이동통신 신호가 잡히는 언덕이 하나 있어 전화를 하려는 사람들이 차를 타고 그 언덕에 모여들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 길가엔 늘 차량들이 몇 대씩 서 있었고 합판으로 대충 지어진 간이 와룽(warung) 한 개도 커피 타주는 사업이 성업 중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간신히 연락이 닿은 로이는 자기 아버지가 전날 밤 왕구두 집에 도착했다고 했습니다. 로이 아빠는 그 두 사람을 상전처럼 떠받들고 있었으므로 로이 아빠가 왕구두에 있다면 그들도 거기 함께 있을 터였습니다. 나는 운전사 시막과 함께 끈다리와 아세라의 경계를 이루는 왈라린도 강을 건너 북부 꼬나웨를 향해 차를 달렸습니다.
두 시간쯤 걸려 로이의 집에 도착했더니 릴리의 큰 언니인, 그러나 나이는 릴리의 엄마뻘이 될 이부 티나가 나를 맞으면서 내가 한 발 늦었다고 알려줬습니다. 30분 전쯤 거기서도 이미 출발했다는 겁니다. 나도 이제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부터 이런 술래잡기를 해야 하다니. 오랜 공직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이부 티나는 당시엔 일단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다음 지방의회 의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고 지방의회 부의장까지 맡게 되는 사람입니다. 아무튼 그녀의 잘못은 아니니 거기서 화낼 일은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을 만난 것은 왕구두에서 산쪽으로 나가는 북쪽 외곽의 한 식당이었습니다. 눈썰미 좋은 시막이 이부 티나의 끼장 밴을 알아 본 것입니다. 릴리가 광산을 하면서 들어온 계약금이나 물건대금으로 형제들에게 뭔가 사준 것들이 많은데 그 집안 막내인 그녀는 14남매 중 어린 시절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아 장성한 형제들 일곱 명 전원에게 몇 달 전 차를 한 대씩 사주었습니다. 오래 전 동업이 파산하면서 내 돈을 그리 많이 까먹었으니 나한테야말로 차 한 대 사줄 법 한데 릴리로서는 내 오래 묵은 빚을 정산하는 것보다 공무원들에게 앞으로 사업도움을 받도록 밑밥을 까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곳은 사슴고기 전문음식점이었는데 사테(Sate -꼬치구이)와 소토(Soto – 끌라빠 분말을 기반으로 국물을 낸 고기국)로 늦은 아침을 늘어지게 먹은 그들은 내가 당연히 거기서 자기들을 픽업할 거라 믿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난 그 끼장 밴을 운전해 온 로이에게 꿀밤을 한 방 먹였습니다. 미리 문자라도 넣어 두었으면 오는 길에 중간중간 신호가 잡힐 때 연락을 받아 사전에 그들 위치를 파악했을 텐데 말입니다. 몇 년 후 그 역시 술라웨시에서 공무원이 되는 로이도 당시엔 아무 생각없는 젊은이였습니다.
“운수가 좋으면 예정이 없어도 귀인을 만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약속을 수십 번 해도 만날 수 없는 법이요.”
그 상황에서 빽구두가 하는 말에 혈압이 확 오릅니다. 아침 내내 그들을 찾아 다니느라 전전긍긍한 셈인데 아무리 날고 기는 보안전문가나 용한 주술사라 하더라도 그들의 철학과 신앙에 놀아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미스떠르, 하띠하띠 사마 므레까.” 그런 마음이 내 얼굴에도 살짝 드러나자 시막이 옆구리를 찌르며 저 사람들한테 함부로 하지 말라고 속삭였습니다. 물론 이 정도 일로 얼굴을 붉힐 필요 없는 게 맞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아군이니 말입니다. 게다가 주술사들이라면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날아오는 총칼은 어떤 식으로든 피할 수도 있겠지만 주술사들이 부리는 귀신이나 그들이 쏘아대는 저주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을 테니 말입니다. 자바섬과 마찬가지로 무슬림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술라웨시 동남부, 특히 도시를 멀리 떠나온 산간지역은 아직도 주술이나 흑마술이 맹위를 떨치는 곳이었고 그런 전통은 그들에겐 삶의 일부로서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활 속에 침전되어 이슬람의 사고방식과 배치되면서도 묘하게 동화되어 있는 주술 전통을 종종 경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래 전 릴리와 한바탕 말다툼을 벌인 후 몇 달 만에 다시 끈다리를 찾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때 수십 년 만에 처음이라는 역대급 폭우가 쏟아져 술라웨시 동남부 전체가 물에 잠겼는데 왕구두에서 꼬나웨 산중으로 들어가는 도로도 곳곳이 침수되었고 어떤 곳은 키를 넘길 정도로 범람한 물이 일주일 넘게 빠지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받은 영감인지 모르지만 릴리의 어머니는 나와 릴리의 불화가 이런 천재지변을 불러 왔다고 믿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갑자기 술라웨시 주민들한테 좀 미안해졌습니다.
