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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켈광산 영적방어작전

니켈광산 영적 방어작전(3)

beautician 2022. 1. 11. 11:57

ep3. 악의를 대하는 방법

 

 

 사실 산간오지에서 자신과 기업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자체적 경비가 필요하다는 것엔 나도 충분히 공감했지만 처음엔 릴리가 취하는 조치들이 좀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파산 후 내가 재기를 위해 숱한 고생을 했던 것처럼 당시 바뚜리찐의 탄광업계에 들어간 릴리의 고생 역시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미용사업으로 가닥을 잡은 이유는 모든 것이 상식에 따라 진행되지만은 않는 인도네시아에서 한번 파산을 겪고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외국인으로서 진행 도중 예상되는 극복 곤란한 불확실성과 실패 리스크가 높은 길을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용, 특히 미용실을 위한 미용기기 수입판매 사업은 판이 작은 만큼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짱 두둑한 릴리는 자신을 한없이 짓누르던 빚더미를 한 방에 해결하겠다며 아예 단위부터 다른 석탄사업에 바로 뛰어 든 것입니다.

 

당시론 그녀가 그 험한 현장에서 성공하리라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세계는 큰 기업들도 인맥과 공권력을 등에 업은 교활한 브로커들에게 대대적인 사기를 당하거나 잿밥에 눈이 어두운 지방관료들로부터 핵심 허가를 받아내지 못해 큰 손해를 안고 물러나곤 하던 곳이었으니까요. 그러나 1년 넘도록 광산현장 텐트나 바지선 위에서 쪽잠을 자며 일을 배운 끝에 릴리는 석탄 3천 톤을 똥깡에 실어 바다 건너 중부 술라웨시의 시멘트 공장으로 첫 선적에 성공합니다. 그게 2006년의 일입니다.

 

석탄 실은 바지선  

 

 

그 후 현지업체들로부터 신용을 쌓은 그녀가 유력한 인사들의 소개를 타고 쌓아나간 인맥을 통해 거래를 만들어 가더니 급기야 지질탐사팀을 구성해 전인미답의 깔리만탄 정글 속으로 들어가 몇 주씩 텐트생활을 하며 지질지도를 만들고 스폰서를 잡아 광산개발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깔리만탄에서 거둔 얼마간의 성공을 뒤로 하고 2011년에 술라웨시로 넘어온 릴리는 형제들 대부분이 고위 공직자로 재직하고 있던 끈다리(Kendari)를 중심으로 처음엔 니켈 수출 브로커로 일하다가 2012년 초부터 인근 광권을 하나 둘 인수하기 시작했습니다. 늘 쪼들리는 듯하면서도 광산을 인수할 정도로 돈을 굴리기도 하는 릴리가 난 너무나도 신기했습니다.

 

하지만 말단 공무원에서 부군수(Wakil Butapi)까지를 아우르는 공직에 포진한 형제들과 친인척들이 힘을 실어 준다고 해서 그녀의 광산사업이 순풍에 돛 단 듯 순항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 바닥은 사업의 단위가 크고 거대한 이권들이 구석구석 연계되어 있는 만큼 표면에 나선 사업가들 뒤엔 관료들과 손잡은 쟁쟁한 자본가들과 권력가들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릴리가 가진 배경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겁니다.

 

릴리가 우여곡절 끝에 첫 광권을 얻은 니켈광산은 바다로 이어지는 수심 깊은 강에서 불과 2-3km 떨어진 북부 꼬나웨 산중에 있었습니다. 그런 좋은 입지조건에 이미 탐사를 통해 상당한 니켈 매장량이 확인된 광산이 거의 헐값이라 할 만한 가격에 나와 있었으므로 릴리는 앞뒤 재지 않고 즉시 광권을 사들였습니다. 더욱이 그걸 중계한 사람 역시 먼 친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현지 광산업계의 유력한 선수로 부상하고 있던 릴리를 초장에 철저히 짓밟아 단숨에 싹수를 잘라 버리려고 업계 선수들이 담합해 만든 함정이었습니다.

