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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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
“배과장, 뭐 하러 그런 꼴까지 보면서 남아 있으려는 거에요? 이제 와서 신입사원들처럼 바닥부터 다시 일 배우게요? 이건 오히려 천금 같은 기회에요. 어차피 회사에선 의류팀 닫는다는데 이 회사 바이어들, 우리가 다 가지고 나가자구요.”
박과장이 내게 이렇게 열변을 토한 것은 1996년의 여름이었습니다. 1년 반 동안의 인도네시아 근무를 마치고 본사에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보통 3년 이상 하는 해외근무를 유독 짧게 마친 이유는 현지 8년 차 터줏대감이었던 공장장과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듬해 생떼 같은 우리 현지 의류공장이 벨기에 회사에 넘어간 것은 당시 표면적 이유였던 시황악화나 누적손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부적으로 불거진 비자금 문제를 본사 모르게 처리하려고 공장장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성과이기도 했습니다. 7년간 공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아무런 오점도 남기지 않았던 초대 공장장과 달리 두 번째 공장장이 비자금 마이너스 28만 불을 기록한 것은 그가 공장의 경영을 넘겨받은 지 불과 1년도 채 경과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마이너스 비자금 28만 불이란 본사보고나 결재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있어야 할 돈이 그만큼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당시 세계곳곳에서 수천만 불짜리 프로젝트를 여럿 진행하고 있었으니 겨우 28만 불 따위가 대수일 리 없었지만 개인에게 엄청난 금액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임기만료가 임박한 공장장은 그 돈을 다시 채워 넣거나 적당한 지출항목을 붙여 떨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해결할 수 없다면 그는 그것을 은폐해야만 했습니다. 그가 우선 생각했던 것은 ‘폭탄 돌리기’였습니다. 후임공장장 내정자로서 부임한 나에게 그 비자금을 비밀리에 인수하라고 강권한 것입니다.
“일단 인수하고 나면 임기 중 어떤 식으로든 채워 넣을 방법이 있어. 나도 도와줄게. 그러니 공장장 말 듣고 조용히 처리하자구.”
시내 지사장도 공장장에게 가세해 나를 압박했습니다. 지사장은 공장장의 입사동기였습니다. 인수인계의 마지막 단계에서 내게 넘어온 비자금 장부는 본사 감사팀에 지출이유를 도저히 소명할 수 없는 내역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지사장의 룸살롱 술값을 대신 갚아주었다는 내용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5만 불, 7만 불씩 뭉칫돈이 빠져나간 부분에는 사용내역조차 기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공장을 운영하다 보면 설명하기 곤란한 용처들도 있는 법이야. 그걸 어떻게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있어?”
그 내용을 묻는 내게 공장장은 짜증만 낼 뿐 구체적인 설명은 결국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돈이 빠져나가던 시기에 공장장과 지사장이 본국 신도시에 아파트를 장만했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회사 일이란 몇 십만 원만 비어도 시말서를 쓰고 개인이 책임지고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인데 문제가 된 금액은 누군가의 목을 날리고도 남을 규모였습니다. 그 시한폭탄을 내 품에서 터지게 할 수 없었습니다. 난 공장을 인수하러 온 것이지 전임자의 빚은 떠안으려 온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나중에 이 문제가 본사 감사팀에게 적발된다면 공장장은 십중팔구 자긴 모른다며 발을 뺄 것이고 그럼 꼼짝없이 나 혼자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쓸 것이 뻔했습니다. 나는 당연이 그의 요구를 완강히 거절했고 공장장이 나를 위험한 적으로 간주한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해 보니 내 책상서랍의 자물쇠가 뜯겨 있고 그 안에 보관했던 비자금장부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누구의 짓인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 후 내 현지생활은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회유를 포기한 공장장과 지사장은 노골적으로 내 운신의 폭을 좁히며 공격해 오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본사에 ‘지사근무 부적격자 징계요청서’라는 것을 몇 번이나 보내더니 결국 자신들의 지사근무연한을 2년 더 연장했습니다. 내가 자카르타에 온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결국 난 1년 반 만에 먼저 본사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건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한편 그 비자금 문제는 공장장이 1년 더 끌어안는다고 해서 해결될 리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공장매각이 결정된 것입니다. 공장을 헐값에 넘기면서 이를 인수한 벨기에 업체는 수백만 불의 이익을 보았습니다. 마침 그간의 누적결손으로 인해 인도네시아 공장의 철수가 본사에서도 거론되자 공장장은 서둘러 공장매각의 전권을 넘겨받아, 구매의사를 보인 한 벨기에업체와 급히 딜을 마무리 지었던 것입니다. 본사 감사를 피하고 비자금 28만 불 문제를 조용히 덮으려고 그 몇 십 배의 손해를 감수하며 강행한 졸속매각이었습니다.
