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BOQ에서 키웠던 고양이

beautician 2016. 9. 8. 10:00

 

어렸을 때 우리 집에 할머니가 키우시던 개가 있었습니다. 메리라고 불렀던 검정색 똥개가 나중에 새끼들을 낳고(당시 개 이름들은 왜 그렇게 메리’, ‘등의 이름 일색이었는지…) 그래서 때로는 두 세 마리로 많아질 때도 있었지만 최소한 언제나 한 마리 이상의 개를 항상 키웠고 언젠가 뜰이 없는 집으로 이사가게 되면서 정든 개를 이웃집에 넘겨 주며 섭섭함에 눈물 글썽였던 기억도 있습니다.

 

더 어렸을 때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는데 항상 기와집 지붕 위로 돌아다니다가도 밥을 내놓으면 귀신같이 알고 어디선가 나타나곤 했지만 며칠씩 보이지 않는 날도 많았지요. 그러다가 아마도 제 짝과 살만한 다른 곳을 찾았는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고양이가 개보다 정이 없는 동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자대배치를 받은 첫날 밤, 나는 숙소 밖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3땅굴을 관리하는 멸공관이라는 시설의 본관 건물은 강당과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뒤로 소대원들의 내무반과 내 소대장 숙소는 PX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숙소를 난 군시절 내내 혼자 사용했습니다.

 

휴전선까지 불과 몇 2km 도 떨어지지 않은 전방지역에서 처음으로 혼자 잠을 이루어야 했던 그 날 밤, 문밖에서 들려오던 그 소리는 마치 아기 울음소리 같았는데 전방부대 수풀 우거진 한 외곽시설에, 그것도 칠흙같은 한 밤중에 갓난 아기가 버려져 있을 리는 만무한 일이었죠. GOP 지역 내에 있는 일반인 지역인 통일촌 대성동 마을도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어딘가 구슬픔마저 느껴지는 그 스산한 소리가 또 다른 아기 울음소리들과 어우러지며 내 방문 밖을 자꾸 어른거리기에 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상황을 수긍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
개성 바로 밑이고 6.25 때 격전지였으니 여기서 죽은 민간인들도 꽤 많았을 것이고 아기들도 많이 죽었겠지. 불쌍한 녀석들… 그 철 없는 영혼들이 아직도 여길 떠나지 못하고 밤마다 울며 배회하는구나…'

문을 열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하고 간단히 믿어버리자 그 후에도 매일 밤 그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무서운 생각 대신 오히려 측은한 느낌이 뭉클거렸습니다.

며칠 지난 후 상황실에서 내 전임소대장으로 그 방을 썼던 서울대 중문과 출신 학군선배 이중위에게 그런 감회를 말하자 그는 입에 삼키려던 커피를 스프레이처럼 내뿜으며 깔깔 웃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아기 울음소리라고 생각했던 그 소리는 사실 고양이 울음소리라는 겁니다. 우리 부대 뒤쪽으로 펼쳐진 야산에는 수많은 야생고양이들이 살고 있었고 내 숙소가 PX 바로 옆이니 밤마다 고양이들이 내려와 쓰레기통을 뒤지며 울어대는 건 당연한 일이었죠. 그때 느낀 배신감…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혼자 감상에 젖었으니 얼굴까지 화끈거려 왔습니다
.

그날 밤 다시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서, 귀신을 보더라도 절대 놀라지 않겠다는 각오로 문을 열어 재쳤을 때 눈앞에 나타난 것은 수십 마리의 고양이떼였습니다. 그 녀석들이 내 방문 앞과 PX 쓰레기통 주변에서 그 아기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가 문을 여는 소리에 동작그만 상태에 들어가면서 문밖을 나서는 나를 서늘한 안광으로 응시하고 있었죠.

 

교배기에 이른 고양이들이 그런 소리를 낸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방문 앞에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아 그 고양이들을 바라보며 어이없어 했습니다..

고양이 꼬리를 잘라 용맹을 과시하는 소대원들을 설득하고 가끔 내 방문 앞에 먹이를 놓아 두곤 하자 이제는 고양이들이 낮에도 종종 모습을 드러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사람들을 피하지도 않았어요. 그 중 두 마리는 밤낮으로 내 방 알루미늄 문턱을 발톱으로 긁어대며 먹이를 달라고 자주 졸라댔는데 나중에 내 방 안까지 들어와서 쫓아내지만 않으면 밤새 지내다 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중 밤색 털 고양이를 '밤탱이', 호랑이 축소판처럼 생긴 놈을 '얼룩이'라고 이름까지 지어 주었어요.