 

릴리가 광권을 산 지역은 제티(Jetty)라 부르는 강가 부두로 나가는 길목과 릴리의 광산 동서남북이 다른 광산들에게 둘러 쌓여 있어 남의 땅을 통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맹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처음엔 우호적인 미소를 짓던 이웃 광산주들은 정작 릴리가 광권 인수를 마치자 광산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가차없이 막아버렸습니다. 릴리는 중장비를 현장에 넣을 수도 없었고 설령 한번 양해를 얻어 현장 준비를 마치고 니켈을 채굴해도 제티로 내보낼 수도 없었습니다. 임대해서 들여보낸 중장비들을 철수시킬 수도 없었으므로 릴리는 여기저기에서 계약위반으로 천문학적인 벌금을 내거나 선금을 낸 바이어에게 소송을 당할 판이었습니다.

 

외국기업이라면 대체로 이 대목쯤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에 봉착합니다. 사방의 업체들을 만나 아무리 사정한다 해도 소용없을 것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돈으로 해결하려 해도 사방을 둘러싼 5-6개 업체들 중 누굴 만나야 할 지, 도대체 어느 정도의 액수를 준비해야 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더욱이 분명 상당한 금액이 될, 그러나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없을지도 모를 그 비용을 절대 투자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설령 지출한다 한들 제대로 정상적인 경비처리도 될 리 없으니 세무당국의 주목을 받는 외국기업들로서는 백기를 들고 투항해 누군가의 하청업체로 전락하거나 두 손 두 발 다 들고 철수하는 수밖에 없기 쉽습니다.

 

그 대목에서 릴리가 수완을 발휘합니다. 그녀는 전전긍긍하던 투자자를 설득해, 만약 제값을 주고 광권을 샀다면 들어갔을 비용의 차액만큼을 더 받아내 여러 개의 쇼핑백에 현금을 나누어 담고, 이 함정을 쳐놓은 배후의 모회사들과 관료들을 자신의 친인척 인맥을 통해 파악해, 일일히 찾아가 누구라 할 것도 없이 그 쇼핑백을 하나씩 전달하며 길을 열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던 것입니다. 릴리가 정확히 얼마를 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10만 루피아 짜리로 채우면 작은 쇼핑백에도 몇 억 루피아 즉 수만 불 정도는 들어갑니다.

 

돈이란 사람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기도 하지만 한 팀으로 뭉친 사람들을 분열시키기도 하는 요물이죠. 우여곡절 끝에 그들 중 한 회사가 마침내 릴리에게 제티와 끈다리로 나가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물론 이런 저런 불리한 조건들이 잔뜩 달렸지만 릴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의 없이 모두 수용하면서 오히려 그 회사를 완전히 자신의 우군으로 돌려 앉혔어요. 그렇다고 다른 회사들과 척을 지지도 않았습니다. 채굴과 선적이 시작된 후에도 그녀는 그때 끝내 길을 터주지 않은 다른 업체들에게도 이미 전달한 쇼핑백을 돌려달라 하지도 않았고 나쁜 소문을 흘리지도 않았으므로 그 사건은 결과적으로 업계에서 릴리가 통 크고 수완 좋은 사업가라는 평판을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끝내 아무도 길을 안 열어 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럼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길을 열었겠죠.” 

이런 상황을 접할 때마다 옛날 처음 나랑 일하던 시절, 자신이 주문한 회사 편지지 양식에 주소가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인쇄소에 수정과 재인쇄를 위해 담판 지으러 갔다가 냉정히 거절당한 후 회사에 손해를 입혔다는 죄책감에 돌아오는 길 내내 펑펑 울고 있던 20대 초반의 릴리를 기억해 내곤 합니다. 그랬던 그녀가 이제 강철 같은 멘탈을 가지고 아수라장 같은 광산현장에서 모든 문제들을 척척 해결해 나가는 것이 대견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뚜리찐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한국인 교민사회에서도 최소한 남자들 절반은 광산, 그것도 석탄사업의 뜨거운 열기에 대체로 한 발씩 걸치고 있던 시절, 깔리만탄의 탄광들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그 뒤를 이어 비철금속이 각광을 받으며 수많은 교민들과 한국업체들이 납이며 망간, 아연, 니켈 광산에 뛰어들던 시절 벌어졌던 사건사고들과 감당할 수 없는 방향으로 마구 전개되어가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