내가 돌아온 본사의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했습니다. 공장장과 지사장이 공식 보고채널을 통해 용의주도하게 공작한 결과였습니다.
“내 밑으로 들어와. 의류팀 복귀보다 백 배 나을 거다.”
대학선배였던 기획실장은 내게 전화위복의 기회를 주려 했지만 당시 난 무척 복잡한 심경이 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회사에 남는다는 건 머지 않아 본사에 돌아올 공장장과 지사장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들은 내 목숨까지 노렸습니다. 비자금장부가 사라진 지 일주일쯤 후 내 차가 출근길 고속도로에서 갓길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논두렁에 처박히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주행 중 앞바퀴가 터진 것입니다. 차가 대파되는 큰 사고였지만 난 구사일생으로 생채기 하나 입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터지지 않은 다른 바퀴들에도 깊은 칼자국이 몇 개씩 나 있었습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사고가 아니라는 의미였고 그 배후가 누구일지는 너무나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본사에서 다시 얼굴을 대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같이 나가자니까.”
그래서 박과장의 그런 속삭임이 계속 귓전을 맴돌았습니다. 사실 마음이 회사를 떠났으니 몸도 따라 나서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습니다. 난 마침내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의류팀원 대부분과 함께 사표를 던졌습니다. 우린 퇴직금을 모아 따로 회사를 세웠고 난 곧 인도네시아로 다시 날아갔습니다. 박과장이 내게 원한 것은 자카르타에서 자재를 수급하고 하청공장을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찾은 자카르타는 떠나기 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 사이 내 입장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난 당연하게 여겼던 대기업 프리미엄을 내려놓고 더욱 허리를 굽혀 거래선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예전엔 회사가 지불해 주었던 주택, 차량, 비자 등의 비용이 개인이 스스로 감당하기엔 매우 버겁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는 기간이었습니다.
“일단 배과장 돈을 먼저 좀 써 주세요. 나중에 돈이 벌리면 소급해 드릴 게요.”
우리가 사장으로 추대한 된 박과장이 그렇게 말했지만 신생 회사가 궤도에 올라 돈을 벌게 되는 것은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내 퇴직금은 순식간에 바닥 났으므로 가족들을 데려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왜 당신 혼자 그 먼 데 나가서 생고생을 하냐구요? 이용당하는 거 아니에요?”
아내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내게도 석연찮은 부분들이 자꾸 보였으니 말입니다. 신용장 상 가격을 박사장이 내게 숨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동업자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만드는 제품을 그가 바이어에게 얼마에 파는지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은 그 오더를 통해 발생하는 이익이 얼마인지도 숨기겠다는 의미로 읽혔으니까요.
“전 직장에서 8년을 함께 일한 친구야. 게다가 지금은 내가 그 친구한테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안돼. 당신도 조금만 더 참아 줘.”