 

늘 혼자 잠자리에 들어야 했던 나는 그 두 마리의 고양이를 바라보며 밤마다 얘기도 걸어 사랑과 인생에 대해 논해 보기도 하고 식당에서 음식도 챙겨주면서 무척 정이 들었지만 반면 내 방을 청소해 주던 당번병들은 질색을 했던 모양이에요. 고양이들이 방안에 배설물을 남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털갈이를 할 때마다 내 방은 몇 주 씩 매일 한웅큼은 될 고양이 털이 휘날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1년쯤 정이 새록새록 쌓인 고양이들이 어느 날 내가 휴가를 다녀오자 보이지 않았습니다바쁜 낮 일과를 마치고 해 저물 녘부터 혹시 문밖에 밤탱이과 얼룩이가 와있지 않을까 밤새 몇 번 씩 문을 열고 내다보곤 했죠. 그러나 그들은 그 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고양이는 개보다 정이 없는 동물이야... 어릴 적 밤마다 기와집 지붕 위를 바라보면서 키우던 고양이를 기다리며 가졌던 그 느낌이 새삼 떠올랐지요. 많이 섭섭했습니다
.

나중에 전역하고도 몇 년이 더 흐른 후 땅굴 소대장이던 전중위의 결혼식이 있었던 부산에서 만난 당시 내무반장 영우에게서 그때 내가 휴가 간 사이 소대의 중고참 몇 명이 내 방 앞에 찾아온 고양이들을 잡아다가 뒷산에서 목 매달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그때의 섭섭함은 분노 같은 것으로 변했습니다.

 

부대 장교들 모시는 것도 쉽지 않은데 소대장 고양이까지 상전 대우해 주는 게 고까웠을 것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 한 마디 하면 됐을 걸...  다짜고짜 고양이를 나무에 매단 소대원들은 그때까지 한번도 동물을 키워보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거꾸로 그들 보기에 내가 부하들 고충을 등한시 하는 오만하기만 한 소대장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그 고양이들이 나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분한 마음과 불쌍한 마음에 잠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전역하고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도 난 아주 가끔은 아직도 멸공관 뒷 야산을 천방지축으로 뛰어 다니고 있을 밤탱이와 얼룩이를 떠올리며 피식 미소짓곤 했기 때문입니다.

 

고양이들이 사라지고 얼마 후, 어느 날 선임하사가 개 한 마리를 찝차에 싣고 왔습니다.

 

소대원들이나 내게 대충 할아버지뻘이 되는 김상사는 사단사령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보기만 해도 식욕이 돋는 개 한 마리가 도로변을 배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입맛을 다시며 유괴해 온 것입니다.

 

"얘들아, 이 놈 자~알 먹여서 살 좀 찌워둬라."

 

기대에 찬 표정으로 소대원들에게 그렇게 말하던 김상사의 희망은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침 고양이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쓸쓸해 하던 내게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내무반 앞에 가만이 앉아 짬밥 찌꺼기를 얻어먹고 있던 이 흰털의 순한 개가 너무 반가웠던 것입니다.

 

소대장님은 소대원들이나 신경 쓰지 왜 개한테까지 신경 씁니까?”

 

이렇게 격렬히 항의해 오는 김상사와 여러 번 말다툼까지 해야 했지만 결국 문산에서 보신탕을 한번 거하게 사드리는 조건으로 흰둥이를 넘겨 받는 데 성공했지요. 그날부터 내 방에는 고양이털 대신 개털이 휘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암놈인 흰둥이는 군대 짬밥에 익숙해 지고 살이 좀 오르면서 사람을 잘 따르는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깔끔을 떨고 낯을 가리는 고양이와는 달리, 볼 때마다 맘 속으로 근수를 가늠하는 김상사에게도 꼬리를 흔들며 반겼고 작업 나간 소대원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재롱을 떨기도 했지요

.