그래서 며칠 만에 광산에서 내려와 보니 릴리의 어머니가 끈다리 사무실에서 화해의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몇 개월 전엔 꽤 심하게 얼굴을 붉히며 큰 소리를 쳐댔지만 그때엔 이미 왜 싸웠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정식 화해라는 게 좀 뻘쭘했습니다. 게다가 양측에 증인을 한 명씩 세우고 이슬람식이라고는 절대 여겨지지 않는 복잡하고 기괴한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릴리의 어머니는 큰 쟁반 위에 놓은 역기봉 두께의 길다란 생나무에 홈들을 파고 그 홈에 각각 커다란 500루피아 짜리 구형 동전을 반쯤 파묻히도록 심었습니다. 나무에서 향기가 진동하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나무이거나 나무 껍질을 벗기면서 정성껏 모종의 전처리를 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릴리 어머니를 가운데 두고 나와 릴리가 양쪽에 앉아 준비된 생달걀으로 나무에 심어놓은 동전에 때려 달걀을 깨뜨리라는 겁니다. 이때 달걀이 박살나서는 안됩니다. 껍질에 구멍만 날 정도여야 해요. 즉 힘조절이 필요한 거죠. 그러면 릴리 어머니가 두 개의 달걀을 받아 한 컵에 넣고 정말 먹어도 될 지 몹시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쟁반 위 잎사귀에 올려 놓은 기묘한 재료들을 섞어 릴리와 내가 나누어 마시도록 했습니다.
잎사귀 위의 재료들은 마늘이나 향료 같은 것들 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약초나 꽃잎들이 있었는데 그것 말고도 정체불명의 이상한 가루들까지 정성껏 올려져 있었습니다. 주술적 기능을 재료들이었어요. 나이가 90이 다 되어가던 릴리 어머니의 시대엔 그 정도 주술은 상식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흑마술, 또는 백마술 어느 쪽으로 부르던 말이죠.
“미스떠르 배는 정말 고집이 센 사람인가 봐요? 아까 두 번? 세 번 만에 깨졌죠?”
“그게 뭐?”
“난 한 번에 깨졌는데. 그러니까 그 뜻은 난 단번에 화를 푸는데 미스터르는 한 번 화내면 잘 풀지 않는 성격이란 뜻이에요. 남자 성격이 왜 그럴까?”
말하자면 이제 막 정식으로 화해를 한 건데 릴리가 또 시비를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아까 내 달걀이 단번에 깨지지 않자 릴리 어머니나 증인들이 탄식을 흘리더니 이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그 얘기를 하는 눈치였습니다.
뭔가 사업의 중요한 전환점이 오면 조상들의 오래된 묘소를 찾아 성묘하는 것도 그들의 정기를 받아 악운으로부터 자신과 사업을 보호해 운수대통을 기원하는 일환이었고 오가는 길에 거래선이나 친인척이 건네는 음료나 커피를 절대 마시지 않는 것은 음독을 우려해서가 아니라 주술이 담긴 내용물을 마시게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맛이 이상하거나 그걸 마신다고 당장 죽지는 않지만 그 음료 안에 녹아 든 주술이 작용하여 어떤 이권이 걸린 사안에 대해 평소의 소신이나 회사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마치 최면술에 걸린 듯 어떤 특정인(보통은 주술의 시술을 요구한 의뢰인)의 이익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터무니없는 결정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내다보고 주관하거나 예방하는 사람들이 요즘 인도네시아 주류사회에서는 이슬람 지도자이자 선생들인 울라마와 끼아이, 우스탓, 루퀴아 등이지만 전통사회에서는 아직도 ‘두꾼’이라 부르는 흑마술사, 주술사들이 맡고 있습니다. 십중팔구 두꾼이 틀림없어 보이는 그 두 사람이 그날 광산으로 올라가는 내 차 뒷좌석에 로이 아빠와 함께 나란히 앉게 되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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