내가 흔들려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의류팀이 해체되지 않았다면 박사장도 곧 해외지사에 나갈 케이스였습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를 기대하고 있었죠. 어쩌면 그도 운명의 변덕에 나만큼 절치부심했을 것입니다. 우린 서로의 상처를 감싸고 위로해야만 했고 우리들의 동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난 박사장에게 얼마든지 양보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사장의 생각은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는 분명 서울에서 나머지 동료들과 함께 뭔가 내가 모르는 비밀들을 하나 둘씩 만들고 있었습니다.
몇 개월간 각고의 노력 끝에 첫 선적이 이루어졌고 드디어 월급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숨통이 트인 것입니다. 난 이제 모든 것이 보다 수월해질 것이라고 낙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이내믹합니다. 그런 장미빛 예측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1997년 하반기 태국발 외환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했습니다. 그건 개인이 노력해서 막거나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달러가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날이 치솟았고 수많은 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하면서 부채와 인건비에 쫓겨 야반도주하는 교민들의 소식도 매일 들려왔습니다. 서울본사로부터 오더도 끊겨 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사장은 더 이상 비용도 보내줄 수 없다고 통지해 왔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언젠가 최악의 순간이 닥쳐오면 이역만리 타국에서 생존과 탈출을 위해 홀로 투쟁해야 함을 박사장의 손을 잡던 순간 이미 각오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하는 상황이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1998년 5월 서부 자카르타 뜨리삭띠 대학의 반정부시위 도중 경찰군의 발포로 시위대 학생들이 사망하면서 전국적 대정부 투쟁이 촉발되었고 혼란에 편승한 도시빈민들의 광기 어린 폭동과 약탈이 자카르타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자카르타는 전쟁터가 된 것처럼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습니다. 자카르타의 북부 중심가인 끌라빠가딩엔 그 지역을 재개발하던 수마레콘사가 사온 군부대가 외곽경계에 나섰고 남단 사거리에 거치된 기관총이 진입을 시도하는 폭도들에게 불을 뿜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계엄군들은 시내 거점들을 확보하고서도 사실상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화교 상업지역으로 쏟아져 들어간 폭도들은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고 수많은 화교 여인들이 무자비하게 겁탈당했습니다. 자카르타 국제공항마저 인도네시아를 떠나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고 자국민 소개를 위해 국적기를 보내오지 않은 무심한 국가의 국민들은 항공권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만 했습니다.
30년 넘게 철권을 휘둘렀던 독재자 수하르토 대통령이 마침내 하야하기에 이르지만 해를 넘기도록 크고 작은 폭동들이 간헐적으로 발생했고 전국에서 인종간, 종교간의 대대적인 유혈충돌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 수천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일련의 사태들로 인해 손이 묶인 나는 뭔가 일들을 벌이기는커녕, 이미 시작해 놓은 사업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이듬해 초 난 철저한 실패를 안고 결국 서울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귀국하여 첫 출근한 회현동 사무실의 분위기는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동안 박사장의 엄살과는 달리 본사 동료들의 얼굴엔 지옥 같은 외환위기를 싸워 견뎌낸 고생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정말 예전 같지 않아요. 외환위기 때엔 일주일에 서너 번씩 룸살롱도 갔어요. 그땐 돈이 정말 쏟아져 들어왔거든요.”
경리를 맡고 있던 서대리는 그렇게 말하다가 내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급히 입을 다물었습니다. 뒤에서 눈치를 주던 박사장은 딴청을 피웠고 다른 동료들은 바쁜 일이 있는 척하며 부랴부랴 자리를 떴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자카르타에서 구축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동안 회사가 금방이라도 망할 것처럼 엄살을 떨며 모든 지원을 끊어 버렸던 본사는 그 사이 생산기반을 몰래 중국으로 옮겨 외환위기로 하늘을 찌르던 달러화 덕을 톡톡히 보며 사상초유의 흑자를 누렸던 것입니다. 박사장과 본사 동료들은 매일 밤 폭죽을 쏘아 올리듯 서울의 밤을 밝히며 룸살롱과 가라오케에서 흥청망청했고 아동복 인터넷쇼핑몰에 투자해 제품촬영용 스튜디오로 개조한 사무실 한 편엔 고가의 촬영장비들이 잔뜩 들어차 있었습니다. 박사장과 서대리가 굴리던 최고급 신형 세단들도 그 영광의 시절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난 기가 막혔습니다.