심지어 아침에 내가 상황실에 들어설 때마다 따라 들어와 책상 밑에 자리를 잡고 장교들 군화를 핥아 주면서 장교들에게도 귀염을 받았지만 너무 나를 따라다니는 통에 가끔 멸공관에 고위장성이 행차할 때에는 내 숙소에 가두어 놓아야만 했습니다. 흰둥이는 생리현상이 급해지면 짝이 잘 안맞아 완전히 닫히지 않는 내 숙소 문을 스스로 앞발차기로 차고 뛰어나오기도 했지만 의전행사가 이루어 지고 있을 때에는 누군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줄도 아는 영리한 개였습니다. 그 사이에 거의 군견이 다 된 거였죠.

김상사가 이번에는 누런 개를 납치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얘들아, 이 놈 자~..' 까지 말하기도 전에 내 눈에 띄었고 누렁이가 숫놈인 것을 안 나는 '우리 흰둥이 혼사까지 신경 써주는 선임하사니임~~ '하며 아양을 떨어 김상사의 반격을 사전에 봉쇄하고 누렁이를 가로채는데 성공합니다.

 

김상사로서는 속 터질 노릇이겠지만 계급이 깡패인 군대에서 어린 소대장에게 눌려 입맛만 다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에 이르러서는 소대원들이 내무반 옆에 개집까지 지어주었지만 가을이 깊어지고 기온이 떨어지면서 사려깊은 당번병은 내 숙소 연탄난로 옆에 새끼줄로 엮은 큰 바구니로 혼방을 따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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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이 되고 멸공관 장교들이 문산으로 나가 조촐한 신년회를 하며 술도 좀 마신 날, 동료들과 함께 자유의 다리를 호기있게 도보로 건너 숙소에 돌아와 보니 흰둥이와 누렁이가 비좁게 끼어앉은 새끼줄 바구니 안에 뭔가 조그만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 만삭이던 흰둥이가 나 없는 사이에 새끼를 두 마리나 낳았던 겁니다. 술이 다 깼어요.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새끼들을 가만히 집어 드는데 엄마인 흰둥이가 걱정스러운 눈치로 낑 하며 앓는 소리를 냅니다.

 

걱정 마, 조심할께.

나도 나중에 내 아이들을 갖게 되지만 갓 태어난 생명을 본 것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내 손바닥 반만한 크기의 새끼들은 신기하게도 엄마 흰둥이의 흰털을 바탕으로 아빠 누렁이를 닮은 누런 색 점들이 큼직큼직하게 머리며 몸통에 몇 개씩 박혀 있었습니다. 한 놈은 숫놈, 다른 한 놈은 암놈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내 전역일이 다가오면서 김상사가 개들을 보는 눈빛이 점점 축축해져 갔습니다.

 

이제 전역하고 나면 뜰도 없는 우리 집에 이 큰 개들을 네 마리씩이나 데려갈 수는 없는 일이었어요. 전역하기 며칠 전부터 개들을 뒷산으로 쫓아 내려고 매정하게 굴어도 보고 때려 보기도 했지만 개들은 여전히 내 방과 소대내무반 앞을 떠나지 않고 내 뒤만 슬금슬금 따라 다녔어요. 내가 가고 난 후의 저희들 운명을 전혀 예감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개들 걱정 마시고 소대장님이나 사회 나가서 잘 사쇼."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군생활을 한 노병 김상사의 말에는 전혀 악의가 묻어있지 않았지만 개들 걱정 말라는 부분은 믿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개들은 내게 부대를 떠난 후 차례 차례 식탁에 올랐다는 것을 후에 전역한 소대원들에게 나중에 듣고 알게 되었죠.

 

하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어느 정도 자란 두 마리의 새끼 중 한 마리를 전역하는 날 안고 나와 뜰 있는 집에 살고 계시던 외삼촌 댁에 억지로 맡기는 것 뿐이었습니다.

군문을 떠난 지 이십년이 지난 후에도 내가 기르던 흰둥이, 누렁이와 새끼 두 마리는 소대원들과 동료 장교, 하사관들 얼굴과 함께 겹치면서 친구처럼 정겹게 떠오르는데 그 개들이 그 정겨운 사람들 누군가의 뱃속에서 지금은 이미 소화된 지 오래라는 사실에 당연하다고 체념해야 할지 분개해야 할지 서글퍼 해야 할지 혼돈스러워지기도 합니다.