“회사 어렵다더니 다 거짓말이었어?”
“배과장 고생한 거 잘 알지만 서울에서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많았어요.”
“명색이 동업인데 서울이 그렇게 살만 했으면 최소한 자카르타 사무실도 유지는 할 수 있게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오?”
“뭐, 냉정하게 들릴 지 몰라도 그 동안 서울에서 올린 흑자에 사실 배과장이 기여한 게 없잖아요? 본사가 직접 중국에 오더를 넣고 관리하면서 창출한 흑자에요. 애당초 자카르타랑 관계없는 이익이었단 말입니다. 우린 이제 인도네시아에서 생산할 계획이 없어요.”
박사장은 말로 내 뺨을 후려쳤습니다. 우리가 한 팀이라 믿었던 것은 나 혼자뿐이었던 것입니다. 원래 업무분장 자체도 박사장이 서울에서 오더를 관리하면 내가 해외에서 생산관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생산기반을 완전히 중국으로 옮기려 했다면 나 역시 인도네시아를 정리하고 중국에 옮겨갔어야 했습니다. 중국하청공장관리는 전 직장 본사시절에도 하던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박사장은 차제에 나를 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투자한 돈을 돌려줄 생각도 없었습니다.
“자카르타에서 돈을 못 벌었으니 그간 운영비랑 생활비 보내 준 걸로 배과장 투자금은 이미 정산한 걸로 칩니다.”
그러니까 자카르타 폭동의 한복판에서, 화염이 치솟던 주택단지 안으로 밀려들던 폭도들과 맞서 싸울 때, 난 나도 모르는 사이 박사장에게 한계효용을 다한 폐물이 되어 현지에 버려졌던 것입니다.
박사장은 내가 회현동 사무실에 나오는 것도 부담스러웠습니다.
“이 사무실에서 배과장 할 일이 더 이상 없어요. 그래도 밥값은 해야 하니 우리 협력업체 일손이 딸리는 모양이던데 거기 가서 일 좀 도와 줄래요?”
전 직장에서는 의류팀 해체를 계기로 일어난 도미노현상으로 일반상품부 전체가 와해되었는데 그 와중에 독립한 사람들 중 중국 광조우에서 가죽자켓을 생산해 일본에 수출하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 선배 일본어 많이 딸리는데 마침 배과장 돌아왔다는 얘기 듣고 반색을 하셨어요.”
회사를 나가라는 얘기나 다름 없었습니다. 전 직장에서 온갖 감언이설로 합류를 종용했던 박사장이 이제 날 회사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월급은 50대 50으로 하자고요. 반 입금하고 반은 배과장이 쓰시고.”
난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날 밤 남대문시장 뒷골목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혼자 소주잔을 거푸 비우며 난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비웃었습니다.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여러 선택지가 남아 있던 시절, 하필이면 박사장의 배에 올라타기로 결정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으니 말입니다. 그 결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아내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습니다. 그 즈음 이미 본사에 돌아왔을 공장장과 지사장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입가에 떠올릴 비웃음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했습니다. 남들에게는 인생의 전성기였을 30대 초반을 난 박사장에게 휘말려 그렇게 허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또 한번의 반전이 찾아왔습니다. 박사장 회사의 수입을 메워주기 위해 다른 회사에 월급 받으러 가야 하는 부조리한 상황이 또 다시 내 등을 떠밀고 있을 때 대학동기의 의약품회사 자카르타 지사장으로 전격 발탁된 것입니다. 이미 베트남에 터전을 닦은 그가 인도네시아까지 시장을 확대하려 하던 차에 마침 현지 경험을 쌓은 나와 만나 건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비록 박사장과의 동업에 투자한 돈은 모두 잃었지만 난 자존심만을 간신히 건져 다시 인도네시아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대반전의 스토리는 또 다른 반전과 복선들을 숨기고 있는 법입니다. 당시 현지 규정상 한국산 의약품의 인도네시아 상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동기는 두 달 만에 지사철수를 결정한 것입니다. 그건 지나치게 빨랐지만 누가 봐도 올바른 사업적 판단이었기에 난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는 누구보다 친한 친구였지만 동시에 노련하고 냉정한 사업가이기도 했습니다. 인정에 끌리지 않아야 최선의 사업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게 난 또 다시 자카르타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습니다.
난 자카르타에서 자력으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옛 일본 바이어들을 박사장에게서 돌려 받는다는 건 어림도 없었으므로 난 한국산 특수자재를 현지공장에 공급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당시 봉제선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씸테이핑을 하는 기능성원단 소재의 레인웨어와 방제복들이 막 시장에 소개되던 시기였는데 그게 전 회사 의류팀에서 생산하던 주력제품이었습니다. 방제복, 방호복을 생산하는 현지 공장들의 자재수급선은 아직 극히 제한적이었으므로 난 그들을 만나 한국산 자재들을 보여주며 하나 둘 공급계약을 따 내면서 조금씩 활로를 열었습니다. 그 즈음 인도네시아도 서서히 외환위기에서 벗어나며 경기가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최악의 위기를 넘긴 것입니다.
“서대리, 씸테이프 40만 야드 구해줄 수 있지? 이번에 잘 쳐내서 2차분 오더도 받자구.”
어느 정도 상황이 안정된 후 옛 의류팀 친구들과 다시 한 번 일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중국에서도 똑 같은 레인웨어나 방호복을 생산했으므로 해당 자재를 가장 잘 이해하는 회사이기도 했습니다. 굳이 박사장 회사를 통하려 했던 것은 옛 친구들에게 내 건재를 알리고, 동시에 끊어진 관계를 되살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박사장으로서도 이익이 생기는 일이었으니 내 오더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꼭 성공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씸테이프 품질불량으로 상당한 물량을 무상교환 해줘야 했던 것입니다. 불량 테이프가 사용되어 수선조차 불가능하게 된 의류 차원의 손실을 공장 측이 내게 책임 지우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기대했던 더 많은 양의 후속 오더는 다른 회사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결말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마진이 박한데 재공급 문제 때문에 손해가 났어요. 뭐, 그래도 커미션은 어떻게든 챙겨 드릴게요.”
우린 원래 총 이익 400만원을 반씩 나누기로 했습니다. 예전에 비해 이익이 너무 적었지만 박사장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모든 가격이 치솟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박사장은 60만원을 송금해 왔는데 손해가 난 와중에 최선의 성의를 보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첫 거래가 시작되자 박사장과의 인적 교류도 재개되었습니다. 출장자들이 날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원단영업담당으로 영입한 형님 뻘 김부장과 함께 서대리도 함께 온 것은 의외였습니다. 경리담당인 그가 자카르타에 와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포상휴가 같은 거죠, 뭐. 씸테이프 오더 더 받을 수 없어요? 총액은 얼마 안돼도 마진이 어마어마하니 말이죠”
도착한 날 저녁식사 중 반주가 지나쳤던 서대리가 혀가 꼬인 채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딴청을 부리는 김부장의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서대리가 또 뭔가 말실수를 한 것입니다.
“손해가 났다면서 무슨 포상휴가...?”