  

아마도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우리 집 뒷뜰에서 쥐약 먹은 쥐를 잡고 죽은 강아지의 뻣뻣해져 가는 작은 몸을 끌어안고 울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지요.

 

 

 

아직도 아이들이 어리고 가족을 인도네시아로 데리고 들어오기 전이었던 어느 해 겨울, 서울로 출장와 있던 일요일 아침에 집에서 석 달 째 키우던 토끼가 죽었습니다.

 

매일 채소를 썰어 먹이를 주고 정성을 쏟았던 아내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했지요.. 이제 막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던 아이들은 '? 죽었네?' 하며 놀라지만 그때는 그렇게 충격을 크게 받은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전날 밤 특별메뉴로 토끼에게 처음 준 쑥갓이 원래 먹여서는 안되었던 것 같다고 말하며 이내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되지만 나는 나대로 추운 겨울 다들 잠든 밤에 회사에서 가져온 일을 한다며 창문도 열지 않은 거실에서 며칠째 담배를 피워댔으니 문간에 있던 토끼의 사인은 아마도 대기오염에 의한 질식사였으리란 확신이 듭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할 뿐이었죠.

동물들을 키우고 싶어하긴 했지만 정작 겁이 나서 동물원에서 낙타를 보고서도 겁을 내던 큰 애 수현이는 처음 키워보는 포유류 동물인 토끼를 한 번도 제대로 안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출장 중에 자꾸 안아도 보고 쓰다듬기도 하도록 시키며 정을 들이는 중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토끼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왔어요
.

이미 뻣뻣해진 토끼의 몸을 그냥 쓰레기통에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아이들의 똘망똘망한 눈초리 앞에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어 교회 가는 길에 늘 지나는 오금공원에 묻어 주기로 했습니다. 오금공원에 가는 차 안에서 아이들은 트렁크에 실린 토끼의 죽음을 벌써 잊었는지 장난치고 싸우느라 난리가 났지요. 신문지에 싼 토끼의 시신을 들고 오금공원에 올라 한 소나무 밑 땅을 파려고 하는데 꽁꽁 언 땅이 도저히 파지지 않아 결국 땅이 조금 패인 곳에 토끼를 놓고 나뭇잎을 끌어 모아 수북이 덮어주는 것으로 가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토끼 위해서 기도해 줄까?"

 

작은 애 지현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우리 토끼, 예쁜 토끼 천당가게 해주세요. 그리고 죽게 돼서 너무 불쌍해요."

 

처음엔 장난끼가 잔뜩 묻어나던 지현이 목소리가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먼저 울음을 터뜨리는 건 수현이부터였어요.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우리 아들 수현이도 사실은 토끼에게 정이 들대로 들어 토끼의 죽음에 그 작은 가슴이 시리도록 아파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대도 남자라고 애써 내색을 않고 있었던 거죠.

 

찬 겨울아침의 공기가 옷깃을 저미게 하는 오금공원에서 울고 있는 두 아이를 나는 꼭 안아 주었습니다. 아이들의 울음에서, 그 눈물에서 전염되는 슬픔이 내 마음도 적셔 왔지만 한편으로는 작은 동물에게 정을 주고 그 불행을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아이들의 예민한 감수성과 그 착한 마음 역시 따뜻하게 전해져 왔습니다.

 

"우리 토끼… 너무 춥겠다."

 

공원을 내려오면서도 걱정스러운 듯 토끼의 나뭇잎 무덤을 자꾸 뒤돌아보던 지현이가 하던 말이었습니다.

동물을 기르는 것에 과도한 의미를 두어서도 안되겠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어릴 적, 개와 고양이를 보살피면서 '주는 사랑'을 배우고 이들과의 이별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사람들과의 이별을 연습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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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잊혀진 것 만 같았던 어린 시절의 순수가 아이들의 동물사랑을 통해 투영되는 것을 발견하면서 당시 매우 어려웠던 시기에 더더욱 가족들을 사랑할 수 있었고 경제위기의 한파가 엄동설한의 추위보다도 더욱 맹위를 떨치고 있던 1999년 당시 애완동물들이 길거리에 많이 버려지고 있다는 뉴스 보도를 떠올리며 버리는 사람과 버려지는 동물들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 한 편이 편치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