전 직장에 고졸사원으로 들어와 아직 20대 초반이었던 서대리가 매번 말실수를 하는 건 그만큼 순수하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박사장이 이번에도 뭔가 장난을 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김부장이 전전긍긍하며 변명을 도왔지만 서대리는 결국 이실직고 하고 말았는데 난 그의 말에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씸테이프 오더의 총액은 2천만원 남짓이었지만 마진이 400만원이란 박사장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애당초 그 씸테이프는 기준 스팩과 달리, 제품불량이 나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최저 품질로 맞춰 생산되었고 불량발생으로 인한 재생산과 재운송비용을 생산공장이 전액 부담했으므로 박사장은 클레임에도 불구하고 추가비용을 단 한 푼도 들이지 않은 채 단번에 1,500만원이 넘는 이익을 챙겼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오더로 서대리에게 포상휴가를 줄만큼 이익을 내고서도 내겐 손해가 났다는 거짓말과 함께 달랑 60만원을 쥐어주며 온갖 생색을 냈습니다. 그가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난 죽 쒀 개 준 꼴이 되었고 후속 오더까지 모두 놓치고 말았는데 말입니다.
“그간의 정 같은 거 차치하더라도 최소한 상도의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니오? 이번엔 정말 너무하잖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던 내가 전화통에 대고 박사장을 너무 몰아붙였던 것일까요? 한동안 대꾸를 못하던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정색을 하고 받아 쳤습니다.
“배사장 기분 나빴다면 그건 이해하지만, 어차피 사업이란 게 그런 거 아니에요?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 건데 그게 욕먹을 짓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우리가 더 이상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배사장한테 시시콜콜 우리 원가구조를 오픈할 의무도 없잖아요. 사업하면서 자기 몫을 못 챙겼다면 그건 배사장이 사업가로서 자질이 없는 거 아니냐고요?”
박사장은 애당초 선의나 교류 따위엔 아무 관심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대화가 오갔으니 더 이상 관계가 지속될 리 없었습니다.
난 사업에 성공해 박사장에게도, 전 직장의 공장장, 지사장에게도 보란 듯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먹으면 웬일인지 일은 더욱 풀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 후 현지 파트너와 손잡고 술라웨시 아세라 지역에서 원목 바닥재 사업을 시작한 나는 그 지역 군수에게 사기를 당해 제재소와 벌목장을 뺏기며 처참한 파산을 맞게 됩니다. 하필이면 가족들을 자카르타로 불러 들인 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습니다. 난 영문도 모르는 그들을 모두 끌어 안고 밑도 없는 나락 속으로 떨어져 내려갔습니다.
뭔가를 쌓아 올리는 일은 평생이 걸리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언제나 순식간의 일입니다. 머나먼 타국에서 좌절감과 열등감에 휩싸여 오욕의 진흙탕 속에서 몸부림치던 그 시간은 영원처럼 길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던 시절엔 그토록 살갑고 친절하던 친구들과 선후배, 이웃들은 내가 깊은 곤궁에 빠져 허덕이자 마치 위험천만한 유행성 출혈열 보균자를 대하듯 멀찍이 떨어져 안전거리를 유지했습니다. 사람들은 정복자들이 휘두르는 창칼을 두려워하는 것만큼이나 곤궁에 처한 이웃들이 내미는 앙상한 두 손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습니다.
파산이 코앞에서 입을 벌리고 있던 시절, 마지막 남은 한 줌의 돈과 시간으로 유력한 아이템들을 서둘러 타진하고 검토했는데 당시 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단의 미용기기들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의 한 신생업체와 얼굴 한 번 마주한 적도 없이 몇 년 동안 성심껏 서로 밀고 당겨 준 끝에 난 현지 미용기기 방문판매 부문에서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파산한지 4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 한국업체는 이제 탄탄한 중견기업이 되어 전세계에 그 브랜드를 알렸고 나 역시 그들의 도움으로 독특한 색깔을 지닌 수입도매상으로 현지 업계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파산 당시 호흡을 짓누르던 엄청난 빚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쏟아지던 채권자들의 욕설은 내가 경제적 능력을 회복하자 살가운 안부전화로 바뀌었고, 당시 쪼들리던 형편에 대학에도 보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아이들은 자카르타의 국제학교를 거쳐 싱가포르와 호주의 대학으로 각각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내게도 실로 오랜만에 한국 땅을 밟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다시는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적도 너머 남국에서 불법체류자가 될 것이라 절망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난 감격에 겨웠습니다.
마음이 푸근해지니 예전의 친구들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다시 들었습니다. 박사장과 결별한 것도 벌써 옛날 일이 되어 있었고 더 이상의 유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파산의 나락에서 그보다 더한 수모를 이력이 나도록 당해 보았고 그 밑바닥에서 수많은 악당들과 파렴치한들의 맨 얼굴을 맞닥뜨려 본 후였습니다. 서로 절박하던 시절, 박사장에게도 당시 그래야 할 만한 속사정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수소문 끝에 가장 먼저 연락이 닿은 사람은 김부장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원단에서 손을 때고 대치동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자기들끼리 똘똘 뭉쳤던 본사 동료들도 그 즈음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박사장이 자기 비서처럼 끼고 돌았던 서대리 역시 그 땐 어느 중견기업의 경리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늘 말실수나 하던 코흘리개 고졸사원이 한 회사의 경리업무 전반을 관장하고 있다니 내 마음이 다 뿌듯했습니다.
“박사장은 아직 그 일 하고 있어. 혼자서. 끈기 하나는 정말 대단해.”
“요즘도 자주 만나세요?”
“회현동 사무실 문닫고 그 친구 혼자 의정부 오피스텔 들어간 지 오래 됐어. 멀어서 잘 못 만나. 그래도 배사장 온다니까 다 함께 술 한 잔 하자더군.”
치고 받고 싸우다 헤어진 것도 아니고 보호자가 필요한 어린애들도 아닌데 나와 박사장과의 사이에 아직도 남은 앙금이 있다면 이젠 털어낼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사장은 같이 만날 때 김부장이 꼭 있어주기를 원했지만 책방이 쉬는 날을 기다리기엔 내 서울출장기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난 내친 김에 그날 바로 의정부로 넘어가 박사장을 만나기로 마음 먹고 지하철 학여울역에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출장 전 몇 번 문자를 주고 받았음에도 내가 직접 전화하리라곤 생각지도 않은 듯 전화기 너머의 그의 목소리는 깜짝 놀라고 있었습니다.
“오늘 시간 괜찮으면 의정부로 넘어갈까 하는데 저녁 때 소주 한 잔 할래요?
그는 어,어, 하면서 즉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김부장님이랑 같이 오는 거에요?”
“김부장님은 책방이 늦게 끝난대요. 오늘은 우리끼리만 만나죠?”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오늘 말고…, 김부장님 시간 될 때 같이 만나죠?”
“그러기엔 시간이 좀 빡빡하네요. 난 주말에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거든요”
“그래도, 원래 김부장이랑 같이 나오셔야 ….”
조금 짜증이 나려 했습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가 김부장을 만나는 것은 언제든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번엔 우리끼리 해요. 뭐, 그냥 소주나 한 잔 하자는 건데…?”
“아니, 잠깐만요.”
그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습니다.
“이봐요, 배사장. 우리 원래 조건대로 가자구요. 김부장 나오면 나도 나가고 김부장 안나오면 나도 안나가요. 알았어요?”
난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가 자꾸 김부장을 들먹이는 것이, 어차피 만날 때 가능하면 김부장 서대리를 모두 불러내 왁자지껄하게 함께 만나자는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실 김부장이 중간에서 완충역할, 또는 중재역할을 해주길 바란 것입니다. 김부장의 참석을 선결조건으로 내세우는 그의 진심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날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싸우러 온 것도 아닌데 왜 새삼 날 피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은 아무 잘못 없다며 고개를 꼿꼿이 세우던 그가 말입니다. 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다음 기회에 보는 걸로 해요.”
그렇다고 짜증낼 필요까진 없지 않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안 만나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게..., 어쨌든 김부장이랑 같이 만나자구요...”
말끝을 흐리는 것이 그는 방금 전 자신이 좀 지나쳤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알았다고요.”
난 전화를 끊고 나서도 어이가 없어 공중전화 박스를 한참 동안이나 노려보았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던 지하철 안에서도 박사장의 아까 그 목소리가 내내 귓전을 때렸습니다. 원래 조건대로 하자고? 사실 여태껏 나와 맺은 약속을 한 번도 지키지 않은 쪽은 박사장 자신이었는데 말입니다.
자카르타에 돌아와 바쁘게 돌아다니다가도 문득 그 날의 전화통화를 떠올리면 난 피식 웃음을 흘리곤 했습니다.
[박사장, 그 친구 정말 일관성은 있어.]
그는 상대방의 입장이 어떻든 자신을 만물의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일관성 있는 이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자라면 좀 독해야 하고 그 정도 이기심도 있어야 하는 거죠. 난 그러지 못했으니 파산도 하고 가족들을 그토록 힘들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박사장과 만났다면 우린 정말 과거의 모든 앙금을 훌훌 털고 화해의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기대와는 달리 무척이나 어색하고 어정쩡한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날 김부장의 동행은 내게도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난 시나브로 그날 그와 만나지 못한 것을 다행이라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박사장이 전화를 걸어온 것은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저기…, 자카르타에 가려는데 호텔 좀 잡아 줄 수 있어요?”
그는 쭈뼛거리고 있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세상 천지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 호텔이라도 얼마든지 찾아 직접 예약할 수 있는 시절이 오래 전에 도래했는데 박사장이 정말 그걸 몰라 아무래도 곤란한 상대일 내게 호텔예약을 부탁하는 건 아닐 터였습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인도네시아에 다시 하청을 넣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배사장, 요즘 다른 일 하는 건 알지만 시간 되면 거기서 우리 오더 몇 개만 하청 돌려줄 수 있을까요? 사례는 할게요.”
중국 인건비가 폭등하면서 많은 회사들이 동남아의 다른 나라로 생산기반을 옮기던 시기였고 인도네시아의 봉제공장들도 그에 따른 특수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박사장의 말투가 그리 간곡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무심하게 들리도록 애쓴 흔적도 보였지만 지난 세월 그런 일들이 있었음에도 어색함을 무릅쓰고 내게 부탁하려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오더를 넣던 중국공장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습니다.
“어쩌면 당장 다음 달부터 시작할지도 모르는데…, 어때요? 한 번 해줄 수 있겠어요?”
문제는 중대할 뿐 아니라 급박하기도 한 모양이었습니다. 난 낮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럽시다.”
“......?”
박사장은 부탁을 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간단히 수락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지 전화기 저편에선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손을 뗀지 오래된 봉제업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간단하지 않을 터였고 하필이면 그것이 박사장 오더 때문이라는 점이 부담스럽지 않을 리 없었지만 난 쉽게 생각하고 싶었고 그게 진심이기도 했습니다.
“모처럼 박사장 부탁이니 뭐든 다 해줄게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1년 전 의정부로 찾아가 박사장과 소주를 대작하려 마음 먹었을 때, 난 이미 마음 속에서 그런 비슷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과거를 말끔히 털어내고 박사장과 화해의 악수를 나누는 장면을 말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매우 어색한 일이겠지만 최소한 내게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내 인생에서 그와 동업했던 시기에 붙어 있던 ‘실패’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그런 나의 의도가 그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전화기 건너편의 박사장은 아직도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가 그 순간 내 반응에 감동해 할 말을 잃었거나 그동안 품어왔던 이기심과 적의를 반성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말랑말랑하게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그의 침묵은 내 협조를 추가 옵션으로 넣어 전반적 손익을 따지며 주판알을 튕기는 그의 머리 속 계산이 꽤 복잡하다는 의미이기 쉬웠습니다. 그래도 난 상관없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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